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 14 민필리아 x 빛의 전사
신생 카스트룸 메리디아눔 구출 작전 이후, 망자의 종소리 돌의 집으로 이사하기 직전 시점입니다.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은 상상 이상으로 평범하고 예상할 수 없는 규모로 깊게 스며드는구나. 이노테라는 주변을 한참 서성거리고. 멈춰 서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이기도 하고. 난데없이 귀나 머리 부근을 만지면서 뜸을 들였다. 두 눈 딱 감고 문을 두드리려고 하면 자꾸만 간지러운 바람같은, 한마디가 울려서 그런가. 두드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 당신을 중심으로 에오르제아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어요.
비범한 한마디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노테라는 큰 감흥이 없었다. 나를 중심으로 이 대륙이, 이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고? 뜬금없어서 잘 와 닿지도 않았다. 이노테라는 정착할 곳이 없어 계속 부유하는 걸 방황 대신 모험이라고 치는 모험가라서 더 그랬다. 굳이 인상 깊었던 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으, 음 목소리가 좋다? 새벽의 맹주라 그런가. 사람과 대화하고 흥정할 일이 많은 위치에 있어서 그런가. 목소리가 부드럽고 강단이 있어서, 사람을 이끄는 힘이라는 게 뭔지 보여주는 듯 해서…… .
- 그래서 나는 당신 곁에 있으려고 해요.
흐억, 억. 이노테라는 온몸이 장악된 그 순간을 떠올리곤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힘껏 웅크렸다. 파파리모가 주술 도구로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아주 크게 웃고는, 평생 술안주로 삼았을 거야. 아니 파파리모는 장난스럽고 짓궃은 면모가 있는 주술사지만. 타인을 그런 식으로 놀림거리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안 놀리는 건 아니지만.
"모래의 집에서 기다릴 민필리아한테도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겠군. 네가 직접 가서 말해주는 게 어때?"
네가 직접. 민필리아한테도. 특정 부분에서만 힘이 더 들어같은데. 내 착각이야? 물어보지 않아도 정답이라는 듯이 이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파파리모가 날 놀리는 건 당연한 거지만 이젠 이다까지 아는 거구나아.
벌써 사물을 뚜렷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늦은 시간이다. 여기서 더 고민하고 우물쭈물하면, 새벽의 모험가라고 할 수 없지. 조금 창피하고 많이 부끄러운 순간을 애써 넘기고 이노테라는 간신히 새벽의 방문을 열었다.
왜 그렇게 고민하고 쩔쩔맨 걸까.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서 그런가, 어쩔 수 없었나.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정말 평범한 새벽의 일상이 거기 있었다. 이것만 정리하고 자려고 했어요. 무슨 일 이신가요? 보고 하러 왔어요. 그 모든 일이 있었어도 새벽은 건재했다.
새벽의 맹주와 모험가는 늘 그렇듯이 간단한 보고와 상황을 주고받았다. 다른 게 있다면 보고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면 민필리아 쪽에서 새로운 화제를 꺼내는데. 오늘은 민필리아가 아니라 이노테라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점일까. 정리도 대부분 끝난 거 같으니, 이만 쉬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들은 민필리아는 이정도는 아직 거뜬하다면서. 잠도 다 날아가버렸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펜을 들었다.
아, 이게 아닌데. 아닌데. 민필리아한테 일을 더 시키고 싶은 게 아닌데. 새벽의 모험가에서 이노테라라는 개인이 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저, 저랑 그러면 같이, 갈래요?! 시간 주우…… 있, 다면."
일한다는 사람한테 지금 이게 뭔 소리냐, 뭔소리냐고… . 장난해? 당황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한 번 쏟은 물은 어떻게 담아보기라도 하지. 한 번 나간 말은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어쩌지,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지.
"좋아요, 어디로 갈 건가요?"
이노테라는 자기 심장이 멎은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야 했다.
수십 번 아니 족히 수백 번은 다닌 길인데. 왜 이렇게 길고 험해 보이는지. 기름칠 덜 된 기계처럼 삐그덕거리면서 이노테라는 앞장 섰다. 뒤 따라오는 민필리아가 어디로 가는지는 비밀인가요? 이거 기대되네요. 사소한 반응을 보일때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갈라지고 퍽 과장스럽게 응했다. 민필리아는 이런 날 어떻게 생각할까. 뒤에서 얌전히 따라오는 발걸음과 웃음소리가 신경 쓰여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걸까? 사람을 처음 태운 초코보처럼 걱정스러운 첫 운전을 선보인 모험가가 민필리아를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모래의 집 옥상이다. 데이트 권유로 들릴 법한, 근사하고 꼴사나운 말을 뱉은 사람이 데려온 곳치고는 초라하고. 새벽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곳보다 친근한 장소. 위치를 확인한 민필리아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이노테라는 덜컥 겁을 먹었지만. 그 모습에 불쾌함이나 못마땅함은 찾아 볼 수 없기에 조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정말 작은 용기라, 몹쓸 짓을 들켜 사과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게 오늘이 모래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새벽 하늘을 보고 싶어서 그으 같이."
