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들.

작가, 시지프스 보엠.

Time-traveler File No. 014

값싼 글을 쓸 잔재주와 자존심을 버릴 배짱이 있다면 작가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법.


시지프스 보엠Sisyphos Bohême

보엠Bohême 이라는 성은 체코의 보헤미아 지역에서 왔다.

이름 시지프스Sisyphos는 스스로 붙인 것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은 쉴라바Tshilaba. '지혜를 찾는 자'라는 뜻이었으나. 1950년대 알제리에서 머물었던 시간 이후에 이름을 바꾸었다. 

184cm. 70kg. 여성의 신체이나 평균보다 큰 편이다. 상당한 근육질이다. 차분하고 늘어진 인상.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부드럽게 흩어진 반곱슬머리와 동그란 안경, 그리고 왼쪽 팔에 새겨진 문신. 머스킷 총과 얽힌 장미 그림은 권리와 투쟁을 상징하는지, 아니면 락밴드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를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드족Mods 패션을 즐겨 입는다. 정장, 구두, 발목이 긴 가죽 신발, 흰 셔츠에 서스펜더, 헐렁하고 펄럭이는 코트 같은 것들. 비틀즈와 카뮈가 패션적 영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셔츠나 바지 주머니에는 항상 담뱃갑과 성냥갑이 함께 들어 있다.

 수레바퀴 위의 삶. 

출생지는 체코, 프라하. 생몰년월일은 알려진 바 없음. 

로마니아 인(집시) 출신이다. 현재의 체코 공화국 중앙 보헤미아 주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혹은 어떠한 감정도 없는 편이며, 그저 떠도는 생활에 익숙하게 해 준 주변 환경에 감사한다. 보엠의 어린 시절 삶은 늘 수레바퀴 위의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나이를 먹은 지금도 보엠은 여전히 자신이 수레바퀴 같은 역사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가족 사이에서 자랐으며, 부모와는 일찍이 떨어져 방랑했다. 유일하게 연을 주고받는 혈육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동생, 파미에트 보엠Pamět Bohême 뿐이다. 동생의 사망 이후에는 가족들과 그 어떤 연락도 주고받지 않는다.  

모국어는 독일어와 체코어. 체코어는 거의 잊은 지 오래다. 프랑스어는 파리의 오랜 친구들에게 배웠으며, 영어는 빅토리안 시대에 오래 머무른 탓에 익숙하다. 소설은 영어로 집필하는 편인데, 가장 많은 작품을 썼을 때가 바로 영국에 거주했었을 적이기 때문이다.

가짜 창조주. 

시간여행자의 특성 상, 한 곳에서 정착하기 어렵기에 가벼운 글이나 통속한 소설들을 써 돈을 버는 습관을 들였다. 스스로를 "싸구려 소설 쓰는 작가"로 지칭한다. 이는 보엠이 쓰는 소설의 대부분이 미래의 것을 패러디 한 것이거나, - 대표적인 예로 <바스티유의 연인들>, 혹은 <지롱드당 선언> 등이 있다. - 소설 안의 어떤 요소들, 문장, 단어, 어투, 혹은 인물의 특성 같은 것들을 어디선가 '훔쳐내어'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 안에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의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자신이 써 내려 가는 것은 어떤 혼합물에 불과하다고 정의내린 후, 보엠은 그 어떤 것도 지향하거나 지양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을 놓아 둔 채 바라본다.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작가를 작가라 부를 수 있는가? 그가 만들어 낸 글들은 프랑켄슈타인처럼, 얼기설기 엮어진 피조물이다. 다만 그 안에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엠은 스스로를 가짜 창조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창작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 여전히, '순수한 창작'을 바라보고 있다.

그 욕망은 보엠을 항상 갉아먹는다. 순수한 창작, 글로서 사람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 언어가 써 낼 수 있는 가치들을 자신의 손으로 지어내고 싶은 욕구. 떠올릴때마다 보엠은 희열에 잠기곤 했다. 그러나 그의 글 안에, 자신의 것은 보이지를 않는다.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들을 읽어낼 수는 있으나 시지프스 보엠은 보이지 않는다. 곧 그는 다시 자신을 되돌이킨다. 가짜 창조주.  

자발적 이방인

언제나 안경 너머로 은은한 미소를 띄고서 사람을 바라보는 일을 즐긴다. 매사 능글거리고 느물거리는 사람이다. 동시에, 화를 내며 폭발하지도 않지만 비꼬며 차가워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정을 주는 일이 없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껄끄럽게 지내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닌, 무난한 사람으로 인식되고자 애를 쓴다. 아주 가까운 친구도, 정 반대편에 마주한 적도 없는. 홀로 뚝 떨어져 나온 섬과 같은 사회적 관계. 떠도는 외로움 속에 자신을 처박기로 결심한 이에게 따르는 결과는 그런 것이었다. 

