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아메산산


낭만주의가 많은 인간들을 망쳤다. 적어도 모든 인간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정성찬은 자신이 이 빌어먹을 낭만주의에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삐딱하게 보는 것이 훨씬 편했다. 염세적으로 굴고, 아주 약간의 다정함으로만 굴러가도 세상은 제 몫을 톡톡히 해낼 것이라고. 낭만에 물드는 건 한순간이다. 정말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맛보면 낭만에 망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정한 말투, 따뜻한 손길, 기분 좋게 웃는 소리, 바닷가에 남겨진 발자국, 찬란한 햇빛, 혹은 먹구름, 푹 젖은 목소리, 단호한 눈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이 모든 무용함이 짧디짧은 한 인간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용함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날씨에 따라서 누군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창가에는 테루테루보즈가 걸려 있었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티비 속 기상 캐스터는 우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雨燦々, 아메산산

비가 찬란히


정성찬은 열다섯의 나이에 일본의 땅을 밟았다. 부모님의 직업 특성 탓이었지만 일본어를 제대로 다 배우기도 전에 새로운 문화를 접한다는 건 꽤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거주지는 한국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말쑥하게 교복을 입고 처음으로 자기소개를 했던 날, 어색한 일본어 발음에 수많은 눈빛이 화살처럼 쏟아졌던 날, 성찬은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다. 순탄하게 졸업하기엔 글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다음 순서는 쉬웠다. 자연스럽게 장난, 그리고 이지매. 문화에 적응을 못한 탓도 있었고, 일본어를 못한다는 점도 있었으리라. 책상 위에 그려진 기분 나쁜 언어를 하나씩 지워내고, 사물함을 열었을 때 와르르 쏟아지는 쓰레기를 묵묵히 치워내며, 옥상에서 양키들한테 얻어맞은 지 어엿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성찬의 부모님은 바쁘다는 이유로 성찬을 챙기지 못했다. 우리 아들은 혼자서 잘할 테니까. 그 맹목적인 믿음에 성찬은 착실하게 부응했다. 일주일에 한 번, 같이 아침을 먹는 날. 학교는 어때? 라는 질문에 성찬은 웃으며 재미있다고 답을 할 뿐이다. 성찬은 여전히 일본어가 크게 늘지 못했지만, 부모님은 그 사실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책상에 적힌 욕설을 매일 지우고, 사물함의 쓰레기를 치우고, 심지어 맞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 바쁜 부모한테 그런 감정까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기쁨은 나눌수록 더 행복해지는 너그럽고 포용적인 감정이라면, 슬픔은 독식해야만 하는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하교 후, 성찬은 혼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바다 쪽으로 달려가서 운동화를 벗고 모래사장을 밟아보기도 했다. 발등을 덮는 모래의 까슬거리는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발목이 푹푹, 파고들 때마다 어딘가의 지하로 깊게, 빠지는 느낌이 기묘하게 좋았다. 매서운 파도 소리에 성찬은 힘껏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발이 걸려서 넘어질 때까지 무작정 달려보기도 했다. 어떤 미친 짓을 해도 바다는 눈감아 줄 것 같았다. 어느 날의 모래사장엔 발자국이 하나 더 있었다. 성찬은 그 발자국을 따라 밟았다. 발은 여전히 푹푹 빠졌지만, 누군가가 먼저 길을 낸 덕에 걷는 것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파도 소리가 매서웠다. 그리고 그 매서움 끝에는 같은 교복을 입은, 말간 얼굴을 한 소년이 성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탄식을 뱉는 것도 잠시, 순간적으로 부는 강한 바닷바람에 성찬은 눈을 감았다. 탄식을 뱉는 사이에 밀려 들어오는 모래알이 텁텁했다.

"大丈夫?" (괜찮아?)

"うん、ごめん... " (응, 미안...)

"あれ、外国人?" (어라, 외국인?)

