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들.

원자의 이야기.

시지프스 보엠

점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1차원의 시작이며 동시에 2차원을 만들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원자처럼 운동하는 것이다. 이는 3차원이자 더욱 거대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시작이나 다름없다.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이 무엇을 말했던지 간에 우리는 단 하나의 자명한 사실만을 받아들이면, 충돌과 편위라는 제 3의 운동이자 또 다른 차원을 알기에 충분하다. 원자라는 하나의 점이 운동을 시작하면 직선으로 떨어지다 빗면으로 벗어나고, 세 번째로 서로 충돌한다. 

그러나 굳이 선이 되고 싶지 않은 점이 있다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묻자. 그것은 간단한 질문이 아니다. 왜냐면 우리는 점으로 남은 이들은 과히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 점이 선을 그었으나 우리와는 다른 방식이었기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이 원자의 편위운동Deklination이 너무나 뛰어난 방식으로 이루어졌기에 강제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허나 어떤 원자는 굳이 선으로 남고 싶지 않아 한다. 기억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의사를 명명백백히 밝히며 남아있는 점. 혹은 점들의 혼합물이라 불리고자 하는 이. 직선으로도, 빗면으로도 움지이지 않고 충돌하지도 않는 원자로 점점히 남아 있는 혼합물.

어느 원자에게 세상은 너무 넓은 공간이자 충돌의 가능성이 무한한 허공Void이었다. 그 허공에 내던져진 하나의 원자는 충돌을 거듭하다 못해 결국 바스러질 것 같은 몸체를 끌어 안고서 주변의 원자들과 부딪히는 대신 모이기 시작했다. 점점이, 점점이 모이다 못해 한 인간을 창조해 냈다. 그것이 시지프스 보엠이었다. 

그는 점이자 선이었고 평면이자 입체인 하나의 혼합물에 가까웠다. 복잡하지만 너무 간단히도, 점과 선이면 그를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했다. 그것은 그랑테르의 회의주의와 콩브페르의 박식함, 쿠르페락의 유쾌함을 뒤섞어 놓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혼합물일 뿐인 인간이었다.  도형이란 것은 결국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 진 것, 조르주 쇠라의 그림처럼, 시지프스 보엠은 점점이 찍힌 남들의 색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혼합물이었다. 

죽음과 영생에 대해 아무 의미도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마르크스와 베버를 읽고, 뒤르켐의 자살론을 토마스 페인의 상식론과 대조하고,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글을 썼다. 혼합물은 혼합물을 창조해 내는 법. 보엠이 쓰는 글은 패러디와 창조가 뒤섞인 오묘한 무언가였다. 그 스스로 "싸구려 소설"이라 칭해지는 것들은 기실 누군가가 한번 써먹은 기법과 특징적 말투에 그 자신의 경험을 쏟아 넣어 만든 하나의 혼돈에 가까웠다. 슬프게도, 온전한 창조를 꿈꾸는 그에게 그 글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온전한 창조란 무엇인가? 사실 시지프스 보엠 자신도 몰랐다. 막연한 생각, 온전한 창조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 혹은 창조가 무엇인지에도 질문을 던지게 되는 의심, 이 모든 것을 흐릿한 일시적 안개로 가리면 일상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쓰고, 쓰고, 또 쓰고, 싸구려 소설이라 칭하며 격하시키고, 동시에 나름대로 나은 혼합물을 만들어 내려면 어찌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것이 시지프스의 삶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