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 장르
유료

[준혁지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하단 결제창은 단순 후기입니다

연성백업 by LIBRA
35
0
0

*준혁지혜

*수색 연합 엔딩 스포

*엔딩 후일담의 후일담에서 약간의 변주를 주었습니다

*몇몇 설정을 혼자 덧붙여 생각한 부분이 있습니다

*약 22800자

*교정 교열을 거치지 않았으니, 이 점 양해 바랍니다

그 이후 양지혜는 잘 살았다.

이 말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정말로 양지혜는 잘 살았다.

언니를 잃기 전부터 양지혜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에 명확했고, 실종자 수색 연합에서 수색대로 활동하면서도 제 본업을 허술히 한 적 없던 사람이다. 제 전공에 맞든 어쨌든, 그녀는 단 한 번도 삶에 헌신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언니를 찾을 때였든, 그 새끼와 마무리 지었을 때였든.

고지헌 그 녀석의 세후 뒤탈 없는 50억에 비할 바는 못 되더라도, 양지혜는 원래부터 이름있는 기업의 직원이었다. 모아둔 재산도 꽤 됐으며, 그럴싸한 집도 한 채 있는 삶.

그러니까 대한민국 통상적 가정 형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양지혜는 잘 살았다고 볼 수 있었다.

비록 남들처럼 따로 가족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신준희를 돌보는 데에 시간을 쏟다 보니 딱히 외롭다는 감정이 들 새도 없었다. 이따금 고지헌이 연락해서 밥이나 한두 끼 먹기도 했고, 연합원들로부터 그래도 전 대장이랍시고 연락통도 날아오고.

실종자 수색 연합이라고는 하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열리는, 뭐 그런 회식에도 가끔 참가해주고...... 그랬다. 이 정도면 대인관계도 무난한 편이지. 양지혜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의 삶이 퍽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 삶은 괜찮았어. 나는 나의 삶에 한 점 후회 남김없이 살았어.

푹신한 병원 침대에 누워, 주름이 자글거리는 손 사이 텅 빈 공간을 들여다보며 양지혜는 웃었다. 병원 천장 형광등이 그 공간 사이로 빛을 투과한다. 인공의 빛이 양지혜의 눈을 비춘다. 그녀의 안광에 비친 허공에는 여전히 존재하는 매끈하고, 주름 하나 없던,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이 하나.

이것은 후회 없는 삶의 증표. 젊었던 날 나의 가장 큰 부분을 받았던 선물. 양지혜의 삶을 이루게 된 모든 것.

양지혜의 삶에서 가장 끔찍했음에도, 결국 그녀의 미래를 지표 하였으니.

그러니 이것이 그녀의 삶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랑이 당신 또한 인도하길 바라며,

아마도 우리의 삶은 이어지고 있을 테니 ─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돌이켜보면 이따금 신준혁이라는 남자와 어떻게 사랑까지 했을 수 있었나 싶을 때가 있었다.

한 없이 가볍고, 알량해 빠진 인상. 양지혜가 좋아할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반반한 낯짝을 떠올리면 그 지경까지 나아갔던 게 신기하기까지 할 따름이다.

분명 우리의 만남이 단순한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였다면 하루 만에 끊길 인연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나지만, 너도 나를 불편해했을 테니.

그러니 우리의 사랑은 비정상에서 시작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게 맞다. 우리는 평범에서 탈피한 채로 시작됐다. 휴전국 답지 않게 생사의 위협은 먼 나라 이야기와 같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전쟁통 한 가운데에서 만난 것이니 말이다.

수색연합은 전사들의 규합지라고 양지혜는 생각했다. 단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절박한 것들이 모인 그곳. 그곳에 들어온 이들은 각양각색이었으나, 단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죽음을 모른다.

우리들은 죽음을 몰랐다.

잃은 것들을 찾기 위해 모인 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어느 하나가 미쳐있는 구석이 있었다. 양지혜는 전쟁이란 걸 겪어본 적 없는 세대였음에도, 그 눈이 무엇과 닮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적 앞에 나선 전사의 눈이다.

이대로 도망치면 평온한 삶이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전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 모인 곳.

그 모두가 상실을 담아내어, 그 역겨운 괴이 세계로 제 한 몸 던져서 누군가를 구해내고싶은....... 그 벼랑 끝의 절박함.

이미 망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를 위해 생자인 자신을 내던지는 그곳에서, 양지혜는 늘상 슬픔의 냄새를 맡았다.

그곳은 삶보다는 죽음과 가까운 곳이었고, 그럼에도 죽음을 모르는 양 구는 미친 인간들이 모인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비단 그건 양지혜 본인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이가 그렇듯 양지혜에게도 언니라는 존재는 어떻게든 버릴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중한 부분이다.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던 사람. 나를 이해하고, 서로를 지탱해주던 삶의 동반자. 혈육의 정을 넘어, 같은 고통 아래에서 도망친 생존자. ......그리고 나의 하나 남은 가족.

괴이세계가 어떤 곳인지 자각할 때마다 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기이하게도 그 때문에 양지혜는 줄곧 살아남았다. 센스라거나, 운이라거나.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테고, 다른 사람들도 다를 것은 없을지도 모르나, 하여간 양지혜에게는 그 언니의 얼굴이 생존의 방침이 되었다.

만일, 언니가 살아있다면.

오로지 나만이 언니를 마중해 줄 수 있을 테니까.

...... 그리고 나만이 절실하게 언니를 구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사람의 자세다. 그 젊은 날의 양지혜는 분명 그것을 위해 죽으러 갔고,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양지혜 같은 이들이 숱하게 모인 곳이 연합이었다. 이 음울한 건물에서, 삶의 기쁨보단 생존이 앞서는 곳에서 사랑이 꽃 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야 사치 아닌가. 정신머리가 있긴 해? 언니가 죽었을지, 살았을지도 모르는 와중에 내가 행복을 찾아서야 될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

그러니까......

......하하. 옛날 생각이 난다.

양지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 때의 기억이 있기에.

.

.

.

"당신, 당신 정말 미쳤습니까?! 제가... 제가 그렇게 나서지 마시라고.....!!!"

엉망진창으로 겨우 생환한 나를 앞에 두고 저러는 꼬락서니를 보라.

