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colours of red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AU (800일 로그)

너는 그날 물어왔었다.

넌 왜 늘 흑백의 풍경화만 그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었다.

난 내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그림에 담지 않아.

이 캔버스는 내가 보는 세계, 그냥 그뿐인 거라고.

in a world of black and white, when people of gray fill the streets

what colour is it that will blow life into my canvas?

리비에르 시라가 보는 풍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회색의 하늘 아래, 회색의 빌딩 사이로 걸어가는 회색의 사람들. 언제나 한결같았고, 늘 지루했다.

그가 색맹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아니었다. 하늘은 ‘푸르고’ 캠퍼스의 빌딩은 고풍스러운 ‘갈색’이었으며, 사람 각각 자신들만의 색을 띠고 있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리비에르가 보는 ‘세상의 관점’이라 말해야 더 정확했겠지만, 리비에르는 항상 별다른 설명 없이 세상을 회색이라 명명했다. 덕분에 그가 미술학과 내에서 괴짜란 칭호를 얻기에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지만, 리비에르는 기본적으로 혼자 다녔다. 오늘도 역시,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 개의치 않는 듯, 리비에르는 캠퍼스 내의 공원 벤치에 자리 잡아 홀로 앉아있었다. 무릎에는 스케치북의 백지를 펼쳐두고, 한 손에는 가볍게 연필을 쥔 채로, 사뭇 지루한 눈길로 주변을 몇 분이나 둘러보았을까. 벌써 몇 번이나 그려 과제로 제출한 덕분인지, 회색의 공원은 리비에르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기야, 늘 보는 캠퍼스가 거기서 거기겠지,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단조롭다 못해 지겨웠다.

뭐, 어차피 교수님이 매주 내주고, 자신이 매주 제출해야 하는 숙제인데, 매주 창의성 뛰어난 결과물을 제출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 이번에도 늘 그랬듯, 흑백의 공원 풍경화나 그리려고 마음먹고 연필을 고쳐 쥔 찰나.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려한 색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햇빛 쨍쨍한 초여름에 만개한 장미가 이런 색을 띨까 생각이 드는 화사하고도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리비에르는 자신의 세계에 처음으로 들어찬 그 색을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조금씩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던 찰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리비에르는 스케치북을 옆에 끼고 일어나, 조급한 목소리로 멀어지는 붉은색의 폭포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봐.

발걸음을 멈추고 리비에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구불구불 웨이브 진 붉은색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얕게 흩날렸다. 리비에르를 돌아본 눈에는 금색의 태양이 담겨있었다. 무슨 일이지? 담담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리비에르는 잠시 답을 골랐다. 충동적으로 지나가는 붉은색의 사람을 멈춰 세웠다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원하는 단어가 입속에서 나열되고 조립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윽고 차분히 기다리는 상대방에게 리비에르는 둥글게 눈을 휘어 웃으며, 빈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

“혹시 바쁘지 않으면, 내 모델이 되어 주지 않을래?”

* * *

따닥, 따닥. 유리로 가려진 벽난로 속에서 겨울의 유일한 따스함을 유발하는 소리가 피어오르는 사이로, 연필의 사각거림이 섞여들었다. 몇 분이 지나고, 가볍게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화음을 자아냈다. 침묵뿐만이 아닌 고요함에 젖어드는 시간이었다.

푹신한 휴게실의 소파에 앉아 습관대로 무릎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연필을 쥔 손을 바삐 놀리던 리비에르는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반대편에 앉은 카이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관찰이라도 하듯 찬찬히 그를 살펴보는 시선에도 카이멜은 익숙한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리비에르는 다시 제 스케치북을 내려다봤다. 하얀 종이에 검은 연필 선으로 그려진 인물은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도, 분위기도, 맞은편의 붉은 이를 못내 닮아있었다.

흠, 풀리지 않는 난제를 앞둔 것처럼 고민 가득한 음성에 책에 집중하고 있던 카이멜이 그제야 눈을 들어 리비에르를 응시했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아니. 그냥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감이 아직 안 잡혀서 그래.”