별것도 아닌 존재는 꼭 인간을 한 번쯤 울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모래알처럼, 인생에 전혀 중요하지 않는 존재라도 말이다. 성찬은 뻑뻑함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처음 보는 같은 학교의 소년 앞에서 끙끙 앓았다. 소년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더니, 성찬의 두 뺨을 감싸 쥐곤 후, 눈가에 바람을 불어준다. 성찬의 눈이 겨우 떠진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퍽 안쓰러웠다. 韓国人? (한국인?) 소년은 성찬의 뺨에 묻은 모래를 조심스럽게, 착실히 털어주며 나라를 유추했고, 성찬은 그 손길을 묵묵히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인이구나. 소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안녕. 작게 한국어로 인사한다. 부모님과 자신, 그리고 자기 전에 봤던 한국 미디어를 제외하고 타국에서 처음 듣는 한국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소년의 얼굴과 언제 매섭게 불었냐는 듯, 다정하게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성찬은 하마터면 꼴사납게 눈물을 한 번 더 쏟을 뻔했다. 이런 다정함은 반칙이었다. 우리 학교네? 소년은 어설프지만 정확한 한국어로 말을 이어나간다. 오오사키 쇼타로라고 해.

오오사키 쇼타로. 성찬보다 한 학년 위였고, 다정한 행동과 말투와 다르게 교내에선 꽤나 껌 좀 씹는 양키에 가까웠다. 성찬은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자신을 패던 양키 사이에 쇼타로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쇼타로를 별난 놈, 음침한 놈이라고 칭할 때, 성찬만큼은 사람들이 오오사키 쇼타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주 약간은 폭력적이더라도, 오오사키 쇼타로는 다정했다. 눈에 모래가 들어갔다고 누군가의 뺨을 감싸쥐고 바람을 불어주는 그런 양키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안녕, 이라고 작게 한국어로 인사해주는, 뺨에 엉겨붙은 모래를 조심스럽게 털어주는, 그런 양키는 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했다. 첫 만남 이후로, 약속 따위 하지 않아도, 성찬과 쇼타로는 바다 앞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쇼타로는 한국어에 꽤 능숙한 편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럼 혼혈이야?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웅, 고개를 끄덕이며 깔깔, 작게 웃었다. 쇼타로는 웃을 때마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피어싱의 그 포인트를, 성찬은 남몰래 좋아했다.

하교 후, 메론 소다를 마셨던 여름 어느 날. 쇼타로는 동네 꽃집 앞에 걸음을 멈췄다. 꽃 좋아해?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고개를 저었다. 시들어서 별로야. 성찬은 낭만 없는 질문을 쉽게 던졌다. 그럼 조화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으엑, 쇼타로는 미간을 좁히며 더 별로야. 대꾸했다. 굳이 왜 별로냐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답이 쉽게 돌아왔다. 생화는 시들어서 별로고, 조화는 영원해서 별로란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답만 하고 있었다. 생화는 시들어서 더 소중하고, 조화는 영원해서 더 단단한 거 아닌가. 성찬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래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성찬은 낭만이 없는 쪽이라면, 쇼타로는 낭만이 과한 쪽이었으니. 그래서 성찬은 쇼타로를 좋아했다. 낭만에서 나오는 그 다정이, 자신을 살렸으니까.

"먼 미래에도 꽃집은 절대 안 망할걸."

"왜?"

"조화가 있어도 사람들은 생화를 선물하잖아."

시대가 아무리 발전하고, 인간들 절반이 사라진다고 해도 꽃집은 문전성시를 이룰 거라는 게 쇼타로의 유구한 의견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화보다 더 생화 같은 조화가 떡하니 있는 세상인데, 사랑하는 사이끼리 생화를 선물하지 않는가. 나중에 꽃집이나 해야겠다. 쇼타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바다를 향해 걸었다. 성찬은 바다가 어느 정도 보이는 곳에서, 꽃집 가게를 하고 있는 쇼타로를 상상했다. 앞치마를 하고, 꽃을 포장하고, 바다 때문에 습도가 높아서 꽃이 시들고 있다고 투덜거리는. 아, 꽤 사랑스럽다... 그럼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도 쇼타로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우린 언제쯤 이별할까. 자연스럽게? 아니면 마음 아프게? 성찬은 걸음을 멈춘다. 훌쩍 앞서 걷고 있던 쇼타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빨리 와. 재촉하는 손짓에 성찬은, 아주 잠시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발을 옮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모든 것이 추억이고,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하면 그만이었다. 

"내일 비가 올 건가 봐."

"어떻게 알아?"

"바다에서 비 냄새가 나."

"쇼타로, 비 좋아해?"

"응, 좋아해."