실종자 수색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수색자뿐만 아니라, 보조인에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일단 진입과 동시에 언제 탈출할 수 있을지 기약 모를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수색자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조자는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를 짊어진다.

아니지. 그건 단지 하나의 생명만이 아니다. 만일 그 수색대원이 누군가를 발견이라도 했다면. 혹은 그것이 유해가 아닌 정말로 살아있는 누군가였다면......

그 과정에서 수색대원이 흔들리지 않도록 정신을 지켜주는 역할을 맡은 자. 그리고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자.

"......울지 마세요."

대장도 자리를 비웠고, 여간한 고참 대원도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초창기 수색 연합은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지침만 제대로 지킨다면 할만해진 몇몇 구역들도, 처음 그 법칙을 찾는 데에 얼마나 지난한 시도를 하였던지.

대체로 건질만한 생존 방식을 찾아낸 건 이태호 대장이었지만, 양지혜라고 실적이 없진 않았다. 아니지. 썩 많았지. 그 특유의 무모한 시도 덕분이지만 결과는 대체로 썩 좋았으니.

......하지만 역시 대장도 없는 상황에 하면 안 됐을 일일까.

"아, 그래도 대충 괴이 놈들 상대하는 법은 알았잖아요. 숨는 구석도 알았고. 그놈의 정신 나간 계단도 대처해준 거 당신이잖아."

"그 망할 계단. 제가 분명히 근처도 가지 마시라고 알려드렸어요."

"알아요, 알아. 근데 그게 우리 대원들을 산 채로 둘이나 삼켰잖아. 어떻게 조사를 안 해요? 게다가 위에서 시켰는데 어떡해?"

".......그래도 그런 선택을 굳이 해야 했습니까?"

비상계단에서 소리가 나는데도 굳이 진입했던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양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은 남자, 신준혁이 곧 지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본다. 양지혜의 취향과는 안드로메다만큼 멀었으나, 반반한 것은 인정하는 낯짝이 고단함에 퀭 했다. 하기사, 제이엘티코리아 진입하면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거기가 오죽 블랙이어야지, 망할 회사. 괴이 새끼들은 그만큼 일하고도 불만도 없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남자의 통신기기. 접이식 철제의자가 즐비하고, 어느 방송실처럼 통신용 장비가 즐비한 곳. 남자의 낯짝과 잘 어울리는 어느 방송사 사무실이라도 되는 곳 같았지만, 널려있는 건 음반용 악보가 아닌 통신 기록용 메모뿐이었다. 어떤 것은 수기로, 어떤 것은 타이핑으로 작성된 신준혁과 양지혜의 수색 기록들.

"우리 3인 1조 아니었나요? 타이핑한 사람은 어디 있대?"

"......먼저 보냈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친구라서, 듣는 것만으로도 휘청거리더라고요."

"저런..... 수색대원에는 지원하지 마라고 전해요. 어차피 여기 그거 말고도 할 일 많으니까."

남자가 앉은 것과 똑같이 접이식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어찌어찌 탈출했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던 것 치고는 괜찮았다. 단지 좀 배가 고프달까. 그놈의 식당 근처를 지난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통신실에 비치된 냉장고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생수를 발견한 양지혜가 꺼내 들었다. 이따금 이태호 대장이나 눈앞의 신준혁이 먹으라고 넣어두는 비상식량 같은 것이다. 이 안에 들어온다면 아무래도 한동안 나갈 일은 없으니, 사원복지..... 뭐 그런 차원이라고 해야 하나.

"그쪽은 뭐 드셨어요? 배고프실 텐데."

"안 먹었어요! 제가 그때 뭐 먹을 정신이었겠어요?! 당신이 미쳐서 계단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뭐 빠지게 달려서 알아서 잘 도착했으니 된 거지. 지침 추가해요. 헥헥댈 때는 괜찮다고."

"안 그래도 대장에게 말했어요. 하....... 그리고 제가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런 식이 아니면 진전도 없을 걸요."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괴이 세계 법칙이라는 게 어디서 안전한 부분이 나올지 모르니, 최대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편이 나중에 가서 좋기도 했다. 판돈이 목숨이라 그렇지, 해볼 만한 장사다.

양지혜가 손안에 든 샌드위치를 빤히 내려다봤다. 장시간 허기진 상태였던지라 양상추와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는 퍽 먹음직스러워 보였으나, 그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지혜가 샌드위치를 다시 냉장고에 밀어 넣었다. 대신 생수병만을 까고 들이킨 후, 목을 축인 양지혜가 신준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도 배고프거든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이 시간에?"

제이엘티코리아는 그놈의 업무시간 규칙준수 때문에 돌아올 때면 늘 한밤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뭐 대순가.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고, 시간은 빈다. 제아무리 프리랜서라도 일상을 영유할 짬 하루는 비겠지.

"밥만 먹자고? 한잔하자는 거죠. 그쪽 설마 미성년자야?"

별 시답잖은 농담에 그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뜬다. 그러고는 벌게진 눈가를 슥슥 닦았다. 옷소매가 눈물 자국에 젖는 것을 보니 오죽하니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 모습에 양지혜는 드물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실제로 그녀가 신준혁의 지시와 애걸을 무시한 것은 맞았으므로.

기분이 꿀꿀할 때는 술이 답이다. 비록 신준혁은 이 미친 사람들만 모인 연합에서도 유달리 거리감 있는 사이였으나, 그렇다고 같이 생사고락을 언제 또 넘을지 모르는데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다.

그는 한번 나의 눈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예, 갑시다. 지혜 씨가 안내해주세요."

"국밥 좋아해요?"

"국밥 싫어하는 사람이 한국에 있나?"

연합 건물 근처에 있는 국밥집 국밥이 딱히 맛이 있진 않았다. 간신히 배만 채우고, 소주 몇 병 따라 마시며 알딸딸함에만 취했지.

한번 술이 들어가니 입이 트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국식 술자리가 다 그렇듯이 말이다. 제일 첫 문은 신준혁의 불평불만에서 시작됐다. 사실 내가 불편했느니 어쨌느니, 상당히 오랫동안 투덜거리는 걸 지은 죄가 있으니 일단 다 들어줬다. 그러다 결국 술김에 참다못해 핀트가 나간 것이다.

"이런 씨발 하지만 내가 맞았잖아!!"

