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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엘] 무제

커뮤 로그 / 공미포 1,601

얼마나 지났을까,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지금까지도 무사히 살아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었다. 그동안 마주해서는 안 될 것들도 많았고, 목숨을 위협하는 함정들도 많았다. 사내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밀려오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런, 호되게 당했나 본데.’

 

어째서인지 오는 사람들마다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정신을 놓은 것, 마냥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기도 하고 과도할 만큼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우릴 파악하고 있는 거지?’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다면 모를 그 사람의 과거사를 알 정도면 미로의 주인은 정말 치밀하고 계획적인 상대였다. 디엘은 가만히 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었을 텐데 이번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내는 직감적으로 저주가 다가오는 시간임을 깨달았다.

 

“벌써 그 시간인가 본데.”

 

짧은 한탄과 함께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저주가 몸을 갉아 먹을 것이 뻔했다. 성치 않은 몸이라면 움직일 체력 정도는 유지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쉬고 있으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잠이 든 건지도 모를 만큼 부스스한 눈으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였던 안전지대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가 찾아왔다. 아마 다들 지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피곤함이 밀려오는 탓에 다시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저주로 인해 불편해진 몸 상태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사내는 멍하니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시간 동안 겪어왔던 모험의 흔적을 증명해주는 듯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한 손을 바라보다 굳게 닫힌 미로의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계속해서 무언가를 보여주는 미로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사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태껏 봤던 것들은 미로의 주인이 갖고 있던 기억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그릇된 욕망이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미로 속에 가둔 걸까.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결정적으로 미로에 갇히기 전 마지막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답답함이 밀려왔다. 분명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모험을 떠나는 길이었을 텐데 정신 차리고 보니 미로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걸려도 이딴 재수 없는 곳에 갇힐 줄은….’

 

조금씩 말라 죽는 기분이 이런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는 편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심장에 이식해둔 어비스의 힘을 이용해 싸우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로를 부수고 싶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더 싫었다. 애초에 저 미로가 부서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괜히 눈을 비비며 멍하니 있기를 반복했다. 지금 잠들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한 잡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흔적조차 없어진 오른쪽 눈이 괜히 욱신거리며 아파져 왔다. 눈을 다쳤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불쾌해졌다.

 

“에라이….”

 

짧게 한탄하듯 욕설을 뱉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차라리 재수 없게 휘말려 죽는 것이 마음 편했을까 싶었지만, 모험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떠올리고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살아야 했다. 모험담을 조금씩 기록해왔던 이유를 떠올렸다.

 

‘다시 마계로 돌아가면 모험담을 들려주기로 약속했는데….’

 

눈을 감으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잊고 지냈던 자신과의 약속이 떠올라 굳게 다짐했다. 모험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결정적인 순간이 떠올랐던 탓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지만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살아남고 싶었다.

 

디엘은 다시 몸을 눕히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저주를 풀고 나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다시 잠드는 것은 여전히 어렵겠지만 지금 쉬지 않는다면 더 힘들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 몸을 뒤척이고 나서야 디엘은 겨우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점점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영 좋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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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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