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의 마음에 드는 점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크레갈로
그것은 코믹 산스 서체에 두서없는 줄 간격으로 레터지에 인쇄한 글이었다. 모서리에 마구잡이로 붙은 덕트테이프가 난잡함을 더했다. 만약 그 문장이 이 공간의 유일한 출구로 보이는 곳에 있지 않았다면 시선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얼토당토않다는 감상은 꼬맹이에게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갈로는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뺨을 감싸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교차했다. 크레이는 거칠게 자라난 머리카락을 목뒤로 쓸어내리며 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재현해야 했다.
“아무래도 힘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얼핏 허술한 나무 문으로 보이는 출구는 2m가 넘는 성인 남자가 전력으로 부딪혀도, 경첩을 뜯어내려고 해도, 손잡이를 분해하려고 해도 비정상적인 내구로 버티고 서 있었다. 혹시나 특별히 벽면의 취약점이 있나 두드려 봤지만 모든 방면의 벽지 뒤쪽엔 두꺼운 콘크리트로 마감된 소리가 났다. 어쩌면 프로메어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주택 한 채를 전소시키는 데 얼마나 걸렸더라? 이미 지나간 과거를 곱씹는 것은 생산적인 사고를 방해한다는 걸 크레이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십 년도 훨씬 전에 과거가 방안을 촐랑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성적인 사고가 힘들 법했다.
*
“아저씨!!”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소름 돋는 기시감과 함께 크레이는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무릎을 잡고 흔든 것은 시야 아래 작달막한 남자아이였다. 그의 이름은 갈로 티모스, 크레이 포사이트는 평생 그 이름을 철자 하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아는 갈로는 이미 훤칠한 청년이다. 이미 버닝 레스큐의 일원으로 한 사람 몫을 하는 소방관이며(이렇게 말할 때마다 갈로는 힘주어서 극동의 명칭을 고집했지만) 자기 입으로 선언한 것처럼 지구와 리오 포티아,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자신을 구해낸 남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렇게 우유 분내가 날 것 같은 꼬맹이가 갈로 티모스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로 티모스였다. 머리끝까지 꼼꼼하게 컨디셔너를 발라 결 좋은 청발이 그러했고, 보풀 하나 일어나지 않은 베이지색 셔츠 깃에 희미하게 묻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타바스코소스 자국이 그랬고, 잔디 조각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찍찍이 운동화가 그러했고, 결코 어른의 시선을 피하는 일이 없었던 한 쌍의 눈망울이 그러했다. 기억하고 말고 갈로가 박탈당한 걸 채워주기 위해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갈로.”
낮게 내리 깔리는 부름에 갈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알아요?”
아이는 소매에서 낑낑대며 작은 금속 팔찌를 끄집어냈다.
“혹시 크레이 형아한테 연락해줄래요?”
거기엔 음각으로 보호자의 이름과 지금은 번호 배열마저 까마득한 오래된 개인 연락처가 쓰여 있었다. 미아 방지용 팔찌였다. 제 손으로 주문해 아이의 손목에 채워준 물건이다. 단 한 번도 사용된 적 없었고 어느 순간 사라졌기에 그런 물건이 있었다는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을 뿐이다. 크레이는 문득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연도와 날짜가 말도 안 되는 문자열로 변화해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논리가 허술한 악몽 속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크레이는 갈로에게 자신이 크레이 포사이트의 친척이라 자칭했다. 크레이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로 내내 미심쩍은 얼굴이었던 꼬마는 오히려 혈연이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수를 착용하고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왼팔의 부재에 대해서도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크레이는 방안을 면밀히 둘러보았다. 아무리 기묘한 일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이대로 탈출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질식사 또는 아사의 가능성이 있었다. 공간은 초등학교 교실 하나 정도의 크기였다. 천장부터 바닥타일까지 새하얀 이질적인 공간으로 마치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구 시설 같았다. 반대로 온통 새하얀 공간이기에 눈에 띄는 곳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공간 구석에 유일한 출구로 보이는 나무 문 하나와 눈을 뜬 순간 앉아있던 빨간색 등받이 플라스틱 의자 한 쌍이었다. 주로 테라스나 해변 파라솔 아래에 비치해두는 야외용 의자였다. 갈로가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이 의자 위에 웅크려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의자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문을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순순히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없나?’
