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Stay Cold

리리 이데아 x 아노렐 킨

그는 늘 높은 곳에서 웃고 있었다.

상어를 닮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정점에 서 있듯이.

머리에 금색 왕관을 쓴, 그래, 마치 미친 왕처럼.

그것이 리리 이데아가 기억하는 조수, 아노렐 킨이었다.

Keep It Close - Seven Lions (feat. Kerli)

제멋대로 묶은 백금발 위에 자리한 작은 왕관. 빛이 비치지 않는, 탁한 피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 왠지 재수 없게 씩 웃고 있던 얼굴. 그의 목에 새겨진, 자신과 같은 조수의 문신.

첫인상? 그런 건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 만났는지, 어디서 만났는지, 그런 소소한 건 서서히 기억에서 잊혀질지라도, 그때 느꼈던 감정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동물 같은 직감이라고 해야 할지, 마음속 깊이 박힌 성질 때문인지, 처음부터 삐그덕거렸었다.

이건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람.

리리가 조금이라도 덜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면, 그가 자신의 선배 격인 사람이란 것도 잊고 엇비슷한 말을 내뱉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리리는 냉정하게 감정을 억눌렀다. 살짝 고개만 까닥였다. 그는 그 작은 인사 아닌 인사에 어떻게 반응했었더라? 기억이 흐려졌다.

몇 번을 더 마주해도, 더 싫어졌으면 싫어졌지, 결코 그가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뭐 한담, 인성부터 글러먹었는데, 속으로 투덜댄 것도 셀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카이멜 마술사님과 같이 그와 그의 마술사, 리비에르의 지원을 가야 한다고 지시가 내려왔을 때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 어딘가 이상하게 비틀린 조합이라면 그러려니, 그들이 수습해줘야 하는 귀찮은 사고를 저질렀겠지 싶었다.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한숨을 쉬면서도 빨리 처리하고, 그와 마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게 낫겠다, 그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껄끄러운 사람. 마주치기 싫은 사람. 그러나 일의 특성상,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

그것이 리리가 가지고 있는, 아노렐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렇기에 냉정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딱히 미련 두지 않았다.

* * *

아티팩트의 오염. 그 오염된 힘으로 인한 폭주. 몇 년 조수로 일한 리리에게는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닌 참가자, 마술사를 비롯한 아티팩트를 다루는 모든 이들이 언제나 조심하고, 가슴속 깊이 새기는 경고였다. UP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눈에 새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건 대체.

자신도 모르게 탄식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 앞에 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미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 멀리, 금이 간 왕관이 나뒹굴었다. 잠시 그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압도적인 힘 앞에, 한순간 굳었을지도 모른다. 냉정해져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조수, 리리 이데아는 참가자들을 향해 외쳤다.

어서! 죽고 싶지 않으면! 들어가요, 빨리!!

일부, 머뭇거리는 참가자들을 다음 에리어로 향하는 문을 향해 밀었다. 그들이 대적할만한 적이 아니었다. 리리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생각해보면, 리리가 잠시 굳었던 이유는 파프니르의 힘 때문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티팩트의 폭주, 파프니르의 탄생. 그리고 소멸.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리리는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내 아티팩트가, 내가 폭주하겠어. 설마 그만큼 실력도, 조심성도 없을까. ‘설마’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잔혹한 진실을 가려뒀었다.

결코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빈말로도 가까워지고 싶은 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알고 있던 이의 빈자리, 그 공허함은 생각보다 컸다.

그것은 리리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기에 그 공허함이 차가운 공포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눈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 * *

다시 볼 일 없으리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는 생각지도 못한 채로 재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푸른색의 마술사가 웃으며 데려온 이는, 그가 아니었다.

여전한 백금발. 여전히 붉은 눈동자. 그러나 미친 왕의 왕관도, 조수의 문신도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다가가지 않았다.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전에도 딱히 일부러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이유는 조금 달랐을지도.

그의 예의는 RP에 두고 온 것 같은 태도가, 사람 속을 긁는 말투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그랬다.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보이곤 했다. 기억하고 있는 ‘아노렐’, 그가 비쳐 보였다. 그의 얼굴에. 그의 행동에. 그의 붉은 눈동자에.

차라리 한 번 멱살을 잡고 흔들면 속이 편해지기라도 하려나, 평소라면 떠올리지도 않을 정신 나간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응어리가 남긴 했나보다 싶었다. 미련? 후회? 그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무엇이었을까. 리리의 눈이 사라진 왕관의 자리에 머물렀다.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산. 한 번도 자신보다 높이 있던 그 자리에서,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는 그 아쉬움. 굳이 따지자면, 갈 길 잃은, 조수의 경쟁심이었을까.

순수하게 웃고 있는,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 눈에 스쳤다. 사라진 기회에 대한 아쉬움, 그제야 리리는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리리는 눈을 돌렸다.

그렇기에 기억할 수밖에 없었지만, 구태여 다가가지는 않았다.

붉은 홍채의 미친 왕을 기억한다. 리리는 왕관을 잃은 아노렐을 눈에 담았다.

* * *

당신을 추모하지 않겠다.

당신을 반기지도 않겠다.

그러나 잊지도, 피하지도 않겠다. 다시 마주치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살짝 고개 숙여 묵례하겠다.

리리라는 사람으로서, 아노렐에게.


Written 1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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