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겸

[윤겸] 새벽 4시에 또 만나요

랜덤어플 이야기 (2023.06.26)


*

 

  어떠한 이야기든 마찬가지겠지만, 시작은 늘 단순한 호기심이 문제일 것이었다. 친구와의 약속이 파토 되고 난 뒤, 할 일이 없어 꾸민 채로 뒹굴 거리다가 문득 셀카를 찍어보고. 그러다가 셀카 어플 밑에 있는 광고에서 친구를 사귀는 랜덤 채팅 어플, 이런 광고에 한 번 속아 보는 것이었다. 뭐 진짜로 만나 볼 것도 아닌데. 휴대폰 액정을 따닥따닥 누르다 보면 어느 새 그곳에 방금 찍은 셀카를 등록하고. 피자와 민트초코를 좋아한다는, 다소 쓸데없는 TMI까지 밀어 넣은 뒤 모든 과정이 끝이 났다. 심심풀이로는 너무나도 쉬운 시작이었다. 

 

  먼저 대화를 걸긴 뭐해서 내버려 두고 나면, 두어 시간은 당연하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었다. 그저 액정만 뚫어져라 보다가 결국은 다시 한 번 선톡을 포기하고. 다시 옷을 갈아 입고 씻었다. 오늘 되게 예쁜 티셔츠를 입었는데, 다소 아쉽게 투덜투덜 거리다가 가족끼리 TV를 보고. 저녁을 먹고. 양치와 세수를 한 뒤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에는 이미 밤 11시였었다.

  살짝 이른 감이 있지만 일단 잠을 자자. 눈을 감으면 누구보다 쉽게 잠에 들었고, 꿈 속에서 아까 세던 양들과 만났다. 한 마리, 두 마리. 몇 번을 더 세다가 잠이 오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설마 지금 꿈인 건가? 문득 자각몽으로 깨닫다가 손에 놓인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손 안의 휴대폰에서 알림 소리가 우웅우웅 울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옆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보았다. 아까 깔았던 어플. 새벽 4시 정각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꿈의 연장선인가, 고민을 했었다. 쭉쭉 부드럽게 늘어나는 자신의 볼을 몇 번이나 꼬집고 나서야 그게 생시인 것을 알았다. 도대체 이 시간에 누가...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은연 중에 내용이 궁금해 어플부터 켜보았다.

 

  [혹시 자요?]

 

  이게 전남친 어플 이었던 가. 새벽 네시면 당연히 자는 거 아닌가? 내가 또 혼자 뭔가를 모르고 있었나. 멍하니 덜 깬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덜 깬 머리 그대로 답장을 했다.

 

  [아뇨. 안 자요. 그쪽은 안 자요?]

 

  비몽사몽한 가운데, 상대방의 프로필을 눌러 봤다. 딱히 정보랄 게 없는 허연 프로필. 와중에 꿈에서 보았던 양이 그 안에 사진으로 있어서 바보같이 부스스 웃었다. 이거 설마 태몽, 그런 거 아니야? 뭘 낳겠다는 것인지, 별 생각 없이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다가 뒤 이어 오는 메시지를 보았다.

 

  [잠이 안 와서요.]

  [그래서 양을 프로필 사진으로 했구나...]

 

  잠깐의 정적 후, ㅋㅋㅋㅋ가 짧게 쏟아졌다. 석민은 자신의 비몽사몽 유머가 통했다는 사실에 슬쩍 잠이 깨기 시작하면서 괜히 뿌듯했다. 이 사람의 나이도 외모도 이름도 모르는데, 괜스레 호감이 가는 그런 느낌. 그나마 성별 란은 있어서 봤는데, 남자가 남자한테 보내는 메시지는 별 다른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도 이석민의 타인에 대한 벽을 멋대로 허물고 있었다. 뭐 당장 마주하는 것도 아니니 바로 낯 가릴 것도 없고...

