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현

12558자

絶弦

시위를 끊다

조호 원년. 쏜 살이 과녁의 한 가운데에 명중했다. 

정월. 조궁의 젊은 후계자가 창상만궁을 물려받았다는 소식은 사흘이 채 되기도 전에 경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음양료의 한가로운 이들은 술잔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안주 삼아 그의 미래를 점쳤고, 청운과 백송 사이 닦여 놓인 도원로만을 골라 걷는 청년의 앞날을 정히 그린 듯이 예언했다. 삼라만상을 꿰뚫는 육안이라지. 원귀도 식신도 단번에 쏘아 죽이는 혼멸의 신궁이라지. 무엇이 두려우랴. 무엇이 고되랴. 전정만리요, 창창소년이라. 화복과 길흉이 모두 손안의 꽃이로구나.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구슬처럼 맑았다. 

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궁장(弓匠) 에조노 요리토모가 도호쿠 지방 히라가타케에서만 자란다는 푸른 상수리나무를 발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그 상서로운 나무에서도 푸른빛과 금빛이 함께 도는 창금가지는 십 년에 한 번 나는 수준으로 드물었는데, 에조노는 꼬박 오십년을 들여 기어코 창금가지 다섯 개를 꺾어 모았다고 한다. 그가 그리도 귀한 나무로 심과 혈을 다해 빚어낸 것이 바로 세기의 명궁 창상만궁이다. 

창상만궁에 얽힌 설화는 한둘이 아니지만 개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것이 수라왕의 혼을 꿰뚫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격으로 따지자면 상중상이요, 위엄으로 헤아려도 그 위에 설 이가 손에 꼽게 드물 주저왕조차 살에 맞은 후에는 그 자리에서 재로 화하여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혼이 꿰뚫려서야 내생을 바랄 수도 사후를 도모할 수도 없으니 육신 뿐만 아니라 혼 까지 멸하는 명궁의 존재는 무릇 령을 가진 것들이라면 마땅히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한 위력과 내력을 가진 신궁이 젠인노미야의 당주에게까지 흘러든 역사는 이제 와서는 정확히 기록된 바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젠인노미야로 말할 것 같으면 음양료의 제일 대신인 음양두 직을 대대손손 물려받던 집안이니, 모두가 창상만궁의 소유자로서 부족함이 없노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혼을 멸하는 신궁이니 음양료 필두의 손에 쥐어졌을 적에 그 위용과 권세가 가장 빛나 보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옛이든 지금이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한 뻔한 것인데,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본디 젠인노미야의 소유였던 창상만궁은 어느샌가 음양두가 지니는 귀보로서 취급되기 시작했다. 벌써 몇 대 째 젠인노미야에서 출사한 이들이 음양두 직을 맡고 있었으니 수중의 구분이 흐릿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음양두 자리에 올랐음에도 활의 시위를 제대로 매기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궁은 귀한 만큼이나 까다로와서, 단순히 쥐고 당기는 힘 만으로는 시위를 매길 수 없었다. 오직 혼의 모양새가 온당하게 다듬어진 이들만이 시위를 당길 수 있었으므로 세 대 째 활이 주물고에 걸려만 있게 된 것은 젠인노미야의 수치일 수 밖에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었으니, 창상만궁이 점차 음양두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새삼스럽게 수중의 권리를 주장하여 스스로의 수치를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던 젠인노미야 사람들은 금상(今上)에게 궁을 진상했고, 당시의 섭정이던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는 활의 시위를 어엿히 매길 수 있는 자가 나타날 때 까지만 조정이 맡아두겠노라는 말로 귀보의 소유권을 갈음했다. 세기의 명궁이 반천년은 썩어 묵겠구나. 젠인노미야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궁이 주인을 찾은 것은 불과 30여년이 지난 후였다. 조궁의 후계자인 고죠 사토루가 태손의 탄일을 맞아 입궐하여 우연히 궁을 잡아본 일로 인함이었다. 태손의 권유로 궁을 잡은 젊은 후계자는 마치 비파의 현을 뜯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시위를 당겼고, 시위가 손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평안궁 내의 모든 종이 세차게 흔들렸다. 궁이 떠나갈 듯이 종소리가 울렸다.