재주 좋게 약간 뭉툭해진 연필을 손에서 한 바퀴, 두 바퀴 돌리던 리비에르는 카이멜이 보던 책에 갈피를 끼우고, 스케치북을 보여달라 손짓하자 순순히 그에게 작업물을 밀어주었다. 카이멜이 말없이 스케치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리비에르는 옆에 내려둔 책을 흘끗 쳐다보았다. 두껍고, 글씨는 작아 이 거리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뭔가 판례문이라고 하지만 쓸데없이 길어 보이는 내용은 리비에르의 관심을 오래 붙들지 못했다. 여태 무서운 집중력으로 내내 그 책을 보고 있던 카이멜이 대단하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톡톡. 그들 사이에 있는 탁자를 두드려 리비에르가 그를 돌아보자, 카이멜이 보고 있던 스케치북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봤을 땐 놀라울 정도로 잘 그린 것 같은데. 하지만 나야 이쪽 분야로는 그다지 아는 게 없으니,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라도?”

“글쎄….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나도 그걸 확실하게 모르겠어서 문제지.”

여기서 막힌 이상, 당장 의미 있는 진도를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리비에르는 스케치북을 덮고 기지개를 켰다. 오래 앉아있어 굳은 어깨를 풀며 옆눈으로 벽시계를 보니 오후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다음 수업이 언제더라,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던 리비에르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카이멜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빙긋 웃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을 등진 카이멜의 머리카락이 그의 눈동자에 밝은 붉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읽을 거 많이 남았어? 한 시간쯤 있으면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점심이라도 먹을래?”

카이멜은 보던 책을 잠깐 응시하며 남은 분량을 가늠하는듯하더니,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몇 장 남지 않았고, 점심은 먹어야 하니 가볼까. 그 후 별다른 대화 없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일어서는 그들의 모습은, 그것이 일상인 듯 퍽 익숙해 보였다.

* * *

시간상 멀리 있는 가게로 가기엔 무리가 있었으니, 둘은 적당히 캠퍼스 내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 하나씩 사서 공원에 앉아있었다. 겨울이라 불릴만한 계절에 접어들었다지만, 오늘따라 기온이 유난히 따스하고 맑아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수업으로 이동하며 리비에르와 카이멜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몇 있었지만, 대체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학생들은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큰 관심을 가지기엔, 그들이 캠퍼스에서 같이 보내는 시간은 일상으로 여겨질 만큼 상당히 길었다.

법학과 수석 카이멜 시레노바. 미술학과 괴짜 리비에르 시라. 어떻게 봐도 비슷한 점 하나 없는 두 사람이라, 학교 일상 중 겹칠 부분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듣는 수업이든, 학과 빌딩이든, 하다못해 중간중간 이동하는 동선이라도. 그만큼 정말 찰나의 기적 같은 우연에서 시작된 인연이라 해도 좋았다.

충동적으로 리비에르가 카이멜을 불러세웠던 날, 카이멜이 꽤 당황하지 않았을까. 리비에르는 훗날 생각할 정도의 상식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당황은 잠시, 카이멜은 리비에르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보고 빠르게 상황파악을 한 모양이었다. 미술 과제인가? 물어오는 카이멜에게 리비에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한 시간, 아니, 30분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내줄 수 있으면 좋은데, 무리한 부탁일까? 카이멜은 잠시 고민하다 선선히 승낙했다. 학생 휴게실에서 책을 볼 예정인데, 크게 방해만 안 된다면 따라와도 괜찮다. 리비에르는 화사하게 웃었다. 물론, 허락 고마워.