  무엇보다 이 사람이 새벽 4시에 잠들지 못하고 헤매이는 것이, 무언가 좀 안쓰러웠다. 자신은 눈만 감으면 잘도 자는데. 그렇게 어플 속에서 석민은 남자를 토닥이듯 일상 이야기를 건넸고, 남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흔쾌히, 단촐하게 받아들이며 대화는 시작되었다. 장문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그런 이야기를 해도 그는 차라리 속내 깊은 그런 이야기가 좋다고 했었다. 그 문장에서 석민은 알 수 없는 다정함을 만났고, 단숨에 그가 좋아졌다.

 

*

 

  또 한 번 양이 자신의 티셔츠 끝을 물고 늘어뜨리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깼을 때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느껴졌다. 설마 또 네 시인가 싶어 시계를 보면 역시나 그 시각이었다. 나 설마 진동 소리 한번에 깬 건가. 이렇게 예민한 사람 아니었는데. 한숨을 쉬다 가도, 문득 메시지가 궁금해 휴대폰을 열어 보면 당연하게도 그 사람이었다. 양의 탈을 쓴 그 사람.

  그와의 시작이 다소 뜬금없었어도, 매번 이야기를 하면 신기할 정도로 몇 년을 지낸 단짝처럼 잘 통했다. 그래서 당장 그의 메시지가 와도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궁금증만 늘었다. 프로필에 정말 아무것도 없길래 문득 그의 이름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뭐라고 부르면 돼요?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묻다가,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나 뒤늦게 후회가 되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답변이 왔다.

 

  [윤정한. 스물 아홉살이요.]

 

  아 형이구나. 너무 쿵짝이 잘 맞아서 친구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살짝 있었다. 그럼에도 그 편안함이 좋아서 이모티콘 몇 개 보내면 편하게 불러요, 라는 말이 따라 붙었고, 그 뒤에 자신도 편하게 말 해 달라 이야기를 붙였다.

 

  [그럼 석민이도 말 놔. 편하게 불러.]

 

  프로필 사진에 붙은 양 때문인지, 그의 말이 포곤하게만 느껴졌다. 잠이 덜 깨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매일 밤 이렇게 잠도 못 드는 그에 대한 측은함 역시 더해져, 정말 그가 불쌍한 양처럼 느껴지다 보니 더 편하게만 느껴졌다. 

 

  [형은 왜 이 시간에 깨어 있어요? 아님 못 자는 거예요?]

  [잠 잘 때 예민해서, 자주 깨는 편이야.]

 

  예전에 한 번 친구들이랑 놀겠다고 버텼다가 잠 못 드는 게 너무 괴로워서 바로 기절했었는데. 매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깨는 것은 얼마나 괴로울까. 석민은 아이구야,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형도 진짜 힘들겠다. 그런 말을 하면 당연한 것처럼 그의 말이 따라 붙었다.

 

  [네가 이렇게 얘기 해주니까 괜찮아.]

 

  이 형 좀 칠 줄 아네. 그런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히히 웃었다. 그럼 형, 내가 자장가 불러줄까? 전화가 부담스러우면 녹음해서 보내 줄게.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노래 잘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니, 자신 있는 방법으로 그를 위로하고자 싶어서. 그런 말을 하면 한창 말이 없다가 다시 메시지가 왔다.

 

  [오늘은 녹음만. 당장 전화하면 너도 못 자잖아.]

 

  역시 다정하다고 생각하면서. 석민은 몇 번이고 노래를 녹음하고, 또 녹음했다. 문득 이 음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 느낌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다 가도 혹여 라도 그가 기다릴까 싶어 서둘러 녹음 파일을 올렸다. 확인 표시는 1초만에 사라졌다. 역시 기다렸나 보구나. 괜스레 미안한 맘이 들어서 우는 이모지와 함께 늦어서 미안, 그렇게 말하면 그는 괜찮다 그랬다. 

 

  [이거 들으면서 오늘은 빨리 잘게. 석민이도 얼른 자.]

  [웅, 형두우.]

  

  형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형이 이 노래를 듣고, 좀 더 쉽게 잠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으면 이석민은 그대로 잠에 들었고, 그 날은 헤드폰을 쓴 양과 같이 음악을 듣는 꿈을 꿨다.