사실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다만 요구에 따른다고 자신들을 내보내 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꼬워서 그렇지 비교적 조건도 명확했다.
“갈로, 이리 오렴.”
돌아가지 않는 문손잡이를 이리저리 살피며 굴리던 갈로는 금세 크레이 곁으로 뛰어왔다. 크레이가 의자를 제 곁에 끌어다 놓고 손짓하자 얌전히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나 싶더니 금세 들썩거리며 초조한 눈치였다. 크레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크레이에 대해 좀 아는데, 분명 지금 너를 찾아 헤매고 있을 테지. 여기가 어딘진 모르겠지만 멋대로 나가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얌전히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단다.”
“그치만.”
갈로는 초조해졌는지 엄지 끝을 앞니로 물어뜯었다. 저 버릇 고치는데도 한참 걸렸더랬다. 손가락 끝에 발라둔 식초를 핥고 짓는 표정이 볼만했는데.
“그렇게 크레이 형아가 좋니?”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의 동그란 뺨에 화색이 돌았다. 낯선 곳에 갇혔다는 불안은 희미해지고 방실 웃는 낯으로 누가 부정이라도 할세라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데?”
크레이는 오른손을 뻗어 셔츠 안쪽으로 느껴지는 의수의 접합부를 주물렀다. 이 또한 자신의 오랜 버릇이었다. 갈로는 피자를 잔뜩 입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처럼 부푼 볼을 우물거렸다.
“어…, 꼭 하나만 골라야 해요?”
“원한다면 네가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해도 상관없단다.”
갈로는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대듯 매달려 크레이를 올려다보았다. 크레이도 몸을 기울여 갈로와 눈을 마주했다. 커다랗게 치켜뜬 눈동자 속에 작은 불꽃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레이 형아는요, 손이 커요. 내 손은 요만한데 형아 손은 이따시만큼 크거든요. 우유도 막 2팩씩 집어서 카트에 넣고요. 피자도 다섯 조각씩 먹을 수 있고요. 책상도 번쩍번쩍 들어 옮기고요. 형아가 잘했다 잘했다 하고 머리 쓰다듬어 주면 엄청나게 칭찬받는 것 같아요!”
손이 큰 거와 관계없는 것도 있지 않니? 크레이는 자연스럽게 샘솟는 의문을 진정시키며 짐짓 다정하게 턱짓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형아는 큰소리를 안 질러요. 저번에도 밀가루를 바닥에 떨어트렸는데 봉지가 터져서 종일 청소했거든요. 터트렸을 때 사방에 튀어서 크레이 형도 크게 눈 뜰 정도로 많이 놀랬어요. 맨날 청소할 때 먼지가 기계 사이에 들어가면 큰일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형아가 갑자기 쭈그려 앉아서 저한테 작은 목소리로 이거 치우는 거 엄청나게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럼 배가 많이 고플 거라고 우리 일단 팬케이크부터 먹을까? 하는 거예요. 초코랑 스프링클이랑 생크림도 많이 뿌려서요. 형아 말로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는데, 진짜 같아요.”
정전기가 일어나지 않게 주의하며 실험 설비를 정리하는 과정은 아주 까다로웠고 당연히 많은 양의 혈당과 세르토닌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난장판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게 아니라 지를 기력 따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갈로는 작은 손가락을 세 번째로 접어가며 간밤을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요. 지금도 엄청나게 똑똑한데 매일 매일 밤늦게까지 방에 불이 안 꺼지거든요.”
“그게 좋아?”