.....그냥 원래 성깔 나온 건가?

"잘못 되면 죽는다고! 내가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그런데 상대 쪽도 만만찮았다. 이 자식, 질질 짜면서 저런 말을 하니 보는 사람 심란하게.

아무튼 술 들어간 대화가 대충 저 지경이 된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 술 괜히 마셨나......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을 때였다. 상대도 별 다르지 않았다. 국밥은 이미 뒷전인 이 상황. 주인아주머니가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 이 국밥집도 괴이 세계 아냐? 뭐 이리 흔들거리냐......

그렇게 술에 반쯤 취해 내 피가 알콜이 된 것이 아닌가 싶을 때 즈음에, 신준혁이 말했다.

"무서웠단 말이에요."

술 들어가 코를 훌쩍이는 신준혁이 또 소주잔을 하나 털어 넣으며 했던 말이었다.

"그 뭐냐, 기억나요? 박주영 씨 말야. 퇴근 시간 10초 빨랐다고 죽은 그 양반. 그러고 정신 오염 당해서 목이 터져라 귀에 지껄여도 결국 투신해서 죽은 인간 있잖아."

기억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제이엘티코리아에서 최초생환이 가능하겠다 싶었을 때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전까진 망할, 옷 좀 흐트러졌다고 죽여. 들어가자마자 명찰이 본인 이름으로 되어있는 걸 발견 못해서 죽어. 아주 가지각색들이었는데, 처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죽었다고요. 그 사람."

신준혁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구나, 이 사람.

"무모한 짓 좀 하지 마세요. 수색대원 첫 번 째 규칙 몰라요? 본인이 살아 돌아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이 죽음과 가까운 공동체에서 양지혜는 슬픔의 냄새를 맡는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이곳에서 무엇을 맡았겠는가.

"왜 죽을 짓을 자처하려 해...."

그건 공기 중에 떠도는 공포일 것이겠지.

이 중 다음 날 어느 누가 돌아오지 못할 지 알 수 없다. 오늘 아침 웃으며 과자를 나눠먹던 이가, 다음 날이면 괴이 세계에 사지가 찢어져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렇게 스러져간 목숨만이 벌써 몇인가.

등록된 실종자의 숫자만큼, 사라진 대원들의 숫자도 늘어만 가는 것이 이 연합이 돌아가는 생리인 것을.

그 연합의 창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전히 가족을 찾지 못한 남자가 말했다.

"...... 나는 지혜 씨가 거기서 죽을까 봐 무서웠어요."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던 목청 찢어지는 소리가 기억난다.

양지혜가 말했다.

"당연히 나도 무서웠어."

술김에 사라져버린 예의 차린 존대 대신 반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술에 반쯤 취한 양지혜가, 오락가락한 정신에도 꿋꿋하게 말했다.

"죽는 걸 좋아하는 정신 나간 새끼가 어딨겠어?"

유달리 지침도 어기고 튀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대원. 대체로 기지를 발휘해서 구색을 찾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에 도가 텄다고 이태호 대장이 평가한 에이스. 그런 양지혜도 당장 눈앞에 닥친 죽음이 무서웠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사실 괴이 세계, 그딴 미친 곳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내 인생 꼬라지가 왜 이 지경이 되었냐는 생각도 자꾸만 든다.

가끔은 언니를 원망했다. 그에 반작용으로 그립기도 했다. 그 쌩쌩한 면상에 대고, 내가 너 때문에 이만큼이나 고생했다고 소리 지르고 싶다. 내 눈앞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언니에게 화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냐고......"

그러려면 내가 움직여야 한다. 죽어도 들어가기 싫은 그곳으로 꿋꿋이 향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으나,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사지를 나아간다. 내 발이, 그곳을 향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아마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술잔을 다시 한번 더 목뒤로 훅 넘겼다. 이젠 술이 물 같은 지경에 다다랐다. 건너편에서 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누가 그걸 모르냐고......"

그도 또 한 잔 더 들이킨다. 어어, 지금이 몇 병째였지. 셈도 헷갈렸다. 대학 이후로 이렇게 마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있잖아, 지혜야..... 그래도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아, 속이 울렁거린다.

"당연한 얘기하지 마! 난 살 거야. 당신도 살고."

"하하."

그제서야 웃음을 터트린 신준혁의 면면을 본다. 술에 잔뜩 취해 시뻘게진 얼굴은 분명 꼴사나워야 하는데도, 타고난 낯짝 때문에 여즉은 볼만했다.

"당연히 살아야지. 살아서 못 해본 거 잔뜩 해야지. 잃어버린? 어? 그래. 언니도 찾고, 만나면 머리부터 쥐어뜯을 거야. 내가 너 때문에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아주 귀를 나갈 만큼 소리 지를 거라고!!"

"으하하!! 나도 우리 준희보면 꼭 그래야겠다."

"그치? 드디어 말이 좀 통한다. 안 그래?"

"그러게."

난데없이 터지는 웃음에 우리 둘 다 끌끌 대는 와중에, 신준혁이 나지막이 말한다.

"그리고 끌어안아 줄 거야. 잘 돌아왔다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그러게. 나도 그래야겠다. 그리고, 그리고 난......"

울렁거리는 천장 너머로 언니의 얼굴이 희끄므레하게 보인다. 못된 년. 하여간 사람 속 썩이는 년. 그럼에도 내가, 정말로.....

"..... 사랑한다고 해줄래."

내 말에 신준혁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 쯤 되자니 정말 물리적으로 속이 울렁대기 시작했던 터라 잘 보지는 못했지만, 그때 듣기로는 분명히.

"나도 그래야겠다. 사랑해, 하고. 말해줄래."

그런 말을 했었지 아마.

그 이후는 별거 없었다. 나란히 구역질하고, 식당 아주머니께 먼지 맞듯 처맞고 쫓겨났으니까.

그 나이 먹고 겪은 쪽팔린 일 중 가히 1관왕에 차지할 일이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연합에 알려지면 여러모로 쪽팔릴 일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달라진 점 하나라면, 나나 그 쪽이나 서로 편해졌다는 거겠지.

지혜야!

