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ocent promise
불쾌한 모노노케안 44화 으깬 수박 中
「이츠키이-!」
귀신 들린 마냥 풍경이 앞뒤로 마구 흔들리며 열렬한 소리를 냈다. 평소의 듣기 좋은 낭랑한 청음은 어디로 갔는지, 땡땡땡땡, 콕콕 쪼이는 고막보다도 풍경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폭음이었다. 아시야는 입을 꾹 다물고 아베노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베노도 답지 않게 기가 눌린 채 족자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리려고 했으나 덮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빨강. 거칠게 일어난 피부와 그 위로 번지는 피가 선명했다. 그 자세가 편한 것인지 아니면 반성의 의미인지, 아베노는 모노노케안이 우다다 쏟아내는 강렬한 문자 속에서도 태연히 정좌를 유지했다.
「은세의 문을 ‘두 번째’로 열 때는!! 안전 확인부터 해야죠! 확인을 소홀히 하니까 다치는 거잖아요!!」
모노노케안에게 손이 있었다면 아베노의 얼굴을 붙잡아 이리저리 돌려 뜯어봤을 법한, 걱정과 노기가 가득 서린 말투였다. 아시야가 아베노를 감싸려 했다면 모노노케안은 아시야마저 무릎 꿇게 하고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변호는커녕 모노노케안이 혼내지 않았더라면 그가 대신 아베노를 추궁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숨긴 거예요?” 묻는다면 평소에는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멱살을 잡을 주인이라도 이런 때마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을 터였다.
오히려 불쾌한 사람은 아시야였다.
아니, 불쾌하지는 않았다.
서운함? 화? 아쉬움?
아시야는 자신이 아는 단어를 골라봐도 어느 것 하나 들어맞지 않았다. 말로는 정의하지 못하는 감정이 밤바다에 일렁거리는 파도처럼 마음속 가득 들이쳤다.
하지만 아시야가 굳이 묻지 않았던 것은, 아베노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언제나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아시야는 모노노케안의 고용인이라 자칭하기엔 미숙했으며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베노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으리라 추측하며 뭉근하게 응어리진 감정을 삭였다. 아베노가 말하지 않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 선택이었으니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이 고용인. 아시야는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내일이면 조금 어색하긴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아베노에게 인사하려고 했다. 니지리구치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그럴 생각이었다. 갈게요, 라며 니지리구치로 머리를 꺼내려던 그 순간에,
“고맙다.”
그 한 마디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묵직한 저음이 잠에 취해 더욱 나른하고 낮았다. 졸음을 못 버텨 벽에 몸을 기대고 있으면서도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아시야에게는 그 모습이 참으로 다정하고 평범하게 비쳤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불쑥, 그러면서도 아주 담담하게,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다른 의뢰가 있다는 걸 일부러 숨긴 거죠?”
추궁하려거나 탓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유를 들을 생각은 없었다. 무리해서까지 캐내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숨겼다’ 혹은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베노는 꾸중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시야를 쳐다보려는 듯했으나 시선은 아시야의 발치에만 머무를 뿐이었다.
“은세로 보내기만 하면 끝나는 의뢰라 굳이 널 부를 필요가 없었어. …다만 이 의뢰는 ‘행정’을 통해서 들어온 거라서 안 부른 거야.”
아베노는,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야, 변명하듯 덧붙이며 시선을 돌렸다.
고용인이 된 지 3개월. 길지는 않지만, 결코 짧지도 않았다. 아시야는 아베노가 한 말이 변명이고 거짓말임을 알았다. 아베노로 변신한 야히코를 간파해냈듯이,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쉬웠다. 아베노의 거짓말은 부자연스럽고 당당하지 않았다. 아베노가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아시야가 묻지 않았더라면 평생 은폐할 작정임이 틀림없었다.
행정. 아시야는 그 이름을 들으면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죽을지 모른다는, 그것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기억 깊게 새겨져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커다란 요괴를 보면 몸이 얼어붙었다. 까만 새를 보면 현기증이 나고 식은땀이 날 정도로 공포는 선명하게 각인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대신 아베노가 다쳤다.
타지 않은 하얀 피부와 샛노란 금발 때문에 뺨 위에 거칠게 할퀴어진 빨강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게다가 쏟아지는 수마가 버거워 통증을 뒤로 밀어두며 끔뻑거리는 눈. 그 밑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까지. 그것이 아시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시야는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니지리구치를 나왔다.
“하나에? 아베노는 괜찮아?”
젠코가 묻자 아시야는 으음, 뜸을 들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아베노는 괜찮았다. 뺨이 약간 쓸린 것뿐이었다. 본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괜찮지 않은 것은 아시야뿐이었다. 개지 않은 안개 같은 감정뿐이었다.
“구급차를 부를 만큼 다친 건 아냐.”
“그래?”
젠코는 안심했다는 듯, 표정이 옅은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응?”
젠코가 한 말에 아시야가 되물었다. 머릿속에 성냥불이 켜진 것만 같았다. 아주 작지만, 손을 댄다면 화상을 입을 만한 온도를 확실하게 품고 있는. 멀리 뻗어 있는 어둠을 걷어내지는 못해도 손에 닿는 가장자리를 인지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아시야는 젠코의 한 마디를 듣고서야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을 다치지 않아서 말이야.”
