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새로 바른 석회 벽. 

ㅂㄹㅇㅅ님 커미션 / 공백 포함 11781자


새로 바른 석회 벽 앞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석회 벽은 새로 칠해질 계획이 없었다. 분명 저 벽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약간 때가 탄 흰빛 위에 몇 가지 회화들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저 벽은 새로 칠해졌다. 건물의 골조와 살덩이처럼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붉은 벽돌을 가리기 위해. 불편하게 흰 빛을 뿜어내며 덜 마른 석회 냄새가 풍기는 벽 앞에서 알버트 웨슬리와 헨리 지킬 박사는 논쟁을 하고 있었다.


지킬이 초대장을 보냈을 때 어터슨과 웨슬리는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그의 저택에 발을 들였다. 여상한 저녁 식사─한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를 마친 뒤였고, 어터슨은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머리가 복잡하다고 양해를 구하며 먼저 자리를 떠나겠다는 정중한 인사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는 어쩌면 어떤 질문들을 지킬에게 묻고 싶었을지도 모르나, 웨슬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 웨슬리는 약간의 위장 문제를 호소하며 음식을 거의 먹지 않은 상태였으나 지킬이 그에게 술 한 잔을 더 권했기 때문에 남았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학문적인 것이었으므로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공격성도 드러나지 않는, 아주 ‘신사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터였다. 


“나는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겠네.”


헨리 지킬이 먼저 손을 휘둘렀다. 그것은 그의 가슴께와 목 사이에서 이루어진 아주 작은 몸짓에 불과했다. 신호 같은 것.


“들어 보게, 웨슬리. 자네가 지금 말하는 건 선악이 지식의 영역에 대한 것이라는 우리의 논조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과 다름없어. 본능이 지식에의 탐구를 방해한다는 것도 옛 논리일세. 우리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늘 그렇듯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네.”

“자연을 길들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을 수많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알버트 웨슬리 박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아주 약간 고양되어 있었다.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면 무신경한 사람은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느끼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변화였으나, 헨리 지킬은 그의 친구였기에. 그는 웨슬리가 자신에게 왜 반박하려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띈 채 진이 담긴 작은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하물며 인간마저도 거대한 집단이 되면 통제할 수 없게 돼. 법이란 그래서 생겨난 걸세. 통치자는 통제하기를 원하네. 그걸 도울 도구를 연구해낸 것이 법이라는 실체로 나타난 것이지.”

“그게 내가 말한 길들임과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자네의 의견을 지나치게 고집하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닌가.”

“내가 자네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건 자네의 논리에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야.”

“자네 취했나?”


웨슬리의 시도는 사소했으나, 지킬에게는 먹혀든다. 그는 그가 취했을 때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알았다. 분명히 그는 지킬의 의견을 꺾고 싶은 다소간 경쟁적인 학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내뱉어 놓고서도 스스로가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나는 것이다. 


“미안하네, 친구여. 자네의 이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

“지킬, 나는. … 자넨 포도주를 마실 땐 취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나.”


변명처럼 웨슬리가 내뱉었으나 지킬의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기이한 충동이 그에게도 목도된다. 오늘 식사 자리에서 헨리 지킬이 포도주 대신 진을 꺼내 들었을 때 어터슨은 지킬에게 약간의 경외심을 표했으며, 웨슬리는 그 싸구려 술, 그러니까 뒷골목 서민들이 마시는 술의 냄새가 퍽 역겹다고 여겼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일 라니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 쾌활한 목소리를 지나치게 크게 높이며 그들이 ‘거칠게 놀았던 적’의 추억을 꺼내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기만 했었다면. 그랬다면 이 저녁 식사 자리는 그들이 머리가 센 신사들이 되기 전 혈기왕성한 젊은이 적 저질렀던 일들의 추억으로 채워진 여흥의 자리가 되었을 텐데. 라니언은 자리에 없었다. 고요한 침묵 사이에서 그들, 아니, 지킬 박사가 라니언을 위한 건배를 들었고. 어터슨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웨슬리는 지킬이 그것을 의도했음을 알았다. 포도주 대신 진을 가져오는 것. 그의 친구가 술을 바꾸어 오늘의 자리를 다소간 금욕적인 곳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시도에 대하여 알버트 웨슬리 박사가 느낀 것은 약간의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지킬이 기어이 그에게 술 한 잔을 더 권했을 때 그는 얕은 숨을 삼키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것은 반드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터다. 친구에 대한 의무감.