키득거리며 나에게 찾아와, 빵조각 하나라도 나누려던 그가 기억난다. 내가 우울할 때면 괜히 장난스럽게, '귀여워' 이런 말을 하며 내 기분을 살폈던 신준혁을 떠올린다. 나에게 욕을 듣고도, 매운 손으로 등 싸대기를 맞아도 낄낄 웃던 너.

'양지혜'에서 '지혜야'로 호칭이 바뀐 것처럼, 네 마음의 변화를 내가 모를 일도 없었을 텐데.

또 어느 날의 일이었다.

"서지훈 씨가 해피에브리마트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한 직원 분을 목격한 이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태호 전 대장이 담담하게 전했던 소식은 연합을 한참 술렁이게 만들었다. 물론 그즈음 되어서 사람 한둘 죽는 것에 정신이 나갈 수색대원들은 없었으니, 당연히 그 사람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다.

"정신 공격?"

"해피에브리마트에서 이런 사례는 없었지 않았어, 형?"

양지혜는 고민하고, 신준혁은 지침서를 다시 확인했다. 한 쪽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수색대원들의 얼굴도 조금 경직된 것이 보였다. 하기야 이제 밝혀질 것 다 밝혀졌다 생각한 해피에브리마트에서 또 새로운 기현상이 나타났다는 건 그닥 좋은 일이 아니니 말이다.

어느 한 곳에서 서류가 탁 덮이는 소리가 들린다. 신준혁이 말했다.

"그런 사례는 역시 없네."

그 짧은 새에 비공식 기록까지 훑어봤던 모양이었다. 그는 인상을 조금 찡그리더니 다른 장소의 기록까지 꺼내 들었다. 그를 돕듯 다른 몇몇 사람도 함께 기록을 훑어봤다.

그 사이에서 이제 갓 성년이 된 앳된 목소리가 말했다.

"사람이 괴이가 되었다는 생각은요?"

괴이현상만으로도 머리 아픈 수색 연합에 들이닥친 골칫덩이, 고지헌이었다.

"너는 또 여기 왜 있냐? 학교는?"

"아, 거. 당연히 자체 휴강이지. 누나는 알면서 뭘 물어? 대학생 교양 아님?"

"아, 씨발. 야 이 새끼야..... 너 진짜 학고맞고싶냐?"

"요새 누가 학고를 줘? 요즘 대학 물렁해요."

갈수록 빡세지는 대한민국 취업난의 시대를 거스르는 반항아 때문에 양지혜는 머리가 아파졌다.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할 찰나, 이태호가 고지헌의 어깨를 진중하게 누르며 말했다.

"지헌아. 학업에 성실해야지. 괴이 수색도 좋지만, 자기 관리도 중요하단 거 말하지 않았니."

"아, 대장도 참.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괜히 눈을 흘기며 시선을 피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번에도 대장이 알아서 잘 잡겠거니 생각한 양지혜가 말했다.

"그래서 수업 째고 여기 나타나서 하는 개소리는 뭔데? 설명해봐."

"아니이, 상상 안 해본 것도 아니긴 하잖아요? 기분 더러워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살아생전 이런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될 일이 얼마나 있었겠냐만, 정작 겪고 나니 별 생각이 다 들었던 탓이었다.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볼 법한 괴물들의 세상에 떨어진 인간이, 그곳에 너무 오래 있던 나머지 똑같은 괴물이 되는 그런 대중매체들을.

"게다가 지훈이 형의 유족 분이 발견됐던 건, 가공된 식품이었지 본인 그 자체는 아니었기도 했고요."

"단순히 정신착란 케이스일 수도 있지. 그때 그 사람, 그닥 제정신도 아니었고. 괴이 세계 들어가면 멘탈이 초마다 깎여나가잖아."

자료를 찾던 신준혁이 한 말이었다. 그는 마치 그런 상상은 추호도 하기 싫은 것처럼 보였다. 그와 함께 자료를 찾던 박은찬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본 양지혜가 거들었다.

"그 말이 맞아. 그렇게까지 비관적인 생각은 안 해도 되겠지."

"누나답지 않게 뭐 그리 감성적이에요?"

감성적인 게 아니라 사기 관리란 거다, 새끼야.

만약 저 가설이 맞다면, 우리는 생존자 수색이 아닌 생존자'였던' 괴이를 탐색해야 했다. 그건, 정말로. 상상으로도 하고 싶지 않은 '만약' 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긴 해야잖아요? 일단 뭐든 대비는 해두면 좋지."

고지헌이라는 놈의 가장 빡치는 점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이딴 가정하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생각 안 하다가 지훈이 형처럼 된통 당하면 그게 더 손해잖아."

그런 말을 내뱉고는 회의실 테이블에 올려둔 과자나 까먹는 고지헌이라는 놈의 심기는 심히 불편해 보였다.

회의실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신준혁과 박은찬 씨가 서류 넘기는 소리, 그리고 고지헌이 과자 털어먹는 소리가 다였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한 사람이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생각해봐야겠지, 그런 경우도."

이태호 대장이었다.

실종자 수색 연합이라는 것을 만들고, 처음으로 괴이 세계에 대한 단서를 우리에게 던졌던 사람. 오로지 아내의 왼손을 찾기 위해 한쪽 눈도 상납했던 사람의 남은 눈은 침통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다들 그런 일이 생겨난다면, 생각하는 바는 모두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그가 할 말이 짐작 된다.

"살아 돌아오는 것을 가장 중요시할 것. 그 지침을 잊지 않길 바라는 바다."

정론이었다. 그러나 양지혜는 본인 몫으로 배당된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과연 이 자리에서 그 지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그러면 이만 일어섭시다. 완전히 밝혀진 것도 아니고, 추측만으로 암울해지긴 좀 그렇잖아요? 다들 식사나 하러 가죠."

"조사는?"

혜미 언니의 말에 신준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괴이 세계가 아니라도 실종 사건에 가장 중요한 건 멘탈 관리래."

"좋네. 뭐 먹게?"

"흠. 삼겹살?"

"나 삼겹살 좋아해. 가자."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혜미 언니였다. 영차영차 잘도 휠체어를 끌고 가는 혜미 언니 뒤로, 끌어주겠다며 은찬 씨가 뒤따른다. 그들을 보던 고지헌이 신준혁을 향해, 삼겹살이 뭐냐고. 형은 센스도 없다면서 소리치고는 이태호를 끌고 나갔다. 그 뒤로도 사람들이 줄지어 나가고는,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은 건 신준혁과 나였다.