아, 그렇구나.
어두운 방에 불을 켜듯이, 바로 그 순간, 아시야는 그제야 몸속에 똬리를 틀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안도와 표리일체로 성립하는 불안이었다.
어두워서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아 뺨이 긁혔을 뿐이지만, 그건 단지 이번에만 한정된 이야기였다.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번’이라는 것은 단 한 번뿐이다. 아시야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을 비껴간 불행은 다음번을 기약하며 잊고 있을 즈음 갑작스레 닥친다는 사실을.
마치 세 살 때 한 번 나타나고는 한 순간에 실종된 아버지처럼.
아베노에게 ‘이번’은 가벼운 찰과상으로 끝났으나, 다음번에는 다리를 접질리거나 피가 많이 나거나, 더 나아가서는 이마를 찧거나 눈이 찔릴지도 모른다. 문을 두 번 연 아베노는 크게 다쳐도 스스로 수습할 능력이 없다. 언젠가 ‘다음번’에, 문을 두 번 열어 크게 다치고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그대로 쓰러져 눈을 감고, 혼자 뭍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 죽어가는 아베노를 생각하면…….
어쩌면 흔적이 남을지도 모를 뺨의 상처와, 그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 자신을 위해 혼자 무리했던 다정함, ‘이번’을 작은 상처만으로 넘겼다는 안도, 그 모든 것이 몽글몽글 뭉쳐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하나에…?”
젠코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소매로 눈가를 아무리 문질러도 눈물이 멎지 않았다.
“젠코….”
“응, 하나에.”
“아베노 씨는,”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시야는 꿋꿋하게, 말을 끝맺었다.
“아베노 씨는…… 좋은 사람이야.”
“알고 있어.”
젠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걸 알아주는 하나에도 좋은 사람이니까.”
다음 날, 아베노의 뺨에는 반창고가 붙었다. 험악한 인상 때문인지 얼굴에 붙은 반창고는 무척 어울렸다. 아베노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어젯밤에 다른 조직과 싸우다 다친 깡패라고 생각할 법했다. 눈 부신 햇살 때문에 마구 찡그린 표정까지 더해져, 아베노의 얼굴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의 외면과 다르게 놀이터는 한적했고 평화로웠다. 어린아이들이 수박을 향해 다가가며 와글와글 떠들었고, 북실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미끄럼틀을 내려오고, 아시야는 따듯하게 데워진 미끄럼틀에 기대어 누웠다. 수박을 아주 으깨버릴 거예요, 으깨면 그냥 수분이 되잖아, 과즙 100%의 씨 들어간 주스가 되겠죠, 따위의 영양가 없는 잡담이나 나누면서. 주거니 받거니 단막극이 아베노의 한숨으로 끝나자 정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둘 사이를 지나쳤다. 아베노는 그것을 내쫓으려는 듯 말했다.
“참, 오이스케 님이 고맙다고 전해달라더군. “몸을 내던져 감싸준 덕분이다”라고.”
아시야는 무참하게 산산 조각난 조개껍데기를 겨우 상상에서 몰아내며 대답했다.
“그랬어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뛸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내가 막지 않았다면 아베노 씨가 몸으로 감쌌을 거잖아요?”
확! 하고 아시야가 두 팔을 펼쳤다. 아베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방안은 계산에 넣지 않았거든?”
아시야도 알고 있었다. 아베노라면 자신처럼 그렇게 요란하게 두 팔을 펼치지도 날아 차기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하지만 분명히.
“머리 한구석에 있었죠?”
또 다칠지도 모르는, 그럼에도 그 상처를 응당 제 것인 양 당연히 여기는, 이기적인 방식이.
“…….”
아베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시야는 그의 꾹 다문 입술이 어떤 말을 쏟아낼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며 발을 들어 걷어찰지도 모른다. 척추와 함께 접어버린다는 말보다 더 심한 폭언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시야는 알고 있었다.
모노노케안의 2대 주인은 너무나 다정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또 눈앞에서 다친다고 생각하니 오싹했어요.”
아베노는 어젯밤처럼 시선을 굴리며 모른척했다. 아시야는, 이번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진 따스한 호의를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 행정님한테서 의뢰가 오면 나에게도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어제는 가벼운 찰과상으로 끝났으나, 다음번에는 다리를 접질리거나 피가 많이 나거나 심하게는 이마를 찧거나 눈이 찔릴지도 모른다. 그럼 아시야는 아베노를 부축하거나 지혈하거나, 아니, 그보다도 더 전에 그가 쓰러질 때면 잡아주리라, 상처 하나 나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꽉 잡아주리라 다짐했다.
아베노가 아시야를 위해 의뢰를 숨기고, 문을 두 번 열어 크게 다치고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그대로 쓰러져, 눈을 감고 그렇게 혼자 죽어가는, 그런 슬픈 ‘다음번’은 찾아오지 않는다.
여전히 표정 없는 금안과 눈을 맞추고, 그 속에 담겨 있을 다정함을 또렷이 응시하며, 아시야가 마침내 말했다.
“아베노 씨가 또 무리를 해도 구명줄만큼은 내가 사수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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