"마지막 날."
"아 남는 사람도 있는 거 알아요. 앞으로도 여기가 새벽한테 중요한 곳이라는 것도 잘 아는데. 본부로 사용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그래서……."
"알아요. 그래서 정리하고 있던 거고, 여러모로 다들 바빴던 건데.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새삼스럽고, 왠지 신기한 기분이 되네요."
새벽 하늘은 변함이 없어서 그런걸까요? 새벽은 우리는 변하는데.
민필리아는 조금 쓸쓸하면서도 강인한 태도로 위를 올려다보더니, 이노테라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고마워요. 근사한 시간을 권유해주셨네요. 그 모습에 이노테라 안에 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그게, 그게 있잖아요. 막힌 게 무너지니 많은 시간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새벽의 모험가로 이미 보고했던 이야기. 단순한 모험가 시절 이야기. 처음 보는 장소에 갔을 때 겪은 사건. 익숙한 곳이라고 방심했다가 일어난 대사건. 나지막하게 이노테라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자 옆에 앉은 민필리아가 실을 계속 이었다. 도란도란 단란한게 그땐 그랬지, 이땐 그랬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세상에나. 추억과 기록이 다양한 각도로 흘러나와 갈무리됐다가 새롭게 이어지는 게 반복됐다.
어떨 때는 새빨간 타인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처럼 어딘가 어색한 태도로. 어떨 때는 자기 신체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친숙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와 태도라 장단 맞추기 힘들텐데. 민필리아는 평소처럼 상냥하고 차분한 태도로 흐름을 이끌었고. 이노테라는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민필리아기에 목이 마를때까지 소재를 꺼냈다. 서투르지만 응원하고 싶고. 들떠있지만 가라앉은 상반된 이노테라의 모습은 무척 낯익은 새벽의 모험가였으니까. 민필리아는 사소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주웠다.
가끔 주제를 꺼내지 못하고, 어 그러니까 그게에. 이노테라가 뜸을 들이고 있으면 민필리아 쪽에서 먼저 새벽 이야기를. 자기가 듣고 알게 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거 아세요? 달은 혼자 빛나는 게 아니라 낮 동안 있던 태양의 빛을 모아서 그 빛을 토대로 내는 거라고 해요. 다날란의 태양은 어느 곳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니, 달빛 또한 훌륭한 조명이 되네요.
그 설명을 듣고 제일 먼저 솟아오른 건 탐구심도 지식욕도 아닌, 그 조명 아래에서 당신과 함께 춤을 추고 싶다는 부끄러운 욕망이라는 걸 들킬까 봐. 이노테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새벽의 맹주 민필리아라고 해도 남의 속마음을 읽을 힘은 없는데. 그런 힘이 있다면 오늘이라는 날이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았을텐데…….
속이 갑갑해질 무렵 구름이 달을 살짝 가리자, 은은한 달아오른 분위기에도 공백이 생겼다. 다날란은 낮이 뜨거운 만큼 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데도. 그렇게 쌀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민필리아가 해준 이야기 덕분일까. 아니면 이렇게 둘만 있는 이 상황에 몸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탓일까. 어느 쪽이 답인지는 모르지만.
이노테라는 깔끔한 어둠이 깔린 하늘을 올려다본 뒤 심호흡을 했다. 속으로 초읽기를 올리고. 계속 속에서 돌고 도는 단어를 꺼낼 순간을 쟀다. 전투……아니지, 고백의 시간.
5초 전. 넷, 셋, 둘, 하나. 민필리아.
"고마워요."
이런 날에… 등불이 다 꺼진 이런 때에 고맙다고 해도 될지. 해야할,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새벽의 일원이니까. 모험가니까 이럴때 괜찮다고 별 거 아니라고. 태연하고 멋지게 버티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저 무서웠어요. 엄청 무서웠어요.
이 감정을 토해낼 때까지, 무수히 많은 고민과 셀 수 없을 만큼의 자책이 이노테라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결국 꺼내기로 했다. 확신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확신을 주고 고민을 이겨낼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곳이 새벽이고. 눈앞에 있는 새벽의 맹주는. 민필리아는 그런 내 곁에 있겠다고 해준 사람이니까.