비 냄새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성찬은 의문을 가졌지만, 그날 밤 쇼타로의 말처럼 일기예보 속 기상 캐스터는 비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성찬은 항상 창가에 놔두고 있던 테루테루보즈를 서랍 안에 넣었다. 오오사키 쇼타로가 비를 좋아한다면, 매일 비가 와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이런 습함도 비와 함께 바다에 다 흘려보낼 수 있을 거라고. 처음으로 자기 전에 내일 비가 왕창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쇼타로는 분명 우산을 쓰지도 않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닐 것이다. 성찬은 비 맞는 걸 유독 싫어하는 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타입이었지만 상대가 오오사키 쇼타로라면 달랐다. 쥐고 있던 우산을 던지고 함께 달릴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 애는 특별하니까. 정말, 특별했으니까.

다음 날,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날이 흐렸다. 성찬의 의자엔 압정이 붙어 있었다. 이제 이 끝없는 괴롭힘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아님 쇼타로의 존재가 위안이 되는 걸까. 성찬은 바닥에 앉아서 의자에 붙은 압정을 하나씩 떼어낸다. 킥킥, 비웃는 소리도 참을 만했다. 모두 다 괜찮았다. 그러니 제발, 자신이 이지매 당하는 모습을 쇼타로가 보지 않길. 이런 비참한 모습까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기도는 먹히지 않았다. 2학년 층에는 내려오지도 않던 쇼타로가, 하필 그날 성찬의 반을 지나가고 있었고, 바닥에 앉아서 압정을 떼어내는 그 초라한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쇼타로는 성찬의 반으로 성큼성큼 들어와서, 양키 둘을 순식간에 피떡으로 만들어버린 후, 바닥에 앉아 있는 성찬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아무런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다정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오사키 쇼타로는 꽤나 폭력적이었다. 그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만 다정하게 굴었다고 그 인간은 무조건적인 다정한 인간일까? 성찬은 처음으로 쇼타로의 시선을 피했다.

"성찬."

"...응."

"나 안 볼 거야?"

창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다에선 비 냄새가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성찬은 쇼타로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창피하고 치욕스러웠다.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성찬의 모습에 쇼타로는 한참동안 성찬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곧 자리를 떴다. 성찬은 그날, 하교 후 바다에서 쇼타로를 기다렸지만 오오사키 쇼타로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3학년 층에 찾아가도, 교무실에도 쇼타로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단순한 비가 아닌, 우기가 시작했는지 일기예보에 우산 아이콘이 전국적으로 뜨고 있었고, 공기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성찬은 하교 후, 우산을 쓰지도 않고 바다 앞에서 쇼타로를 기다렸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온몸이 아팠다. 그때 왜 시선을 피했냐고, 질책하는 느낌 같아서 서글프기도 했다. 모두가 오오사키 쇼타로를 바라보지 않을 때, 별나고, 음침한 놈이라고 할 때, 자신만큼은 쇼타로를 마주보고 있어야 했다. 그 특별하고도 소중한 오오사키 쇼타로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컸다.

일본의 우기는 말도 안 되게 길었고, 정성찬은 오오사키 쇼타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사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으면서, 그 흔한 메일 주소도, 집 주소도 몰랐다. 꼬박 일주일을 기다렸던 날, 새벽. 성찬의 휴대폰에는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 보고 싶어. ] 오오사키 쇼타로가 분명했다. 자신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을까. 성찬은 창문을 열었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약속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쇼타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쇼타로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이렇게 다칠 줄 알았으면 우산이라도 가져올 걸. 성찬은 겉옷을 벗어서 쇼타로의 머리 위를 덮어준다. 괜찮냐는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단지 할 수 있는 말은, 메시지의 [ 보고 싶어. ] 에 대한 대답뿐이다. 나도 보고 싶었어. 쇼타로는 그제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 좋아해?"

"응."

"그럼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줘."

"뭔데?"

"앞으로 내 생각 하지 마."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성찬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러운 이별이 아닌 마음이 찢어지는 그 이별의 순간. 앞으로 다신 오오사키 쇼타로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느낌에 성찬은 본능적으로 쇼타로의 손을 잡았다. 쇼타로는 잡힌 손을 보며 바보, 중얼거린다. 그리고 긴 침묵. 아무런 대화없이 쏟아지는 비를 묵묵히 맞을 뿐이다. 침묵을 깨트리는 건, 항상 쇼타로의 몫이었다. 이제 들어가. 얼굴 봤으니 됐어. 어설픈 한국어지만 꽤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성찬은 이 손을 절대 놓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쉽게 놓고 싶지 않았다. 이제 우리 못 봐?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돌려준다. 약속 지킬 수 있겠어?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계를 넓혀준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이 버젓이 있는데. 