파란이자 경종이요, 시대를 넘는 조종(弔鐘)이었다. 

고죠 사토루가 시위를 당긴 지 닷새 만에, 태정대신의 대리인이 조궁에 찾아와 젊은 후계에게 창상만궁을 내린다는 선지(宣旨)를 읽었다. 조아리고 받으매, 모두가 그의 창성과 젠인노미야의 쇠잔을 예측했다. 

물론 그간 젠인노미야에서 인재가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위를 당길만한 자질을 보였던 두 사람 중 하나는 가문에서 쫓겨나 젠인노미야라는 성 조차 쓰지 아니하며, 하나는 가문을 스스로 버려 야인을 자처하였는지라 음양두 자리는 언감생심이요, 후보로 거론되기조차 어려웠다. 이러한 사정이었으니 젠인노미야가 활을 단념하는 것도 완전히 이치에 어긋나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활의 소유자가 다음 대의 음양두로 내정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형국이어서야 그들이 창상만궁을 쉽사리 포기할 리도 없었다. 세상만사가 모두 짚을 낫으로 베듯 단번에 자르고 묶을 수 있는 것이었더라면 사바세계가 이리 분잡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리하여 정월 말일. 조궁의 다실에 음양료 이등관이 방문하였다. 

“나니와의 시텐노지에는 눈꽃이 한창이라지요. 내주 비가 쏟아지면 겨울 정취도 다 가실 터인데 걸음을 하시려거든 이른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음양두께서도 한가하신 모양이지? 입춘이 지나면 우수도 곧일 텐데, 춘분제 대비는 잘 되어가시나.”

“소주(小主)께서 곧 어엿한 자격을 얻으시어 조력하실 것인데 봄이 온다 한들 어느 주령이 두렵겠습니까.”

“자격이라면 이미 갖춘 줄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관문이 별도로 있었던 모양이네.”

“때로는 애틋한 밀어 백 마디 보다 옥지환 하나가 더욱 값진 법이지요.”

네가 정말 궁을 쥐었는지 시위를 당겼는지 궁 안 종소리만 듣고서는 정말로 알 도리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일천하에 자격증명을 하라는 말이었다. 결국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보겠다는 젠인노미야의 불미한 심산이었으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교활한 노친네들 같으니라고. 고죠는 속으로 웃고서, 손안에 든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대관절 나니와에 뭐가 있길래.”

이등관이 그린 듯이 미소 지었다.

“나니와의 이이모리산을 알고 계시는지요.”

“이름은 들어보았지.”

“시텐노지를 건너다보는 남쪽의 험산입니다. 가장 깊은 골짜기는 아직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지라고도 하지요. “

귀찮게도 서론이 길군 그래. 고죠가 다시 한번 웃었다.

“그 이이모리의 어느 봉우리에, 한 겨울에도 꽃이 피고 한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골짜기가 있다고 합니다. 잔예와 기운을 가늠해보았을 때 원신(怨神)의 소행이 아닐까 한다는 보고문을 받아보았지요.” 

“인근에서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었나?”

“그것은 아닙니다만, 시간의 이치를 초월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능력은 격으로 따지자면 주저왕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당장은 무해하다고 여겨질 지 몰라도 언제 돌변하여 사람을 해칠 지 모르는 일이니 더욱 두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나더러 제대로 시찰 조차 되지 않은 것을 상대하러 나니와까지 납시어라.”

“소주께서 지니신 주물은 혼 마저 꿰뚫는 것으로 알려진 천의무봉의 만궁입니다. 이이모리의 그것이 진실로 신의 격을 지닌 것이라면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등관이 모은 손 위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음양사란 족속들은 본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상대하는 자들이오나, 그 또한 어리석은 인간인지라 스스로 보지 못한 것을 오롯이 믿는 것이 고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뭇 사람들의 신망을 얻으시려거든, 몽매한 세간에 두려운 격위를 여지 없이 보이소서.”