"항상, 쭉 생각했거든요. 너무 한심하고 볼품 없고. 자꾸 눈물이 나서 원망스럽고. 이렇게 멍청하게 울지 말고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된 것처럼 아무 생각이 안 나서. 계속 울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면 차라리 죽자고. 그냥 죽어버리자고.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몰라요. 예전이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는데. 근데 정말 이상한데, 진짜 신기하고 이상한데. 죽고 싶지 않았어요.
한심하고 꼴사납고 아무것도 못 하고. 바보 같은데. 죽고 싶다고 죽지 그러냐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왜 그런 걸까. 왜…… 그랬을까. 나름대로 고민해봤거든요. 쭉 생각했어요. 그날 이후로 계속. 그 이후로 정말 틈만 나면, 왜 그랬을까. 물음표를 계속 반복하고 돌리면서. 이리저리 고민했는데요……."
이노테라는 정착할 곳이 없어 계속 부유하는 걸 방황 대신 모험이라고 치는 모험가였다. 그리고 새벽의 모험가 이노테라에게 있어서 모험이라는 건.
당신, 잘 몰라서 그렇지. 탁월한 모험가가 될걸요? 나중에 고대 석판을 찾으면 연락할게요. 재밌을테니까요. 언젠가 아슈톨라가 넌지시 두고 간 제안이 떠올랐다. 새벽의 모험가 이노테라에게 있어서 모험이라는 건 무엇인가.
"당신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을 붙잡고 제대로 지면을 밟도록 매어놨으니까. 죽고 싶지 않았어요."
"의무감인가요?"
의무감.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처럼 땅을 밟아야 하니까. 아래에 있으니까 내려가야한다고. 나를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저기 있는 사람들을 헛되게 보낼 수 없다고. 지면에 쐐기를 의무와 부담으로 박은 게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진 끈이 날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구름에 가려진 달이 다시금 고개를 들이밀자, 조명처럼 빛이 쏟아졌다. 의무, 부담감.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이노테라는 등불이 다 꺼진 날을 겪었기에 이 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의무라기엔 강제적이지 않았고. 부담이라기엔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는 걸. 조바심이 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지도 않았다. 이런 걸 뭐라고 명명하는 걸까. 다들 뭐라고 정의 내리는 걸까?
이노테라는 우선 이 모든 것의 이름을, 행운이라고 하기로 했다.
"전부 당신들이 항상 함께 해주었으니까. 그때 남아있던 다른 사람들과, 모두와 만나서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거 같아. 등불은 꺼지지 않았어. 꺼진 적 없어."
언어로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이노테라 안에 있던 응어리가 확실한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 곁에 모두가 남아서. 다들 기다리는 곳으로. 모두가 있던 곳으로 데려다준거야. …다들 외롭지 않도록 앞을 보여준 거구나. 길잡이처럼 이끌어주면서, 앞으로도…… 살아가라고 등을 밀어준 거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네 잎 클로버를 찾고 우는 아이가 없듯이. 경사스러운 언약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험가가 드물듯이. 이노테라도 벅차서 올라오는 감정을 울음으로 해소하지 않기를 택했다. 그 대신 목소리에 마음을 담아서. 표정에 행운을 띄우며.
지금 바로 아래에는 모래의 집이 있다. 옆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가 침묵도 즐길 수 있는 사이가 된 사람은 새벽의 맹주 민필리아. 방랑자라고 불리고 싶지 않아서, 대충 모험가라는 이름을 대고 살아간 이노테라는 이제 어엿한 모험가가 되었다. 무서워도 없어지고 싶지 않아. 한심해도 다시 보고 싶은 상대가 있어.
"새벽의 혈맹에 날 넣어줘서 고마워요. 내가 새벽의 모험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마워요. 나를 잡아줘서 고마워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해줄 모두에게, ……당신, 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라서."
곧 동이 트면 우리한테는 새로운 미래와,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상황이 기다리고 있겠지.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그게 끔찍하지 않다. 이 모든 변화와 행운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고 싶다고. 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닿길 바라면서 이노테라가 웃었다. 모래의 집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웃었는지 시원한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저도 마찬가지네요."
"응, 으응?"
"저도 마찬가지라고요. 먼저 고맙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고마워요. 새벽과 당신을 만나게 된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랍니다."
세상에서 제일 즐겁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이. 가장 뛰어난 영웅이 나오는 모험담을 얘기하는 음유시인처럼. 긍지 높고 사랑스럽게 표현하는 민필리아를 보고 이노테라는 크게 숨을 삼켰다. 심장이 제대로 뛰는지 확인하게 됐다.
"그건 확신할 수 있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아, 큰일 났다. 큰일, 까지는 아닌가……. 역시.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어쩌지. 어쩌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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