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세계

초라한 사랑의 말로

소래 느티나무 성당 수색 지침서 9-3.

괴이현상 실종자수색연합 / 신준혁 × 양지혜
원작과 외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급적 외전을 전부 읽으신 후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C)떨리고설레다 2023


초라한

사랑의

말로

.

.

씨발.

지침서의 9-3번 항목을 떠올린 순간 양지혜는 생각했다.

씨발 이거 좆됐다.

그렇게 달달 외우고 들어온 지침인데 왜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다른 것과는 달리, 제가 도저히 잊을 수 있는 항목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연애와 연관지을 만한 화제가 나왔다면, 너무 늦기 전에 "당신의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마땅히 기억해야 할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 소래 느티나무 성당에서 해당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는 보고는 없었으니, 아마 정신 오염의 일종일 확률이 높았다. 정신 오염…. 양지혜는 괴이의 세계를 유독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남자를 기억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의 얼굴을 인식하고 그들의 음식에서 그들과 똑같은 맛을 느끼던 수색자. 그저 독특한 사람이라고만 여겼던 특징이, 사실은 무시해도 좋을 것이 아니었음을 양지혜는 이제 알았다.

그러니 돌아가면 검사를 좀 받는 것이 좋겠다. 양지혜는 눈을 감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정신이 지속적으로 오염되면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았다. 그러니까, 괴이의 세계에 오래 노출된 인간의 말로를 보았다. 저 또한 이상세계를 넘나든 짬밥은 그들 못지않으니,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느니 양지혜는 차라리 죽을 것이다.

"가영 씨는 좋아하는 사람, 이 있으시다고 했죠."

사제가 다시 말을 걸었다. 했죠오, 하고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물었고 윤가영이라는 가명을 쓰는 양지혜는 저도 모르게 그렇다 답한 차였다. 양지혜는 눈을 떴다. 말을 꺼낼 적절한 시기는 지났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당신의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

항목 9-3에서 대처가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면, 그는 귀하가 무슨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자는 역시나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굴었다. 싸가지 없기는, 잃어버린 것이 양 귀가 아니라 한쪽 눈과 한쪽 팔임을 모두가 아는데. 양지혜는 쯧, 하고 속으로 혀를 한번 찼다. 더는 잘못하지 않도록 지침서의 나머지 내용을 빠르게 복기했다. 그 다음 내용은, 정신이 좀 나갈 것 같긴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해는 안 된다는 거였지. 그래도 치명적인 실수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양지혜는 둥그런 테이블 너머 검은 사제복의 남자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적당히 봐 줄 만한 외모는 얼굴의 반절뿐이고, 나머지는 무늬 없이 매끈한 은가면을 써서 가렸다. 양지혜는 가면 아래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피부가 불길에 녹아서 엉겨붙고 이목구비가 죄다 일그러진 살덩어리를 본 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직은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무렵, 눈알이 사라지고 텅 빈 눈구멍을 머쓱하게 손으로 가리던 때를 기억해서도 아니었다. 그때 그 인형의 집에서 신준혁의 눈에는 피가 고여 있을지언정 양지혜를 겁먹게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성당 고해실에 앉은 이것은, 양지혜는 차마 그 모습을 떠올리기조차 무서워 숨을 골랐다. 심장이 새끼손가락 끝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열기에 녹고 일그러져 본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얼굴까지는 괜찮았다. 해피 에브리데이 마트나 제이엘티코리아나, 하여튼 다른 데에서 비슷한 것은 자주 봤으니까. 대신 양지혜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한가운데였다. 얼굴 반쪽에 홀로 뻥 뚫린 눈구멍과 속을 그득 메운 끝없는 심연. 

그래 괴이의 눈구덩이에 가득 담긴 어둠이 양지혜는 두려웠다.

"궁금하네요, 신도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어떤 사람인지 제게도 설명해 주시겠어요, 신준혁의 얼굴을 한 괴이가 요구했고 양지혜는 그를 신준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부던히도 노력했다. 고지헌은 빛바래지 않는 사랑을 대장이라고 불렀고 은가면의 사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 없이 사는 모습이 양지혜는 때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저도 고지헌처럼 그냥 보이는 대로 일컬을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빛바래지 않는 사랑은 이태호, 은가면의 사제는 신준혁,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하지만 애석하게도 양지혜는 녀석 같은 부류가 아니었고, 두 개의 다른 알맹이를 고작 같은 껍데기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이름으로 칭할 수 없었다.

"신도님?"

"제가 좋아하는 사람, 이요…."

