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모란꽃에 사자 무늬를 새기고
7600자
어떤 이는 모란꽃에 사자 무늬를 새기고
언뜻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어느덧 사라져 돌아오지 않으니
사라진 사람을 누가 기억하리
도연명 <형증영(形贈影)>
계문 3년. 봄 지나 강북에도 꽃이 지니 정오품 중산대부 동사후저의 구창(丸窓) 너머로 풍경이 야위었고 사치스러운 안주인이 종을 부려 성산의 백죽을 옮겨심게 하였다. 삼대가 넘도록 성산을 지켜온 산지기의 아들이 낫을 들고 막아섰으나 앞선 장정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져 가슴뼈가 부서졌을 뿐이고, 막일꾼들의 손에 반 천년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백죽림이 무참히 뽑혀나갔다.
계문 4년. 이듬해 봄이 돌아올 때 즈음 백죽림 골짜기가 망가진 후 황폐해진 성산 계곡에 핏물이 고여 계곡 생물들이 떼죽음 당하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후부의 안주인이 산신의 진노를 샀다며 속삭였지만 동사후도 그 안주인도 저자의 소문의 진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리석은 민초들이 허황된 소문을 지어내 떠벌리는 것이라고 여겨 입을 경솔히 놀리던 이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띈 자를 잡아 참하였다. 민심은 겨울철 풀꽃처럼 쉬이 시들었고 귀신들린 성산에는 인적이 끊겼으니 저자는 삼엄했고 산야는 황량했다.
계문 8년. 성산 가까운 기슭에서 뛰놀던 어린아이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홀연히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간 곳이 묘연하도록 사라진 아이의 수가 열을 넘길 때 즈음 백죽림 정괴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슬그머니 나돌기 시작했다. 후부 사람들이 엄히 입단속을 했으나 그런다고 흉문이 박멸되겠는가. 저잣말을 우습게 여겨 패락지도로 떨어진 우군들의 고사는 어느 시대에서나 쉬이 찾아볼 수 있는 법이었다.
이듬해 봄. 소문이 들불처럼 담을 넘고 구릉을 지나 옆 고을에까지 이를 즈음이 되어서야 후부에서는 형주에서 왔다는 도사를 불러 제를 치르려 했다. 영험하기가 등천한 신선 못지않게 대단하다는 도사는 도착하자마자 마을 입구에 작은 불을 놓아 탁기를 살랐고 기이하게 검은 연기가 마을 안에 가득 떠도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도사의 신묘한 소문이 강남에 파다하니 좋다는 대로 따를 수밖에.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눈초리를 받으며 도사가 후부로 들어선 지 일각 만에 담장 너머에서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후부 담장 안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은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청년 도사의 목소리를 듣고 귀를 의심했는데, 까닭이란 다음과 같았다.
‘이봐, 청지기. 얼마 전 이 집에 경사가 있었지?’
그러자 청지기가 어찌 아셨는지를 물으며 마침 별채의 금이낭이 아들을 보았다는 사실을 고해 올렸다. 그러자 도사가.
‘사라진 아이가 있으니 나타날 아이도 있으리라 여겼을 뿐이야. 보아하니 이 집 둘째 공자가 사람이 아니군. 아이를 죽여 죽림에 묻게. 빼앗긴 것을 돌려받으면 그도 만족할걸세.’
그러자 청지기가 말씀하시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사가.
‘이 집에 사람 아닌 것이 둘밖에 더 있는가? 하나는 별채의 작은 도령이고, 하나는 청지기 자네 아닌가!’
도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찬 눈 내리는 겨울 녘을 후부 앞뜰에 옮겨다 놓은 것처럼 봄의 소란스러움이 가시고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미복을 입은 청지기의 발아래 늘어진 그림자로부터 댓잎 마주치는 소리가 빼곡하게 들려오니 사람들이 그가 바로 도사가 이르는 ‘사람 아닌 것’임을 알았고, 산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처럼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후부를 뒤흔들었다.
‘한낱 도쟁이가 감히 신벌을 가늠하려는가!’
그 목소리가 너무 커 예사 사람들은 차마 듣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지거나 귀를 막고 버티었는데, 오로지 도사만이 꿋꿋이 버티고 서서 일갈하기를…….
“아무래도 그건 너무했지.”
“그랬나?”
