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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의 멍청한 정신에 대하여.

ㅎㅋ님 커미션 / 4725자

쿠르페락은 방금 청혼을 받았다.

혁명 전야의 날 파리 교외의 어느 성당에서. 사실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법이다. 청년은 수백번의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그저 웃어 넘기기만을 즐겨 했었으니. 청혼한 상대마저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함께 웃어 넘겼으니.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하필 아주 간단한 대답 ─예, 혹은 아니오.─ 하나를 내어 놓기 어려워진 이유는 그의 앞에 서 있는 이 아가씨가 몹시도 떨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어 온다.

"왜 내 청혼을 받아줄 수 없어요, 쿠르페락?"

"로라, 나는."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

가정, '만약'을 그리는 질문. 그 안에 무게를 지니고 어느 사건처럼 덜컥 들이닥친 것은 청혼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들은 말마따나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때로 새벽녘 혜성처럼 그저 사라질 영원에의 상상을 해보고는 하였으나.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쿠르페락은 아주 당황하였다. 그는 이 아가씨가 모든 것을 짐작했으리라 판단했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자신이 영원을 생각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저 그 장난스러운 순간이 좋아 반복해대는 것이리라 생각했던 청년은 그렇게 대뜸 들이밀어진 것 같은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쿠르페락은 사고에 자신이 흔히 대처하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 사이에요, 로라. 그렇다면 당신도 잘 알겠지요. 고양이들은 밤에 새어나오는 말을 다들 들으며 다니지 않던가요? 오, 이런, 그래서 나는 당신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뇨, 나는 몰라요. 지금은 모른다고 하고 싶어요."

그렇게 눙쳐 보려 들었던 시도는 무산된다. 쿠르페락이 로라의 표정에서부터 비롯된 감정을 목도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어느 분노에 가까운 마음, 일부 격렬함을 품은 요구. 활기 넘치는 정신은 이러한 혼돈의 때에 세련된 유머로 상황을 모면코자 하기도 한다. 그것이 청년 쿠르페락의 기질이었다. 그는 모두를 웃게 하였으며 두루 사람들과 편하기 지내기를 즐겼으므로. 그러나 그는 아직 이러한 유머들이 간혹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었다. 질문에 명확히 마주하지 않고서,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한 일말의 기대와 로라가 가진 희망을 전부 애매한 상태로 남겨 두려는 행태는 먹히지 않을 셈이다. 이 불안한 진실은 쿠르페락이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만든다. 쿠르페락은 활기찬 친구 역할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농담과 즐거운 헛소리가 아니라 청혼에 대한 답이다. 그래서 청년은 약간 말을 더듬어 들었다. 낯선 기분이었기에.

"나는, 당신의 청혼을 받아 줄 수가 없어요, 로라. 내게는 할 일이 있고, ... 나는 그것을 먼저 좇기로 내 동지들과 결의했으니까. 당신도 뮈쟁을 드나들며 알았겠지만 우리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느 이상을 실천하려 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나는 당신과 지금 당장의 청혼에 대해 논할 수가 없는 입장이 됩니다. ... 내 친구,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으리라 믿어요. 당장은 말예요, 지금은."

"그냥 말이라도 해 줄 순 없어요?"

"로라,"

"그냥 청혼이잖아요, 쿠르페락. 그냥 청혼일 뿐인데......"

마주한 얼굴 사이로 바람처럼 어떤 감정들이 흘러간다. 그들이 혹시나 잡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그러므로 일순간 모든 것은 의미가 있어진다. 수백 번의 청혼과 그들이 함께 나누었던 웃음들. 시대건 조국이건 간에, 그 모든 것을 굳이 밝히려 들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 그저 말 한마디만 내게 내어 줄 수 있겠느냐는, 어느 간절함 같은 것이. 그간의 시간을 모두 담아 무겁게 두 사람을 누른다. 마치 이 공기를 차마 숨쉬기 어려운 것처럼 조용히 입을 닫은 채, 쿠르페락은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는 것으로 그 마음에 답하였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은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는 몰랐다. 자신이 로라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 오만한 정신은 그것들에 대해 굳이 답할 필요 없다고 결론내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흔히 그러했다. 조국과 시대를 제외하고서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어느 전염병 같은 사상들, 그 멍청한 정신들. 그러면서도 진실함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들. 쿠르페락은 실은 사랑을 알지 못하면서 잘 안다고 떠들어대던 류의 인간일이지도 몰랐다. 어찌 보면 그보다도 로라가 훨씬 더 사랑이란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리라. 대신 그는 우정에 대해 잘 알았다. 사람 사이에 따스함이 돌게 하려면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도. 그가 유머라던가, 웃음이라던가 하는 도망치는 길의 방식을 써먹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쿠르페락의 진실함과도 같았다.

