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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에나] 부재자에 관한 다양한 해석 : 잔존하는 자의 입장에서

2023. 12. 13

기억의 조각 by 匿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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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 근친

사별 소재

사후 세계를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종교적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아주 막연한 것이었다. 내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 그 수치를 가늠하고 낮게 수군거리는 사람들. 나를 호명하는 이. 그 뒤로 천국과 지옥의 입구로 보이는 두 개의 문이 자리한다. 곧 선고가 떨어진다. 당신은 저쪽으로 가십시오. 지옥의 아가리가 쩍 벌어진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긴다. 내 죄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고. 말하고 보니 제법 구체적인 상상이었다. 그리고 전부 아무 의미 없다. 시노노메 에나는 죽었다. 감히 죽은 자로서 말한다. 사후는 지루하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다.

부재자에 관한 다양한 해석

– 잔존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은 이따금 자기 장례식 얘기를 한다. 직접 말로 꺼내지는 않아도 생각은 하겠지. 어떤 장례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던가. 누가 올까. 내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울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자잘하고 쓸데없는 망상. 정신을 차리고 내 죽음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후였다. 처음에는 자각조차 없었다. 조금 더 잘래. 흐릿한 의식을 붙잡고 꿈틀거리다 내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집은 조용했으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잠에서 깨는 시간에는 늘 그런 법이었으므로.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디려고 했다. 시도했다. 그럴 수 없었다. 발이 반쯤 투명했다. 바닥이 훤히 비쳐 보였다. 형태를 잃었던 정신이 서서히 선명해진다. 모양을 되찾는다. 잠깐 묻어 두었던 기억의 파도가 넘실대다가 방파제를 넘어 모든 것을 휩쓴다.

도쿄예대를 썼었다.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잘못되었노라고. 처음부터 당신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었고 그른 것이었다고. 나를 인정한 적 없던 그가 끝내 제 그릇된 안목을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다. 입학 원서에 시노노메 에나(東雲絵名) 네 글자를 적어 넣으며 아무도 앞의 두 글자를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1차 실기는 붙었었다. 기뻐할 시간은 없었다. 쉴 틈도 없이 2차 실기가 몰아쳤다. 1차 때는 정말, 정말 죽을 만큼 떨려서 사람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집에 왔고 발표날까지 며칠간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다. 캔버스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냉장고에는 치즈 케이크 한 판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의 제일 비싸고 수량이 적은 한정 메뉴. 누가 준비했는지는 뻔했다. 그 당분으로 버텼다. 1차 합격자 발표는 혼자 확인 했다. 합격이었다. 믿기지 않았으나 믿어야 했다. 2차 실기가 코앞이었다. 몇 사람에게만 결과를 간결하게 전했다. 오랜 친구 하나는 꼭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서로 바빴으므로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그 애가 반짝이는 빛을 휘감고 춤을 추는 영상을 보며 휴대폰 자판을 두드렸다. 센터 시험 시기에 올려 준 수험생 응원 영상은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고 했다. 간단한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사람은 울 수 있다. 아키토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축하해. 말이 짧았다. 그 애가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이유를 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닮아 있었으므로.

2차 실기는 아키토가 데려다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고사장으로 향하며 우리는 정적을 나누었다. 도쿄에서는 3월 초에 벚꽃이 피지 않는다. 요 몇 년 새 평균 기온이 눈에 띄게 높아져 다른 지역에서는 벌써 개화가 시작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른 봄이 아닌 완연한 봄일지도 모른다. 예대 2차 실기는 하루로 끝나지 않으므로 이 길을 한 번 더 겪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의 가시가 폐를 찌른다. 호흡이 미묘하게 거칠어졌다. 발밑이 아득하다. 어중간한 그림과 달리 발아래가 꺼지는 느낌은 깊고 확실했다. 숨을 몰아쉰다. 누가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그를 안다. 아키토였다. 물고기처럼 무리 지어 헤엄치는 인파 속에서 남동생이 말한다.

에나. 네 그림을 보여주고 와.

그게 뭐야.

