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겸] 나와 너의 가시나무 下
느와르물 조각글 연재. 설계자x운반책. (2024.03.10)
*
윤정한은 본디 유능했다. 어려운 집안으로 인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경찰에 합격했다. 머리가 빠르고 재치와 결단력이 있었다. 그런 그를 눈 여겨 보던 위에서, 더 이름이 알려지기 이전에 스파이를 제안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주변에 누구도 없는, 보호 받을 수 없는 천재는 빛깔 좋은 미끼였다.
자신의 동료가 죽고, 그에 대한 존경 하나 없이 비밀로 마무리 된 상부의 처리 결과 역시 알고 있었다. 어디든 믿을 수 없는 곳들 천지였다. 도겸에 대하여 증인보호 신청을 해볼까 생각해 봤지만, 이미 여기에 엮인 증인 하나가 살해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날은 악몽을 꿨다. 그 어디도 자신을 보호할 곳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도겸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건 다소 잔인했다. 윤정한은 그게 미친듯이 불안했다.
도겸은 이미 사건에 휘말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전에 정한 대로, 정한의 지시에 따라 거짓 정보와 진실된 정보를 섞어 남자에게 전했다. 그와 동시에 윤정한 역시도 이 바닥의 일을 늘렸고, 점차 점수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의 설계 스케일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자의 사업을 모방하여 시작한 신생 업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접촉도 잦아졌다. 일종의 스카웃이었다. 윤정한은 그것을 기회라 여겼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이용하여 여러 업체에 접촉하여 남자의 사업을 파헤치고 약점을 뒤졌다. 남자만 죽는다면 좋아할 사람이 꽤 많은데, 나는 죽으면 걔가 너무 울 것 같아서. 윤정한은 그 모든 일에 죽을듯이 매달렸고,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흘러갔다, 고 생각했다.
다만 사는 게 늘 수월하게만 흘러가지는 않는 게 다반사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알 수 없는 카드로 인해 일이 어그러질 것이라는 것도, 언제나 설계자로써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한은 도겸이 돌아오지 않는 빈 집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너는 돌아와야 하는데. 너 역시도 살아야 하는데.
뜻하지 않은 변수에 정한은 백방으로 그의 소문을 찾아 헤맸다. 깨끗이 쓸어낸 것처럼 그의 흔적이 없었다. 정한은 좀 더 머리를 굴려 도겸과 같은 포지션의 운반책을 찾아냈고, 그에게 경찰의 정보를 들려 보냈다. 직감은 정확했다. 그 쪽에서 정한을 데리러 왔다. 그 날 처음으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멍과 붓기가 가득한 도겸이 울고 있었다. 난 죽지도 않았는데, 네가 왜 거기서 울게 된 걸까.
석민은 정한이 짜 놓은 작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가 하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해냈지만, 단 한 번 그의 계획을 어겨야 하는 날이 찾아 왔다.
평소와 같이 만난 그 남자가, 윤정한을 죽이라고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라며. 이번 명령만 제대로 해내면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해주겠다고 했다. 살 집과 신분도 준다고 했다. 정한 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 했을까? 분명 하라고 했겠지. 그걸 아는 석민이었지만, 선택은 반항이었다. 그에게나, 이 남자에게나. 곧장 품에 숨겨둔 칼을 꺼내 그를 찌르려 했지만 살인은 커녕 누군가를 해쳐 본 적이 없던 그가 손쉽게 붙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정한은 그 사실을 남자에게 직접 전해 들으며 웃었다. 그래. 내가 죽을 거 같아서 울었구나. 결국은 그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을 여기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이게 사랑인가 보다 했다. 너도 나도 진짜 어떡하지. 어떡해야 할까?
곧장 정한은 남자에게 이중스파이를 제안했다. 경찰 쪽의 정보들을 주기적으로 전달하는 대신 이도겸을 놔주고, 말들을 직접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까지. 후자는 남자의 제안이었다. 네가 네 동료를 죽인 것처럼. 굴 속에 기어든 쥐새끼들을 직접 하나하나 처리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정한은 그 말을 들으며 바닥을 쳐다 보았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그에게 들어간 순간 어떤 표정을 했을 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겠다고 했다. 도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이젠 하고 싶은 거였으니까.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으면 석민이 울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되었다. 정한은 그런 그를 부드럽게 끌어 와 약통을 꺼내 상처를 치료했다. 부르튼 손을 끌어 입 맞추고 그 손을 끌어 가까워진 그의 입에 입 맞췄다.
“도겸아. 한 가지만 약속해.”
“...”
“너 만큼은 날 의심하지 마. 내가 뭘 해도 미워 하지 마.”
젖은 눈가에 다시 입 맞췄다.
“그럼 내가 너 구해 줄게.”