“자네도 자네답지 않군, 웨슬리.”


지킬이 그렇게 말했을 때, 웨슬리는 다시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희고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손가락이 양 팔을 감싼다. 그러나 어깨를 보았을 때 그것은 자신만만한 몸짓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방어적인 태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한 건 자네야.”


헨리 지킬이 투명한 알코올이 담긴 잔을 소리 내어 내려둘 때 파열음이 울린다. 그 소리에 웨슬리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고. 그들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잠시간 나이 든 박사들 속에 든, 그 얇은 껍데기 속에 뒤채는 기이한 덩어리를 느꼈다. 그것을 느끼는 감각은 공유된다. 


“왜 오늘 식사 자리에서 포도주를 들지 않았지?”

“어터슨은 홀로 있을 때 진을 마시는 류의 사람이지 않나. … 친우들은 닮아가는 면이 있네.”


웨슬리는 세 겹의 옷이 덮인 자신의 팔위를 긁어내리는 손톱 아래 짓뭉개지던 섬유의 감각에 퍼뜩 고개를 내리고 마룻바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그는 혓바닥 위에서 이지러진 사실 하나를 삼키고자 구역질을 감내하는 중이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무언가 숨기는 데에 능통했으나 지금은 그것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이 방 안에는 숨겨진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지킬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네가 내게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웨슬리, 이유 없이 친구를 비난하지 말게나. 내가 자네에게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다고…….”

“왜 포도주를 들지 않았나. 지킬, 나는 이것이 우리가 여상하게 즐기던 저녁 시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네. 자네가 진 병을 꺼내 왔을 때 어터슨의 표정을 보았지 않나. 나를, 그건 마치…….”


이제 낯선 생명체의 우화 직전에 보이는 움직임처럼 무언가 그 안에서 꿈틀댄다. 거의 완성된 몸체를 가지고 번데기 속에서 껍질을 긁어 대는 나방의 몸부림처럼. 지킬이 양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을 때 웨슬리는 그가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 위에 선명하게 남은 긁힌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벽난로 불빛에 비추어 졌을 때도 명확해지는 자국. 웨슬리는 일순간 그것이 준 고통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 글쎄.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다. 알렉산더 루인의 것이다. 


그것이 번개처럼 그를 꿰뚫고 지나갔다. 고통. 비쩍 마른 가운뎃손가락에 끼어진 반지와 우악스러운 손길 아래 후려갈겨진 따귀 한 대. 상한 데 없는 건강하고 싱싱한 젊은이의 이빨이 외력에 의해 입 속 연약한 살을 짓이겨 찢어낸 덕에 바닥에 뱉어낸 타액 속에는 붉은 혈액이 섞인다. 마룻바닥 위에는 타다 만 석탄이 뒹굴고 있었다. 공기 중에 죽은 생물의 몸이 굳어진 것이 타는 냄새가 난다. 죽음, 이 방 안의 모든 것은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죽은 나무로 된 가구, 숨 쉬지 않는 금속, 루인이 고개를 처박고 있는 이 양탄자조차도. 강제로 죽음의 냄새를 벗겨낸 짐승 가죽을 장식이라며 깔아 둔 채 으깨어진 생명을 동굴에 처박아 발효시킨 것을 포도주라 부르고 들이키는 인간의 유희, 그 기가 막힌 흉내놀이의 도중에 갑자기 그 두 마리 짐승은 피를 보아야겠다는 갈증에 시달리던 차였다. 

두껍고 값비싼 카펫 위에 자국을 남기며 타들어가던 석탄을 맨손으로 주워 든 이는 알렉산더 루인이었으며. 그가 그것을 길고 검고 치렁치렁한 에드워드 하이드의 머리칼을 향해 내던졌다. 그 매캐한 연기가 살아있는 것에 가 닿을 때에서야 그들은 숨 막히도록 축축하고 무거운 그 장막을 스스로 찢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전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독한 머리카락 타는 냄새와 함께 귀청 찢어지는 괴성이 울리고, 루인은 황급히 창문으로 달려가 그것을 걸어 잠그었으며,


“어터슨이 자네가 라니언의 장례식에 오지 않은 일에 대해…… 궁금해 했네.”