잔이 한번 오갔다. 맑은 술이 빗물처럼 잔 안으로 쏟아졌다. 비 내리는 밤, 어느 이름 모를 객잔에서 두 사람이 술잔 두 개와 어항육사 한 접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강북으로, 한 사람은 강남으로 건너가 각자의 여정을 끝마치고 온 참으로, 비가 쉼 없이 내리는 탓에 발은 묶였으나 그 덕분에 술맛만큼은 좋았으니 오랜 회포를 풀기에 제격인 날이었다. 게토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주제넘었어. 자식 잃은 어미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고 큰 소리야.”
“사람은 다 제각기 생긴 법이라지만 마음 생긴 모양은 다 비슷한 법이 아니던가?”
“그러니 네가 아직 사이비 소리를 듣는 거다.”
“누가 그래?!”
“하여튼 저만 모르지.”
술잔이 한번 비고, 다시 채워졌다. 빗소리가 빼곡했다. 이번에는 고죠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강남에서는 무슨 일로 불렀다던?”
“말도 마라.”
게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죠는 낯을 기울였다.
“웬 한숨이야? 사군(師君) 자격으로 가서 극진히 모셔지고 온 거 아니었어?”
“대접이야 그럴싸했지마는. ……들어볼래?”
고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토가 입을 열었다.
영전 17년. 강남십육공 가운데 가장 성세를 누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복안성의 수광공에게는 수성장군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그것은 빼어난 전략가이기도 한 수광공이 외세의 침공으로부터 대쪽같은 굳건함과 바위같은 담대함으로 훌륭히 성을 지켜내 붙여진 별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애지중지 길러온 금지옥엽 외동 여식인 태화군주(郡主)를 뭇 젊은이들의 빗발치는 구혼담으로부터 철통같이 지켜내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기도 했다. 복안성의 젊은 공자들은 원망을 담아 그를 ‘수성장군’이라고 불렀고, 공은 그것을 알면서도 하나 뿐인 여식을 엄히 단속했다.
수광공이 태화군주에게 유일하게 정기적인 만남을 허락한 외간 사내는 단 한 사람, 형주에서 왔다는 유명한 도사였는데 까닭인즉슨 그가 군주가 어렸을 적 뱀 귀신의 질시를 사 화를 입을 뻔했던 것을 우연히 구해주고 나서 수광공부의 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광공은 도사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 여겨 귀한 가르침을 청했고, 도사는 곤란히 여겼으나 어린 군주의 타고난 팔자가 사나워 앞으로도 액화를 불러들일 것이 분명하니, 죄 없는 어린아이의 운명이 또 안타까워 모질게 떠나지 못하고 일 년여의 말미를 두고 군주의 스승 자격으로 성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하여튼 물러터져서는.”
“조용히 해.”
약속대로 봄이 가고 다시 봄이 돌아왔을 때 도사는 떠났고, 고집 억센 군주는 제 사군이 떠나기 한참 전부터 시위랍시고 사군의 물건을 하나씩 감추어 제 처소에 숨겨놓기를 반복했다. 사군과 군주의 실갱이가 수광공부를 소란스럽게 뒤집어놓았으나 수광공은 그저 뒷짐을 지고 웃을 뿐. 한 때의 귀여운 소동이라고 여겨 단호히 만류하지 않았고, 도사 또한 그리 여겨 한숨은 쉴지언정 군주의 법석을 엄히 타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데?”
“…….”
“문제가 생겼구나?”
고죠는 씩 웃으면서 빈 술잔에 맑은 술을 채웠다. 무이산에 잠시 다녀오겠다던 사람이 느닷없이 복안성에 눌러앉아 일 년씩이나 돌아오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 스스로도 방랑하는 인생이라지만 일언반구 의논도 없이 정착을 결정한 것이 지금까지도 다소간 서운했다. 토라졌느냐고 물어보면 아니라도 대답할 테지만, 여하간 나를 두고 혼자 호의호식하더니 그것참 고소하다고 생각하면서, 고죠는 소채볶음 사이에서 당근만 밀어두고 나머지를 골라 먹었다. 그 모습을 본 게토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내 실수였어.”