그는 회의실 내 종이컵이나 먹다 남은 과자를 대충 정리했고, 나도 함께 정리했다. 아니 뭐, 저 새끼 혼자 정리하라고 냅둘 수도 없고.

그렇게 다 마신 종이컵을 탁탁 정리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데, 신준혁이 슬쩍 와서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지혜야, 나 때문에 남았어? 나 정말 기뻐."

"으."

히죽대며 스윽 다가오는 놈의 마빡을 밀어내니 괜히 우는 척 하는 꼬라지를 보라. 아, 이 놈이랑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그럼 너 혼자 냅두냐?"

"우리 지혜는 상냥하기도 하지."

"적당히 하랬다."

하여간 말 하나하나가 사람 소름 돋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멀대같이 큰 놈이 아양 부리는 꼬라지를 보노라면, 얜 진짜 저 키에 진짜 저러고 싶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런 놈이라서 좋은 점도 있다.

"분위기 전환한 거지? 잘했어. 고지헌 새끼 말대로, 삼겹살은 센스가 없었지만."

이런 쪽에 도가 튼 놈이니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상이 맞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회의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서니, 사람들은 벌써 건물을 빠져나갔는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물에서 숙식하는 사람도 있으니 불을 끌 필요는 없겠다 생각한 양지혜가 적당히 문만 잠갔다. 고개를 돌리니 신준혁은 이태호와 연락하고 있던 참이었다. 대충 회식 장소가 어딘지에 대한 내용이다. 얼추 목적지를 들으니 걸어서 15분 거리의 밤늦게까지 하는 고깃집이었다.

결국 고기냐고..... 이 인간들은 괴이 탐색도 하면서 비위가 좋은 건지, 아님 무뎌질 대로 무뎌진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 술도 팔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회식의 주목적이 고기가 아닌 술이겠구나 싶어졌다. 고지헌놈도 이제 잉크도 안 말랐을지언정 성인 딱지는 받았으니 거리낄 것 없는 모양이다.

양지혜는 이번에야말로 술에는 입도 안 대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성큼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신준혁이 쪼르르 따라붙었다.

"지혜는 걸음도 빠르네."

"네가 느린 거야."

"에이. 좀 늦게 가면 뭐 어때서. 어차피 고기 구워지려면 시간 꽤 걸려."

데이트하는 기분이나 내자. 그리 말하는 놈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니, 그가 과하게 엄살을 떨었다. 하여간 저 방정맞은 촉새 입은 쉬지를 않아.

때는 가을이었다. 늦은 밤의 바람 소리와 드문드문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계절. 외투를 추스르는 양지혜가 흡사 직업병과 같은 기분으로, 괜시리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골목 같은 것을 훑어봤다. 습관이었다. 거리는 사람이 가장 죽어 나가기 쉬운 장소이기에.

괴이들은 죽음과 비극이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았으니.

양지혜는 가을 코트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그러자 촉새 같던 녀석의 입이 닫히는 대신, 멋쩍은 웃음소리가 실 없이 흘러나왔다.

"대장이 결론 지었잖아?"

"결론은 결론이고. 좀 더 감정적인 부분을 묻는 거지, 나는."

"굉장히 의외인데..... 네가 그런 얘기하니까."

이 새끼가?

"야. 너나 고지헌이나, 날 대체 뭐로 보는 건데?"

옆구리를 꼬집자 아야야 우는 시늉을 한다. 세게 꼬집은 것도 아닌데 엄살도 유분수다.

"아니이. 그게 아니라, 난 지혜 네가 이런 공사 구분에는 좀 더 합리적일 거라고.... 생각했달까?"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나도 대장 의견에 동의해."

"거봐. 이런 것처럼."

"하지만 사람이 늘상 마음먹은 대로 되나."

실제로 케이스가 없지도 않다.

"양순자 대원님 생각해봐. 내가 동의하는 것과 별개로, 사람마다 다 다를 텐데."

"음......."

얼마 전 어린 딸을 살리고 돌아가신 그 아주머니의 얼굴이 아직 어른거렸다. 좋은 분이었지. 양지혜가 그 분에게 얻어먹은 반찬도 꽤 됐었다. 언니를 잃어버린 후로 밥도 제대로 못 챙기고 살았었는데.

양지혜는 양순자 같은 사람을 좋아했다. 착하고, 다정하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

지침을 어겨 사망했을지언정 그 사람의 사랑은 시들지 않겠지.

"글쎄...... 나도 좀 힘들지도 모르겠다."

"왜? 너도 홀릴 것 같아?"

"아니 그것보단......"

말을 한참 고르던 그는 이내 자신도 이 대답이 맞는지 긴가민가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더 일찍 찾아주지 못해 그 꼴이 됐을 거라 생각하면, 역시 좀 그렇네."

"너나 할 법한 생각이다."

"매정해......"

우는 시늉을 하며 은근슬쩍 껴안으려 한다. 이번에는 봐주기로 한 양지혜가 못 말리는 애완견처럼 구는 신준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무거워. 물론 놈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럼 그렇게 괴이가 된 사람은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일까?"

신준혁의 그 질문은 공허해 보였다. 신준혁이 동생인 신준희를 잃은 지는 몇 년째이지. 내가 언니를 잃은 지도 몇 년째더라......

기약도 없는 실종자 수색에, 사랑하는 사람의 끔찍한 죽음 이외의 변수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이런 고민을 안 하는 연합원이 누가 있겠냐만.

"아니겠지."

그랬기에 단호하게 잘라야 했다.

"그때가 되면 정말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 짓거리 하는 이유가 뭐겠어. 멀쩡하게 산 사람 찾고 싶어서잖아."

시린 가을밤의 날씨에도 붙어있으니 온기가 차오르는 것 같다. 양지혜는 신준혁의 따뜻한 체온에 몸을 슬쩍 기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정신이 좀 나가도 괜찮아. 멀쩡하면 더 좋겠지만, 사지 하나 잘렸더라도 살아있기만 하면 바랄 게 없어. 그 미친 곳에서 살아남아 내게 와준 것만으로도 나는 남은 평생을 헌신할 수 있을 거야."

코 끝이 조금 시리다. 겨울이 다가오는 날씨일까.