결과가 어떻게 되든 네 그림은 네 그림이야. 평생 그림 그리고 살게 해줄 테니까 일단 한 점만 더 끝내고 오라고.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그 애의 표정은 떠오르지 않는다. 막 튀어 오른 말만이 막 짠 물감 같은 색을 냈다. 고작 한 살 터울인 남동생은 성가신 존재였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조차 아키토가 있다. 가족 여행. 자동차 뒷자리에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잠든 우리. 카레에 든 당근이 먹기 싫어서 서로의 접시에 몰래 던져 넣는 걸 엄마에게 들킨 바람에 간식을 빼앗긴 날. 너의 생일, 크리스마스, 새해, 졸업과 입학, 새 학기, 나의 생일. 매해 돌아오는 계절 한정 디저트와 여름 축제. 눈을 감았다 뜬다.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빛이 들어온다. 언제 이렇게 컸지.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꽤 대견했다.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2차 실기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며칠에 걸친 시험이 끝나고 아키토에게 밥을 샀다. 동생은 사양과 염치라고는 모르는 사람마냥 음식을 계속 시켰다. 조금 후회했다. 아니다. 잘한 일이었다. 웃기게도 최종 결과를 확인하러 가는 길에 차에 치였으니까. 돌아오는 길도 아니었다. 가는 길이었다. 통증이 있었던가? 그것조차 모호하다. 즉사였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게 낫다. 아픈 건 좋아하지 않는다.

방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있었다. 원래 죽으면 다 이런 건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다른 귀신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볼 수 없었다. 죽은 자는 이승의 물건에 손도 댈 수 없었다. 그건 그럭저럭 납득이 갔다. 그래도 벽이나 문조차 통과할 수 없는 건 너무했다. 이래서야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당연히 그림도 그릴 수 없었다. 죽고 나서도 그림 생각을 하는 게 우스웠다. 빛이 들지 않는 방은 어둡고 답답하다. 추운가? 그건 모르겠다. 유령은 오감이 옅다. 나이트코드에 접속할 수도 없다. 인터넷상에서 귀신을 자처했던 자들은 다 사기꾼이었다. 접속이 되는 게 더 이상하다. 아무래도 그건 심령 현상이지……. 그 무엇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보고 듣는 게 전부였다. 내 방은 유례없이 고요했으나 아키토의 방은 여전했다. 내부 역시 변함없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새어 나오는 소리를 훔쳐 먹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다. 그것을 제하고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사후는 지루함의 연속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온다고 해서 나를 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궁금했다. 나를 찾아 줘. 발견해 줘. 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 줘. 나를 말해줘. 욕망은 자주 거칠게 끓고 금방 사그라들었다. 목적지 없는 감정은 그런 법이었다. 방문객이 없는 방에는 먼지가 잔뜩 쌓였다. 내 위로는 한 톨도 쌓이지 않았음에도 나는 이미 먼지투성이였다. 마르고 갈라지고 스러지고 있었다. 소멸의 징조 같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죽었는데도 두려웠다.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 싶어 닥치는 대로 손을 뻗고 물건을 통과하는 손을 향해 분노하고 생리 현상이 끝난 몸이라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려고 애를 쓰다 못해 다시 물건에 손을 뻗다 지쳐 침대에 몸을 막 던진 참이었다. 아키토의 공간에서 여태 들어 본 적 없는 소리가 났다. 벽은 아직도 얇았다. 전에는 그닥 의식하지 못한 점이었다. 아키토가 새벽마다 시끄럽다고 벽을 치며 짜증을 부렸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애써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그건 우는 소리였다. 음성의 주인은 당연히 그였다. 어이가 없었다.

고작 하나 있는 남동생은 귀염성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어렸을 때는 엄마를 붙잡고 아키토 말고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다. 그러면 아키토도 옆에서 에나 좀 밖에 내다 버리면 안 되냐고 떼를 썼다. 그런 날이면 저녁 식사로 꼭 당근이 잔뜩 든 크림 스튜가 나왔다. 엄마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우리는 식탁 아래에서 서로의 발을 마구 밟아댔다. 한쪽 벽을 공유하며 스무 해 조금 안 되게 살았더니 보기 싫어도 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있었다. 타인에게는 보일 수 없는 치부와 탁한 감정의 부산물. 추잡하고 더럽고 지긋지긋하고 넌더리 나는 밑바닥. 아키토는 나로부터 그것을 봤다. 내가 물건을 집어 던지고 나면 노크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 묵묵히 정리를 도왔다. 나는 아키토에게서 무엇을 보았던가. 아키토는 강한 척을 했다. 나는 그가 숨기고 싶어 했던 모습들을 안다. 벅벅 비벼가며 우느라 붉게 달아오른 눈가. 미묘하게 갈라진 목소리. 아키토는 제 방에서조차 울지 않았다. 옆 방에 늘 내가 있었으므로. 지금은 다르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영원한 2학년일 남동생이 소리를 죽이지 않고 울고 있었다. 오늘 밖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다. 말을 걸 수도 없다. 그저 가만히 누워 소리를 들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내가 없으니까 이제야 편하게 울 수 있게 된 거겠지. 그런데 저렇게 울면 얼굴에 티 다 날 텐데. 살아 있었더라면 얼음팩이라도 던져 줬을 것이다.