그날을 이후로, 리비에르는 종종 제 학과 빌딩도 아닌, 법학과 빌딩의 휴게실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안녕, 혹시 바쁘지 않으면 오늘도 모델을 부탁해도 될까? 저번에 그린 게 워낙 마음에 들게 나와서. 그런 그의 행동을 예상치 못한 듯 카이멜의 눈썹이 위로 휘었으나 딱히 거절할 명분도, 마음도 없었는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리비에르에게 카이멜은 크게 뭐라 하지 않았다. 처음엔 타 학과 학생인 리비에르의 방문을 이상하게 여겼던 다른 학생들도 이내 카이멜의 반대편에 자리 잡은 그의 모습에 익숙해질 정도로, 리비에르는 차차 하루가 멀다고 카이멜을 찾아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자네 혹시 나한테 작업거나?”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 독서하는 카이멜 앞에서 조용히 리비에르가 연필을 손에 들고 그의 모습을 종이에 담아내는 게 일상이 되었을 무렵. 어느 날 리비에르는 카이멜에게 혹시 같이 점심을 먹을 생각이 있는지 물어왔다. 그 특유의 무해해 보이는,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리비에르의 미소를 마주 보며 카이멜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부정하지 않으며, 리비에르는 얼굴을 살포시 기울였다.

“그렇다고 하면, 혹시 싫을까?”

그러고 눈을 접어 웃는 것이 이번에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나한테 작업거는 거 맞구나. 앞으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다시 귀 뒤로 쓸어넘기고, 카이멜은 팔짱을 꼈다. 따지자면 싫은 건 아니었다. 굳이 지금 심정을 말하자면, 자신을 단순히 과제 제출용 모델로만 보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정도였을까. 아니, 갑자기는 아닌가. 애초에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날 하고많은 다른 사람들을 두고 자신을 불러세웠을 리는 없겠지. 째깍, 째깍. 초침이 흘러 1분, 2분. 카이멜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 * *

이게 아닌데. 리비에르의 성격이 타고나기를 느긋하고 여유롭지 않았다면 연필을 내던졌을 정도로, 일주일이 넘도록 무언가 계속 막혀있는 느낌이었다. 늘 그리던 대로 손을 따라 연필은 움직였고, 퀄리티 역시 평균적으로 그리는 것에 뒤떨어지지 않았으나, 왜인지 결과물이 그의 눈에 차지 않았다. 거짓으로라도 리비에르가 완벽주의 성향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그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리비에르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 약간 앓는 소리를 내자 카이멜이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남았나?”

“아직도라기엔, 그 마음에 안 드는 게 뭔지도 찾지 못해서 말이지.”

완벽하게 겨울에 접어들어 해가 빨리 저문 밖은 이미 어둑하고 깜깜했다. 늦은 오후, 의외로 휴게실이 한산했기에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대화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지, 카이멜은 대화를 끊지 않고 이어서 물었다.

“그럼 차라리 다른 걸 그려보는 건 어떤가? 계속 같은 사람만 그리다 보면 지겨울 법도 한데.”

“그건 안돼.”

리비에르가 드물게도 단호하게 답했다. 카이멜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방해되지 않게 하나로 묶어 올린 붉은색 머리카락이 사르륵 소리 내며 어깨 위로 흩어졌다. 리비에르의 시선이 잠시 그 움직임을 좇았다.

“꼭 나여야 하는 이유라도 있다면, 좀 궁금하긴 한데.”

여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카이멜은 그들이 처음 만난 날부터 의문을 가진 점이긴 했다. 굳이 나를 불러세워, 나를 모델로 그리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리비에르는 말꼬리를 흐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언어로 옮겨 타인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물어본 사람이 카이멜이었던 만큼, 성의 있는 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생각하고 정리한 끝에 리비에르는 짧게나마 나긋하게 단어를 찾아 끄집어내었다.

“붉고 찬란한, 유일한 색이어서. 아마도 그런 걸 거야.”

붉은색. 카이멜은 길게 기른 제 머리카락을 손에 가볍게 감아 잠시 응시했다. 확실히, 보기 드물게 화려하고 불처럼 타오르는 색이라고 여러 번 듣긴 했다. 하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카이멜이 리비에르의 말에 온전히 납득하기엔 따질 점이 너무도 많았다.

“붉은색이라면 굳이 내가 아니어도, 주변에 많잖나. 가령 저기 벽난로의 불꽃이라든지, 저 맨 위 칸에 꽂혀있는 책이라든지. 하다못해 오늘 점심때 먹은 사과라든지.”

리비에르는 카이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단조로운 회색이 아닌 것은.

“내게 보이는 유일한 색은 너밖에 없어.”

