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관수련장

ㅇㅎ

토끼 by 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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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말을 안 들어, 브리지타. 궁에 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폐하께서는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저 부엌 하녀들의 싸구려 날붙이조차 길이 드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데, 하물며 그보다 고귀한 것들에는 얼마만큼의 인내가 필요하겠어요?”

“그렇다 한들 길이 드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물건은 쓸모 있는 물건이라 할 수 없단다. 물건 따위에 정을 붙이는 치들이야 그걸 보고 지조가 없다느니 한심한 소리들을 해 대지만, 그야 그들은 나와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르니 당연하지 않겠니. 그 점을 잊고서야 대화가 진전이 되질 않지.”

“물론 그도 그렇지만요.”

“지조 있는 것은 결코 쓸모 있을 수 없단다. 나약한 정신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 여겨도 실상은 안주한 것에 지나지 않아. 세상이 언제까지고 같을 수 없으니 자연히 시대에 따라 쓸모 있는 것도 달라질진대, 그 사실을 차마 인정하지 못해 옛것이나 붙잡고 있는 자들은 도태되어 마땅하지.”

황후와 그의 아름다운 시녀에게 부엌 하녀의 칼 따위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갓 즉위한 황제, 콘라드 크라나흐였다. 누가 들었다간 내란죄며 황실 모독죄 따위의 무시무시한 죄목들을 한몸에 뒤집어쓰고 처형대에 서야 할 만한 발언들이었건만, 황후는 제가 뭐 틀린 말을 했냐는 듯 반듯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국 신민들에게야 퍽 영광스러운 즉위식이었을지 몰라도, 황권에서 밀려나 있던 쭉정이 황자가 제깟 머리에 과분한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 전부 로젠하임을 등에 업었던 덕임을 생각하면 그에게 발언권 따위는 없었다.

‘제가 그리 우습게 보던 여자 하나를 내치려고 아버지와 척질 생각은 추호도 없을 테고.’

개좆만도 못하게 여겼던 로젠하임 공작이 그녀의 인생에 최초로 도움이 된 순간이었다. 그 역시 핏줄을 증명하듯 그녀 못지않게 권력욕이 강했으므로, 헤르디스가 원하지 않았다 한들 무능한 황자의 곁에 장녀를 묶어 두려 했겠지만.

어찌 되었든 뜻대로 되었으니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헤르디스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늘어지자, 비요른이 그녀의 머릿결을 매만지며 말을 붙였다. 평생을 논하는 목소리가 노래하듯 밝았다.

“하지만 저는 언제까지고 폐하 곁에 붙어 있을 생각이었는걸요.”

“너 또한 때가 되면 떠나게 될 거란다. 네가 그것의 개가 될 줄 어찌 알고 너를 평생 신임하겠니.”

농담인 줄을 알면서도 브리지타는 도톰한 입술을 삐죽였다. 헤르디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미모가 빼어난 것을 알고 상전에게까지 써먹으려는 그 맹랑함이 제법 기꺼웠다.

“물론 너는 무척이나 명석해서 시대와 발맞춰 움직일 줄을 아니 네 쓸모가 쉬이 다하지는 않겠지. 안 그렇니?”

그제야 브리지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황후 폐하께서 ‘쓸모 있음’보다는 더 대단한 딱지를 붙여 주시기를 바랐지만, 제가 이만으로도 전례 없는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냉담한 헤르디스가 이상하리만치 싸고도는 그리첸의 여자. 그 황송한 칭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최초였으며 유일했다.

“그야 물론이죠, 폐하. 그보다 이번에는 그것이 무슨 일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건가요?”

“되었다. 알아 봐야 네가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그런데도 알려고 했다간 필시 피곤해질 테지.”

‘알아 봐야 네가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니’라. 그녀가 국가 중대사에 남몰래 관여하는 일을 피곤해할 리 없다는 사실은 황후만이 알았다. 그러니 이것은 차라리 일종의 신호이자 명령이었다. ‘사교계의 사람들만을 움직여서는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황권에 더 가까운 해답을 내놓으라’는.

‘하여간 모든 것을 손에 쥐셔 놓고도 만족을 모르셔선.’

바로 그 만족을 모르는 점 때문에 그녀를 마음 깊게 존경하게 된 것이면서도, 브리지타가 속으로 괜히 불평을 했다. 장난스레 과장된 표정만으로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은 엄살을 귀신 같이 읽어낸 그녀의 황후 폐하는 짐짓 실망한 체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할 말도 없으면서 뜸 들이긴. 기대도 한 적 없단다. 나가 봐도 좋아.”

“할 말이 없긴요, 폐하께 가장 유용할 패가 어떤 것일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죠.”