침묵이 조금 길다고 느꼈는지 그것이 재촉하듯 되물어 왔다. 양지혜는 문득 궁금해졌다. 여기서 힌트를 주면 이것은 '윤가영'의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할까. 찾아가서 죽일까, 팔다리를 떼어내고 얼굴은 몽땅 갈아 버릴까. 양지혜가 일그러진 얼굴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녀의 눈이 더는 그 남자에게 향하지 못하도록. 아니면 이상한 세계로 데려가 영영 가두어 둘까. 진입 방식이 알려진 곳 외의 공간에 집어넣으면 양지혜도 수색연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의 세 글자 이름을 알려 주면, 그러니까 한때 제가 썼던 세 음절의 호칭을 양지혜의 얼굴을 한 '윤가영'의 입에서 들으면 신준혁의 가죽을 뒤집어쓴 이 괴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양지혜는 그것의 한쪽짜리 눈을 바라보며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그 사람은 저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요."

9-1.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가시되,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양지혜가 사랑했던 신준혁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온전히 사실이다. 남은 것은 존재의 찌꺼기뿐이므로 양지혜가 원하는 방식의 받아들임이 못 된다. 그러면서 슬쩍 사제의 목 위를 올려다볼 때 반쪽짜리 얼굴에 스쳐지나간 순간의 감정이 복잡미묘했다. 양지혜가 느끼기에는, 감히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음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어 안도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가요."

소래 느티나무 성당 고해성사실을 수색하는 대원은 누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내밀한 속마음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화제가 연애 쪽으로 전환되면 그 법칙은 조금 힘을 잃는 듯했다. 뭔가를 숨기는 방식으로 대답해 버려, 혹여나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양지혜의 뒤늦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것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좀 설명해 드릴까요, 하고 사제가 운을 떼는데. 이어지는 말에 양지혜는 차라리 귀를 막고 크게 소리를 질러서 그의 목소리를 차단하고만 싶었다. 그러다 저것의 심기를 거슬러 영영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이 순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결말마저 기껍겠다. 그러나 양지혜는 이대로 현실에서 도망치기에는 지나치게 강인했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내던지기에는 너무 나약하지 못했다. 양지혜는 가만히 앉아 그것의 하소연을 경청했다. 간간히 추임새도 넣으면서, 목구멍까지 차오른 괴로움은 허벅지를 찔러 나오는 비명과 함께 눌러 삼켰다.

그것이 묘사하는 여자는 천상의 존재마냥 아름답고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고귀하고 보고 있자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신준혁의 눈에 제가 정말 저렇게 비쳤을까. 양지혜는 문득 회의감을 느꼈다. 그녀는 매우 객관적인 편이었으므로, 실제 신준혁은 저를 저렇게까지 여기지 않았으리라고 믿었다. 양지혜는 그렇게까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것은 분명 애정의 조각만이 남아 비틀리고 뒤틀려 변모한, 낡아빠진 집착에 불과하다. 신준혁의 찌꺼기가 사랑하는 대상은 양지혜의 환상…. 그러니 저것이 사모한다 말하는 이는 결국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인간의 불완전한 인지로는 둘을 같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탓에. 신준혁의 얼굴을 한 괴이가 마디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양지혜는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전신을 찔러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온갖 주접이 덧칠된 이야기는 양지혜가 기억하는 순서와는 조금 달랐다. 신준혁의 수려한 말빨을 그대로 가져왔는지 퍽 들어줄 만했으나, 그것만이 대화의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사이사이에 튀어나오는 이름이,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하나뿐인 개암색 눈동자가, 아니 이 시간과 공간과 분위기의 모든 것이 사방에서 누르고 들어와 양지혜는 숨이 막혔다. 빠져나올 길 없는 깊은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울컥울컥 폐에 물이 들어차고 콧구멍으로까지 흘러나와 코끝이 시리고 아팠다.

좋아해.

아니야.

네가 너무 좋아.

입 다물어.

저것은 신준혁이 아니고, 저것이 사랑하는 이 또한 양지혜가 아니다…. 그러나 양지혜는 여전히 인간인 탓에, 부정확한 인지에 굴복해 버리고선 비참한 기분에 한껏 젖어들어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픈 충동에 몸서리친다.

좋아해요.

나는 네가 정말 싫어. 당장이라도, 너를 가져다가, 내 눈 앞에 세워 두고, 두번 다시 그 입을 열지 못하게 산산조각으로 찢어 죽이고 싶어.

너를, 당장, 내 눈 앞에….

지혜야, 사랑해.

지혜야….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의, 아직도 저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다.

"지혜야, 그러니까, 너를 정말정말 좋아해."

"죄송하지만, 저는 지혜가 아니라 윤가영이에요."

한때 사랑했던 이의 찌꺼기에게조차,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도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