누나.

누수된 벽 사이로 흐느낌이 흘러넘치고 그것을 타고 단어가 샜다.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 오른다. 소름이 돋았다. 죽은 사람도 소름 돋을 수가 있구나. 그저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키토가 내게 직접 누나라고 부른 적은 드물었다. 아니다. 아예 없었다. 가끔 남에게 나를 소개할 때만 그렇게 불렀다. 날 것의 감정이 그치지 않고 퍼붓는다. 벽을 때린다.

에나.

조금 웃었다. 죽고 처음 웃었다. 웃을 일이 없었다. 한 겹의 벽을 사이에 두고 내 이름이 들린다. 아키토가 몇 번이고 나를 불렀다. 피와 삶을 나눈 동생이 부르는 이름은 각별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를 떠올렸다. 시노노메 에나. SNS에서 꽤 유명해. 다들 내 얼굴을 좋아하거든. 하지만 그림으로는 그만큼 반응이 안 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림 그리는 게 좋고 그림으로 인정받고 싶어. 인정받을 거야. 누구는 넌 안 될 거라고 하지만 두고 보라지. 곧 카미야마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고 예대 유화 전공 1차에 붙었어. 2차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결국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미래의 일이 아니고 온통, 또 오직 과거의 일뿐이다. 나는 미래를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죽고 난 뒤의 변화에 관해서도 알 수 없다. 내가 빠진 니고는 어떻게 됐는지. 새로운 일러스트레이터를 구했는지. 그 사람의 그림에 전 일러레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는 평이 달리지는 않는지. 2차에는 붙은 건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엄마는, 그 녀석은, 그리고 너는 내 장례식에서 울었는지. 너무 사소해서 의미가 퇴색된 과거의 부스러기를 애써 모아 곱씹는다.


 

그 뒤로도 아키토는 몇 번인가 더 울었다. 간격은 있었으나 그것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시간의 흐름은 내게 무의미했다. 옆 방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나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림만으로 날짜를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삶도 죽음도 내가 속하고 머물 곳은 못 되었다. 내가 개입할 수 없는 미래를 가정하고 되돌릴 수 없는 과거만을 되새김질하는 건 지치고 지겨웠고 재미없었다. 눈을 감는다. 그건 고스란히 내 의지만으로 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었다. 이대로 계속 눈을 뜨지 않으면 사라지게 될까. 그럴 때마다 웃기게도 나를 부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 동생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기뻐해도 될까. 내 감정에 맞는 신발을 신기고 있는지 확신이 없다. 감정이란 으레 무언가와 부딪힐 때의 부산물이 아닌가. 무언가와 충돌할 수 없으니 태어나는 감정도 미미했다. 상황에 맞는 감정을 고를 능력은 이미 사라졌다. 어쩌면 내가 울음소리를 들으며 느꼈던 건 기쁨이 아니라 비루한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일어난 적 없는 일을 기다렸다. 나는 열 수 없는 문을 아키토가 열어주기를 바랐다. 그 애라면 나와 시선을 교환할 수 있을지도 몰라. 논리적 근거라고는 없는 헛된 망상이었다. 만약, 정말로 날 볼 수 있다면 놀라겠지. 그럼 네가 나를 먼저 찾지 않았냐며 놀려줘야지. 부정해도 소용없다. 이미 이곳에서 몇 번이고 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모호하고 기분 나쁜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그런 미약하고 잔인한, 허황한 기대뿐이었다.

또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됐다. 청각마저 망가진 줄 알았다. 1층의 간지러운 소음은 여전했으니 단순한 착각이었다. 2층에서는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층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사고로 죽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방향의 사고뿐이었다. 계속 생각한다. 혹시 아키토도 죽어버린 걸까? 그래서 이제 옆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이제 무언가 집어 던지려고 시도할 힘도 없었다. 아키토는 어디에서 죽었을까. 왜 죽은 걸까. 이제 그러면 너도 나처럼 지루하고 허무하게 그저 존재하고만 있는 걸까. 나도 이렇게 힘든데 동생인 너는 견딜 수 있을까? 아키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리고 처음으로 울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그 행위를 설명하는데 ‘울었다’보다 적절한 말이 없다. 달래줄 사람은 영영 오지 않는다.