결국, 정해둔 날이 오자 도사는 사라진 물건들을 얼추 찾아내어 수광공 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났다. 중요한 물건이나 민간의 손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것들은 어느 정도 단속했다고 여겼기에 행여나 군주로부터 돌려받지 못한 물건이 있대도 작별 선물인 셈 치자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복안성에서 기별이 온 것은 그렇게 성을 떠나온 지 삼 년이 조금 넘어갈 무렵이었다. 때마침 고죠가 강북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움직일 여건이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잠깐만 다녀오자고 생각하면서(군주가 아무리 떼를 써도 붙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마음먹고서) 게토는 기별을 따라 다시 복안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찾은 복안성은 여전했으나, 수광공부는 어쩐지 모르게 허전했다. 수광공 내외가 옛 사군을 극진히 모셔 대접했으나 군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 게토는 기다리다 못해 군주의 안위를 물었고, 수광공은 대답을 망설이다가 곧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사군께 면목이 없으나…….”
수광공으로부터 들은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도사가 떠난 후 군주는 한동안 떠난 사군에 대한 서운함도 잊고 얌전해진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사군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어도 차분한 태도로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걸어야 할 길이 있는 법이고 제자 된 도리로 사군께서 가시는 길을 감히 막아서서야 되겠냐는, 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진중한 대답을 내어놓기에 수광공 부부는 역시 귀한 사군을 모셔 가르친 것이 효득을 보는가, 하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나서 군주는 어째서인지 자수에 몰두했다고 한다. 붉은 잉어, 자귀꽃, 공작새, 매화꽃, 호랑나비, 설양난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수놓았는데, 어째서인지 다 놓은 다음에는 완성품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내팽개치니 주위에서는 일종의 수예 수련을 하시려는가 싶어 아리송해 하면서도 끊임없이 좋은 실과 비단을 구해다 바쳤다. 그런데, 군주가 수놓은 것들을 늘어놓고 보면 한 가지가 기이했다.
“너 설마…….”
“그 설마야. 모든 수예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붉은 실로 새긴 모란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었다더군.”
군주를 모시는 시녀들은 이런 실을 구해다 바친 적이 없는데 어디서 구하셨을까 싶어 한동안 의문스러워했다. 이승의 것 같지 않은 화사함이 섬뜩해 군주에게 실의 출처를 물어도 어느새 자라 어린아이 태를 벗은 군주는 실과 바늘을 든 채로 비밀스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고.
“성혼홍사(成棍紅絲)로군. 두고 올 게 따로 있지 그걸 놓고 와?”
“……그래, 내가 머저리다.”
성혼홍사는 인연부를 만드는 데에 사용하는 붉은 실로, 보통의 아무개가 쓴다면야 아무런 효능도 발휘하지 못하는 평범한 실일 뿐이나, 그 용도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면 사용자가 도사가 아닌 민간의 필부라고 하더라도 신이한 힘을 발하는 기물(奇物)이다. 보통은 미혼 남녀의 좋은 인연을 빌거나 혼인을 앞둔 이들의 행복을 비는 부적에다가 새기는 글월을 수놓는 데에 쓰는데,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이를테면 모란이나 자귀, 원앙 같은 것을 수놓지 않는 까닭은 생명이 있는 것을 새기면 글월과 달리 대상에 마음이 깃들어 그것이 실로 살아나 자유롭게 이리저리 배회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음을 담아 새긴 것이 생명을 얻어 날아가 버리면 그 마음의 주인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다 얼마 전, 군주가 홀연히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부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었고, 없어진 물건은 군주가 마지막으로 수놓았던 화사한 모란문 표의(表衣) 단 하나뿐이었으니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사람을 풀어 아무리 수색해봐도 딸을 찾을 수 없자 수광공은 또다시 어떤 요물이 군주를 홀려 데려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튿날 아침이 되자 군주는 마치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었다는 것처럼 처소에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수광공은 이러다가 딸을 영영 잃겠다 싶어 멀리 형주에 머무는 사군에게 또 다시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사정을 듣고 보니 과정은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아무튼간에 사건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으므로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게토는 안내를 받아 군주의 처소로 향했다. 어린아이의 일 년은 성인의 일 년과 달라, 고작 몇 년간 보지 못했을 뿐인데도 군주는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예를 올리는 모습이 사뭇 생경했다. 그리하여 게토는 군주를 꾸짖는 대신 군주가 잠들 때 까지 기다렸다가 공부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지금까지 군주가 수놓은 편물들을 모조리 한데 모아 제령식을 진행했다. 공부의 빈 뜰에서 숨죽인 불이 타올랐다.