"하지만 죽었다면......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적어도 존엄했으면 싶어."

여태 찾아낸 유해들이 온전했던 경우가 드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부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이 정도도 바라지 못하나.

"하지만 괴이가 됐다는 건, 죽었단 얘긴 아니잖아?"

"물리적으로는 그렇지. 사실 괴이가 되었다는 부분 자체는 생각보다 문제가 아냐."

괴이가 되었을지언정, 내가 납득할 부분이 있으면 나도 고민했을 것이다. 여태껏 봐온 실제 괴이 새끼들 행태를 생각하면 기대도 안 되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가령 연쇄살인마가 있겠다."

사회는 암묵적으로 인간이라는 것의 정의를 내놓고는 한다. 인간의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저선의 기준이란 또 무엇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반성조차 하지 않는 족속들이 엄연히 인간 세상에도 존재하잖아. 사람 등쳐먹는 데에 취미 들리고, 타인을 헐뜯는 것에 자각조차 없고. 나는 괴이 새끼들도 혐오스럽긴 한데, 그쪽도 별 다르진 않아 보이거든."

사람이 선할 수만은 없다. 양지혜도 그것을 모를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다. 본인 스스로도 깨끗하기만 한 인간이라는 자각은 애초에 갖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이라면. 그런 기준에서 양지혜는 하나 결론을 내린 것이 있다.

"내 기준은 아무래도 살인이겠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에 큰 자각이 없다면, 그건 괴물이나 다름 없는 거니까."

"그럼 만약 그 괴이가 살인 같은 건 저지르지 않았다면?"

"고려해볼지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역시 희박하지. 더군다나 내가 믿을 수도 없고."

괴이가 된 순간부터 상대를 믿을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절실하게 기다려온 자일지라도 그랬다.

"그럼 신준혁 너는?"

"나?"

"여태 나만 지껄였잖아. 그리고 좀 떨어져!"

이번에는 양지혜가 패기 전에 잽싸게 떨어진 신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혜야. 넌 네 힘이 장난 아닌 걸 가끔 좀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알거든? 그래서 대답은?"

"나도 너랑 비슷해."

지혜가 알기로 신준혁은 물렁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그가 쌓아온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는 퍽 가벼운 부분이 있었고, 그 덕분에 오늘처럼 심각한 분위기가 될 때 꼭 환기시켜주는 담당이기도 했다.

수색작업에서도 지침서를 꼭 지키며, 정도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기도 했고. 지침 지키는 거에 비해 덜렁대는 부분이 많은 것은 흠이긴 했지만, 의도적으로 돌출적인 행동을 한 적은 없다. 일명 사고 치는 면에서 양지혜와 궤가 다르다는 의미였다.

그 행동 방식처럼, 그는 자기 몫을 챙기는 걸 좋아하고 생존에 집착한다. 가벼운 척, 서글거리면서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간 것만큼은 돌보는 인물.

바운더리 안에 들어간 것을.

양지혜는 안다. 그런 겁 많은 저 남자도 결국 수색대원에 속해있단 것의 의미를.

"죄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면에선 아무래도 사람과 완전히 다르지, 그것들은."

살인범과 비교해도 역시 그렇다. 그가 말을 이었다.

"괴이들에게 인간이란 일종의...... 에이 씨발. 식품 같아 보였잖아. 우리가 돼지나 닭을 먹듯이."

그는 그 말을 하며 자신들이 찾아가는 가게의 주메뉴를 떠올린듯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뒷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사람은 그러질 않지. 아무리 개자식일지언정 교도소에 처박고 기회를 주는 건, 반성의 여지를 주기 위해서고."

신실한 종교인다운 인간을 향한 믿음이었다. 양지혜는 아직 저 놈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무신론자로 고지헌과 손뼉이라도 맞출 얼굴로 의외기도 하지.

"나도 너랑 같아. 괴이가 된 시점에서 가망성 따윈 없겠지. 하지만 만일, 정말 아주 희박한 확률이라도 그 사람이 죄의식이란 걸 느낀다면....."

"용서해주자고?"

"아니."

그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심의 밤은 인공의 빛에 물들어, 별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반쯤 기운 달만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디디고 선 인간을 바라보는 경적소리에 시끌거리는 거리에서. 인간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내려다보는 밤하늘 아래에서.

"용서할 수 없지. 유가족이 있는 판에 용서 운운을 내가 꺼낼 노릇도 아니고. 단지......."

그 때였다.

"지혜 씨! 준혁 씨!"

연합원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늦으니 데리러 온 것 같다. 양지혜와 신준혁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괴이 세계에 비공식 수색이라도 나갔나 걱정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넨 그가 어서 가자며 재촉한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벌써 거하게 한 잔 돌린 것 같았다.

"가자. 우리 먹을 것도 없겠다."

양지혜가 신준혁의 손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시뻘게진 그의 얼굴을 알 리 없는 양지혜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빨간 간판에 촌스러운 글자로 번쩍대는 삼겹살 전문점이 코앞이었다. 센스가 있느니 없느니 해도 저걸 보니 괜히 허기가 지긴 했다. 하기사, 한국인치고 삼겹살 싫어하는 사람 없기도 하다.

괴이현상에도 사라지지 않은 한국인의 피에 속으로 혀를 내두른 양지혜가 신준혁을 향해 말했다.

"네가 뭐라 말할 건지 알 것 같네."

양지혜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너는 가끔 지나치게 다정한 면이 있어."

"무, 뭐?"

거리가 시끄럽다. 반쪽짜리 달만이 둥실 뜬 밤하늘 아래, 인간들의 생기가 가득한 도시였다. 술주정 부리는 아저씨, 재잘대는 대학생 무리, 시끄럽게 싸우는 부부, 차 경적소리, 가게 곳곳에서 들려오는 귀 아픈 아이돌 최신 음악 같은 것들이 이곳이 사람의 세상 임을 증명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언젠간 잃어버린 사람들과 함께 돌아와야 할 세상.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나 보지."

정말로 조용히 중얼거린 그 말을, 신준혁은 과연 들었을까.

글쎄. 들었어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지혜에게 지금 연애할 정신머리 따윈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언젠간 미래에, 양지혜는 이 사람의 거리를 다시 한번 신준혁과 걸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잃어버린 사람들을 되찾은, 아주 희망적인 미래에서.

