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그리고 인어
크레갈로
*크레갈로 교류본 '상호보완적 애착관계'에 제출하였던 원고를 웹공개합니다.
본문에 인어를 식재료로 사용한다는 언급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점을 유의해주세요.
“이름은?”
“갈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갈로가 고개를 든 순간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저녁놀 때문인지 한층 더 타오르는 듯한 붉은 시선은 금세 눈꺼풀 뒤로 사라졌지만 잊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어째선지 갈로는 강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사내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 했지만 사내의 널따란 등만 보일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크네.’
큼지막한 진주와 석류석 두 알, 산호 한 움큼. 갈로에게 매겨진 가격이었다. 막 거래를 마친 자는 누구에게 보일세라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은 마치 인어에게 해를 끼친 자는 저주받는다는 고사를 다분히도 신경 쓰는 사람 같이 보였다. 갈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자신을 사들인 사내도 그런 타입일 것이다.
크레이 포사이트, 이 저택의 주인이자 앞으로 갈로 티모스의 법적인 소유주가 될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가 짐마차 옆에 멈춰 서서 모자를 벗자 말과 얼추 눈높이가 맞을 정도의 거구인걸 알 수 있었다. 크레이는 15년 전 홀연히 나타나 저택을 사들이고 막대한 재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며 지역 유지 행세를 해왔다. 몸에 밴 기품과 우아한 턱선에서 먼 지역의 뼈대 있는 귀족 집 자제니, 멸망한 왕가의 후손일 거라느니 하는 풍문은 많지만 그 어떤 것도 밝혀진 바가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인어 수집 취미로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몇 개 붙었을 뿐이다. ‘프로메폴리스의 미식가’, ‘바다의 푸른 수염’이니 하는 것들. 사람들은 그가 지금껏 손에 넣은 인어들을 어떻게 쓰고 또 어떻게 처리했을지에 지저분한 상상력을 잔뜩 부풀리곤 했다. 세간에 널리 퍼진 악평 때문인지 그는 결혼 적령기가 한참이나 지났으면서도 여태 독신의 몸이었다.
“깨지 않게 조심하도록. 중요한 것이니.”
크레이의 지시에 따라 4명의 인부는 거대한 유리 수조를 들고 힘겹게 계단 위로 올랐다. 이 안에 든 것은 귀하게 모셔 온 인어다. 생채기라도 냈다간 무슨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 그들이 겨우겨우 정문을 넘어서자 수조는 비로소 준비된 수레 위에 올려 매끄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저택에 들어서자 처음 보이는 메인 홀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대리석이 쭉 깔려있었다. 곳곳에 놓인 각진 기둥이나 문 위의 석상을 제외하면 특별한 장식 없는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창백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중 특이한 점은 바닥의 가장자리를 따라 매끄러운 구멍이 파여있었고 꽤 깊은 수위의 물로 가득 채워졌다는 것이다. 마치 성 주변의 해자를 놓듯 저택의 안과 밖을 가르는 수로였다. 이는 저택 뒤쪽의 수원과 연결돼 있는지 약한 수류를 일으키며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메인 홀을 한 바퀴 두른 그 물길은 쪽문을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 다른 시설과 이어지는 듯했다.
‘저런 게 집안 곳곳에 있으면 관리가 어려울 텐데.’
습기는 목재를 갉아 먹고 뒤틀리게 하니 근처에서 물을 피하는 것이 상식이다. 고가의 목제가구가 많은 저택은 더더욱 그렇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갈로는 반대라는 걸 깨달았다. 집안에 수로를 설치하기 위해 반대로 근처의 가구를 최소화 한 것이다.
“여기에 두면 될까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인부들은 수조를 낑낑대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크레이는 고생한 그들에게 얼마간의 사례비를 쥐여 주었다. 가죽 주머니가 제법 두둑했는지 인부들이 연신 몸 둘 바를 몰랐다. 크레이는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이만 자네들은 돌아가도 좋네.”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일제히 멀어지다 이내 조용해졌다. 그와 갈로 단둘만 남은 것이다. 크레이는 매듭 끈을 당겨 수조를 감싸고 있던 암막 커튼을 완전히 걷어내었다. 여태 유리에 바싹 달라붙어 커튼 틈으로 엿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갈로는 얼른 수조 위쪽으로 부드럽게 유영해 고개를 내밀었다.