자수들을 보아하니 과연 사물에 마음이 깃들어 독자적인 영(靈)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대로 두었으면 새처럼 날아가고 꽃처럼 져버리는 한철의 마음에 영혼과 이지를 빼앗겨 군주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어릴 적 자신을 구해준 스승과의 사제지정이 깊어, 공경하는 스승이 다시 돌아오기를 빌며 한 땀 한 땀 놓았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야 애잔했으나 이럴수록 비정하게 구는 것이 마땅했다. 고죠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여튼 물러터져서는.’
연기와 재를 느꼈는지 군주가 처소에서 뛰쳐나와 소리쳤다. 게토는 한숨을 삼켰다. 가능하면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항의하는 군주를 막아섰고 게토는 바람과 불티를 앞에 두고 서있었다.
“사군, 뭐하시는겁니까!”
“네 마음을 돌려놓는 중이다.”
“제가 수놓은 것입니다, 주십시오!”
“너는 사람이지 새도 꽃도 아니다. 마음이 산으로 들로 날아가 사라져버리면 남은 껍데기 안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며, 누가 그 결과를 책임지겠느냐?”
그러자 군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사군께서 책임지시면 될 것 아닙니까!”
“…….”
“하하하하!”
“웃지 마.”
“네가 할 말을 잃게 하다니, 그 아가씨 기개가 제법 대단해.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네가 만나면 뭐 어쩔건데. 헛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
“그야 당연히 이 모란꽃에는 사자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말해줘야지.”
게토는 상 아래로 고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일부러 얻어 맞아주고서, 고죠는 씩 웃었다.
모란꽃에 사자 무늬를 새긴다는 것은 이 꽃에 지키는 이가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옛 고왕국 시절에 정인을 멀리 떠나 보낸 이들이 모란꽃 위에 사자 무늬를 새겨 문 앞에 걸어둠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내도록 변함없음을 알렸다는 고사로부터 비롯되었고 지금은 혼약자가 정해진 젊은이들이 그런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거나 물건을 지녀 저자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한다. 속되게 말해 ‘임자 있음’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노골적인 함의에 어쩐지 이마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게토는 짧게 신음을 삼켰다. 그 모습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죠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야?”
“한 두 해 지나면 잊겠지. 있었다가도 사라지는 것이 사람임을 그 애도 알 나이가 되었어.”
“쓸쓸한 것을 가르치는구나.”
“섭리와 이치를 가르칠 뿐이야.”
“그걸 너도 충분히 알아야 할텐데.”
“내가 설마 나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겠어?”
그런가. 웃으면서, 고죠가 술잔을 들어올렸다.
“언뜻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어느덧 사라져 돌아오지 않으니 사라진 사람을 누가 기억하리. 태화군주의 성혼을 빌지.”
잔 두 개가 서로 맞부딪혔다. 맑은 소리가 나면 마치 신호처럼 비가 우수수 쏟아졌다. 동그란 모양의 구창 너머로 우중지야가 무르익듯이 깊어가면 모란꽃 위에 새겨지는 사자무늬가 선명했다.
그리고 연호가 바뀌어 건희 원년. 세상이 뒤집혀 사방에서 전란이 일자 동사후부의 흰 담장도 무너지고 수광공부의 옛 영화도 덧없이 도산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가장 먼저 불타 죽고 세상에 지독하고 역한 것들만 남아 득실댔으니 도행은 옛말이요, 방랑은 사치가 되었고, 형주의 도사들 역시 까마귀 우짖는 전장을 헤매며 말과 사람이 죽어가는 꼴을 보아야만 했다. 함께 소매와 술잔을 나누었던 벗은 세상사, 섭리, 이치에 환멸을 느껴 가장 먼저 곁을 떠났다.
‘언뜻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어느덧 사라져 돌아오지 않으니 사라진 사람을 누가 기억하리.’ 오래 전에 함께 읊었던 싯구에 담긴 인연의 허망함을 스스로 깨우쳐 알았다고 여겼으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쳤던 것은 상호간에 마찬가지라 함께 술잔을 나누었던 정은 연기처럼 홀연히 흘러가 사라져버렸고, 소매안쪽에 새겨진 자수무늬만 옛 시절을 증명할 따름이었다.
불타고 남은 빈 뜰에서 쓸쓸하게 옛 노래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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