지킬이 그렇게 말했을 때 웨슬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불길한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라도 되는 양 그를 바라보았다. 손끝에 걸리는 녹슨 금속의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입천장과 후두개 사이로 연기처럼 싸구려 진의 향기가 들어찬다.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마주 앉아, 짐승 가죽으로 된 의자에 기대어 서로의 테이블 위에 진 한 잔을 더 놓아 둔 채 잠시간의 침묵이 사이를 훑고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자네가 왜 우리의 오랜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는지 물었어.”

“지킬, 자네는 무어라고 답했지?” 

“……”


그들은 냄새를 맡고 있었다. 덜 마른 석회 벽과 장작이 타는 냄새. 잔에 담긴 비릿한 알코올의 향, 그 사이로 풍겨왔던 지독한 탄내.


그것은 짐승 시체의 썩어가는 악취와는 분명 다른 냄새였다. 잘라내어도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신체의 말단 부위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하이드는 자신의 머리칼이 타 버린 것에 대한 분노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알렉산더 루인이 창문과 덧문을 걸어잠그고 몸을 돌렸을 때 하이드는 손에 부지깽이를 들고 휘두를 만반의 준비를 마친 터였다. 다만 그가 아직 행동을 취하지 않은 이유는 루인을 돌려세운 채 쇳덩이로 그를 후려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이 눈동자에 드러나는 것을 똑똑히 보기 위해서 그는 기다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검은 부위와 흰 부위 사이에 드러난 실핏줄을 시각 안에 잡아채는 순간 그는 부지깽이를 휘둘렀다. 탄내와 더불어 살점 뭉개지는 둔탁한 소리, 어금니 사이로 으깨져 새어나오는 고통의 비명이 작은 삼중주를 이룬다. 손에 지휘봉을 든 자는 에드워드 하이드였다. 그는 연주를 계속하려 드는 막무가내의 마에스트로이다. 하이드가 외친다. 그 여자가 좋아하는 거야, 그는 씩씩대고 있었다. 루인은 알고 있다는 몸짓을 취하며 붉은 액체 흐르는 코를 쳐든다. 그래서?

하이드는 부지깽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러댄다. 박자 잃은 지휘자 아래 불협화음이 나는 것은 당연지사이며, 그렇기에 루인의 입에서는 욕설과 저속한 말이 뒤섞인 불유쾌한 행진곡이 노래된다. 그 여자도 자넬 부지깽이로 두들겨 패는 걸 좋아하지, 안 그래? 하이드가 외친다. 내 머리카락을 태우면 부인이 쓰다듬을 게 사라진단 말이다! 루인이 코웃음을 친다. 고통과 경련이 섞인 손으로 바닥을 기면서 고양이처럼 등을 구부리고 있다. 친우여, 자네 꼬락서니가 우습기 짝이 없다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군, 에드워드 하이드가 그 짐승의 머리를 쥐어잡은 채 창문턱을 향해 걸어간다. 루인은 비웃고 있다. 곧 그 비웃음 소리를 멈추고자 하는 행동이 반복된다. 이제 모든 행위는 절정으로 향해 간다. 두개골이 석회 벽 위에 부딪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지킬 박사가 침묵한다. 그들은 의자에 기댄 채 잔에서 풍기는 알코올의 냄새와 아직 덜 마른 석회의 눅눅한 냄새를 함께 들이키고 있었다. 일순간 웨슬리는 지킬이 자신의 잘못을 숨겨 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가 어터슨의 앞에서 자신이 라니언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리적 변명을 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은 증명되지 않은 생각일 뿐이다. 혹은 알버트 웨슬리 그 자신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헨리 지킬 박사는 눈길을 새로 바른 석회 벽 위로 돌린다. 그는 석회 냄새 사이로 혹여 썩어가는 짐승 시체의 시취가 풍길까 숨을 잠시 멈추었다 뱉어내었다.


“자넬 비난하려 한 것이 아니야, 웨슬리.”

“누가, 자네가? 혹은 어터슨이?”

“……우리 둘 모두가.”