크레이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어두운 수조 속에 신비롭게 굽이치는 갈로의 꼬리지느러미였다.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까 어린 태가 풀풀 나는 인어였다. 어리고 건강한 개체임을 증명하듯 길게 늘어진 청록색 지느러미는 비늘 하나 떨어져 나가지 않아 깨끗하고 매끄럽게 뻗어있었다. 크레이는 그 아름다움에도 동요 없이 갈로를 응시했다. 새로 사 온 과일에 흠이 없는지 살피듯 건조한 눈이었다. 그러다 문득 갈로의 왼팔에 불꽃이 감겨 올라간 듯한 독특한 흉터를 발견하였다. 매끄러운 피부 결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흔적은 한층 더 도드라져 보였다. 크레이는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자 갈로는 마지못해 왼팔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손목이 잡혀 상체가 딸려 올라갈 지경이었다. 깨끗하게 마른 손가락이 화상 자국을 부드럽게 헤집자 이미 다 나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뜨거움이 번져 오르는 듯했다.
“인어가 화상이라니, 어쩌다 생긴 거지?”
“…….”
갈로는 대답이라도 하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가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갈로는 움찔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어와 사람의 언어체계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이 인간과 흡사한 성대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인간은 인어의 목소리와 천식 걸린 사람의 숨소리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인간들은 오랜 세월 인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인어는 꾸준히 학습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말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것이 인어가 인간을 사고팔지 않는 이유라고들 설명하곤 했다.
“어리석은 물음이었나? 하지만 내 말은 제대로 알아듣는 것 같군.”
갈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크레이가 턱을 매만지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 처음에 제안받았던 건 분명 분홍색 지느러미의 암컷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병이 들어 폐사했다고 하더군.”
갈로는 아이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갇힌 상태에서 3일 만에 경비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철제 수조를 분해하였고 인간 친구를 사귀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갈로가 알고 있는 가장 용감한 인어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언니도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아는 사이였나?”
갈로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크레이가 어디까지 알고 묻는지 알기 어려워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크레이는 언니에 이어 동생까지 원했던 걸까. 사실 지금 뜻대로 되지 않아 머리끝까지 화가 나있는데 애써 삭히는 중일까? 하지만 크레이의 날렵하게 휘어진 눈꼬리며 부드러운 어조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크레이는 갈로가 동족을 잃은 슬픔에 젖어있는 줄 아는지 부드럽게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갑작스럽게 동족을 잃고 여기 끌려왔으니 피곤하겠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착하게 굴면, 여기 있는 동안은 불편 없이 지내게 해주마.”
갈로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크레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가를 올렸다.
괜한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레이의 저택은 인어가 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처음 왔을 때 중앙 홀에서 보았던 기나긴 수로였다. 크레이는 덤덤하게 수로가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든 가도 된다고 허락했다. 저택 대부분의 방과 연결되어있는 수로를 통해 갈로는 자유롭게 저택을 오갈 수 있었다. 덕분에 갈로는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익숙해질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크레이의 저택에 오느라 삼 일 밤낮을 수조 안에 갇혀 맴돌이했을 때를 생각하면 천지 차이였다. 저택을 관리하는 소수의 하인은 이미 수로를 오가는 인어에 익숙한지 갈로가 물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갈로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다 보면 간식으로 익힌 가리비나 사과 알 따위를 건네주는 이들도 있었다. 갈로는 전혀 의심받지 않고 저택을 돌아다니며 이곳을 감시할 수 있었다. 어떤 더러운 음모가 꾸며지거나 끔찍한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밤낮 할 것 없이 쏘다니는 인어의 눈을 피하긴 힘들어 보였다. 더군다나 대체로 인간은 인어가 말을 못 한다는 이유로 말을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생각해서 그의 근처에서 타인의 평판이나 비밀을 서슴없이 늘어놓곤 하였다.
또한 갈로는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 중 가장 넓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딱 기분 좋은 정도로 햇빛에 데워진 물로 반쯤 채워진, 바다 한편을 조금 떼어온 듯한 방. 모서리는 비늘이 쓸리지 않도록 둥글게 깎아 놓았고 벽면엔 바다를 표현하는 부조를 배치해 두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라는 표현이 무색하도록 부조 속의 바다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실제 에메랄드로 표현한 호사스러움이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갈로가 원한다면 방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경사를 타고 올라 테라스에 걸터앉아 창밖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테라스에서 잘 보이는 정원은 하루에 한 번 크레이가 티타임을 즐기는 장소였다. 대체로 업무에 바빠 얼굴을 자주 비치지 않는 남자였지만 그 시간만큼은 꼭 얼굴을 내밀었다. 크레이가 정원의 경치를 벗 삼아 차를 마시면 갈로도 그 시간 동안 크레이를 내려다보며 사과를 갉아 먹곤 했다. 크레이는 갈로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칼같이 시간이 되면 냅킨을 접고 다시 일어나서 업무를 보기 위해 서재로 향할 뿐이었다. 갈로는 자신이 이 남자를 감시하고 싶은 것인지 관심을 끌고 싶은 건지 조금 헛갈렸다. 인어의 악몽일지도 모르는 남자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평온한 나날 속에서도 때때로 악몽을 꿨다.