 


 

문이 열리고 닫힌다. 뒤에서 거친 소리가 난다. 내부는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럽다. 반겨주는 사람은 없다. 집이 싫다. 위로 향하는 층계를 밟는다. 2층은 더 싫다. 통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 에나가 시끄럽게 울고 웃고 화내고 떠드는 소리가 없는 고요한 복도는 가만히 앉아 이쪽으로 달려들 틈을 노리는 거대한 맹견 같았다. 가족 중 2층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이제 나뿐이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과정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닫힌 문을 지나친다. 문을 열 사람은 자리를 비웠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벽을 본 채로 침대에 눕는다. 습관처럼 휴대폰 액정에 불을 밝힌다. 눈이 부셨다. 새벽 한 시가 지났는데도 주변이 조용하다. 옆 방을 쓰던 사람은 25시마다 인터넷으로 무슨 서클 활동을 했다. 그들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으나 에나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가끔 벽을 넘어 범람하는 소리가 거슬려 따지러 갔었다. 이제 벽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방음벽이라도 설치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이제야 한 달 남짓이었다. 4월은 바쁘고 정신없는 달이다. 새 학기이니 어쩔 수 없다. 에나의 생일도 그대로 있다. 주역 없는 생일이다. 시간은 고이지 않고 자꾸 흘러내렸다. 벚꽃이 기고만장하게 날뛰고 있는데도 매번 날짜를 확인하고 만다. 3과 4는 너무 다르게 생겼다. 3월 말에는 3학년들이 당연하다는 듯 졸업을 했고 그 유산을 물려받아 2학년이 3학년이 되었다. 에나는 3월 중순에 죽었으므로 졸업도 하지 못했다. 나의 진급은 에나의 유품과도 같다. 우리는 이제 같은 학년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3월 중순은 예대 최종 발표가 있는 시기였다. 같이 가줄까.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에나는 뚱한 얼굴로 싫다고 했다. 혼자 볼 거야. 거울을 들여다보며 입술에 색을 입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민 여자의 모습이 갑작스레 낯설었다. 입시생이 되어서도 에나는 아버지를 꺼렸다. 아니다. 입시생이 되었기에 더 그랬다. 우리를 만들고 묶은 남자는 에나를 부정했다. 에나와 에나의 그림을 받아 줄 대학은 없을 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에나를 다그치고 있을 때 나는 방에 누워 있었다. 편의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나가 곧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가리지 않고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질 것만 같았다. 그림 그리는 애가 손을 다치게 하는 건 내버려둘 수 없었다. 빈손으로 들어간다면 나도 예외 없이 쫓겨날 테니 공물을 바쳐야 했다. 나갈 채비를 하는데 옆방이 조용했다. 방문이 열려 있었다. 나가면서 아버지가 제대로 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빈틈 속에 시노노메 에나가 있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종이를 찢거나 물건을 던지지도 않았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에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화구를 꺼내 그림을 그렸다. 선을 긋고 색을 입혔다. 그 이후로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여자는 그렸다. SNS 업로드도 뜸해졌다. 에나는 그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다. 엉망이 된 팔레트. 막 짠 물감의 냄새. 여러 색이 섞여 탁해진 물통. 붓과 날카롭게 벼린 연필. 그 모든 게 에나였다.

나 예대 썼어.

쓸 거야, 도 아니고 썼어. 아버지가 없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스푼을 달그락거리며 에나가 돌연 선언했다. 원서비 출처는 서클 수익이겠지. 나만이 알고 엄마는 모르는 것이었다. 몇 번 엄마가 에나를 캐물었으나 원하는 답은 얻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즈음 에나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다.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하는지 몸은 잔뜩 여위었는데 눈빛은 형형했다. 그 눈을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불쾌한 감각이 불쑥 튀어 오르고 바닥에 떨어진다. 치우지 않는다. 같은 벽을 공유하고 있으나 대화할 기회는 현저히 줄었다. 누워서 귀를 바짝 세우면 벽 너머에서 에나가 그림 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불규칙한 비트에 맞춰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시기 우리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에나는 당연하다는 듯 예대 유화과 1차 실기에 붙었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선물을 샀다. 먹으면 없어질 소모품. 딱 그 정도가 좋아 보였다. 닫힌 문 너머에서 에나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2차 실기를 앞둔 짧은 며칠간 나는 에나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냉장고에 넣어 둔 케이크만 야금야금 사라졌다. 2차 실기 때는 같이 갔다. 애도 아니고 혼자 가겠다고 투덜댈 줄 알았는데 별말이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새 캔버스 같았다. 나는 에나가 아니다. 에나가 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에나의 기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 여자는 언제나 나를 앞섰다. 태어나보니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내가 앞으로 겪을 것을 에나는 이미 겪었다. 지금 여자가 느끼고 있을 이름 모를 감정 또한 나중에는 내 몫이 될지도 모른다. 에나(絵名)의 그림(絵)이 좋다. 에나의 절반이었다. 에나는 제게 이름을 쥐여 준 사람을 갈구했다. 정확히는 그 사람의 은총 같은 인정을 바랐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이 될 수도 없다. 다만 나를 이루는 절반은 정확하게 그 사람한테서 왔다. 그 말이 튀어나온 건 그래서였을까.