착한 그 애는 처음으로 싫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해 달라고 하지 않았을 거라고, 이런 데다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면서도 정한은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 자신이 동료를 죽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 만이 중요했다. 자신의 목숨 보다도, 본인을 그렇게 졸라 맨 인간의 윤리보다도.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정한이 이 모든 일들을 시작하는 데에는, 그만한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
정확히 1년이었다. 정한은 일수를 계산하고는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의 일상은 늘 같았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고발하고, 속이고 비웃고 죽이고. 수도 없는 과제들을 해오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꿈 속 창고에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꿈을 자주 꾸진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일어나면 자신을 잃어버릴까 붙들고 잠이 든 도겸이 보인다는 것.
윤정한은 그의 존재가 미친 듯이 불안했다. 오히려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한 것은 자신이었는데. 도겸은 본인이 자신을 지켜야 될 것처럼 굴었다. 바쁘게 어딘 가를 다니며 무언가를 숨기기에, 붙들고 그러지 말라 운 적도 있었다. 네가 없으면 이 모든 것들이 무의미했다. 도겸은 우는 정한의 머리를 끌어 안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 뒤로는 외출이 잦아들었고, 집에서 늘 정한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그렇게 바라던, 정착. 분명 바라던 정착이었는데. 정한이 모를 석민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석민은 그 사실이 다소 비참했다.
*
그렇게 정한은 수도 없이 일하고, 수도 없이 많은 계획들을 세웠다. 이전부터 접촉해 온 여러 업체들과 경로를 설계하고 단계를 짜냈다. 그는 여전히 탁월한 설계자였다. 그의 병적인 불안을 일으키는 모든 변수들을 계산하고 대비해냈다. 집착에 가까웠다. 이 모든 설계를 실패할 수 없다. 그 생각 만이 온종일 그의 그림자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 설계의 끝에, 정한의 앞에 다시 남자가 자리 했다. 계획대로였다. 일 년을 늘 상상하고 그리던 그 모습 그대로. 머리에 구멍 난 그가 자신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그 장면 그대로. 엔딩이 이루어졌다. 정한은 자신에게 튄 피들을 대충 쳐냈다. 문질러져 더 진해진 색들을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마음 속 창고에 시체 한 구를 더 올려 놓고 나면, 머리가 하애졌다. 수 년 동안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불안들이, 창고와 함께 모두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그 창고가 아프지도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 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매일 같이 누군가를 죽이고 돌아갔을 때엔 도겸이 그런 자신을 보지 않았으면 해서. 매번 옷을 갈아입고 피를 씻어낸 뒤 집으로 돌아갔었다. 허나 오늘은 그에게 남자의 피를 보여줘야만 했다. 집에 들어서자 쇼파에 앉아 있던 도겸이 멍한 얼굴로 일어섰다. 피하게 될까, 이번에야 말로 나를 미워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는 곧바로 달려와 자신을 안아 주었다. 그게 정한의 피인 것처럼 또 엄청 울었다. 네가 그렇게 우는데, 나는 왜 잠기지 않을까. 숨이 막히지 않을까. 오히려 갑갑한 속이 풀리는 것처럼 가벼워져서, 그를 마주 안아주었다.
모두 끝났어. 남자는 죽었고, 사업은 다른 회사에서 모두 흡수해 갈 거야. 나도 더 이상 안 가도 돼. 그냥 너랑 같이 지내도 돼.
반 쯤은 거짓말이었다. 곧 경찰이 그를 찾으러 들이닥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자신과 협력한 그 누군가가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분명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늘 그가 기다리는 이 집이 자신의 무덤이 된다면. 차라리 그걸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겸이 울먹이며 속삭였다. 형, 나 비밀이 있어.
석민은 고백했다. 형, 내 이름은 이석민이야. 이도겸이 아니라, 이석민.
석민은 자신의 다른 이름이 그를 이곳에 너무 오래 붙잡아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디도 가지 못하도록 붙든 자신의 이름이, 오래 묵고 썩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것이 아니어서. 그래서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고백했다. 차라리 그게 팔자라면, 그냥 우리 떠나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같이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들로 부터, 더 멀리 가자. 형.
그 날은 내내 무당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의 진짜 집과, 잃어버린 것들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백했다. 형. 나랑 같이 떠나자. 울음이 다 그치지 않은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고백했다. 형, 나랑...
결혼하자.
정한은 그대로 다시 그에게 입 맞췄다. 얼굴이 맞닿으면, 이번엔 누구의 눈물인지도 모를 정도로 다시 얼굴이 축축해졌다. 둘은 바보같이 서로를 붙잡고 엄청 울었다. 그리곤, 떠날 준비를 했다. 누군가는 그 길을 그리고, 누군가는 그곳에 데려갈 수 있도록. 그 날은 밤새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사나운 팔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는 서로를 껴안을 줄 밖에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가시같은 이야기들이, 그들에겐 해피엔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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