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어둠, 중력

 나는 완전히 그에게로 빠져들고 있었다. 중력에 이끌린 행성처럼, 그는 내게 단 하나뿐인 항성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곁을 맴돈다. 뜨거운 체온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다정한 손길과 짙은 체향에 한순간의 숨을 이었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을 믿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지만 당신이라면 무엇이든 믿어주고, 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어진다. 그렇게나 당신은 내게 과분한 사랑이었다. 늘 대가없는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속해서 나를 보듬어주고, 체온을 나누어주는 첫 번쨰 사람. 당신에게 나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지만, 내겐 당신의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길의 끝에는 언제나, 오로지 당신 뿐이었다.  

 그의 품에 완전히 몸을 기대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규칙적으로 울리는 고동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도 때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품에서 숨을 잇고 있으면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고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날만이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당신의 품에서만 찰나의 숨을 이을 수 있었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닳아가는데. 

 당신을 향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짙어지고, 이젠 당신 없는 삶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삶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벌써부터 이별을 걱정하는 것은 이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당신을 볼 때마다 이유 모를 불안이 생긴다. 오늘처럼 평화로운 날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품에 날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것임을 안다. 그의 품에 담겨 생각에 잠겼다. 여태 삶에서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있지 않았다. 내게는 정말 당신 뿐이었다. 닳아 없어질 시간들이라면 최대한 많이 기억하고 품에 새겨 평생을 간직해야지. 나는 앞으로도 이 체온에 기대 숨을 쉴 테니까. 천천히 팔을 둘러 당신의 등을 쓸어주었다.  

 희미하게 떨려오는 몸짓과 숨이 여실히 느껴졌다.  

 "따뜻해." 

 "으레 체온이라는 것이 그렇지." 

 "… 체온만을 말하는 건 아니었는데." 

 손은 여전히 그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찰나 농조로 뱉어낸 말이 귓가에 스쳤다. 그제야 조금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상처 입은 소년 같다. 누구에게도 제 상처를 말하지도 못한 채 시간이 지나고,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린 불쌍한 사람. 연민에 어떻게 생긴 상처일까 유심히 살피고 보듬어 보지만 그 뿐. 숨기는 것이 있다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인가 차마 물어보지는 못 한 채 시간이 흘렀다. 어찌 되었건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나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이 될 수 없다면 마지막이라도 되어 볼 생각이었다. 완전한 이기심이었다. 동경이 연민이 되고, 연민이 사랑이 되는 사이 생겨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욕심. 

 그가 이미 떠나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내게서 겹쳐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따금 내게로 다가오는 죄악감에 가득찬 시선에, 이렇게 품에 끌어안고서 떨리는 숨을 삼키는 모습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평범하게 헤어졌으면 이리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 이별의 사유는 아마도 죽음 때문일 것이다. 내게 떠나지 말아달라 하는 것도, 다칠 때마다 과할 정도로 두려워 하는 것도 그리 생각하면 설명이 되는 노릇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그만이 구원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을 구원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들 하지만, 인생에 찾아온 기적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이제야 간신히 손에 잡은 구원을 내 손으로 놓아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우주는 이제 당신 뿐이었다. 당신은 늘 내게 사랑이 무겁다 농조로 말했다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살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당신에게서 받은 것이 전부였으니 당연했다. 불행한 사람 두 명이 만나 사랑하는 것 만큼 큰 행운이 어디 있을까. 이 비극은 내 삶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그는 따스한 어둠을 닮았다. 내 모든 것을 안아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너른 품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제야 편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태 아물지 않던 모든 상처와 나아지지 않던 통증들이 이제야 사라져가는 것 같다. 이 품만이 내게는 다정이었다.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공간. 여태 지독하게도 괴롭혀오던 결핍이 이제서야 충족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간절했다. 한 줄기 햇살 같다는 느낌도 조금은 받았다. 

 귓가에 고동소리가 나즈막히 울린다. 이것이 당신이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와도 같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 때마다 이 고동을 떠올려야 되겠다. 내 곁에 한 사람 만큼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지.  

 가만 눈을 감고서 숨을 짓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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