그랬다. 양지혜는 그에게 마음이 있었다.

한 없이 가벼이 굴면서, 사람의 목숨이 경중에 달렸을 때는 누구보다 슬퍼하고 진지해지는 사람. 저 또한 죽기를 무서워하면서도, 끝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 멈춰 서지 않은 결의와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다정한 사람.

그 다정함에 빠져들었던 거겠지.

너는 그런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널 용서하지 못했다. 내가 소중한 사람을, 나에게 선물한다는 핑계로 죽여버린 정신 나간 놈 따위 내가 알던 네가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15명의 사람을 죽여버리고도 제가 뭔 짓을 했는지 모르는 정신 나간 놈은, 신준혁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너는 12차 수색 인형의 집, 그곳에서 죽었다.

그 사실을 몇 번이나 되새겼는지. 저것은 내가 사랑하는 신준혁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는지. 그 신준혁이, 끝끝내 살아서 내게 돌아오겠다고, 생에 집착하여 전락한 결과가 저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를 인정하지 못했다.

나를 구하고 사랑했던 네가,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전락한 너마저도, 너였지. 그 찌꺼기마저도 너였다. 그래. 나는 네가 신준혁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끝끝내 나에게 돌아와, 무고한 15명을 죽이고, 내 언니를 죽인 반지로,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버린 괴물.

오로지 나를 위해 남겨둔 인간성 하나만이 티끌처럼 남았던 너에게 이별을 고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너였다면, 내가 인간으로 남길 원했을 테니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거기 있지?"

고요하다.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애초에 이 병실은 양지혜 혼자 쓰는 1인실이었다. 방문객은 고사하고 의사, 간호사조차 오지 않는다. 할 일을 끝마친 그들이 제자리에 돌아간 지도 한참.

대답없는 정적을 향해 양지혜가 픽 웃었다.

"아닌 척하긴."

늙어서 찾아온 여유에 몸을 기댄다. 사실, 실제로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양지혜의 목숨은 이제 곧 끝난다. 스물일곱에 유예받은 명이 드디어 마감할 때였다.

바쁘게 살아온 삶이었다. 양지혜는 지독하게 오래 살았다. 아흔을 넘긴 나이의 그녀가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주변인은 모두 떠나보낸 후였다. 심지어 돌봐주던 준희마저도 그녀가 장례를 치렀다. 비슷하게 오래 산 놈 이어봐야 고지헌 놈이 다였다.

아파서 죽은 사람, 사고로 죽은 사람, 결국 괴이 세계에서 명을 달리 한 사람, 그리고 잠들듯 조용히 죽은 사람.

그 모두가 각각의 끝을 맞이하는 걸 지켜보며, 양지혜는 자신도 언젠가는 저런 차례가 오겠거니 생각했다. 늙어감에 따라 죽음에 담담해지는 여타 다른 이들처럼, 양지혜도 인간의 순리를 닮아간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나의 삶을 충실히, 살았는가를 계속해서 묻게 되는 거다. 그러자면 과거를 되짚어야 한다. 나의 추억을 되새긴다. 그리고 그 추억의 끝에는 결국 신준혁이라는 존재에 다다른다.

그렇기에 양지혜는 신준혁을 떠올린다. 벌써 머나먼 옛날이 된 일이었음에도, 양지혜는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찬란했던 기억이다. 돌이킬 수 없기에 빛나는 한 때의 아름다움이다. 영원히 바래지 않을 그 순간. 곱씹을수록 차곡차곡 쌓여가 손상되지 않을 저 하늘의 별처럼 무한히 반짝일, 양지혜만의 보석.

"나는 나의 삶을 후회하지 않아. 아무렴, 누가 준 목숨인데 허투루 쓸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어."

늙은 양지혜에게 신준혁은 이미 그런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준 삶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의무가 존재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 것. 후회할 일은 남기지 않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

"난 행복했어. 좋은 인생이었지.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도 많았고, 난 언제나 나에게 당당했어. 이따금 슬플 일, 괴로운 일이 없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이겨냈지. 그러니까, 평범하게 살았다는 말이야."

목소리에 조금씩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든다. 병실에 있던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양지혜는 그간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 노화된 육체 탓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숨 헐떡임 한번 없이 기운이 났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양지혜는 지금 이 순간, 스물일곱의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나의 반짝이던 모든 것들이 존재했던 비극의 시간으로.

"인간을 이루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었지, 우리."

인간이란 무엇인가.

괴이 수색을 하며 우리들은 이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늘 품고 살아왔다. 인간. 인간의 정의.

사람이 사람이 되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양지혜는 그것을 다정함이라 일컬었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을 배려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이상적인 이타심이 조금이라도 가진 자가 사람의 자격을 지닌다.

그리고 그 다정함이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뜻한다.

"살인을 한 자가 인간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야. 다른 이의 고통을 모르기에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거든. 그러니 누군가를 해한 순간, 인간의 자격이 박탈되는 거지."

그러한 자는 영원히 겉도는 삶을 살며, 인간의 세계로 편입될 자격이 암묵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양지혜는 이것에서 괴이의 정의를 내렸다. 사람을 식용으로 보고, 해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정신 나간 무리들. 그것이 설령 인간이었던 존재였을지언정, 인간의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종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은 또한 반성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잖아."

반성. 그랬다. 반성이었다.

"전락했든 무엇이든, 자신의 죄를 직시할 수 있는 자. 죄를 바라봄과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입혔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자. 나의 행동이, 누군가의 절망을 만들어냈음을 깨닫고 함께 괴로워할 수 있는 자."

그것은 괴이가 되지 않은 인간조차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니 양지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너는 나의 언니인 양지은 양을 포함해 총 16인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그 이후 수색에 나선 연합원들 몇을 추가로 더 죽인 죄인이지."

베게에 푹 파묻힌 고개를 돌린다. 입꼬리에 미소가 걸린다. 그 곳에 존재하는 멀대같이 키가 큰, 은색 반 가면을 쓴 사내를 올려다본다.

"그것이 자신의 죄인지조차 모르는 죄인."

그것이 신준혁이 괴이로 전락한 이유였다. 양지혜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정물처럼 자신을 내려보는 사내를 응시했다.