“그 집에 가면 산채로 비늘을 벗겨낼 거야. 신선한 게 맛있을 테니까 살아있을 때 재빠르게 손질해야 할걸?”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겠지. 먼저 꼬리에 쭉 칼집을 내고 뒤집어 놓으면 피가 쭉 빠져 얌전해질 텐데 그때 껍질을 벗기는데 훨씬 편할 텐데?”
“부잣집이니까 고급 올리브유랑 바질을 아낌없이 쓰지 않을까? 튀기듯이 구우면 비린내도 하나도 안 나고….”
“그 짓 할 때 냄새도 안 나고.”
“범해지고 먹히든, 먹히면서 범해지든 악취미인 건 마찬가진데?”
모두가 갈로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갈로의 팔을 짓누르고 다리를 당기고 꼼꼼하게 잡아 묶는다. 그리고 번뜩이는 나이프가 뱃가죽에 푹 박히는 감각. 순간 갈로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요한 방에 첨벙대는 소음에 그의 음성이 다시 파묻혔다. 갈로는 방 안에 있는 게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약 효과가 떨어지고 있어….’
모든 게 꿈이라면 좋았겠지만 반쯤은 실제로 겪었던 일이었다. 너 같은 배신자는 타르타르소스에 듬뿍 찍혀서 한입에 먹힐 거라는 둥, 크레이가 그렇게 키가 큰 건 인어의 영양소를 풍부하게 섭취해서 그렇다는 둥 사람들은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네가 인어를 빼돌렸으니 네 몸으로 갚아야 할 것 아니냐고 다그치는 전 고용주의 고함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그리고 결코 말로만 끝내지 않는 위인이었다. 기어이 암시장에서 사람을 인어로 만들게 해준다는 약을 구해와 갈로에게 억지로 먹였다. 약 냄새에 위액이 역류해 토하고 싶어 하는 그의 입술을 약병으로 틀어막고 코를 잡아 삼키게 했다. 가서 약 효과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이미 그땐 그 남자의 위장 속이 네 집일 텐데 무슨 걱정이냐며 비웃음이나 당했다. 그리고 끔찍한 숙취 같은 고통 끝에 멀쩡한 다리 대신 지느러미가 생겨 있을 무렵 이미 수조에 담겨 크레이의 저택으로 이송당하던 중이었다.
‘어쩌면 크레이는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나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
인간으로 돌아오면서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건 좋았지만, 사람들의 주의를 끌면 곤란했다. 꼬리를 내려다보자 그 매끄럽던 비늘이 수북하게 빠져 물 위에 둥둥 떠올라있었다. 갈로는 서둘러 그것들을 그러쥐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 다음 날엔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럭저럭 오랜 기간 들키지 않고 버틴 것이 오히려 대단하다 해야 할 것이다.
‘완전히 돌아가면 어떻게 하지?’
짧은 기간 보아온 크레이는 그저 피에 굶주린 악마라고 하기엔 다소 어폐가 있었다. 최소한 인어고기를 섭취한다는 소문에 한해선 헛소문이 아닌가 싶었다. 크레이의 저택 주방은 너무 깨끗했고 수상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인어를 올려놓고 썰만한 조리대 크기도 아니거니와 사람들의 태도도 지나치게 살가웠다. 적어도 음식 재료를 대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수많은 인어의 행방은 신경이 쓰였다. 인어의 몸인 이상 이 저택을 홀로 빠져나가는 것이 어렵다면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일까.
다음 날 저녁이 되자 갈로는 완전히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하도 말을 안 해서 말을 할 때마다 목이 긁히는 느낌이 강했지만 몇 번 가다듬으니 들을 만해졌다. 심각한 건 다리 쪽이었다. 분명 매끄러운 대리석을 딛고 있는데도 칼날 위를 걷는 고통이 매 걸음 엄습했다. 인어와 인간을 뒤바꿔주는 약물의 부작용이었다. 나중에는 사라진다고 하지만 이대로면 애초에 멀리 도망치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도망칠 생각도 없지만….”