 

  *

 

  첫 통화는 생각보다 떨렸다. 벌써 한 달을 네 시마다 이야기 하면서 친근감은 극도로 올랐지만, 당장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머뭇거리다 웃으면서 정한이 형, 부르면 상대 쪽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어색하다, 너. 장난스레 붙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발음이 모호하고 귀여운, 동글동글한 느낌이었다.

 

  “그치마안. 처음이잖아, 우리 전화.”

  “난 너 목소리 엄청 들었는데.”

 

  반칙이다. 괜히 민망해서 웃다가 문득 자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아 반칙이야, 형. 그나마 오랜 기간 이야기 해 온 친근감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면, 그의 앙냥냥 발음이 귀여워서 남은 벽도 사르르 녹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플이고 나발이고. 채팅은 자는 지 안 자는 지에 대한 체크 사항일 뿐, 늘 밤마다 소곤소곤 전화가 당연한 듯 이어졌다. 육성으로 이야기 하는 내용들은 더더욱 쿵짝이 잘 맞았고, 결국 만년을 알아온 것처럼 둘의 친근함은 깊어졌다. 그러다가 결국은 먼저 만나자고 하는 것은 석민이었다. 정한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다 가도, 문득 소심한 목소리로 아 그건 좀 그런가, 하는 석민의 말에 약해졌고. 결국 그들의 약속은 일주일 후로 정해졌다.

 

  ‘너 나 만난 뒤에도 지금처럼 똑같이 대해 줄 수 있어?’

  “아... 솔직히 나 낯 좀 가리긴 하는데... 형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석민은 정한의 말에 딱히 특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정한의 걱정이 그저 우리가 어색할까 싶어서 그런 건가, 그런 생각만 했었을 뿐이었다. 그 단순함이 정한에게 더 긍정적인 답변이 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로. 그들의 만남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물론 그 동안도 지겹도록 전화하고 이야기 하면서.

 

*

 

  무슨 데이트를 하는 것 마냥. 묘하게 떨려 와서.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꾸미고 향수도 뿌렸었다. 흔쾌히 피자나 먹자며, 자신이 아는 맛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한 것 때문에 떨리는 것인지. 애써 피자 때문이라며 되뇌이곤 했었지만, 사실 피자 앞에서 잘 보이겠다고 잘 꾸미는 게 말이 되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석민은 스스로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로 약속장소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 보았다. 자신은 셀카로 프로필 사진을 걸어두었으니, 그가 대신 찾아주겠지 싶다 가도, 보지도 못한 그를 찾을 수 없음에도 주변을 둘러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설레이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뒤에서 툭툭 두드리는 것이 느껴져 뒤를 돌았다.

  아. 진짜 양 같다.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복실복실한 머리. 그리고 뒤늦게 닿은 시선은 그의 비현실적인 이목구비와 마주쳤다. 멍하니 보다가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형. 진짜 양이었구나.”

 

  첫 만남에, 첫 마디는 그것이었고. 그 어이없는 한 마디가 정한은 마음에 들었다.

  양 같은 머리는 석민의 낯가림을 순식간에 녹여 주었고, 대화의 주제가 되고 또 데이트의 시작이 되어 버렸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석민의 취향에 딱 맞았기에, 강아지 만지는 것 같다며 신이 나 이야기 하다 가도. 문득문득 어이 없어 웃는 정한의 얼굴에 괜스레 더 웃긴 이야기를 해보고 자신의 TMI를 더 이야기 해보기도 했었다. 다행히도 석민의 유머코드가 정한에게도 통하는 것인지 그 역시도 같이 웃다가 결국 피자가 식는 줄도 몰랐다.

  설마 피자만 먹고 헤어지면 어쩌나. 매일 같이 이야기 하며 자기 혼자 친근함을 쌓아 올린 정한의 마음에 자기가 들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을 했었지만. 생각보다 둘은 현실에서도 더더욱 쿵짝이 잘 맞았다. 피자를 다 먹고 나면 바로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사실 민트초코를 그리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던 그가, 도대체 왜 먹는 것인지 궁금하다며 같이 가자고 했었다. 흔쾌히 계속 자신과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그의 태도에 괜스레 또 안심하고. 신이 나서 자기가 쏜다면서 데려가 같이 먹다 보면, 전화 했던 여러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대화에 녹아 정말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것 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면 괜히 또 아쉬웠다. 괜히 옆에서 꾸물대다가 형, 오늘 진짜 재밌었어. 그런 말을 꾸물꾸물 내밀면 정한은 웃었다.