가면으로 가린 쪽의 얼굴은 매끈하고 아름다운 쪽.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갈아버린 형태 없는 얼굴을 보면서도, 양지혜는 그가 그 시절과는 조금도 달라짐이 없음을 알았다.

양지혜에게 '이 존재'에 대한 믿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그가 결코 자신만은 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에 고착화되어버린 괴이였으니까.

"나는 죄인을 사랑할 수 없어. 나의 가족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 없어. 그것이 죄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자를, 감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 담담한 말에, 증오 한 톨 묻지 않은 전언은 지나치게 차다.

"아니. 용서하더라도 너의 죄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것이 옳다. 용서할지언정 죄가 사라지는가?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가? 양지혜가, 전락해버린 그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삶의 끝에 와서도 양지혜는 그것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렴풋이, 아마 그런 것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용서따위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런 자에게 감히 내가 사랑하는 자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거야."

그것이 네가 신준혁이 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너는 끝끝내 다정함을 버리지 못해 나를 떠나갔고, 또 다정함을 버리지 못해 내 주변을 맴돈다. 영원히 나를 떠났으면서,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양지혜는 그가 그 어떤 인간도, 그 이후에 해치지 않았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르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당당하게 인간의 삶을 살았다.

마치 네가 본래 기거해야 할 곳은 이 세계라고 주장하듯이, 평생에 걸쳐 살아남았다.

그것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내가 무엇을 해야......."

주름하나 지지 않은 매끈한 손이, 그의 나머지 가려진 가면을 벗겨낸다. 아, 그곳에는 그리운 그 얼굴. 서글서글 웃으면 보기 좋은 눈꼬리가 처지는, 한 쪽을 영원히 잃어버린 네가 우는 눈이, 나를 본다.

영원히 그 시절에 박제되어 성장하지 못한, 네가 그곳에 있다.

목이 막힌 듯 숨을 삼킨 그 녀석이 나에게,

".......너의 세계에 함께할 수 있는 건데?"

미래를 묻는다.

양지혜는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으로, 그 희망으로 살아왔고, 이제 죽을 수 있다.

왼쪽 손을 든다. 약지가 사라진 그곳에는 여전히 반지 낀 스물일곱의 손가락이 존재한다. 그가 허리를 숙인다. 경건한 것을 취하듯 무릎을 꿇는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이마를 찍는다.

"죄를 바라보고."

그의 가슴을,

"그 죄를 깨달으며."

그의 왼쪽 어깨를 찍는다.


"그 죄책감에 빠져 영원히 몸부림 쳐야 해."

그리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찍으며 말한다.

"그렇게 사람이 되는 거야."

한 쪽만 남은, 그의 손을 잡는다. 그때와 똑같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그녀의 발에 은구두를 신겨주었던 손이었다.

그의 손을 감싸며, 함께 합장한다.

"사람의 마음을 되찾게 되면, 보는 하늘이 다를지언정 사람의 세계에 함께 살게 될지니."

그가 우는 것을 바라보는 양지혜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창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었다. 때가 다가와 져내려 가는 목숨 앞에서도 빛나기를 멈추지 않는 저 하늘, 인간의 시선에서 끝없이 불멸하는 별의 영원한 반짝임이다.

"그렇게 되면, 용서하지 못해도, 죄가 사라지지 않아도, 결국 증오는 남을지언정, 같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어."

양지혜는 잘 살았다. 살아온 것에 후회 한 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니 이것은 그녀의 후회 따위가 아니다.

"이게 바로 당신의 그분의 소망이야."

언제 어느 때가 되어도 상관없다. 10년이든, 100년이든, 설령 이 행성이 멸망하는 순간이 되어서라도.

"인간의 세계로 돌아와."

그러면 그 순간부터 너의 마음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너에게 내 이름을 말해줄 테니.

"그때가 되는 순간에, 육신이 저물지언정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제서야 마지막 순간 쏟아부은 기력이 사라지듯, 양지혜의 손이 툭 떨어졌다. 축 늘어진 그녀의 왼손을, 그가 하나 남은 손으로 받쳐 든다.

사라진 약지는 여전히 그의 품에 존재했다. 반지 또한 여전하다.

품에서 꺼낸 약지를 그녀의 손, 빈 곳에 맞춘다. 미동조차 않는 손에 맞추어진 반지는 본래 그 자리에 존재했던 마냥 딱 들어맞았으며, 그녀와 어울리지 않은 듯도 보였다.

그렇게 맞춘 손을 받쳐 그 경계에 입을 맞춘다.

"응. 그럴게 지혜야. 돌아갈게. 사람의 세계로, 돌아갈게."

다정함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약간의 장난기가 있던, 잃어버린 인간의 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타인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아끼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졌던,

네가 사랑했던 나를 ─.

네가 신준혁이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나를 되찾아야 하겠지.

스물여덟에 삶이 멈춰버린 자였다. 그는 그때와 정말로 한 점 달라짐 없이, 그 시절에 고여버린 이였다. 사랑밖에 그를 움직일 동기가 없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고, 한 발짝 씩 내딛게 된다면.

그 어느 날 언젠가는 그 또한 사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육신에 얽매이지 않고,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영혼과 영혼으로 알 수 있는 인간의 정의란.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알고,

타인을 향한 다정함을 알아야 하며,

그리고 미래로 나아갈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인간이 된 자에게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사랑이란, 그 모든 것들을 아는 자야만이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기에.

장례가 치러졌다.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하나가 희미하게 자리한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서, 괴물은 그 비석 아래에 꽃다발을 내려놓는다.

화사한 장미 꽃다발이다. 결코 시들지 않을 누군가의 웃음과 같은 영원함을 닮은 것이다.

괴물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뉘인 묘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그는 아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기에. 자격이 없으니까.

자신의 죄를 깨닫기 위해 그는 그것을 뒤로했다.

하늘 위 태양이 따사로이 그의 머리를 비춘다. 괴물은 저도 모르게 하나 남은 손바닥으로, 그 생명 근원의 빛을 가린다. 손가락 사이를 비추는 그 빛에서, 괴물은 누군가의 손을 떠올린다.

그의 눈에 언제까지고 아름다운, 다정한 사람의 손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 그의 세계로 향한다.

사람의 길을 걷기 위해, 괴물은 발걸음을 뗀다.

Proverbs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단 금액은 단순 후원입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