세 번 울리는 종이 일몰을 알렸다.

고죠 사토루가 나니와로 떠난 것은 그로부터 이레 후였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바위틈에 피는 봄꽃의 진홍이 선명했다. 푸르게 돋아난 이끼 자국을 피해 걸음을 옮기자면 곧 물소리가 청명한 냇가를 마주쳤다. 두터운 구름 사이로 해가 드나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짧은 소나기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고죠는 옷깃을 끌어올렸다.

입산일로부터도 어느새 꼬박 엿새가 지났다. 준신의 격을 지닌 존재가 거처를 무방비하게 개방해 두었을 리가 없을 테니 탐색에 시간이 걸리리라는 것은 떠날 채비를 했을 적 부터 예상했던 바이나, 엿새째 같은 곳만 빙빙 돌고 있자니 속이 터졌다. 이등관의 말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고 보고문을 써 부쳤다는 시찰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니 이 파송 부터가 자신을 이이모리산에 산 채로 파묻으려는 젠인노미야를 비롯한 음양료 노인들의 속셈이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봄의 산에는 먹을 것이 많았고 이이모리는 황폐함과 거리가 먼 산인지라 생존에는 지장이 없었다. 원신이 산다는 소문과는 달리 해로운 기운이 맴돌거나 귀찮은 주령들이 따라붙는 법도 없었다. 산짐승들 쯤이야 당연히 문제 조차 되지 않았다. 해가 지면 불을 피우고 동굴 틈에 누워 눈을 감았다. 청정한 산이었다. 

이쯤 되니 춘일의 산행을 즐기러 온 듯도 싶었다. 보다 혹독한 계절이었더라면 애를 먹었을 테지만 춘분 지나 청명이 다가오는 시절이라 유채꽃 피어나는 뒷산에 올라 토끼를 쫓던 어릴 적이 떠오르기도 했다. 원신 따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노라고 큰소리를 치며 빈손으로 돌아간대도 손해는 아닐 듯했다. 음양료의 노인들이야 입방아를 찧어들 대겠지만은. 

열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지난 아흐레 간 입산한 길목을 기준으로 하여 세 방위를 살피었으니 남은 것은 그늘진 서쪽이었다. 나니와에서도 손꼽히는 험산이라던 말 답게 경사가 가파르고 산세가 거칠었다. 한 번의 실족이 그대로 절명으로 이어지리라. 비탈길을 오르는 걸음 아래로 돌 조각들이 굴러떨어졌다. 소리만 들어도 까마득했다. 

고개를 넘어 비교적 평탄한 어귀에 들어섰을 때 즈음이었다. 발 디딜 자리를 보려고 시선을 내리고 있었는데, 문득 눈앞에서 둥글고 긴 그림자가 기울었다. 고죠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이었다. 

아니, 반드시 사람이라는 법은 없었지만.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바위 위에 올라 앉은 남자가 턱을 괴고 이쪽을 내려다보면서 가만히 웃고 있었다. 

“첩첩산중에 새 객이라니 오랜만인걸. 길을 잃었나?”

키가 크고 선이 단정한 남자였다. 고죠는 천천히 남자의 용모를 뜯어보았다. 눈매가 얇고 낯빛은 고요했으며, 몸가짐은 호숫가에 부는 바람처럼 잠잠하고 호젓하였다. 풀어내린 머리에 차려입은 것은 재색 목면옷. 공가의 자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당신은?”

“보시다시피 평범한 산촌 사람이야.”

“이름을 묻는 거야.”

“아.” 

남자가 짧게 웃었다. 

“스구루라고 불러. 당신은?”

고죠라는 이름을 댈까 하다가 속으로 삼켰다. 섣불리 조궁 사람임을 밝혀서 좋을 일이 없었다. 