“그야 네가 내 손에 전부 들려 주면 내가 어련히 잘 판단하지 않겠니. 네 역할은 책사가 아니란다, 비요른. 감히 날 대신하려 들어.”

뾰족하게 채근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 것은 정작 그녀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 늘 자신의 의견을 묻기 때문일 터였다. 자칫 세간에 비난받을 일들은 홀로 도맡아 하시면서, 국가 중대사를 좌우하는 즐거움은 기꺼이 제게 나누어 주시니. 정말이지 황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이 건방져, 가이예르.”

아, 이제는 친히 투정까지 해 주시고.

“이도 다 폐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겠어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죠.”

“뻔뻔하기는. 그런 네 태도가 재미있으니 한 번만 눈감아주는 줄 알렴.”

“어련하시겠어요. 그보다 폐하, 동향 출신 중 아는 사람이 좀 있어요.”

또다시 무례를 지적당하기 전에 그녀가 기다리던 패를 눈앞에 꺼내어 놓겠다는 심산이다. 진정으로 제 시녀가 건방진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적도 없었으므로, 황후는 기꺼이 그 장난스런 화제 전환에 어울려 주었다.

“네 고향이라면 그리첸 아니니. 일이 커졌다간 대공은 어찌하려고.”

“아마 지금쯤 대공자께서 벌이는 일들을 수습하느라 무척 바쁘셔서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 쓰실 여력이 없으시겠죠.”

헤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리첸의 대공자가 무슨 기행을 벌이는지는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완벽히 틀어막았다고는 하나, 제국의 황후가 마음 먹고 손을 뻗었을 때 잡지 못할 정도의 정보는 아니었으므로. 다만.......

“내가 무슨 사소한 일을 벌이려는지는 어찌 알고 그런 약속을 해?”

“무슨 일이 되었든 폐하께서 바라시는 한은 사소할 텐데도요.”

하하! 헤르디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로써는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브리지타가 정답을 말했다는 뜻도 되었으므로, 그녀도 황후와 함께 웃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사교계의 소문을 틀어막는 것뿐이면서 말은 잘 하는구나.”

“일이 생기고 나면 폐하께 더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 능력뿐이라는 것도 잘 알지요.”

황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갓 즉위한 황제가 제 정통성이며 능력, 제위의 안정성 등을 시험하고 싶어할 리 없으니 그는 무슨 일이 터지든 은폐하기 급급할 터였다. 아니, 되레 큰일이 터질수록 더 필사적으로 주변국에 감추려 들겠지. 죽은 형제들의 망령이 아직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 뻔하니.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사방이 적일 테니 황후가 할 일이라곤 그 의심을 더 공고히 다져 주는 것뿐이었다.

‘겁에 질린 황제가 공의회를 쥐 잡듯 잡을 테니 사교계만 틀어막으면 ‘사소한 일’에 대한 소식이 헤르츠비스에게까지 들어갈 리 없고, 들어간다 한들 구태여 대응하지 않을 테고.......’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았다.

“그래서, 안다는 자는 어떤 인물이지?”

황후는 그리 묻더니, ‘위텔 후작부인’이라는 이름자를 듣기 무섭게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지타가 추천한 사람이니 아주 탐욕스럽든, 아니면 세상에 불만이 많든 둘 중 한 가지는 갖추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후작부인의 경우에는 전자일 테고.

황후는 언제나 신의 따위의 추상적이고 저버리기 쉬운 것보다 거시적인 대가를 바라는 자들과 손잡으려 했으니, 브리지타의 ‘후작부인’ 역시 그녀가 달라붙어 황후가 사용하기 좋도록 벼려낸 도구일 터였다. 그녀가 이제껏 황후의 손아귀 안으로 밀어넣었던 수많은 다른 희생양과 마찬가지로.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그리첸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던 것 같구나. 하지만 후작의 처라면 결국 사교계에나 영향을 좀 끼치고 말 것이 아니니?”

“후작께서 부인을 몹시 아껴 그리첸에서부터 모셔 왔다는 소문은 듣지 못하신 모양이네요.”

“그래 봐야 내실의 일이 정무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려고.”

내실의 일이 정무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제국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름아닌 황후였다. 내실에서 황제를 영영 내쫓았으니 이제는 사실상의 황제 노릇도 하고 있는 셈이고. 그러니 이는 이를 테면 후작부인의 능력에 대한 의심보다는 제 시녀에게 놓는 으름장에 가까웠다. 후작 부인의 뜻이 제 뜻이 되도록 압박을 넣는 것은 네 의무라는 듯. 브리지타는 언제나 황후가 배속하는 의무를 기쁘게 받들었으므로 이번 건이라고 특별히 어려울 일도 없었다.

“뭐든 말씀해 보셔요, 폐하. 과연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직접 확인하게 되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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