“……”


헨리 지킬이 시선을 돌린다. 알버트 웨슬리는 마치 공기가 첨예한 것이라도 되어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떨고 있었다. 라니언 박사의 죽음. 그 앞에 세 증인이 서 있다. 선지자의 탄생 설화처럼, 세 동방박사는 말구유 대신 친구의 관 앞에 서서 그 안에 담긴 것을 본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 다만 차갑게 식은 오랜 친우의 썩어가는 육체가 아니다. 누군가 탄생시켰고 이제는 스스로 그 태를 찢고 나오려 드는 어떤 것. 불길함. 뒤틀림. 생명 얻은 악. 한 박사는 그 앞에서 눈을 돌렸으며, 다른 이는 그의 유언을 받아들었고, 또 다른 이는……


“라니언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날 비난하려 든 게 아니었단 말인가?”

“웨슬리, 제발.”


파리한 지킬 박사의 얼굴 위로 박쥐같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간다. 그는 손을 떨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웨슬리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들 모두 그 안에 꿈틀대는 새벽 나방의 징조를 느끼고 있다. 불길한 죽음의 표식을 등에 진 생명체. 숨을 들이키면 그곳에는 불길한 냄새가 있다. 그 냄새를 맡고 모습을 본 자는 공기 속에 든 병을 들이키는 것과 같이 시들어간다. 그러니까 마치 라니언 박사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감염된 것이다. 그가 들이킨 것은 진실이었다. 자신의 친우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추악한 진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려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천 찢어지는 소리가 이어진다.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루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느 쪽이던 귀를 긁기에는 안성맞춤인 불쾌한 소리인 것을. 분에 못 이긴 하이드가 그의 목을 조르려 들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손 안에 헐떡이는 울대와 숨통을 쥐고 있는 것을 즐겨 했으므로. 그래서 루인은 하이드가 자신을 돌려세워 몸을 숙이는 틈을 타 하이드가 입은 기다란 코트 자락을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가 넘어지며 어깨로 테이블을 쳤고 충격은 그대로 테이블에 전해져 그 위에 있던 포도주 병을 바닥에 나뒹굴게 한다. 하이드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이 루인은 기어가듯 몸을 숙여 병을 집어 들고 자신의 두개골이 내리쳐졌던 바로 그 창문 턱 위에, 단두대의 칼날처럼. 단숨에 내리쳐 깨어낸다. 

석탄을 집어 들었던 손바닥에 잡힌 물집 위로 포도주가 젖어들었다. 소매로 성마르게 얼굴을 적신 피를 문질러 내며 루인이 하이드를 비웃는다. 부인께서 나를 죽이기라도 하신다고 했나? 하이드가 이를 갈며 그르렁댄다. 그 여잔 그렇게 할 수 있어. 루인이 깨진 병을 내리꽂기 전에 하이드가 몸을 굴려 피한다. 분명히 깨진 유리 아래로 살점이 짓눌리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래서 라니언 앞에서 그 짓을 저질렀나? 이제 고양이처럼 바닥을 기는 것은 그이다. 루인이 가파른 숨 사이로 조소하며 하이드의 셔츠를 간신히 찢어낸 병을 쳐들었을 때, 하이드가 코끝으로 웃음소리를 내었다. 점차 그것은 숨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끝내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 박장대소와 비슷한 소리가 된다. 루인은 그 웃음을 들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또한 하이드의 얼굴에 드러날 고통을 목격하고 싶어 안달이 난 지경이었으므로. 하이드의 윗니가 드러난다. 양 귓불에 닿을 만큼 늘어난 입과 그 사이로 보이는 붉은 살덩이와 흰 이빨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렸다는 듯 한 만족감을 담은 것일 터이며. 루인은 창자가 뒤틀리는 불쾌감을 느끼며 손에 쥔 병을 고쳐 쥐었다. 

살인자가 말한다. 라니언의 표정을 자네가 봤어야 하는데. 살인자가 답한다. 자네 얼굴을 보는 걸로 충분할 것도 같아. 날 직접 죽여 보지 그래? 라니언처럼? 그건 직접 죽인 게 아니지 않나? 그래? 할 수 있기나 한가? 자넬 죽여서 저 벽 속에 묻으면 아무도 알지 못할 텐데.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저질러서 증명해 보지 그래. 그래? 그렇다면 박사의 방 벽에 자네를 묻어 버려야겠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자네가 두 목숨에게 죽음을 선고할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대단한 오만이군! 방을 빙빙 돌며 콜로세움 속 짐승들처럼 웃던 살인자가 살인자의 목을 후려쳤을 때 비쩍 마른 어깨 위로 찢어진 코트가 미끄러져 떨어진다. 루인은 핑 도는 듯 한 고통을 느꼈다.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웨슬리가 이 일을 안다면 즐거워하리라. 그는 고통 속에서 낄낄대며 손을 뻗었다. 그곳에 자신에게 명백한 살의를 뻗친 친우가 있다. 