“사토루.”

“좋은 이름이네.”

“그런가?”

“그래. 깨닫는다는 뜻이잖아? 살아있는 동안에 개오(開悟)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예언 같아서 마음에 들어.”

“그것참 거창한 해석이군. 그러는 네 이름은…….”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이 들려오더니,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손금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추이를 보아하니 계속 내릴 모양인데. 누추하지만 내 집으로 들겠어?”

“이런 산중에 집이 있다고?”

“말했잖아, 산촌민이라고. 그리고 어디든 주춧돌 놓을 곳만 있다면 사람은 사는 법이야.”

남자의 등은 반듯하게 움직였다. 발디딤이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산촌 사람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라고, 고죠는 짐작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봄비에 어깨가 젖었다. 나긋한 취록이 청정한 빗물에 녹아 발치에 스며들었다. 

자신을 스구루라고 소개한 남자가 안내하는 길은 어쩐지 엿새 동안 산을 헤매는 동안에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산길이었다.  좁고 가파르기는 했어도 각박한 길은 아니었다. 채 헤매지 못한 서쪽의 기슭이라고는 해도 신기로왔다. 길을 따라 이름 모를 들꽃과 아름드리 노송을 지났다. 모두 헤이안쿄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들이었다. 

고개를 넘자, 남자가 이른 대로 단출한 오두막이 보였다. 

“다 왔어.”

“혼자 살아?”

“그래. 그런 탓에 세간이 허름해 보이겠지만 참아줘.”

“느닷없이 들이닥친 주제에 불평할 수야 없지.”

“그렇다면 고마운걸.”

남자가 죽렴을 들추었다. 

오두막은 간소하기는 했어도 너저분하지는 않았다. 홀로 지낸 지도 오래되었는지 세간 마다 세월이 묻어 반드르한 윤이 돌았다. 집안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자니, 그제야 잊었던 한기가 찾아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성난 뇌성 사이로 부드러웠다. 곧 남자의 손길 몇 번에 화로의 불씨가 살아났다. 

비바람과 함께 해가 저물었다. 


초승 아래 억새풀이 마른 바람에 흔들렸다. 풀이 누웠다 일어나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막막했다. 비스듬한 달빛 아래로, 한 남자가 그림자 만큼이나 어두운 옷자락을 나부끼면서 서 있었다. 고죠는 어쩐지 남자의 옆얼굴에 진 벼랑 같은 그림자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꿈이라는 자각이 희미했다. 

머지않아 남자의 등 뒤로 인적이 들려왔다. 죽립과 우장(雨裝) 차림인지라 인상을 식별하기는 어려웠으나 큰 궁을 들고 있었으므로 단번에 눈에 띄었다. 바람이 불어 죽립이 덜걱였다. 틈 사이로 비친 달빛이 검은 눈동자를 비추었다. 살의가 가득했다. 고죠는 그가 팔을 들어 궁에 시위를 매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 나뭇결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곧 쏜살이 검은 남자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고죠가 막아서기도 전에 살은 공중에서 힘없이 우그러졌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풀어내린 머리칼이 날개뼈 근처에서 가만히 흩날렸다. 바람이 불어와, 부서진 화살촉과 나뭇결들은 금세 저 멀리로 날아가버렸다. 두 사람이 달과 억새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검은 남자였다. 

“그만둬, 에조노. 그대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한껏 비웃어라. 그 숨통을 끊어놓을 때 까지 몇 발이고 쏠 테니.”

“시위도 가까스로 매기는 주제에 내 숨통을 끊겠다고. 역시 궁장과 사수는 별개의 재목인가 보지. 안타깝구나. 차라리 내가 대신 쏘아보는 것은 어떻겠어?” 