카이멜은 잠시 침묵했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군. 리비에르가 상당히 괴짜라는 것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편견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처음엔 예술가 특유의 기질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색맹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 그가 세상에 품는 감정을 내보이는 일종의 표현인가?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다. 리비에르의 수수께끼는 그대로 두기로 하고, 카이멜은 반 이상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회색의 선으로 가득한 그의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그래서 늘 흑백의 그림만 그리는 건가?”

“맞아. 난 내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그림에 담지 않으니까.”

여전히, 선뜻 그를 완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카이멜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은 말을 꺼냈다.

“네가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색이 나라면, 그럼 그 색을 그대로 그림에 담아보는 건 어떨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던 듯 리비에르의 눈이 잠시 커졌다, 이내 심해처럼 깊은 생각에 빠져들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첫 만남부터 그랬듯, 카이멜은 리비에르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색을 그림에 담아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별로 없지만.”

“해보지도 않고 안될 거라고 단언해서는 될 일도 안 되지 않겠는가.”

그가 법학과 수석이라는 점을 제쳐서라도, 카이멜은 똑똑했다. 리비에르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에 토 달지 않고, 리비에르는 순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눈을 휘어 미소 지었다.

“일리 있는 말이네. 좋아, 한 번 해볼게.”

* * *

리비에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비밀에 부친 것은 그와 카이멜이 만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처럼 휴게실에서 카이멜의 반대편에 앉아 연필로 스케치를 끝낸 리비에르는 이후로 학과 빌딩에 있는 작업실에서 나머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며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 점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과제의 제출일이 성큼 다가온 만큼 리비에르는 눈에서 미련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카이멜 역시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었지만, 그 역시 시험 기간이 가까워진 만큼 바빠진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잠시 짬을 내어 리비에르의 작업실에 찾아가려면 못할 것도 없었으나, 리비에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었다. 다 완성하면, 그때 보여줄게. 그가 갑자기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카이멜은 순순히 알겠다고 답했다. 아예 안 보여준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 가깝게 흘러, 땅에 서리가 끼고 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서로 얼굴을 보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던 와중 리비에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작품, 오늘 마무리 지을 것 같으니 시간 되면 내일 보러올래? 카이멜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내일 7시에 시험이 끝나니 그때 가도 괜찮은가? 응, 내 학과 빌딩 알지? 그 앞에서 보자. 각자 자신만의 설렘을 품고 잠들 수 있는 밤이었다.

구름이 녹아 결정처럼 떨어지듯이, 눈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조금씩 쌓이다 녹고 있었다. 해가 자취를 감춰 어두워지는 시각, 리비에르는 카이멜을 빌딩 앞에서 맞이해 안쪽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만난 기분은 둘 다 느끼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특별한 말은 오가지 않았다. 늘, 어제 본 것처럼, 간단한 인사와 일상 얘기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전등이 환하게 켜진 작업실에서는 희미하게 물감 냄새가 맴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없나? 캔버스와 각종 미술 도구가 어질러진 작업실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카이멜이 물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두어 명 있었는데, 저녁 먹으러 간 거 아닐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리비에르는 추측했다. 이쪽이야, 가벼운 손짓에 카이멜은 리비에르를 따라 작은 이젤에 놓인 캔버스 앞에 섰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캔버스에 담긴 것은 붉은색의 향연이었다. 수채화 물감이 어우러져, 카이멜의 형상을 부드럽게 그려냈다. 리비에르 특유의 무채색에 가까운 색감이 전체적으로 녹아있었지만, 그중에서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섬세하게 자아낸 붉은색의 머리칼이었다. 그림 속, 창밖에서 쏟아지는 빛을 머금은 모습이,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림을 감상하던 카이멜이 입꼬리를 작게 끌어올려 웃었다.

“색에는 자신 없다더니. 좀 많이 미화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설마, 리비에르는 그린 듯이 마주 웃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 안 나?

“말했잖아. 난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캔버스에 담는다고.”

그러니 이 작품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 황홀하고 찬란한 색채를 알려준, 너에게 바치는 그림인 것을. 애정인 것을. 붉은색의 사랑인 것을.

이 한 폭의 그림에 담아 너에게 고백한다.


Written 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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