네게 주어져야 하는 시간이 박탈당했는데도? 크레이는 베개를 안은 채 문간에 말없이 서 있던 갈로를 기억한다. 종일 부모 손을 타야 할 시기의 아이를 뒤늦게 눈치챈 척 의자를 돌려 마주했던 자신이 있다. 잠이 오지 않니, 갈로? 하고 물으면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버릇처럼 좋은 밤을 기원하였다. 그런다고 제 악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형아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 어려워서 자기는 이해하기 힘드니까, 매일매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형아는 이미, 그러니까….”
갈로는 말하다 말고 몸을 일으켜 크레이의 귓가에 다가왔다. 크레이도 고개를 숙여 아이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도록 귀를 기울였다. 무엇이든 거침없이 말하다가도 유독 쑥스러움을 타는 모습이었다.
“형아는 사실 이미 ‘영웅’인데요. 저한텐 엄청 대단한 사람인데두요. 항상 열심히 해서 모두를 구하려고 해요. 그게 멋져요!”
갈로는 겨우겨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듯 피유~ 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깐 사이 귓불이 붉어진 게 제법 용기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 그리고, 그리고 밥 먹을 때요. 우리 집에서는 이렇게 길쭉한 나이프로 간식을 잘라서 나눠주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반으로 자르기 어렵잖아요. 그때 형아는 꼭 아주 조금이라도 큰 쪽을 저한테 줘요. 사실 형아 덩치는 아저씨처럼 이따만 하잖아요?”
갈로는 있는 힘껏 활짝 팔을 펼쳤다. 그래도 그 넓이는 떡하니 앉아있는 크레이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사실 형아가 더 큰 쪽을 먹어야 해요. 근데 그럼 자기는 다 컸고 저는 앞으로 더 클 거라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에요. 웃기죠? 아무튼 형아가 간식 자를 때 진짜 진짜 진지한 표정으로 자르고 나서 어디가 큰지 고민하거든요. 그때 형아 얼굴을 보는 게 좋아요.”
이렇게 시답잖은 점까지 주워섬기다가는 하루가 다 가버릴지도 모른다. 크레이는 힐끔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여전히 문자열을 읽을 수 없었다. 쓸모 없는 위성 시계 같으니.
“이제 다 말한 거니?”
“아! 아! 아! 한 개만, 아니 두 개만요!”
그래 네 녀석의 황소고집을 어떻게 말리겠니. 크레이는 저릿해지는 머리를 짚고 표정만은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그리고 크레이 형아는 애 취급 안해요.”
‘이건 또 듣던 중 신기한 발상이군.’
갈로 티모스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굴기 일쑤였다. 현장 체험학습을 가기 전날 밤 가방을 체크해주거나 그가 홀로 플랫을 계약할 때 재단 법무팀에 들러보라고 조언해준 것도 그 일환이 아니었던가.
“형아는 내가 뭘 궁금해하면 이해할 때까지 열심히 설명해줘요. 귀찮으니까 검색해보라고 할 수도 있고 적당히 됐다고 그냥 그런 게 있다고 하고 넘길 수도 있잖아요. 근데 계속 이해했는지 얼굴을 보면서 말해줘요. 심지어 형아가 뭘 잘못했을 때도요. 내가 애라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얼버무리지도 않고 그냥 다 말해줘요. 그게 좋아요.”
“그래, 그럼 마지막은?”
갈로는 크레이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들어줘요. 꼭 아저씨처럼요.”
크레이는 그 환한 얼굴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갈로는 그가 기분이 좋아진 게 만족스러운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나만 너무 많이 말했다. 아저씨도 같이 사는 사람 있어요?”
크레이 포사이트는 잠시 그의 어린 연인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있지.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 녀석.”
“에, 나 같은가 보네. 그럼 마음에 드는 점은요?”
그야, 넌 항상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녀석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아름다운 면을 바라본다. 그러니 속이 비비 꼬인 천하의 악당도 너에겐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크레이는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없어.”