"대신 비가 엄청 오는 날엔."

"...오늘처럼?"

"응. 오늘처럼."

"쇼타로."

"너무 많이 와서 잠겨 죽을 것 같은 날에만 가끔 내 생각 해 줘."

"그런 말 하지 마."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지, 라고."

이미 정해진 이별의 수순처럼 제 할 말만 하는 쇼타로가 원망스러웠다. 나 너 좋아해. 성찬은 다시 한번 고백을 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한다는 말을 조금이라도 일찍 할 걸 그랬다. 쇼타로가 이별을 고할 때, 나 좋아해? 에 대한 답이 아닌, 먼저 좋아한다고 말을 할 걸. 그럼 조금 이 관계가 달라졌을까. 여기서 이별은 거리적인 걸 뜻하는지, 아님 영원한 이별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성찬은 마지막으로 쇼타로에게 매달린다. 죽지 마, 살아야 해. 뜬금없이 생존을 목표로 두는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 그럼 우리의 목표는 생존으로 하자. 그리고 쇼타로는 팔을 뻗어 성찬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입을 맞춘다. 첫키스는 눈물 맛이었나, 아님 비 맛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바다의 맛이었나.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입술이 떨어질 때, 쇼타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했다.

"大好き。" (좋아해.)

성찬은 그 후 일주일 정도 심하게 앓았다. 그리고 오오사키 쇼타로는 전학 처리가 되었다. 어디로 갔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마치 원래부터 없던 사람 같았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여전히 성찬의 의자엔 압정이 있었고, 책상 위엔 욕설이 적혀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생존으로 하자. 쇼타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성찬은 의자를 들고 창문을 깨트렸다. 양키들의 표정이 볼만했다. 네 머리도 깨줄까? 섬뜩한 말이 일본어로 술술 흘러나왔다. 쇼타로가 제 곁에 있는 거 같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쇼타로가 자신의 일부라도 된 것 같았다. 성찬은 처음으로 폭력을 손에 쥐었다. 오오사키 쇼타로가 손에 자연스럽게 쥐고 태어난 폭력을, 성찬은 이별하고 나서야 쥐게 되었다. 의자를 들고 창문을 깨트릴 때, 괜히 손이 얼얼했다. 성찬은 가만히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폭력을 걷어내면 아주 작은 다정이 있었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그 다정을 제게 준 것이다. 아, 쇼타로. 빌어먹을 오오사키 쇼타로. 이렇게 사람을 망가트리고 도망가는 행위는, 정말 치사했다. 성찬은 그날 밤부터 다시 서랍 안에 있던 테루테루보즈를 꺼내어 창가에 놔뒀다. 오오사키 쇼타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비가 너무 와서 잠겨서 죽을 것 같은 날에만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우기가 끝나고 있었다. 



오오사키 쇼타로의 아버지는 참 못난 존재였다. 친어머니를 병에 걸려 죽게 하더니 그거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새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랑은 중독과도 같다고 아버지의 폭력에도 코피를 흘리면서까지 쇼타로를 붙잡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했었다. 사랑이란 다 그런 걸까? 쇼타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치가 떨렸다. 쇼타로는 자신이 가진 폭력성을 혐오했다. 자신도 언젠가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긴다면 다 망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머리에서 쾌감이 폭죽처럼 터졌다. 주먹질을 끝내면 고독함이 찾아왔다. 자신의 가장 큰 흠을 지우기 위해서 쇼타로는 매일 바다 앞에서 죄책감을 씻어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모두 다 괜찮다고,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았다. 폭력이 지워지면 진짜 나다운 감정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어느 날, 쇼타로는 성찬을 만났다. 자신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온 이상한 소년. 약속을 하지 않아도 서로는 오래된 약속처럼 서로를 기다렸다. 모래사장을 달리기도 했고, 운동화를 벗고 바다에 첨벙첨벙 들어가기도 했다. 성찬과 있으면 폭력이라는 단어가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메론소다를 마셨던 어느 날, 쇼타로는 동네 꽃집 앞에 걸음을 멈췄다. 생화는 시들어서 별로고, 조화는 가짜 주제에 영원해서 별로였다. 제 말을 이해 못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바보같은 성찬의 모습이 좋았다. 폭력이 지워진 자리엔 보잘것없는 낭만과 다정이 있었다. 