결과가 어떻게 되든 네 그림은 네 그림이야. 평생 그림 그리고 살게 해줄 테니까 일단 한 점만 더 끝내고 오라고.

거짓말이었다. 에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 여자의 그림을 평생 보고 싶었다. 미술관에서 작품 보호 용도로 그어진 선을 넘지 않는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액자에 둘러싸인 그것을 보거나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벽에 크게 그림을 걸어 놓고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복도에 차곡차곡 쌓인 스케치북. 온갖 곳에 기대 있는 캔버스. 바닥을 굴러다니는 내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화구들. 그 모든 게 내가 평생에 걸쳐 눈에 담고 싶은 그림의 일부였다. 화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나는 낯선 건물로 들어갔으나 나는 그 자리에 오래 매여 있었다.

시험이 끝나자 에나는 내리 이틀을 꼬박 퍼질러 자고 내게 밥을 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쪽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었다. 또 쇼핑이라도 할 셈인가 싶었더니 목적지는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돼. 뻔한 메뉴판을 넘기며 여자는 말했다. 보통 이럴 때는 수험생이 얻어먹는 거 아닌가. 대놓고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빈 종이였다. 거기서 그 무엇도 읽어내지 못했다. 불편하고, 또 불쾌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의 누나였던 사람이 완연한 타인처럼 느껴졌다. 퍼즐 <시노노메 아키토>의 모서리 조각 하나가 영영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 부재를 채우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주문했다. 명백한 화풀이였다.

그게 에나와 둘이 공유한 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결과는 죽어도 혼자 보겠다며 드물게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에나는 한참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라인도 답이 없었다.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렸나? 그럴 리 없었다. 에나는 휴대폰을 자기 영혼처럼 챙겼으니까. 아니면……. 나쁜 생각만 자꾸 맴돌았다. 내가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은 고작 그 정도였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미적지근하게 웅성거렸다.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면 에나를 볼 수 있겠지. 늘 아무렇지 않던 파트에서 연거푸 박자를 놓쳤다.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한 날이었다. 전화는 같은 부분에서 무려 세 번째 실수를 저질렀을 때 왔다. 시끄럽게 울리는 벨 소리에 모두 동작을 멈췄다. 뒤에서 토우야가 조금 쉬는 건 어떻겠냐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발신인은 아버지였다. 받기가 싫었다. 느리게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아버지는 이제껏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제 할 말만 쏟아내고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아키토. 당장 병원 응급실로 와라. 아니다, 집에 들렀다가……. 아니, 역시 지금 바로 오는 게 낫겠다. 에나가, 사고를 당했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네 엄마 기절했다. 병원 위치 보내줄 테니까 택시 타고 와도 된다.

