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오롯이 그대만을 위한 서약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AU (600일 로그)

“…그래서. 방금 뭐라고 했나, 자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붙들어 매었다. 철들기 훨씬 전부터 받아온 교육도 한몫하긴 했지만, 한숨 쉬어봤자 저 사내의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침착하게 되물은 것이 무색하게도 청발의 사내는 세상 고민 없는 표정으로 해사하고 친절하게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니까요, 황제 폐하. 오늘은 폐하의 일정도 제가 거의 비워놨겠다, 잠깐 저랑 나갔다 오시지 않겠습니까?”

저걸 말이라고. 아니 애초에 언제부터 자네가 내 일정에 관여할 수 있는 위치였나? 물어볼 뻔했지만 그다지 듣고 싶은 답은 아닐 거라 예상해 굳이 수고를 들이지는 않았다.

어째 수년이 지나도 저 사람은 달라지는 게 없나. 딴에는 기사단장이랍시고 제복부터 모자까지 갖춰 입고, 검까지 허리에 찼으면서. 기사단장, 리비에르는 마치 그의 생각을 읽고 있던 것처럼 더욱 활짝 웃으며 검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권력남용이라는 걸 조~금 해봤죠. 크게 신경 쓰실 건 아니고요.”

아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게 지금 제국 최고의 기사에게서 들을만한 말인가. 이 기사단 정녕 이대로 괜찮은 건가.

그러나 입 한번 벙긋해보기도 전에 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미 진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모른 척 져준 걸지도 몰랐다.

어쩌겠는가, 저 사람은 원래부터 저런 사람인 것을.

리비에르는 손을 내밀었다. 황제 폐하,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정말, 말이라도 못하면.

적발의 황제, 카이멜은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 * *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섬겨왔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줄곧 사랑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제 손을 잡아오는 온기를 느끼며 리비에르는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눈가를 접었다.

“그럼 가볼까?”

누군가 들었다면 황제모독이라 소스라치게 놀라고, 저 무례한 놈을 당장 감옥에 집어넣으라 기함할 말이었지만, 다행히도 근처에는 카이멜과 그를 제외한 사람은 없었다. 황제, 카이멜은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별다른 말 없이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 와서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 친해지고 나선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편하게 내키는 대로 불러대던 그였다. 날 잡아서 황녀님을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며 부모에게 죽도록 혼난 후, 주변에 누가 있는지 먼저 확인하는 습관은 들었지만.

애초에 당사자인 카이멜은 그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 리비에르는 거리낌 없었다. 어쩌면 카이멜이 자신의 격식 없는 태도에 조금은 해탈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 멀리 고이 접어버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카이멜은 리비에르에게 지극히 존엄하신 황제 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친구였고, 리비에르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왜 그리 보나?”

아, 생각에 빠진 채로 너무 빤히 쳐다봤나. 여기서 '네가 너무 예뻐서' 이런 식상한 대답을 했다간 아무리 나라도 검으로 한 대 맞겠지?

어린 나이부터 무예에 출중한 재능을 보인 카이멜이었다. 그가 황제의 유일한 후계자만 아니었다면 지금 기사단장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리비에르가 아닌 카이멜이었을지도. 제국을 다스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검만큼은 놓지 않았던 그였다. 지금도, 간간이, 자신에게 연습 겸 대련을 청해오곤 했으니.

그리 검을 맞대고 있자면, 항상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마음 한편에 소중히 간직하고, 그 따스함을 가끔 꺼내어 보고, 잊지 않도록 고이 모셔두는, 그런 추억이었다.

* * *

“기권하겠나?”

아, 또 졌나. 이런 데선 봐주는 법 하나 없는 황녀님이기도 하지. 그게 자신의 친구답기도 했지만.

리비에르는 어깨를 으쓱하곤 검을 잡지 않은 한 손을 올렸다. 명백한 항복의 표시였다.

“좀 진지하게 할 순 없는 건가.”

“난 항상 진지해. 네가 그냥 그만큼 뛰어난 거란 생각은 안 들어?”

키득이는 목소리에서 진지의 ‘진’자도 찾아볼 수도 없었지만, 리비에르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카이멜은 대할 때는 늘, 언제나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한 번만 더 하고 그만 들어갈까? 그래, 이번엔 한 번 힘내보도록. 둘은 검을 다시 고쳐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사람은 카이멜이었다. 날이 무딘 대련용 검이 빠르게 찌르고 들어왔다. 리비에르는 물처럼 흐르듯, 옆으로 가볍게 피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을까. 저번보다 길게 이어지는 대련에 둘 다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조금씩 빈틈이 드러나고, 허점이 보였다 싶은, 그 순간.

쐐애액. 어느 때보다 검이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목을 향해. 하나는 심장을 향해.

리비에르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카이멜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검은 카이멜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무승부인가. 하면 하는 사람이잖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검을 거두었다. 리비에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뭐, 그야.

그야, 지금 중요한 고백을 하려 하는데, 완패한 상태로 하기엔 모양이 안 살잖아. 그래서 이번엔 진짜 목숨 걸고 힘냈지.

고백? 카이멜은 눈을 깜박였다. 리비에르는 검을 가볍게 잡아, 손잡이를 카이멜에게 향하게 내밀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리비에르 시라는 평생 나의 삶을 바쳐 고귀한 그대의 검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오롯이 그대만을 지키고 섬기며,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오롯이, 그대만을 위해 살아가며,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카이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서약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언젠간 기사가 될 리비에르가 황제가 될 자신에게 하게 될 서약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놀란 이유란, 그저 지금 이 순간, 같은 맹세를 받게 될 줄은 몰랐던 탓일 것이다. 조금 놀랐을지는 몰라도, 그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다른 답을 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검을 받아들었다. 가볍게 어깨에, 목에, 세 번 내려앉았다.

“나, 카이멜 시레노바는 리비에르 시라를 기사로 임명하며, 그대의 서약을 마음과 기억에 새겨 나아가리라.”

화려한 궁전도, 근엄한 교회도 아니고, 신성한 서약을 증언한 이는 둘밖에 없었지만. 그렇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 * *

“듣고 있나, 자네?”

아, 잠시 생각에 너무 깊이 빠진 모양이었다. 서둘러 정신을 현재로 불러온 리비에르는 듣고 있다는 의미로 살랑살랑 손사래를 쳤다.

“그냥 생각 중이었어. 기억나지? 옛날에 했던, 첫 서약 말이야.”

그리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카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겠지. 당연히 기억나긴 한다만, 카이멜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자네가 기사로 임명받으면서 다시 하게 될 서약이었는데, 굳이 두 번 할 필요가 있었나?”

이번엔 리비에르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치 않은 그 단호함에 카이멜은 궁금한 기색을 내비쳤다. 리비에르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거야, 기사로 임명받으면서 한 맹세는 제국과 제국의 황제에게 하는 거잖아. 내가 너한테 한 건 다른 종류의 약속이었으니까.”

그때 한, 둘만이 증인으로 선 서약은, 내가 너에게만 하는 약속이자 고백이었으니까.

리비에르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깊이 믿고 있었으니까.

다시금 되새기자. 네 손에. 이 검에.

나는 오롯이 그대만의 검이자 방패이며, 이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는 오롯이 그대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이것은 오롯이, 내가 너에게 하는, 영원의 서약일지니.


Written 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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