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겸

[윤겸] 프시케, 프시케.

낡은 학원물+알오물. 짧은 글. (20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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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었어? 그 소문... 도서관 그, D구역 말이야.

 

  작은 마을 안. 그곳에 거의 숨겨져 있다시피 한 작고 낡은 기숙사는, 약간은 엄격한 종교의 규율로 옭아 맨 교칙이 존재하는 미션스쿨이었다. 그곳에선 동양인이 매우 적은 비율이었지만 학생들은 인종에 대한 호기심이 도통 없었다. 그 대신 알파와 오메가의 여부를 기민하게 따질 뿐. (그마저도 아닌 베타들은 동양인 만큼의 소수로 구성되어 그 사이에서 거의 그림자처럼 지내고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순결. 정결. 정한은 낡은 교칙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동양인 임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금발이 기이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빛 없는 무감한 눈길도 다소 눈에 띄었다. 모두가 은근히, 혹은 대놓고 그를 쳐다 보았다. 그건 역시나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 이라기 보다, 그 냉한 얼굴이 필요 이상으로 예뻐서. 혹은 그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냄새가 뜻하지 않게 우위를 점하고 있어서 였을 것이었다. 그는 늘 최대한 베타처럼 조용히 지내려 노력 했지만, 타고난 존재감은 근근이 여럿의 입에 떠돌 수 밖에 없었다. 전학을 온 순간부터 그랬고, 전학을 오기 전에도 그랬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늘 유난스러운 사람처럼 살아야 했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선 이걸 팔자가 세다고 말했지. 타고나기를 별처럼 태어나서, 아무리 조용히 편하게 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런 그이기에 이유 없이 흠모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그이기에 이유 없이 증오하는 사람도 있었다. 덕분에 우성을 시기하는 열성의 흔하디 흔한 음모를 자주 마주쳤었다. 그리고 윤정한은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 치고 그것을 그저 가만히 받아 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였다. 그가 이곳에 강제 전학을 오게 된 이유는, 그가 결국 참지 않아서였다.

 

  *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좁은 시골 구석에선 명문가 자식들의 콧대 높은 목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따라 붙는 눈길만 무시하고 아웅 한다면 자신이 원하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이다. 정한은 무기력한 눈으로 그저 한 곳에만 시야를 붙인 채 아직 마저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들을 생각했다.

 

  “Lee!”

 

  그리고, 전학 온 뒤로 제일 많이 들린 어떤 이름으로 생각이 미끄러져 갔다. 또다. 이 조용한 학교에서 자글자글한 소음 외에, 유독 크게 들리는 목소리와 이름이 있었다. 유독 자신을 쳐다 보지 않았던 어떤 키 큰 남자애. 정한이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쪽에 리라 불린 그 남자애가 활짝 웃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타입이었다. 늘 주변에 사람이 많은 놈들이야 많았지만, 대부분 부에 이끌려 혹은 힘에 이끌려 무리를 이룬 놈들이 대다수였었다. 허나 까무잡잡한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혼 나고, 목소리 높이다 시끄럽다 혼나는 저 애한테 부와 힘이 있을 리는 없어 보였다. 애초에, 냄새란 게 없었다. 무향, 무취. 그림자 같은 베타. 그럼에도 그의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리가 없으면 안될 것처럼 굴고, 늘 그의 뒤를 쫓아 다녔다. 

 

  정한은 그들을 쳐다 보다가, 문득 마리아 상의 초상화를 올려다 보았다. 자애라는 것을 표현한 얼굴에 태양처럼 빛 표현이 가득했다. 사람이 빛난다는 것은 그런 거구나. 문득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

 

  리, 라는 것은 성이었고 그의 이름은 석민 이었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에 다들 그를 리 라고 부르는 듯 했었다. 그는 다소 시끄럽지만 순했고, 좀 바보 같았다. 늘 바보를 자처하며 모두의 벽을 녹이고 번쩍번쩍 빛이 났다.

 

  “...”

 

  정한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를 알 리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은 있었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정한은 늘 그의 뒤를 눈길로 쫓다가 그가 사라지면 시선을 돌렸다. 그가 지나가면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게 신기해서, 한동안은 그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서관의 D구역에서 그를 발견했다. 낡은 손수건을 눈에 두른 채 가위를 쥐고 앉아서 덜덜 떨고 있었다. 넌 진짜 바보 같다. 정한은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애써 참고 그의 앞으로 갔다. 분명 근래 떠도는 미신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예전에 살던 나라에서는 칼을 물고 밤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 미래의 짝이 보인다 고도 했었지. 주변에서 속닥거리며 이야기 하던 것을 얼핏 들은 정한은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

 

  그는 겁이 많았다. 벌레를 가지고 와 그를 놀려도 그저 울상을 한 채 도망치며 웃음을 주는 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주제에 짝을 찾겠다고 친구들의 골림에 넘어간 꼴을 보니, 도통 친한 건지 괴롭힘을 당하는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누구세요?”