그 말을 듣고 동료들에게 어떻게 설명했던가. 그들은 어떤 식으로 나를 배웅했는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 벌어진 모든 일들은 전부 흐릿하다. 그나마 뚜렷한 게 있다면 감정뿐이다. 바깥 공기는 기분 좋게 따뜻했다. 길을 장식한 몇몇 가로수가 이르게 꽃을 터트리고 있었다. 평온한 풍경 속에 나만이 녹아들지 못했다. 움직이고 있는 몸이 낯설고 뻣뻣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신발 밑창과 차 바닥이 맞닿는 감촉조차 생경하다. 상태가 안 좋다는 말도,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도 듣지 못했는데도 그랬다. 택시가 덜컹댈 때마다 헛구역질이 났다. 당장이라도 토할 사람처럼 보였는지 기사님이 계속 이쪽을 흘끔거렸다.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호흡이 거칠었다. 마치 2차 실기를 보러 가던 에나 같았다. 병원 바로 직전 길목에서 차가 막혀 도중에 내렸다. 단 1초라도 일찍 도착해야 할 것만 같았다. 숨이 목 끝까지 찼다. 그 순간조차 나는 여자를 생각했다. 자기가 늦게 일어났으면서 한정 팬케이크를 못 먹게 될까 봐 내 손을 끌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전속력으로 걸어가던 사람을. 나중에 전해 듣기로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걸기 훨씬 전에 시노노메 에나는 벌써 죽어 있었다고 했다. 아직도 나는 내가 늦게 도착했기에 에나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에나가 당한 사고는 뺑소니였다. 목격자는 없었다. 운전자가 바로 병원에 데리고 왔다면 에나는 살 수 있었을까? 아무도 의사에게 그것을 묻지 않았다. 물음을 묻었다. 부모님은 둘 다 에나를 만나겠다고 했다. 엄마가 우는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고 아버지가 우는 건 처음 보았다. 나는 울지 않았다. 사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눈가는 이미 잔뜩 붉게 부어 있었다. 내 눈 주변 피부는 엄마를 닮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나까지 에나를 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봤다. 목 아래에는 하얀 천이 덮여 있어 얼굴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게 꼭 실기를 앞뒀을 때 같았다. 얼굴 군데군데 붉은색 액체가 발려 있었다. 유화 물감은 아닌 것 같았다. 피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조잡한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일부처럼 보였다. 아버지에게 장례 절차를 설명하는 저 의사도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일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숨어 있던 스태프들이 에나를 깨우고 싸구려 분장을 지워줄지도 모른다. 나를 놀려 먹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면 에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다릴 것이다. 내 가정은 전부 글러 먹었다. 맞아떨어진 게 하나도 없었다. 타이밍을 놓친 걸까 봐 몇 번이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에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에나의 장례식이 내 인생 첫 장례식 참가가 될 줄은 상상도 안 했다. 처음이었기에 장례식이 조촐했는지 평범했는지 아니면 규모가 컸는지 나는 말할 수 없다. 얼굴도 이름도 낯선 친척 어른들과 아버지와 연줄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왔으며, 내가 아는 에나의 친구들이 왔고 내가 모르는 에나의 친구들이 왔다. 에나는 인간관계가 좁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이따금 우리를 모두 아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서 괜찮다고 했다. 다들 그 뒤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은 세상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에나가 죽고 새삼스레 그 진리를 깨달았다. 내 일상조차 그대로였다. 새벽마다 조깅을 했고 낮에는 연습을 했으며 행사가 열리면 당연하게 무대에 섰다. 밤에는 소음이 없어 푹 잤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알았으나 정작 내가 아무렇지 않았다. 가끔 편의점에서 케이크를 샀다. 식성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부재를 알면서도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을 사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먹었다. 버린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시트 맛이 더는 느껴지지 않아도, 크림이 혀에 닿는 순간 구역질이 나도, 씹지 않고 삼킨 케이크 덩어리가 뱃속에서 둥둥 떠다녀도 입 안에 계속 쑤셔 넣었다. 한계점에 달하면 나도 모르게 화장실로 달려가 전부 게워 냈다. 그 토사물이 꼭 에나가 흘렸을 피처럼 보였다.

에나의 수험 번호는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그 여자는 과연 그걸 알았을까? 앞으로 평생 해소할 수 없을 궁금증이었다. 새 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불쾌한 소문이 교내에 달라붙어 악취를 풍겼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말야, 선배 중에 대학에 떨어져서 차도에 뛰어들어 죽은 사람이 있대. 에나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이 입으로 에나의 살과 피를 게걸스럽게 먹고 마셔댔다. 3학년 개학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진로 상담에서조차 담임이 그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동정과 연민과 호기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쪽이 멍청했다. 시노노메 에나를 만들고 낳은 부모보다 내가 더 걔를 잘 알았다. 에나는 절대 그럴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최근에는 드물었으나 아무튼 전처럼 울면서 물건을 집어 던지고 화를 내고 내 뺨을 할퀴는 한이 있어도 차도로 뛰어들 리가 없었다. 애초에 뺑소니였다고……. 인근 CCTV를 쥐 잡듯 뒤져 범인도 잡아 법적으로 종결된 사고였다. 내가 가장 잘 아는데. 그런데도 계속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네가, 원치 않던 결과를 떨쳐내려고 애쓰다가 찻길로 튕겨 나간 게 아닐까. 모든 걸 묻고 싶었다. 네 입으로 그런 헛소리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말란 말을 듣고 싶었다.