갈로는 막 태어난 사슴 같은 동작으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사람을 부를까 하다가 단념했다. 이대로라면 크레이에게 말도 붙여보기 전에 경비에게 끌려 나갈 팔자였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이다 크레이의 서재로 향하기로 했다. 서재에는 책들이 많아서 수로가 연결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방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갈로가 크레이를 자주 볼 수 없었던 것도 그가 이곳에 틀어박혀 일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젠 거의 외우다시피 한 통로를 따라 서재로 걷는 동안 다행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단순한 운의 산물은 아니었는데 갈로가 그동안 하인들의 동선을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세요?”
거의 기어서 들어가는 목소리로 문 안쪽에 말을 걸었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얼핏 지나치게 밝은 등에 일순 눈앞이 어두워졌다 다시 모든 사물이 눈에 들어왔다 갈로가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서서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한참 눈을 깜박였다. 그곳은 서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드넓은 책상과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너무 깨끗한데?’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갈로는 수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의심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오히려 그 점이 수상할 정도였다. 갈로가 아픈 발을 부여잡고 의자에 앉아 크레이를 기다리기로 마음 먹은 순간 발끝에 희미하게 버석거림이 느껴졌다.
“소금?”
갈로의 발끝이 아픔 때문에 그토록 예민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아마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갈로는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을 노크하며 소리를 가늠했다. 일부 바닥이 소리가 달랐다. 공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공간을 중심으로 마룻바닥에 체중을 실으니 덜컥대고 한쪽이 들리며 하수구 같은 지하공간이 드러났다.
‘크레이, 당신 진짜 악당이야?’
벽면에 아슬아슬하게 붙은 계단을 타고 한참을 내려가 땅에 발을 딛으니 어두운 통로가 눈앞에 놓였다. 띄엄띄엄 달아놓은 등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통로 옆에는 눈에 익은 수로가 졸졸 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갈로에게 무심코 뛰어들어 헤엄치고 싶은 욕구가 불쑥 솟아났다. 이제 꼬리는 없지만, 물속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치는 것이 이 끔찍한 발의 고통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느껴졌다.
‘다시 인어로 돌아가는 약을 먹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새까매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 끝을 바라보며 갈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한발 한발 다시 제 발로 내딛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고 걸어간 기나긴 통로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감옥도 고문실도 아니었다. 그저 드넓은 바다, 망망대해였다. 갈로는 맥이 탁 풀려 통로 끝에 주저앉았다. 통로는 바다와 인접한 절벽의 작은 동굴로 위장되어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라면 저택에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발이 없는 인어라 할지라도.
“그럼 아이나의 언니는….”
“그녀는 말괄량이 동생을 찾아 떠났다. 이야기가 다르다며 클레임을 잔뜩 걸고 말이지.”
“…!”
어느새 크레이가 갈로 뒤에 서 있었다. 그 거대한 남자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걷는 건 꽤 섬뜩한 일이었다. 갈로가 아무 말 없이 크레이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크레이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갈로 옆에 걸터앉았다.
“처음부터 두 자매가 다시 사냥당하지 않도록 조용히 바다로 돌려보내 달라는 의뢰였다. 한꺼번에 데려올 수 없으니 언니를 먼저, 그리고 동생 쪽을 이번에 데려오면 마무리되는 거였는데.”
그리고 눈꺼풀이 희미하게 열리며 붉은 눈이 갈로를 향했다.
“네가 모든 걸 망쳤지.”
갈로가 그저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인어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인어를 도망치게 한 바보가 있다고 들었으니까…. 그리고 너 인어 말은 지지리도 못하더군.
갈로는 벙졌다. 나름 자신이 지금까지 봐왔던 아이나를 흉내 내며 거의 완벽한 인어 연기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그저 어설플 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크레이 당신, 브로커…같은 거야? 인어를 탈출시켜주는?”
크레이는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었다.
“악명을 활용한 사업의 일환 뿐이다. 저택의 유지비도 이만저만 많이 드는 게 아니라 말이지.”
“에, 그럼 나는.”
“완전한 적자지. 고스란히 마이너스야. 네 몸값을 대체 얼마나 지불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갈로는 크레이 손에서 떨어진 보석들을 생각하며 몸을 흠칫 떨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 년 내내 일해도 갚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내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크레이, 그때 왜 날 샀어? 처음 봤을 때부터 아이나가 아닌 걸 알았잖아.”
“…….”
크레이는 갈로를 등지고 줄곧 바다를 바라보았다. 혹시 어쩌면 크레이 포사이트라는 남자는 악당에 그다지 재능이 없을지도 모른다…, 갈로 티모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어쩔 수 없나. 갈로는 머리를 벅벅 긁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을 에일듯한 고통이 이제는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빚은 몸으로 갚으면 될까? 아! 인어가 아니면 안 되나?”
크레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어 취미가 있는지 없는지 갈로가 알게 되는 건 조금 훗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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