보엠은 자신에게 몰아쳐 오는 인생의 파도에 아무런 반항도, 저항도,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소금물을 한껏 들이키며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의 시간에 기대를 걸지 않아 이 순간의 쾌락에 집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압생트와 포도주, 위스키, 파이프나 궐련 담배. 이런 것들은 고통을 마취시키는 데에 특효약이다. 누군가의 글, 옳지 않은 방향으로 뒤틀린 관계, 숨통을 졸라매는 손길. 이런 것들은 마비를 깨우는 데에 특효약이다. 보엠은 둘 모두에게 의존하여 본 바가 있다.

 

의존의 단계가 지나고 난 후에. 보엠은 순간의 반항들에, 단단히 이어진 관계들에, 작은 행복들에 기댄다. 그것은 먼 이후의 이야기다. 

흉터들에 대하여.


알베르 카뮈, 

당시 막 시간여행을 시작하였고, 삶의 가장 열정적이고 격동적 부분을 보내고 있던 보엠에게 카뮈는 정신의 창조주였으며 또한 사랑이었다. 가까이 지내지는 못하였으나,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몇 번의 만남을 가졌으며. 카뮈가 희곡 <칼리굴라>를 초연했을 당시 직접 관람한 경험도 있다. 1960년 카뮈의 자동차 사고를 우연치 않게 목격하였다. 그 이후에 보엠은 프랑스를 떠난다. 대부분의 역사 인물과의 접촉을 꺼리는데, 그것은 아마도 카뮈의 자동차 사고를 지켜본 영향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가사 배서스트, 

카뮈가 보엠에게 창조와 삶에 대한 것을 안겨주었다면, 아가사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것을 안겨주었다. 남프랑스의 자동차 사고 이후, 보엠은 런던으로 향했다. 그때 만난 한 귀부인은 보엠이 평생 기억할 미美의 표상이자 종속적 주인이 되었으며, 또한 가장 쓰라리고 구역질나는 흉터가 되었다. 

아베쎄의 벗들, 

다시 파리로 돌아온 보엠이 만난 젊은 청년들. 보엠은 처음으로 자갈과 바위가 가득한 진창길을 구르던 자신의 삶이 멈추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활기와 이상으로 가득한 청년들, 또한 사려 깊고 사랑이 많던 집단을 그저 지켜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보엠은 그들과 2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그 이후 프랑스에 자리를 잡고 집필 활동을 이어 나간다. 

마리-모르간, 

카뮈가 시작의 선생이었다면, 마리-모르간은 마지막의 선생이 되어 주었다. 보엠은 그와 함께 미래와 과거, 현재의 고정축이 얼마나 허무한지에 대해 나누었고, 또한 삶의 경험들을 나누었다. 진실로 마음을 의지할 수 있던 이가 마침내 자신의 죽을 자리를 골랐을 때. 보엠은 육체와 정신, 철학적 죽음에 대한 정의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런던. 

싸구려 소설 한 권을 들고 출판사를 찾아가는 것은 거대한 용기를 등에 지고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거나, 밑바닥을 치고 난 후라 가진 것이 용기뿐인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지프스 보엠은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보엠 자신은 제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어디에도 팔 수 없는 그저 흔한 삼류 소설이라 굳건히 믿고 있었으니. 그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태도를 활 삼아 그 책을 출판업자들 앞에 내놓고서 악기 다루듯 이리저리 펼쳐 보이는 행동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었다. "무의미의 축제." 보엠은 이것보다 우스운 것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출판되려면 60년을 기다려야 할 책 제목을 1960년대 런던의 거리에서 중얼거리는 일은 그에게 웃음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케네스 왈츠를 읽으며 동시에 고타 강령 비판을 외우는 것만큼이나 모순된 행동 아닌가. 모드족Mods 패션을 차려입고, 손에는 19세기 프랑스 종기에 대한 소설을 들고, 위스키에 취한 채 비틀대는 걸음걸이로 걷는 보엠 자신의 모습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그 속에는 무언가 다른, 흔히 시대를 뛰어넘은 예언자나 현자가 지닐 만한 해탈함이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또 다시 과거가 된 미래들이 쌓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보엠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 푼짜리 소설책을 손에 들고서 노래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People try to put us d-down." 약간 투박한 영어 발음으로 가사를 읊다가, 그 시간여행자이자 작가는 곧 한 건물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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