소녀의 이야기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얇은 가죽 신발을 뚫는 냉기에 소녀는 발가락을 안으로 말며 발을 내딛었다. 수중엔 겨우 두어끼를 해결할 돈 밖에 남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일자리를 구해야할텐데…. 눈 위로 새겨지는 발자국만큼 깊은 걱정을 새기며 걷던 소녀는 커다란 벽면에 덩그러니 걸린 구인 전단지에 눈동자를 굴렸다.


쿠죠 저택 사용인 모집

30세 이하

성별 무관

필요 기술 없음

의식주 무료 제공

시급 협의 가능

주의사항 : 저택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외부로 발설 금지


소녀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전단지를 떼어냈다. 가장자리에 그려져 있는 작은 지도를 따라 발을 옮겼다.

소녀의 고민은 쉽게 해결됐다.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안내 받은 방으로 향하는 내내 소녀는 자신이 머물 저택을 살폈다. 자잘한 소품이 없는 대신 깔끔하고 단정한 복도. 저택의 크기에 비해 작은 창문. 뒤뜰로 이어져있는 통로 너머에 보이는 커다란 온실.

모든 것이 낯선 환경 속에서 소녀는 곱씹었다. 저택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외부로 발설 금지.

낡긴 했지만 침대에 등을 기대자, 억눌러온 긴장이 풀렸다. 길게 터져 나온 한숨과 함께 소녀는 돌아누웠다.

창 너머론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떠올린 소녀는 사방을 감싼 어둠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깐 눈을 감는다는 게, 잠들고 말았다.

저녁식사시간은 벌써 끝났겠지. 이대로 한숨 더 잘까 싶어 몸을 뒤척여봤지만, 요란하게 우는 배가 잠을 달아나게 만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 뭐라도 먹어야 해.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방을 나섰다.

한밤의 저택은 스산했다. 어깨에 걸친 겉옷을 단단히 쥔 채 소녀는 발을 옮겼다. 벽에 걸린 촛불에 의지해 길을 더듬어 봤지만, 모두 비슷하게 생긴 복도의 풍경 탓에 식당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누구야?”

복도를 울린 목소리에 소녀는 걸음을 멈췄다. 어디에서 난 소리지? 주변을 살피는 소녀의 눈에 열려 있는 문이 들어왔다. 이끌리듯, 돌린 몸과 함께 발을 떼어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최대한 발소리를 낮춰 걸었다. 문 앞에 멈춰선 소녀는 열린 문틈을 살피려던 찰나, 한 발 빠르게 튀어나온 손이 소녀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갑작스런 힘에 소녀는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오고 말았다.

“미안해. 처음 보는 사람이라 누군지 궁금했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목소리와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짐작컨대 제 또래의 소년인 듯 했다. 비슷한 처지인가 싶어, 소녀는 소년에게 마음이 갔다.

“괜찮아.”

“다행이다. 그런데 어디 가는 길이었어?”

소년의 손이 손목을 감쌌다. 조심스럽게 당기는 손길을 따라 소녀는 걸음을 옮겼다. 창을 등지고 있는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가벼운 발걸음만큼이나 소년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식당으로 가는 중이었어.”

“식당? 그럼 내가 알려줄게.”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웃음에 소녀는 따라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소년과 함께 방에서 나온 소녀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 내내, 소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리저리 안내했다. 이쪽은 서고, 저쪽 복도 너머엔 집무실, 아, 여기는 하녀장의 방. 종알종알 이어지는 말 덕분에 한밤의 저택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저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년의 걸음이 멈췄다. 뒤따라오던 소녀역시 걸음을 멈추고, 소년의 앞에 있는 문을 살폈다.

“아, 식당이다!”

식당 문 앞에선 소녀는 소년을 돌아봤다.

“알려줘서 고마워!”

“으응. 큰일도 아니었는걸.”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네. 나는 C. 너는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응.”

소년의 뒤로 벽에 걸린 촛대 끄트머리에 매달린 불길이 흔들거렸다. 소년의 고개가 돌려졌다. 주홍색의 옅은 불빛을 따라 소년의 옆얼굴이 보였다. 불꽃만큼이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리쿠. 리쿠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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