알버트 웨슬리는 기어이 양 손에 얼굴을 파묻는 채 숨을 헐떡대었다. 불규칙한 숨소리는 잦아들 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입고 있었다. 여러 겹의 옷들이 그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손바닥에 숨기려 들었던 눈을 들자, 창백한 헨리 지킬 박사가 손을 무릎 위로 늘어뜨린 채 있는 것이 보인다. 


“라니언의 장례식에 오지 않은 자네에 대해 어터슨이 불만스러운 말을 했네. 그래, 자네가 예상한 것이 맞아. 웨슬리, 그러나 나는. 나는 자네의 얼굴이 그곳에 없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 내가 왜 자넬 비난하겠나?”


지킬 박사는 무언가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속삭인다. 누군가 자신의 죄를 들을까 두려운 것처럼.


“오늘 식사 자리에서 어터슨은 자넬 보지 않았어. 웨슬리. 나를 보았네.”


기어이 이가 떨리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헨리 지킬은 자리에서 몸을 움츠렸다. 구둣발 아래 마룻바닥의 자국이 스친다. 새로 칠한 석회 벽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석회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 안에 들었을 것이 분명한, 그가 느끼기에 반드시 그 곳에 있을 악취를 맡는 것이다. 시체. 하이드는 루인의, 혹은 웨슬리의 시체 대신 짐승을 분풀이로 짓이겨 놓았다. 지킬은 그것을 덮었다. 그들은 드디어 서로의 ‘그것’에 대해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어.”


알버트 웨슬리는 자신의 친구를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약간의 불안감에 진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려 했고, 맞은 편에 앉은 헨리 지킬이 자신과 정확히 같은 순간, 같은 손을 뻗어 진을 들이키려 했을 때 참지 못하고 잔을 소리 나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웨슬리는 죄악으로 떨리는 지킬의 손끝을 보며 자신의 주름진 눈가 위를 성마르게 문질러댔다. 경련하는 피부 아래로 나이 든 자의 신경과 근육이 있다. 그는 가끔씩 그것이 지나치게 두껍다고 여기곤 하였다. 존재와 추악함 사이에서. 웨슬리가 입을 연다. 


“……내 서재에서. 논문을 읽다 잠시 잠들었네, 안경을 집어 쓰려고 했을 때 어지러움을 느꼈어. 거울을 보니 그 자가 되어 있었다네. 어떻게 이런 일이…….”


오, 웨슬리. 지킬 박사가 완전히 지친 목소리로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여전히 한 손을 이마 위에 올린 채. 웨슬리가 뒤로 끌어 숨기려 드는 어떤 짐승의 냄새를 그도 맡은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지?”


알버트 웨슬리 박사는 그 질문에, 약간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불안한 손가락으로 진 잔을 집어 전부 그것을 비워낸 후에야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소호 거리로 갔네. 그곳에서 하이드를 만났고,”

“깨어나 보니 무언가를 파괴해 놓지는 않았나?”

“지킬,”

“우리에게는 대책이 필요하네, 웨슬리.”

“자네에겐 ‘그 부인’이 있잖아.”


웨슬리가 다소간, 그답지 않은, 그러니까 약간의 절박감과 어떤 다른 감정을 담아 외치고, 헨리 지킬이 행동을 멈춘다. 연속적인 행동이 웨슬리의 언어를 막아섰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이마 위에 얹어 놓은 손을 장막처럼 내려놓았을 때 그는 지킬의 눈이 절망적인 바다 한 가운데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드와 지킬을 완전히 동일시한 문장이 두 친우의 사이를 벽처럼 갈라놓는다.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웨슬리는 변명 비슷한 것을 하려 입을 열었으나 지킬이 고개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 명백한 대화의 거절에 웨슬리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의자에 등을 댄 채 굳어졌다.