 

  “다음에 또 만날래?”

 

  그 말이 어찌나 반갑던 지. 석민은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다른 데 가보자. 그런 말을 하고 헤어져서는 집으로 가는 길에도 지겹도록 메시지를 보내고. 씻고 침대에 누워 또 전화를 하다 보면, 처음으로 정한 쪽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석민은 굳이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저 그가 처음으로 쉽게 잠들었다는 생각에 그저 혼자 설레하며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새벽 네 시에 문득 일어나도, 메시지는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 좋아서 바보같이 웃다가, 양이 아닌, 양 같이 생긴 정한과 같이 놀러 가는 꿈을 꿨다.

 

  *

 

  그와 방탈출 카페도 가고. 코인 노래방도 가고. 여러 피자 가게도 갔다가, 놀이공원도 가보고, 영화도 보고 연극도 봤다. 당연한 수순처럼 늘 이어지는 대화와 만남은 각자를 서로의 운명처럼 붙여 놓게 되었다. 우리 이미 10년 전부터 만나 왔었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같이 다니다 보면, 석민은 다른 친구들에게 여자친구 생겼냐는 타박까지 받았었다. 거기다 정한과 찍은 셀카를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해놨더니 정말 단단히 오해를 받기도 했었지. 아무리 아니라 해도 아무도 안 믿었고, 결국은 에휴 그렇게 생각해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문득 그 사실도 기분이 좋았지만 석민은 그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바보 같은 이석민은 그 기분 좋음이 일상 속에 아무렇지 않게 스며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스며든 윤정한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한이형 바보를 자처하며 옆에 있다가, 어느 날 사라진 그의 흔적 앞에서 뒤늦게 그 무게를 깨달았다.

 

  정말 뜬금없는 부재였다. 늘 옆에 있을 거라 생각 했었던, 늘 답장이 있을 거라 생각 했었던 텍스트도, 전화도. 당장 약속도 단숨에 사라졌을 때 문득 석민은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아, 우리.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분명 윤정한은 석민의 집주소며 가족관계, 어느 대학교에 다니고 어떤 학과에 다니는 몇 학년 인지도 다 아는데. 놀랍게도 석민은 그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얼굴, 목소리 밖에 몰랐다.

  물론 그게 그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분명 물었지만 정한은 그 때마다 능숙하게 대충 이야기 하며 다른 주제로 넘어가곤 했었으니까. 그 외의 것은 모두 다 알았다. 자신이 노래하는 것 중 더 빠르게 잠에 들 수 있는 곡이 무엇인지, 당장 그가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그가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그가 큰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당장 잠이 오지 않을 때 자신과 하는 밤 산책 역시 좋아한다는 것을. 자신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 했었는데.

  정말 꿈처럼 사라진 정한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전화 기록과 남은 텍스트 메시지 뿐이었고, 이건 그저 윤정한 이라는 존재가 꿈이 아니라는 사실 만을 알려주고 있었다. 

 

  *

 

  친구들에게 여자친구와 헤어졌냐는 물음을 들었다. 답지 않게 우울한 기색과 매번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건 아닌데. 문득 정한에게 있어서 자신의 무게가 이렇게 깃털 같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괜스레 더 서운했었다. 그건 자연스럽게 그의 눈물 버튼을 콕콕 찔렀고, 늘 불어 난 울음보를 꽉 쥐고 살아야만 했었다. 사실 꿈에 그가 나타났을 때 진짜 찔끔 울었다는 것은 비밀이었지만.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처음과 같이. 갑작스레 눈 앞에 윤정한이 나타났다. 무슨 미련 남은 전 남친처럼 첫 약속 장소에서 휴대폰만 만지고 있었을 때였다. 누군가 제 앞에 다가오길래. 갑자기 나타난 상대의 운동화 앞코만 내려다 보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보면 그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보글거리는 머리는 어디 갔는지, 외모가 더 돋보이는 생머리의 윤정한이. 석민은 멍하니 그를 쳐다 보다가 불어버린 울음보가 툭 터진 것처럼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정한은 처음엔 다소 놀란 듯 보였으나 이내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형 없이 지내 보니까 어때?”