남자가 한 걸음 다가섰다. 위협적인 기세도 아니었다. 평탄한 안색에, 승려나 여행자의 것과도 같은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에조노라고 불린 자는 한껏 경계하는 듯한 낯이었다. 죽립이 반쯤 벗겨져, 그제서야 그가 늙은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거리를 좁히자 에조노가 빠르게 두 걸음 물러섰다. 에조노가 태세를 정비하고, 비틀거리면서 시위를 매겼다. 다시 한번 화살이 날았으나, 이번에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땅으로 처박혔다. 남자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만두어라. 죽이고 싶지 않다.”

두 발. 

“그만두래도.” 

세 발.

“에조노 요리토모.”

네 발. 

남자가 손을 뻗었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에조노의 숨통이 한 순간에 조여들었다. 공중에서 목을 졸린 여인이 숨을 헐떡였다.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안, 검은 남자는 비스듬하게 시선을 던졌다. 저 먼 곳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바로 발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고, 언짢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표정을 읽기 힘든 낯이었다. 푸른 그늘이 진 옆얼굴 위로 기품마저 깃들었다.

그 낯에 격분했을까. 에조노가 힘을 쥐어짜 고함을 질렀다.

“우습게 보는구나, 주저왕! 그러나 아무리 너라도 언제까지고 웃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천하에는 훌륭한 술사들이 많다. 앞으로는 더 많이 태어날 것이다. 개중 누군가, 빈 시위를 튕기는 것 만으로 삼백리 바깥의 종마저 울릴 수 있는 기린아가 나타나 반드시 네 목을 꿰뚫고 말 것이니, 그 날을 기쁘게 기다리거라!”

그제서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 위로 강이 흘러가는 듯했다. 

“왜 나를 그리 증오하지?”

“사람을 홀리고 미혹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멋대로 현혹되는 것은 너희들이 아닌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다.”

“물에게, 바람에게, 태양에게, 산에게 그리 말해보라.”

“오만방자한 잡귀 같으니.”

“말이 심하군.” 

짧은 한숨이 샜다. 여인의 목이 꺾였다. 바람 소리가 소슬했다.

고죠는 눈을 떴다. 들보가 드러난 천장이 보였다. 밤새 내린 비가 멎고 해가 드는 모양인지, 사위가 밝고 환했다.

복사꽃 향기가 내려앉았다. 

“일어났네.”

사내가 미소 지었다. 


스구루라는 남자는 대개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이 산의 식생에 대해 설명할 때만큼은 퍽 즐거워 보였다. 마치 자신이 키우고 기른 것들을 늘어놓는 농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바위틈에 자리 잡은 비단뱀을, 들풀 사이에 숨은 약초를, 철마다 찾아오는 새의 이름을, 병들어 죽어가는 나무의 증상을, 독을 품은 홍화를 알았다. 청수한 손 끝으로 젖은 흙을, 탁한 물을, 썩어가는 나무껍질을, 죽은 동물의 시체를 건드렸다. 

그 뒤에는 어김없이 가지런한 설명이 뒤따랐다. 초오(草烏)를 잘못 씹고 죽은 거야. 어미와 함께 나고 자란 것들은 대개 유독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할 줄 알지만 가끔 이런 천방지축들이 제 명을 못살곤 하지. 가여워하는 투는 아니었지만 그늘진 곳에 땅을 파고 묻어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짧게 손을 모으고 명복을 비는 것도 같았다. 

그는 내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언제 떠나냐든가, 왜 왔냐든가, 당신은 누구냐든가. 으레 물어야 할 것들에 대해 이상하게도 초연했다. 비가 그친 날 아침 하산길을 일러주며 배웅할 줄로만 알았는데, 정오가 되자 자연스레 두 명분의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마치 처음부터 고죠가 이 산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여상했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먼저 물어볼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소임을 잊었냐는 질책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별이 회전하듯이, 계절이 돌아오듯이, 물이 흘러가듯이, 철새가 돌아오듯이 순차와 섭리에 걸음을 내맡겼을 뿐이다. 