나와 에나의 방을 구분 짓는 벽은 아주 얇았다. 벽은 그간 정말로 공간을 가르는 역할만을 했기에 소리는 거르지 못했다. 에나는 그 사실을 무시하고 살았다. 울고 싶을 때는 울었고 화를 내고 싶을 때는 화를 냈다. 소리를 듣고 방문을 두드리면 언성을 높였다.

케이크 사 왔으니까 작작 좀 해.

꺼져.

걱정해 줘도 난리야.

누가 걱정 해 달래? 케이크만 내려놓고 꺼지라고.

그럼 돈 줘.

싫어.

물리적 폭력만 빠진 대화가 오가던 때도 있었다. 각자 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였으나 거기에 다가가려고 손을 뻗으면 점점 더 멀어지던 비참한 시기였다. 제 아들을 죽이고 신을 우롱한 탄탈로스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으나 우리는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죄가 없었다. 분수에 넘치는 소망을 가진 게 죄였던가. 우리 둘 다, 어렴풋하게 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죄는 주체가 인지하고 인정하였을 때 비로소 완전한 형태를 갖춘다. 에나가 밖으로 감정을 집어 던질 때 나는 그것을 막무가내로 집어삼켰다. 목에 걸리는 감각이 기분 나빴다. 에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소리를 죽여 울었는데도 에나는 금세 그것을 알아채고는 했다. 기분 나쁘게. 이제 그걸 알아채는 사람도 없다. 안방은 계단으로부터 거리가 제법 되었다. 내 닫힌 입을 열어 울음을 갈취해 가는 건 항상 에나였다.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에나가 생각나기에 우는 것인가. 울고 싶어서 에나를 떠올리는 것인가.


 

대학은 가지 않기로 했다. 성적도 성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야 하는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곁에서 조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이제 선택은 전부 내 몫이 되었다. 에나가 예대에 원서를 썼다고 선언하던 것처럼 독립을 말했다. 차이가 있다면 내 선언은 저녁이 아닌 아침을 배경으로 했고, 청자가 달랐다. 에나와 엄마가 아닌 아버지와 엄마가 내 주장을 들었다. 그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돈을 모으려면 이 집에서 계속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한계였다. 집 전체가 버거웠다. 어디든 에나가 살았던 증거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4명끼리 찍은 가족사진이나, 아무도 쓰지 않는 샴푸와 치우지 못한 칫솔 같은 것. 신발장에는 여전히 에나가 즐겨 신던 구두들이 있다. 에나의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아 문고리 위로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아무도 닦지 않았다. 그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부재를 다시금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하루하루가 불합리한 시험의 연속 같았다. 부재를 의식하는 순간 공백은 허물을 한 겹 벗고 더 선명해진다. 그럼에도 자꾸 떠올리고 만다. 지뢰의 총량을 알 수 없는 지뢰밭 같았다. 더는 이곳을 견딜 수 없었다.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러 조건을 따져가며 사방으로 발품을 팔아 그럭저럭 괜찮은 원룸을 구했다. 이상적인 집은 절대 아니었으나 집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비록 윗집은 새벽마다 알람을 스물다섯 개씩이나 맞춰 두고 제시간에 일어나지 않아 나까지 잠에서 깼고 옆집 사람은 매일 밤 애인을 데려와 뜨거운 밤을 보냈으며 원룸 건물 인근의 유흥가에서 술을 잔뜩 퍼마신 사람들이 굳이 이 건물 근처에서 속을 게워 냈지만 말이다.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여중생의 옆 방 생활을 몇 년이나 했던 만큼 정말 괜찮았다. 더 싫은 건 따로 있었다. 윗집도 옆집도 바깥도, 주변이 모두 적막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그 고요가 입과 코를 틀어막아 호흡을 방해했다. 소리의 부재가 웅웅거린다. 버저가, 누군가의 부재를 알린다. 어디를 가든 결국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 모른 척했다. 알고 있었다. 독립을 준비하며 나는 에나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에나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행위였음에도 그랬다. 그 여자는 자취 로망이 있었다. 가끔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소파 전체 면적이 10이라면 에나가 늘 9를 차지했다. 침대인지 소파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자기만 편하게 드러누운 모습이 아주 기가 막혔다. 혼자 사는 연예인을 조명하는 티비 프로그램을 보며 에나는 자기의 미래 계획을 서슴없이 늘어놓곤 했다. 너, 내가 안 깨우면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잖아. 그러면 꼭 자기 말에 초를 친다고 나를 마구 발로 찼다. 이제는 내가 에나보다 나이가 많다. 담배를 피울 수 있고 술도 마셔도 된다. 처음 술을 마셨을 때도 에나 생각을 했다. 우스웠다. 분명 걔는 이 맛 없는 걸 왜 마시냐며 화를 냈겠지. 나는 시노노메 에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에나가 마땅히 먼저 했어야 했던 일을 나 홀로 하고 있다는 게 싫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그럴 것이다. 피로 짜인 저주였다. 저주를 베어 물면 썩은 팬케이크 맛이 날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찾은 본가는 도통 변하지 않아 징그러웠다. 아버지는 작품 활동을 핑계로 해외로 도망쳤다. 물론 엄마도 함께였다. 가족 중 일본에 있는 건 나뿐이었다. 사실 집에 오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본가에 있을 서류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방문 때와 달리 가족사진이 전부 뒤집혀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다. 다 옛 것이었다. 먼지투성이 액자를 굳이 돌리지 않았다. 에나가 제 사진을 올리던 SNS 계정은 아직 살아 있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이다.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인터넷에서 에나낭 요즘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당연하게도 에나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도 거기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주변 사람과 연락을 끊고 먼 타국에서 혼자 생활하는 에나를 그릴 수 있다. 그리고 늘 멍청한 질문을 던진다. 걔는 뭘 하고 살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시노노메 에나는 언제나 그림을 그릴 텐데도.