그 순간 달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어느 날 갈로 티모스는 퇴근 후 잠시 본부에 남아 야식을 챙겨 먹기로 하였다. 맥주캔을 따서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으려니 마침 전자레인지에서 띵 소리가 울렸다. 향긋한 맥앤치즈가 준비되었다는 의미였다. 남은 맥주를 들이켜며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아뿔싸 생전 처음 본 공간이었다. 사방이 온통 하얀 것이 살풍경해 보였다. 갈로는 어색하게 입가에 묻은 거품을 문질러 닦았다. 이건 납치라고 해야 하나? 슬금슬금 허리 홀스터에 손을 뻗고 있는데 익숙한 거구의 사내가 앉아있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투명한 금발에 엄숙한 매부리코가 그려내는 독특한 옆선을 몰라볼 갈로가 아니었다.
“크레이!”
혼자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반가워 달려들었더니 커다란 손바닥이 이마를 밀치고 있었다. 살얼음처럼 차가운 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당신 대체 뭐야?”
“엑!”
그는 크레이였으되 그가 알던 크레이는 아니었다. 천천히 올려다본 앳된 얼굴, 격식 없는 복장, 의수 없이 축 처진 왼쪽 소매에서 일종의 향수마저 느껴졌다.
*
깡!
동결탄을 먹여 땅땅 얼어붙은 금속 문고리를 그립으로 후려갈겨 보았지만 망할 놈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거인의 마음에 드는 점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이라고 적힌 종이가 잠시 나풀거렸을 뿐이다. 도리어 총을 잡고 후려진 손만 반동으로 얼얼했다. 레스큐가 모양 빠지게 실패했네. 갈로는 주섬주섬 뒤를 돌아보았다. 크레이는, 그러니까 좀 많이 젊은 그는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동결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레이가 놀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제 막 이론을 검증하는 단계에 있는 발명품들이 떡하니 범용화된 모습을 접한 것이다. 그건 본인이 미래인이라는 갈로의 주장이 영 헛소리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였다.
일단 이 공간을 무력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자기소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새삼 크레이한테 날 소개하려니까 이상한 기분이긴 한데. 큼큼.”
목을 가다듬은 갈로는 기운차게 외쳤다.
“갈로! 티모스! 우주 제일의 소화꾼이다!!”
“크레이 포사이트, 프로메폴리스 공과대학 화공생명공학 전공.”
크레이는 빠른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소속을 밝히고 갈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그가 내민 ID카드를 가늘게 쏘아보았다. 갈로도 크레이가 건네준 학생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와 더 어린 크레이다. 아주 뽀송뽀송하네. 공교롭게도 그들은 동갑이었다. 크레이는 눈썹을 까딱이며 ID카드를 돌려주었다.
“고기동 구명 소방대 버닝 레스큐 3번대 소속?”
“그래.”
“내가 알기로 그런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야 그렇겠지….”
당신이 사정관이 된 후로 출범한 조직이니까.
“그보다 크레이, 내 이름 이미 알고 있잖아.”
“…갈로는 집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을 거다.”
“나 참, 나도 어린 시절엔 낮잠 정도 잤다고.”
“내가 갈로와 만난 건 전국적으로 보도된 일이야.”
갈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의식일까? 이럴 때조차 이 사내는 자신을 구했다고 하지 않고 만났다고 표현한다.
“그럼 이건 어때? 내가 당신이 버니시인걸 안다고 하면.”
불길이 달렸다. 크레이의 눈동자에서 당겨진 화염이었다. 갈로의 발이 덜렁 들렸다. 다음 순간 갈로는 자신의 목줄기를 움켜쥐고 있는 팔뚝을 탁탁 두드렸다.
“큭, 이것도 다 당신이 말해준 거거든?”
불꽃은 갑자기 나타난 것만큼 빠르게 갈무리되어 사라졌다. 갈로는 자리에 주저앉아 캑캑거렸다. 어렸을 땐 그리 다정하게 굴더니만 다 컸다고 매정하기 짝이 없었다. 크레이는 멍하니 서 다소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너에겐 중요한 일일 텐데?”
“글쎄? 나는 여기서 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걸랑.”