의아하게 여기던 마음 조차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만으로 사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고죠는 스스로에게 일러두었다. 산의 봄이 짧다는 사실을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꽃이 질 때 까지 만이라도 유예를 두어도 괜찮을 테니, 신궁은 잠시 봉해두자. 주력을 둥글려 신궁을 잠재우면서 그는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기어이 그대 마저 홀렸구나. 알지 못할 이의 탄식이 귓가에 맴돌았으나 손으로 내저어 쫓아 보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망령의 공염불이었을 것이다. 

홀리지 않았다. 선택한 것 뿐이지. 

‘명심하세요, 소주.’ 

성을 떠나오기 전 조궁의 수족이 고개를 조아리며 이르던 말을 기억한다. 선선대 적 부터 조궁의 주인을 모셔온 충복이었다. 

‘소주께서는 강하십니다. 만궁조차 소주의 수중에 들어왔으니, 소주께서 거꾸러트리지 못할 적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그러나 소주께서는 유일무이하십니다.’ 

충복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이이모리의 원신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지요. 감히 말씀 올리자면 출중한 자일수록 이해자를 자처하는 이의 미혹에 연약한 법입니다. 동류로 난 자가 없으니 속을 읽은 듯이 감언하는 자가 어찌 기껍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따라 서슴이 없네.’

‘용서하십시오. 다만 소주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부디 총명히 참과 거짓을 분간하소서.’

집이나 잘 지키거라. 웃는 낯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달렸다. 그까짓 환술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지 않겠느냐 하고. 

그 대화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경계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스구루라는 남자가 자신의 이해자를 자처하고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만 내맡길 수 있는 삶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했다. 그것은 기이한 확신이자 앞서 달려 나가는 인지에 의함이었다. 이 안에서는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날이 흘러가고 달이 바뀌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봄을 살았다. 상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리 긴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깊은 속을 터놓은 것도, 살아온 궤적을 맞부딪힌 것도, 미래를 공유한 것도 아닌 상대건만 마치 지난 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인연인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이곳에 제 자리가 있었던 듯이 평안했다. 애당초 벽이랄 것을 세우지도 않았으나 사이는 점점 더 허물 없어졌다. 삼나무 아래에서 농을 주워섬겼다. 개울을 따라 걸었다. 다친 새의 날개에 약풀을 으깨 붙였다.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사슴을 길들였다. 소낙비를 피해 동굴 안으로 달려들었다. 마주 보고 웃었다. 입술 사이로 가르쳐 주었던 노랫가락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그해 봄, 이이모리의 봄꽃은 생명력이 끈덕진 것인지 진대도 다시, 진대도 다시 피었다. 

질긴 생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봄의 끝은 뭉툭한 모양새로 찾아왔다. 

며칠 간 뜨락에 앉아 깎는 데에 열중하던 피리의 마지막 손질까지 마친 참이었다. 입술을 대고서 숨을 불어 넣으면 나긋한 소리가 계곡 가운데 울려 퍼졌다. 청청한 옛 곡조는 황도의 것이었다. 

나니와즈에 피었구나 

꽃이여

어디선가 피리소리에 맞추어 노랫말이 들려왔다. 고죠는 피리를 거두고 주위를 살폈다. 인적은 없었다.

“스구루?”

분명히 음성이 달랐으나 일단 부르고 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동쪽 오솔길에 놓아둔 덫을 확인하겠노라고 아침 일찍 오두막을 나섰으니 근처에 있을 리가 없었다.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정적. 고죠는 다시 한번 피리를 입술로 가져갔다. 

겨울 지내고 

이제는 봄이라고 

피었구나 꽃이여

또 다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단가(短歌)였으니 더 이상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 정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쫓을 수 있었다. 땅을 박찼다. 처음 이이모리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길을 밟아 내려갔다. 계곡과 숲이 등 뒤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한 호흡을 내쉴 때 마다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산이 이런 모양이었던가. 못해도 두어 달은 머물렀던 것 같은데 마치 처음 보는 듯이 생경했다. 봄의 파편들이 손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주어진 계절을 모두 소진했던가. 꽃잎 한 장 조차 남지 않았던가. 어느새 인을 찢고 나온 만궁이 기세 등등히 손에 들렸다. 숨이 다해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보면,  어디선가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천천히 눈을 돌려 과녁을 쫓듯이 바람을 마주 보면, 

아득하게 흰 겨울날의 설풍경에 눈이 부셨다. 