"로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는 당신이에요. ... 그래서 나는 거짓말으로라도 답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청혼이란 건 가벼운 일이 아니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떤 무거운 약속을 하게 되는 셈이니까요. 아니, 내가,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그런 약속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결정하기에는 때가 적절치가 않을 뿐이고, 나는 다른 것들을 고려해야만 해요. 내일 장례식에서 어디에 서 있을 것인지, 바리케이드를 칠 곳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지휘해야 하는지. 당신도 알다시피 전투와 결혼이란 것은 함께 놓일 수가 없는 것들이라서, 아직은 당신과 부케나 웨딩드레스를 이야기 하기에는 어려워요, 정말로."

품에 안긴 아가씨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 혹은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표하지 않는다. 청년을 마주 안아 드려 하지도 않는다. 그제서야 쿠르페락은 약간의 슬픔에 휩싸였다. 혹여 자신이 청혼에 대해 굴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자신의 친구에게는 상처가 되었을까 두려워서.

"물론 괜찮은 때였다면 나는 당신이 한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의 미래와 당신의 미래를 함께 둔 채 우리 각자의 미래와 대조해 보았을 지도 모르지만. ...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요. 로라, 정말이에요."

"됐어요."

변명 같은 말도 먹히지 않을 셈이다. 훌쩍이는 소리가 난다. 로라는 주먹을 들어 그 두텁고도 얄팍하기 짝이 없는 정신을 두들긴다. 쿵, 쿵, 가슴께 너머로 전해져 오는 통증들은 가만히 안은 채 쿠르페락은 로라를 토닥였다. 그는 일순간 로라가 이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받아들여진 거절에 마음이 아파 본 적 있는 이들은 알 것이다. 그럴 때에 멍이 든 것처럼 얼얼해지는 감각을, 쿠르페락은 지금 그러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는 아팠으며, 한편으로는 슬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렇게 되지 않으면 도저히 풀 방법이 없노라고 확신했다. 그는 신의 얼굴을 보기를 선택하는 대신 민중의 얼굴을 보기로 택한 정신이었으므로.

"성당에서 청혼을 거절당한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야."

농담, 늘 그렇듯이 가벼운 말투로. 울음 섞인 것을 제외하면 다를 바 없는 어느 농담 하나에,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그곳에서 정상 궤도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고집 세고 정열적인 정신이 기어이 그곳에 되돌려 놓았다. 그래서 쿠르페락은 안도의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으나, 그 얼굴을 로라가 보았을지, 보지 않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대신 쿠르페락은 하던 대로 자신의 정신을 그녀에게 내어 주었다. 애정이라는 이름 하에.

"거절이 아니에요. ... 그러니까 나랑 약속 하나 해요."

"..."

"파리를 떠나기로."

"언제를 말하는 거죠, 나는 몰라. 내가 갈 지, 안 갈지."

"당신도 잘 아는 날에, 그러니까..."

청년은 손을 들어 아가씨의 머리에 얹었다. 이렇게 지금이 마무리되리라 생각하면서.

"약속해요. 아주 위험해질지도 모르고, 나는 당신이 걱정되니까."

"..."

긴 침묵이 이어진다. 로라는 울음을 참으려 아주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쿠르페락은 그녀를 다독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가 대답을 내어 놓았다. 약속할게요, 그 말 한 마디가 끝이었다. 그들의 사이가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쿠르페락은 그 어떤 약속도 내어놓을 수 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으며 로라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청년 쿠르페락은 사려깊음을 가장한 굳은 심지를 지닌 사람이었으며, 어쩌면 자신 안의 불안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오만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가 정말로 설득되었다고 믿었다. 그녀가 잠시간 파리를 떠날 것이라고.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지금 그에게 하등 중요할 것 없는 사안이다. 쿠르페락에게는 할 일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이는 마치 1832년과도 같았으리라.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어느 떨림이 은연중에 흐르고 있는 그러한 시대. 한 쪽에게는 그것이 1789년과 같은 혁명적 떨림이었으나 한 쪽에게 그것은 그저 자신이 지닌 마음이라는 진실한 선물 하나일 뿐. 그 두 가지가 어긋난다. 사실 아가씨는 설득되지 못했다. 로라에게 조국과 시대 같은 것은 그저 알기만 하면 충분한 요소들이었으므로. 쿠르페락은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하려 든 것이나 다름없다. 대신 이 청년은 자신의 존재, 그러니까 로라가 아끼고 애정하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 충분함을 뛰어넘어 아주 중요한 것으로 될 수 있으리라고 믿은 채. 어느 저돌적 정신이 늘 그렇게 하듯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받아들여 달라 요구한 것이며, 아가씨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용과 행위는 때로 다른 법이다. 그것이 그들의 사이를 달라지게 할 것임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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