이지매를 당하던 성찬을 목격한 날, 쇼타로는 오랜만에 주먹질을 했다. 심장이 쿵 쿵 쿵 쿵 세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인간들은 내가 가장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상처를 주는 걸까. 다정하게 굴고 싶어도 꼭 피를 보게 만들었다. 양키 새끼들의 코에서 피가 터질 때, 쾌감이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지워진 자리에 낭만과 다정이 있으면 무엇하나. 다시 폭력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성찬은 쇼타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내가 싫니? 쇼타로는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찬."

"...응."

"나 안 볼 거야?"

내가 싫니? 라는 질문 대신 안 볼 거야? 라는 질문으로 돌려서 말했지만 성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쇼타로에게 이별은 거창하지 않았다. 연애관계에서 우리 헤어지자, 이런 말을 뱉는 게 아닌. 마음이 찢어지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것도 아닌. 그저 정성찬이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것. 그만 한 이별이 없었다. 쇼타로는 그날 이후 성찬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분명 정성찬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를 흠뻑 맞은 상태로 구구절절한 사과를 하겠지. 그러니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을 잊길 바랐다. 천둥이 쾅, 하고 울렸다. 보고 싶다는 성찬의 목소리 같아서 쇼타로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은 건 오히려 자신이었는데. 처음으로 비가 싫어졌다.  

그 후, 꼬박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은 아버지가 자신을 폭행하고, 그걸 말리던 새어머니가 아버지를 칼로 찔렀던 날이었다. 새어머니는 쇼타로를 안심시키며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다. 얼굴이 다 터진 상태로 쇼타로는 그 돈을 받았다. 이 새벽에 심부름할 곳이 어디 있다고. 쇼타로를 밖으로 내보낸 후, 새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잿더미로 사라졌다. 살인과 방화, 그리고 자살. 너무 사랑해서 혼자만 지옥으로 보낼 수 없었던 걸까? 아님 올바른 선택이 어려웠던 걸까. 아님 이게 사랑이 아닌 감정인데, 정의를 내리기 어려워서 사랑이라고 예쁘게 포장을 한 걸까. [ 보고 싶어. ]  쇼타로는 성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한 핑계라고 생각했다. 비를 맞으며 자신을 만나러 온 성찬에게 쇼타로는 이별을 고했다. 원래의 계획은 바다에 빠져서 죽으려고 했으나, 눈치는 또 얼마나 빠른지 죽지 마, 살아야 해. 뜬금없이 생존을 목표로 두는 언행에 쇼타로는 그 소원은 기꺼이 들어주기로 했다. 정성찬은 특별하니까. 가장 특별했으니까. 폭력을 휘두르는 자신의 시선을 피해도, 아버지의 폭력적인 피를 그대로 쥐고 태어났다고 해도, 결국 이 새벽에 자신을 위해 달려오고,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그럼 우리의 목표는 생존으로 하자. 쇼타로는 태어나서 가장 큰 결심을 성찬의 앞에서 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했다. 大好き。 (좋아해.) 

