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정의의 정의

아키에나

X by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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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큐어(cure) 오마주

그는 책을 읽지 않았다. 문장이 끝나면 이야기가 끝나니까. 글을 끝까지 쓰는 법이 없었다. 어떤 말도, 묻는 어투로 말을 마치곤 했다. 질문은 대화가 이어지는 말이니까. 문장을 마치면, 이 글도 끝이 보인다고⋯⋯⋯ 끝과 결말은 중단을 의미하는 말이지? 초록색 사과를 칼로 뭉툭하게 깎아내다가 끄트머리를 다듬던 투박한 손이 말했다. 나는, 이 사과의 이름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아오이(青い)같잖아. 풋사과일 뿐인데⋯⋯⋯ 미래엔 빨간색이 될 거라고. 이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린 사과를 먹음으로써,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늙은이 같다⋯⋯⋯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곤 했다. 그럼 그녀는 그가 건네준 사과를 쾅 소리가 들릴 만큼 세게 포크를 그릇에 박은 뒤 사과의 연한 부분을 와작와작 씹으며 말했다. 제발 그만하고 먹으면 안 돼?

그가 쓰던 씨디 플레이어에는 한 가지 음악만 담겨있었다. 같은 구절의 가사만 반복하던 음악⋯⋯⋯, 아이 워너 비⋯⋯⋯ 라는 구절만 무한대로 반복하던 플레이어는 방전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플레이어가 방전 되지 않도록 집에서만 음악을 들었다. 들으면서도 기기에 항상 충전기를 연결해 두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일시 정지 버튼은 도금이 벗겨져 있었다. 전원 버튼은 비닐도 벗겨져 있지 않아 이런 씨디 플레이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음악의 이름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컴퓨터 본체에 긴 선을 달아 MP3를 연결하고, 무형의 음악을 유형의 존재에 삽입했다. 그의 정의를 이해하고 싶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무형의 존재였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곳엔 존재하지 않는......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을 뒤집개로 긁어낸다. 그렇게 해야만 탄 자국이 사라진다나...... 엄마가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은 쓰면 안된다고 뒤집개로 프라이팬을 긁어내면 긁어댈수록 코팅이 벗겨진다고 다그쳐도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쓰던 그 프라이팬이 쓰레기통에 담기려 하면 울며불며 말리고, 엄마가 몰래 버려도 밤 늦게 더러운 쓰레기 봉지를 뒤지며 다시 주워왔다. 기름이 둘러진 프라이팬 위에 계란 두 개의 껍질을 깨뜨려 튀겼다. 계란 두 개 이외의 것은 올릴 수 없었다. 불문율이었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것들은 내겐 없었다. 어느 날은 붓을 세게 쥐어 캔버스에 세게 박아댔다. 그리고 빗자루 같아진 붓의 꼬리에 물감을 적셔 망설임 없이 캔버스에 칠했다. 예술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담는 그릇이 남들보다는 배로 커서, 그들의 절대적인 무기를 망가뜨려도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으며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 자식도 그의 행동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가 그려낸 그림은 미완성이더라도 이상적인 그림이었으니까. 영원히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붓이 말총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무언가를 깨뜨리는 건 원치 않았다. 정의가 정의인 이유는 정의를 정의한 사람만이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정의를 깨뜨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정의는 집에 사는 전문가에게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죽었다.

코팅이 벗겨져 윤기조차 나지 않는 프라이팬을 달궜다. 방전되지 않는 씨디 플레이어를 콘센트에 연결했다. 이어폰을 양쪽 귀에 꼽은 후 그 음악을 재생했다. 팬을 그의 이상이 담긴 근원지에 박아 넣었다. 깨부숴져 그의 우주가 드러날 만큼. X를 가슴 위에 새겼다. 대동맥에서 터져나온 붉은 액체는 온몸을 적셨다. 눈에 선혈이 맺혔다. 피를 뒤집어 쓴 채 기름이 달궈진 팬 위에 계란 두 개를 깨뜨려 구웠다. 접시 가운데에 다소곳이 얹은 뒤, 전구가 내리쬐는 식탁 앞에 앉아 씹었다. 그리고 붓을 캔버스에 박아대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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