  “...형이 너무 보고 싶어.”

 

  나 형 좋아하나? 바보 같은 이석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서운함과 허전함이, 결국은 좋아하던 사람에게 차인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는 것을. 울면서 그런 얘기를 덧붙였다. 나 형 좋아하나 봐. 정한은 웃으면서 애 다루듯 또 이야기 했다. 나도 너 좋아해. 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나 진짜 형 좋아하나 봐. 그런 말을 하면서 엉엉 울면 정한은 고개를 기울여 입 맞췄다. 알아, 나도.

 

  *

 

  자신이 정한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석민은 사실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였다. 윤정한이 양이 아니라는 사실, 혹은 감정은 이미 윤정한 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예민해서 자주 깨곤 하는 것은 물론 진실이었다. 그 역시도 잠이 오지 않아 액정만 누르다가, 휴대폰 속 온갖 광고 속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랜덤친구 어플을 보았다. 자신을 고정관념에 가두는 모든 정보들을 넣지 않은 채, 추천 친구 목록 만을 둘러 보는 것이 간밤의 습관이 되었다. 일종의 사람 구경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던 와중에 문득 자신의 취향인 ‘누군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솔직하게도 적어 넣은 그의 정보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다가, 문득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은 새벽 4시. 잠에 들지 못한 채 버틴, 새벽의 멜랑꼴리함이 부른 치기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답이 오지 않는다면 바로 탈퇴하고 어플을 삭제할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운명처럼 그에게서 답장이 온 것이었다.

 

  생긴 것처럼 착했고, 생각보다 재밌는 애였다. 새벽마다 보내는 메시지를 귀찮아 할 법도 한데, 그는 자신을 신경 쓰는 것처럼 매번 놓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다정함이 죄다. 그가 보내 준 녹음파일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묘하게 심술이 나서. 윤정한은 양의 탈을 쓴 채 작전을 짰다. 도리어 순한 양이었던 그가, 자신이 늑대여도 내치지 못하도록. 이 노랫소리와 다정함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보 같은 양 한 마리는 그 꾐에 넘어가 그를 만났고, 그의 일상 속에 자신을 우겨 넣는 것까지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가 피자를 좋아하고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역시 자신의 특성을 발견하고 그에 맞춰 주는 것에 매번 심술이 나는 것을 참느라 혼이 났었다. 나는 일부러 신상과 같은 정보들은 알려 주지도 않는데, 얘는 왜 당연하게 윤정한에 대해 더 잘 알아채고, 그에 맞춰 주는 걸까? 그 바보 같은 선함과 다정함이 극에 치달았을 때, 윤정한은 작전을 시작했다. 그에게 ‘길들인다’는 것이 무엇인 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이 관계에서 누가 어린 왕자였고, 여우였고, 장미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부재 속에서 정한 역시 빈 자리의 무게를 느끼며 이를 악 물었고, 이따금씩 그의 흔적을 하나 둘 다시 되짚어 나가기도 했었으니까. 그 사실이 다소 약 올랐었지만, 문득 첫 만남의 장소에서 다시 그를 만났을 땐. 정한의 심술도 벽처럼 녹았을 뿐이었다. 바보 같고 미련한, 저 솜뭉치. 제 밤을 매번 대신 세어 준 그가 혹여 눈물에 녹아 없어질 까봐. 미련해진 정한은 빠르게 그의 앞에 가 섰다. 숨바꼭질은 끝. 내가 너 봐준 거니까. 그러니까. 보고 싶었다고 얘기해줘. 석민아.

 

  형 없이 지내 보니까 어때?

  ...형이 너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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