오오사키 쇼타로는 더 이상 정성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정성찬을 감히 자신의 핑계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약속한 것처럼 생존만을 목표로 두고 살았다. 병으로 눈을 감은 친어머니, 함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아버지와 새어머니. 오오사키 쇼타로는 완벽한 고아였다. 경찰 조사를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치료도 받고, 친척 집에서 몇 년을 머무르고, 또 보육원에서도 몇 년을 머물렀다. 쇼타로는 성찬과 했던 약속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생존을 목표로 두는 게 아니었다. 죽고 싶었던 순간이 무수히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모든 약속을 다 어길 순 있었지만, 성찬과의 약속은 감히 어길 수 없었다. 기꺼이 지키고 싶었던 첫번째 약속이었으니까. 정성찬은 자신이 살아 있는지, 어디서 뒤졌는지 절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위해 악착같이 살았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증명이 생존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담배를 합법적으로 입에 물 수 있게 되던 해. 쇼타로는 한국으로 넘어갔다. 모든 사람들이 친어머니와, 성찬이 사용하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동글동글하고 다정한 언어. 자신이 한국어로 말할 때도 다정하게 느껴졌을까? 묻고 싶었지만 물을 상대가 제 곁에 없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 하나와 약간의 자금으로 숙소도 금방 구했고, 어느정도 능숙한 한국어 덕에 일자리도 수월하게 구했다. 바다는 멀었지만, 오히려 멀어서 더 좋았다. 눅눅한 짠맛이 피부에 닿지 않았다. 오로지 비만 조심한다면 정성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몇 개월 후, 쇼타로는 서점에서 성찬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점 안에 배치된 잡지 표지에 있는 정성찬을. 라이징 모델이라는 타이틀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전할 수 없지만, 성찬의 안부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자신은 잘 지내고 있다고. 쇼타로는 잡지를 들고 작게 중얼거린다.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얼굴이었는데, 이제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거리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제 우리 못 봐?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자신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던 성찬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 안부가 얼마나 소중한지. 쇼타로는 잡지를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잡지를 꼼꼼하게 읽었다. 패션 이야기, 그리고 신제품 소식, 다른 유명인의 인터뷰, 그리고 정성찬의 화보와 인터뷰까지.

Q. 모델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어떤 친구 덕인데...... 제 소식을 알리고 싶었어요. 저는 그 친구의 소식을 영원히 모르겠지만, 제가 유명해지면 제 소식은 그 친구가 알 수 있으니까요.

Q. 의미심장한 말이네요.

A. 누구나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잖아요.

Q. 그렇죠. 그럼 이 자리를 빌어서 그 시절 추억 속의 그분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A. 미안. 네 생각 자주 했어.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쇼타로는 인터뷰 부분을 찢어서 벽에 붙였다. 나는 네가 죽지 말라고 해서 악착같이 살았는데, 너는 내 생각 하지 말고 살라는 그깟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구나. 자신을 잊어 달라는 약속은 가치가 없었다. 그냥 잊으라는 이유도 부정적인 추억으로 남는 게 싫어서였다. 성찬아, 내가 너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니? 무섭거나, 슬프거나,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도 고백할 게 있어. 나도 네 생각을 종종 했어. 너를 생각해야만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나의 가장 좋은 추억이야. 등신같은 정성찬, 바보같은 정성찬. 그리고 가장 특별한 성찬아.


낭만주의가 많은 인간들을 망쳤다. 적어도 모든 인간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정성찬은 자신이 이 빌어먹을 낭만주의에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삐딱하게 보는 것이 훨씬 편했다. 염세적으로 굴고, 아주 약간의 다정함으로만 굴러가도 세상은 제 몫을 톡톡히 해낼 것이라고. 낭만에 물드는 건 한순간이다. 정말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맛보면 낭만에 망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정한 말투, 따뜻한 손길, 기분 좋게 웃는 소리, 바닷가에 남겨진 발자국, 찬란한 햇빛, 혹은 먹구름, 푹 젖은 목소리, 단호한 눈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이 모든 무용함이 짧디짧은 한 인간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용함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날씨에 따라서 누군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창가에는 테루테루보즈가 걸려 있었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티비 속 기상 캐스터는 우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오오사키 쇼타로와 이별한 후, 성찬은 많은 사람과 연애를 했다. 긴 만남은 없었다. 묘하게 쇼타로와 닮은 사람만을 찾아서 만났다. 눈 밑에 점이 있다거나, 웃는 모습이 귀엽다거나, 피어싱 위치가 같다거나. 이별 사유도 동일했다. 쇼타로가 하지 않을 행동을 하면 마음이 식었다. 예를 들면 비가 왕창 쏟아질 때 비가 온다고 투덜거린다거나, 우산을 써야 한다고 짜증을 낸다거나. 바다를 싫어한다거나. 묘하게 쇼타로와 어긋난 발언을 할 때, 성찬은 가차없이 이별을 통보했다. 프레데리크 베그베데의 로맨틱 에고이스트에서 ‘내 마음에 드는 여자들은 모두 너의 표절이다.’ 라는 문장이 딱 자신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제는 오오사키 쇼타로의 표절이 아닌, 그냥 오오사키 쇼타로를 사랑하는 게 더 빠른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만. 자신이 사랑했던 그 소년은 이제 허상 같은 존재였으니. 이별한 후, 그 어떠한 소식도 듣지 못했다. 누군가는 차에 치여 죽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야쿠자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은 그 어떤 소식도 믿지 않았지만, 굳이 믿는다면 후자를 믿었다. 죽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모델 제안을 받았을 때, 쉽게 수락한 것도 모두 쇼타로를 위해서였다. 아무런 소식이 없는 냉정한 그를 위해서. 자신이 유명해지면 쇼타로도 소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별의별 이유로 차인 정성찬의 구 연인들은 절대 모르겠지만, 정성찬은 지독한 순애보였다. 쇼타로와 나눴던 사소한 대화조차도 잊지 못했다. 첫 만남부터, 꽃집을 지나가면 생화와 조화 모두 별로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나중에 꽃집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 그리고 헤어지기 전 나눴던 입맞춤까지.