크레이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한순간 황폐해진 젊은이의 얼굴에 갈로는 마음이 저렸다. 크레이는 다소 오랜 침묵 끝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을, 뒷덜미를 보여줘.”
“으응? 내 목?”
갈로는 크레이 앞에서 뒤돌아서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어째 육식동물에게 멋대로 약점을 보이는 기분이 되어 싱숭생숭했다. 크레이는 갈로의 목과 등이 이어진 어느 지점을 조심스레 만졌다.
“네가 갈로 티모스인 걸 인정하지.”
“어이, 무슨 일인데 그래.”
“넌 모르겠지만 여기에 점 하나가 있다.”
과연 거울을 돌려봐도 절묘하게 보이지 않을 부위였다. 어린 시절 종종 갈로를 씻겨주곤 했던 크레이였기 때문에 알고 있는 특징일 것이다. 갈로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서 매번 여길 물고 빨던 거였어?’
유독 집요하게 목덜미를 따라 키스를 내리던 남자를 상기하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피차 납득했으면 그걸로 결과 오케이야. 그럼 피곤하게 왈가왈부할 거 없이 탈출 조건을 채워보자고”
“그래. 이 악몽에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군”
둘은 얼른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 마주 앉았다. 막상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동거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갈로는 근질근질한 볼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동거인의 마음에 드는 점 말이지. 누가 먼저 말할래?”
크레이가 작게 거수했다. 이런 건 먼저 끝내버리는 쪽이 후련하다는 판단이었다.
“내가 먼저 하지.”
“엉, 해치우라고~!”
크레이는 말을 꺼내 놓고도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다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더니 뚱한 얼굴로 말했다.
“편식하지 않는 점.”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그래. 이유도 말해야 하나?”
“말하면 좋고?”
“갈로를, 그러니까 너를 돌보기 시작한 게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난 그다지 요리엔 재능이 없더군.”
“하핫! 당신 요리 나쁘지 않은데?”
크레이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자긴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래, 그런 점이 말이다. 너는 먹성도 좋고 가리는 음식도 없으니 뭘 줘도 싹싹 그릇을 비우잖아. 식비 단가 계산하기도 좋고 영양학적으로도 편리하지.”
“결국 아무거나 잘 먹는 게 맘에 든다는 거네?”
하루하루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 없을 만치 바쁜 나날이다. 아마 내일도 그렇고 모레도 그럴 것이다. 사람 흉내는 버겁고 고단하다. 손끝에 매달린 어린애가 서툰 보호자 행세를 간신히 하는 자신에게 하루라도 더 속아준다는 것에 그만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뭐, 그런 셈이지.”
갈로는 기억에 잠긴 듯한 크레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크레이, 그거 알아? 나도 어릴 때 싫어하는 음식 정도는 있었어. 어린애인걸. 당연하잖아. 근데 있잖아. 당신이 보고 있으니까. 당신은 나의 영웅이니까 그 앞에서 못 먹겠다는 소리가 안 나오더라? 그래서 코 막고 꼭꼭 씹어 먹었던 거야. 그런데 당신이랑 같이 먹다 보니까,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니까 어느새 진짜 맛있어졌어. 그러니까 거짓말도 아닌 셈이지.
“이제 네 차례야.”
크레이는 턱을 들어 올리며 더 이상 흥미 없다는 얼굴로 갈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어디보자.”
갈로는 찬찬히 어렸던 크레이를 훑어보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날들의 표상, 기만과 거짓으로 시작된 인연이라도 당신은 한결같이 나를 먹이고 배웅하고 기다렸더랬다. 갑자기 품 안에 떨어진 재투성이 어린애를 위해 한껏 힘쓰던 당신을 안다. 나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당신이 하는 일은 한점 변함없었을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난 당신의 변함 없는 모습이 좋아.”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일한 출구가 미끄러지듯 열렸다. 망설임 없이 성큼 나아가는 갈로의 그림자를 향해 크레이의 애끓는 듯한 음성이 울렸다.
“잠깐! 너 설마 아직도 나와…”
크레이에겐 미안하지만 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그의 연인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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