부탁받은 서류를 찾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하나의 악기처럼 삐걱이는 음을 토해냈다. 내 방과 에나의 방은 다르지 않다. 양쪽 문고리에 모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 모습만 보면 둘 다 죽은 사람 같다. 둘 다 살아 있던지. 몇 년간 어떤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가 우리 집에 있었다. 열리지 않는 문은 벽과도 같다. 갑자기 왜 이 벽을 부수고 싶어졌을까. 판도라는 호기심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내용물이 궁금했겠지. 나는 이 문 너머에 있는 것을 안다. 그건 부재의 파도였다. 아직도 낫지 않은 상처를 소금에 절일 바닷물이었다. 당연하게도 문은 삐걱거린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 감각을 기억한다. 병원으로 달려가던 고등학교 2학년의 끝. 치기 어린 미성숙의 말로. 눈을 감아도 코는 멀쩡하다.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와르르 쏟아진다. 그 가운데 아주 낡은 물감의 냄새가 났다. 내게 먼지 알레르기가 있던가. 눈이 아주 아팠다. 앞을 볼 수 없다. 시야가 뿌옇다.

“아키토?”

거기에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게 있었다. 익숙한 교복을 입은 여자. 짙은 갈색의 옆을 땋은 단발머리. 머리칼과 거의 같은 색의 눈. 나와 닮지 않은 얼굴. 내가 회피하고 모면하고 유기한 기억의 집합. 몇 년에 걸쳐 벗어나려고 했던 나쁜 꿈이 현실 속에 있었다.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약을 한다는 놈들을 만나게 된다.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약이 제공하는 환각이 이런 걸까. 모르겠다. 다만 고개를 끄덕인다.

“나, 대학 어떻게 됐어?”

거기에 있는 여자는 부정할 수 없는 시노노메 에나였다. 나의 누나. 내 삶을 얼룩지게 만든 주범. 처음으로 뱉는 말이 대학 얘기라니. 그게 우습게도 안심이 됐다. 역시 나보다 더 에나를 잘 아는 사람 따위 없었다. 반투명한 몸 사이로 비춰지는 에나의 방은 방 주인을 포함해 달라진 게 없었다. 여자의 피부 표면에 언뜻 비치는 나만이 모호하게 변해 있었다. 으레 변화란 불가역적이라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닭이 달걀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죽은 사람이 당장 여기 있는데. 그때 여자는 혼자 죽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남동생도 같이 죽었다. 물건이 깨지는 영상을 역재생하듯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삶-죽음에서 죽음-삶이 된다. 한때 나를 이루었으나 잃었던 것이 서서히 몸에 달라붙었다.

“진짜 미안한데, 결과부터 알려주고 울면 안 돼?”

시노노메 에나는 웃길 정도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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