"성찬아, 역 근처에 꽃집 새로 생긴 거 알아?"

"...... 아, 고마워요. 매니저 형."

"꽃집 이름 찍어줄게."

성찬은 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비가 오는 날마다 꽃집에 들르곤 했다. 조금 더 오오사키 쇼타로를 생각하고 싶은 날엔, 비가 오는 날에 맞춰서 바다를 보러 갔다. 보통 사람들은 비 오는 날 바다에 간다면 기함을 하며 싫어하겠지만, 성찬만큼은 달랐다. 더 이상 우산을 쓰는 것도 싫었다. 비를 온몸으로 맞을 때만, 오오사키 쇼타로를 마음껏 생각할 수 있었다. 보고 싶다. 그냥 좋아한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속에 평생 나오지 못할 것이다. 홍콩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는가.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으니, 나는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정성찬은 그 과거가 좋았다. 바다 냄새가 나는, 비 냄새가 나고, 오오사키 쇼타로가 존재하던. 그러니 굳이 그 과거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었다. 비 냄새가 난다. 이제 정성찬은 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내일은 반드시 비가 올 것이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수국이 피면 우기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새로 생긴 꽃집 앞엔 수국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성찬은 푸른색 수국 한 다발을 요청하곤,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만을 바라본다. 스케줄 관련 연락과, sns엔 최근 인터뷰 했던 내용이 화제가 되어 그 친구가 누구인지 추리하는 게시글이 뜨고 있었다. 과연 오오사키 쇼타로는 인터뷰를 봤을까?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웃었을까, 울었을까. 아니, 애초에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아, 나는 바다 안 가요."

"왜요? 바닷가 동네에서 살았다면서."

"그냥 마음이 아파."

"마음은 왜 아프대."

성찬이 예쁘게 포장된 수국을 품에 안을 때, 꽃집 아르바이트생 두 명의 대화가 도란도란 들린다. 정돈되지 않은 생화를 품에 안고 나오던 아르바이트생과 성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그 오오사키 쇼타로가 제 눈앞에 있었다. 앞치마를 하고, 꽃을 포장하고, 물론 바다가 주위에 없으니 습도가 높아서 꽃이 시들고 있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쿵, 쿵, 쿵, 쿵. 언제부터 심장이 이렇게 뛰었더라. 입을 열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우연히, 운명적으로 오오사키 쇼타로를 마주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었다. 보고 싶었어. 아님, 잘 지냈어? 분명 가장 좋은 첫 마디가 있었는데, 겨우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은,  많이 아팠어? 라는 보잘 것 없는 안부 인사였다. 마음이 아팠구나. 먼저 이별을 던지는 사람이,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바다에 안 간다고 할 만큼. 그때의 모습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피어싱은 반짝거리고 있었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 모습까지 그대로였다. 지금 쇼타로의 손바닥엔 폭력보다 다정이 가득하게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많이 아팠냐는 질문에 쇼타로는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이번 여름은 우기가 꽤 길대."

과거에 갇혔던 시간이 몇 년 만에 제대로, 천천히 현재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부터 창가의 테루테루보즈는 다시 서랍장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쇼타로는 생화를 품에 안은 상태로 조심히 성찬에게 다가가서 작게 속삭인다. 안녕. 성찬의 뺨에 묻은 모래를 조심스럽게, 착실히 털어주던, 첫 만남에 나눈 그때와 같은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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