알렉산더 루인이 늘어진다. 나뭇결 위에 칠해진 붉은 액체의 난장이 에드워드 하이드의 흥취를 돋우고. 그는 미동 없는 몸뚱이를 발끝으로 툭툭 치다 머리채를 쥐어잡아들었다. 턱 끝으로 굴러 떨어지는 핏방울이 카펫을 적신다. 그 머리를 두어 번 흔들면 흰자가 보이게 까뒤집어진 눈동자가 제 자리를 찾느라 숨과 함께 흔들리고. 드디어 하이드는 분노와 기이한 만족감이 뒤섞인 얼굴로 목을 긁으며 입 안 가득 가래침을 끌어 모아 루인의 얼굴 위에 뱉는다. 퉤. 약간 뜨뜻하고 질척한 액체가 피와 함께 루인의 얼굴 위에 칠해졌을 때. 그는 한 손으로 알렉산더 루인의 뺨을 감쌌다. 어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에드워드 하이드의 목소리를 따라 돌아온다. 곧 하이드의 괴상한 낯짝이, 뒤틀어진 몸뚱이가 바닥에 나뒹굴고, 루인이 그 위에 올라탄 채 하이드의 목줄기를 움켜쥐려 손톱을 세웠다. 한 판 더 하자는 말이군! 마룻바닥 위의 하이드가 킬킬댔을 때 루인 또한 벙실대는 어린애처럼 숨통을 짓누르며 천진한 잔인성으로 외친다. 죽지는 말라고, 친우여. 인간의 몸이 풍기는 체취와 죽음이 어우러진 방에서 그들은 한 몸으로 엉킨 채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얼룩이 남을 것이 분명한 핏방울들이 불규칙하게 튀어나간다.


석회 벽 위로도 작은 얼룩이 배어나온다. 나무껍질 사이로 대가리를 쳐든 작은 기생 짐승처럼.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 작은 갈색 얼룩이 물기를 타고 두텁게 칠해진 석회 사이로 번지고 있다. 냄새가 풍긴다. 악취. 알버트 웨슬리와 헨리 지킬은 그들이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해 내고야 말았다. 헨리 지킬 박사는 짓이겨진 짐승 시체와 드러난 건물의 살점 앞에 놀라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참회했다. 그러나 그는 벽을 새로운 석회로 칠해야만 했다. 알버트 웨슬리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음에 수없이 많은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새벽녘 무릎을 꿇은 채로 빌었으나 곧 그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기도를 비웃는 그것을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약을 마시고 원래대로 돌아오면, 그는 다시 나이든 몸뚱이를 셔츠와 조끼로, 재킷으로, 코트로 가려든 채 사람들 앞에 나섰다. 새로 바른 석회 벽 속에는 검은 고양이의 시체가, 아니, 어쩌면 무엇인지 모를 시체가 들었다. 이제 그 장소에. 벽에 덕지덕지 묻어 미처 긁어내지 못한 털과 내장이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곳 바로 앞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다. 


“약을 더 주도록 하겠네.”

“……자네 쓸 것도 모자라다고 하지 않았나.”

“또 다시 자네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지킬 박사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갈라진다. 웨슬리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감쌌다. 그가 문장을 더듬으며 사과의 말을 꺼냈을 때 지킬이 몸을 일으켰다. 눈동자가 벽난로 불빛에서, 완전히 고개 숙인 자신의 친우에게, 다시 새로 바른 석회 벽으로 향한다. 


“자네가 저 벽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나도 바라지 않네.”

“……”

“일어나게, 웨슬리. 연구실로 가지.”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이 창문 너머로 보인다. 알버트 웨슬리 박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고개를 쳐들고 석회 벽을 바라보았다. 그도 갈색 얼룩을 목격한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어떤 발톱 세운 감각이 있다. 서슴없이 자신을 찔러 낼 어떤 죽음에 대하여. 그는 충동적으로, 덜 마른 석회 위에 손을 대었다 그 축축함과 차가움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손바닥 위에 석회 반죽이 묻어난다.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 자국이 벽 위에 남았다.

잠시간 알버트 웨슬리는 관 속에 있을 라니언의 뺨이 이것과 같이 차가우리란 생각을 하였으나. 곧 불길함을 떨쳐내려는 듯 그는 고개를 흔들고, 손을 감싼 채 불안한 걸음으로 지킬 박사를 따라 연구실로 향했다. 손자국 남은 벽은 곧 새로 칠해질 것이다. 계획되지 않았으나, 움푹 들어간 손자국을 가리기 위해. 혹은 다른 것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불편하게 흰 빛을 뿜어내며 덜 마른 석회 냄새를 풍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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