한 걸음 내딛어보니 살얼음과 부드럽게 쌓인 눈이 밟혔다. 그제서야 자신이 입산할 적 두터운 겨울 직의를 입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면 홑옷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었다. 고죠는 무릎을 꿇고 눈밭에 손을 파묻었다. 솜을 덧댄 옷자락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아직도 한겨울이구나. 생각했다. 산에 든 이후로 아주 짧은 찰나만이 흘렀으리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우수도 경칩도 춘분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한나절, 아니. 한 시진 조차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일각이 여삼추라, 만년도 일춘몽이요.

깨우쳤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옷자락을 갈무리하고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돌릴 참이었다. 

“그대로 돌아가도 좋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곧바로 돌아보지는 않았다. 거기에 핀 것은 매자나무 꽃이라고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은 어조였으니 웃음마저 나왔다. 보지 않아도 바위에 걸터앉아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을 것을 쉬이 짐작했다. 오래 다듬은 자작나무처럼 미소 지으면서. 

“스구루.” 

“응.”

“그대는 무엇인가?”

“그대도 알겠지.”

“이 궁은 그대를 위해 빚어졌는가?”

“그대도 알겠지.”

“음양료의 노인들은 그대를 가리켜 원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 눈에 그대는 세상에 원념을 품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아.”

“그렇다면 말해보지 그래.”

시선이 내려앉았다.

“나는 무엇을 품고 있지?”

고죠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초목같이 선 남자의 등 뒤에서 여린 꽃가지가 피어났다. 불어오는 봄바람이 꽃잎을 간지럽혔다. 새소리가 투명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입 밖으로 내면 이 봄이 영영 끝나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못내 알아서. 

“스구루.” 

손을 뻗어 유예의 틈을 만드는 것이다. 

아주 멀리 있었던 것 같았는데, 금세 익숙한 옷자락이 손 끝에 닿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날 천둥 소리와 화롯불 타오르는 소리 가운데서 들려오던 부드러운 목소리처럼 얇고 부드럽고 다정한 시선이었다.

“개오(開悟)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사토루(悟).”

"사람을 홀리고 속인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그대도 보았을 텐데. 나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런대도 세간에서는 그대를 잡아 죽이고자 신궁을 빚었다. 사람의 의지를 저주하지 않는가?"

"저주하지 않는다."

손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활의 현을 어루만지는 손길. 이것은 봄이다. 다른 것일 수도 없이. 

"모든 삶이 그러하듯 모든 죽음에도 의미는 있어야 한다. 에조노 요리토모의 손에 죽는 것에는 의미가 없었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여태껏 마땅한 죽음을 기다려 왔느니."

그러니 이것은 봄을 죽이는 활이다. 

"그러나 그대 손에 죽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이이모리의 산중.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공기를 가르고 계절을 찢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화살은 날아가 봄의 혼을 꿰뚫는 대신 아름드리 노송을 반으로 작살냈다. 잠깐 눈이 마주쳤고, 무슨 말인가를 나눈 듯도 했다. 그러나 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전해지는 일 역시 없었다. 

곧 봄이 옷자락을 물렸고, 경계가 썰물처럼 멀어졌다. 겨울 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조궁의 후계가 품 속을 더듬었다. 단검이 잡혔다. 죽이는 데에 의미가 있다면 살리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을 봉하는 것과 죽음을 봉하는 것은 다르지 않은 무게를 지녔으니 생의 내내 봄을 짊어진 채 걸어갈 것이다. 

힘주어 활대를 쥐었다. 단검의 날이 창백했다. 

현이 끊기는 소리는 숫제 비명같았다. 

그의 생에,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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