 

  인기척에 그가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정한은 문득 그를 바라 보다 바람 빠지듯 웃었다.

 

  “짝 찾아?”

  “...네?”

 

  베타인 그는 나의 냄새도 모른다. 늘 자신을 쳐다 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딱 한 번 자신을 쳐다 보았을 때가 있었지만, 그 땐 왜였는지 복잡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돌렸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너한테만 내 얼굴이 괴물처럼 보여?

 

  “나, 네 짝이야.”

 

  온 세상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자신에게만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정한은 손을 뻗어 창백해진 그의 손을 감쌌다.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고 마는 그 눈과 마주하고 싶진 않아, 손수건을 벗기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입 맞췄다. 잘게 떨리는 몸은 자신보다 조금 더 컸지만, 그럼에도 순한 그는 밀쳐 내지도 못한 채 얼어 붙어 있었다. 그렇게 몇 초간 입 맞추다가, 천천히 떼었다. 그가 손수건을 벗으려 손을 올릴 때, 힘을 주어 땅바닥에 눌렀다.

 

  “보면 안된다고 했잖아.”

 

  정한은 그대로 다시 얼어붙은 리의 모습을 우습게 바라보다가 그대로 일어서 도망쳤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무료한 일상에, 이석민은 윤정한에게 가장 재밌는 것을 던져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좋았다.

 

  *

 

  구설은 어느 나라에 전해지든, 대부분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짝을 찾기 위해 무언가 주술을 걸고, 주의 사항을 어기지 않는 것. 대충 들어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만, 짝을 찾기 위해 하는 주술이면서 얼굴을 보면 안된다는 주의 사항은 다소 웃기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 터무니 없는 주의 사항의 덕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 

 

  정한은 속으로 내기 했다. 구설에 의하면 앞으로 두 번은 더 도서관에 그가 나타나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가 계속 자신을 찾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 때는 복수처럼 그의 앞에 나서고 싶었다. 정말 자신을 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묻기 위해서.

 

  그리고 똑같은 시간, 도서관 구석엔 거짓말처럼 그가 있었다. 그 때처럼 조금 떨고 있었지만, 겁에 질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귓바퀴가 빨갛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새였다. 적막이 흘렀다. 그 모양새에, 정한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대로 걸어가 다시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정결. 하나님 앞에 순결을 지키고, 죄로부터의 단절을 지키는 것. 호르몬이라는 사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으면서, 얘는 왜 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일까. 정한은 그의 손에 깍지 껴 쥐고 좀 더 밀어 붙여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작게 젖은 소리가 엉기고, 깍지 껴 달라 붙은 손이 간지럽다는 듯 꼼지락거렸다. 너는 네 짝이 보이지 않는 누구라도 괜찮은 걸까? 그저 운명이라는 이유만 있으면, 누구나 괜찮은 걸까? 넌 왜 그렇게 순해 빠져있을까.

 

  그러다 문득, 정한은 그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느꼈다. 호르몬의 냄새가 아니라, 그가 친구들과 엉망진창으로 뒹굴던 풀 냄새. 긴장감에 어린 축축한 땀 냄새. 부드러운 피부에서 나는 파우더 냄새. 그 어떤 향으로 덮지 못하고 세상에 어우러진 냄새가 누구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

 

  그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쭈욱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민은 자신을 덮친 남자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 보고 있지 않았다. 늘 친구들과 엉겨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어 자신의 시선을 끌었다. 주의사항이, 저주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평생 나를 모른다면? 혹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짝이라 착각한다면? 별별 드라마들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흘러 가기 시작하면, 정한은 되려 욕심이 났다.

 

  세 번째 날에도 석민은 그 자리에 있었다. 순종적인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짝을 기다렸다. 여전히 자신의 짝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그가 날아가 버릴 수 있었으니까. 착한 프시케를 바라보던 에로스는 문득 그의 욕심을 가지고 싶었다. 나를 더, 욕심 내주었으면. 나를 더 궁금해 하고, 더 바랐으면. 그런 마음에 정한은 그에게 다가가 여느 때처럼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손수건을 내렸다.

 

  꾹 감은, 바보 같은 눈이 얼핏 떠지고, 시선이 오갔다. 놀란 듯 조금 커진, 말간 그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정한은 그대로 눈 감고 그의 손을 얽어 맸다. 구설과 다르게 도망갈 수 있는 것은 에로스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너도 나비처럼 도망가 버릴 수 있으니까. 그는 맡지도 못할 냄새를 가득 묻히며, 정한은 조바심을 냈다. 내가 정말 괴물이어도 떠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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