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무대

Spell thy name tonight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AU (1200일 로그)

한 해가 끝나가는 추운 12월이 돌아올 때면 왕궁의 가장 큰 홀은 으레 들썩이게 마련이었다. 이유인즉, 가장 규모가 크고 호화로운 왕궁의 파티는 왕의 탄신일도 아니고 새해 축제도 아닌, 연말의 크리스마스 파티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이어져 왔는지 모를 오랜 전통이었지만, 한 해를 무사히 나고 그 노고에 힘써준 이들을 보상하고 격려한다는 제도는 모두가 환영하기 마련이었다.

파티 당일인 크리스마스에는 왕도, 귀족도, 기사도, 평민도 차별 없이 휴일을 즐길 수 있었지만, 파티 전야에는 준비에 모두가 배로 바빠지기 마련이었다. 왕은 파티 서류 결재에, 귀족은 파티 참석 단장에, 기사는 보안 점검에, 평민은 마을 축제 준비에. 다들 바삐 움직이고, 하루하루가 끝날 때 몸은 고단했지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축제에 기분은 하늘만큼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고대하던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부터 분주하게 왕궁의 사용인들이 움직였다. 파티장의 장식을 매만지고, 기다란 테이블을 배치하고, 바닥을 쓸고 닦고. 부엌에서는 궁중 요리사들이 온갖 산해진미를 굽고 볶았다. 시종장과 시녀장은 마지막으로 초대장을 받은 손님 목록을 확인하느라 정신없었다.

숨 가쁘게 낮이 저녁으로 넘어가고 하늘이 보랏빛 노을로 물들어가자, 왕궁에서 날아온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값비싼 마차를 타고, 어떤 이는 보다 수수하게 차려입고 걸어서, 기사처럼 보이는 이들은 말을 타고 도착하기도 했다. 시종은 손님을 순차대로 맞이하며 초대장을 확인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파티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호화롭게 차려입은 파티의 손님들은 처음에야 도착하는 이들 한명 한명에 관심을 쏟으며 눈길이 오갔지만, 파티장에 사람이 점차 늘어날수록 각자 자기 친우, 친척과 어울리기 바빠 새로이 도착하는 손님은 무관심의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오셨습니까, 카이멜 시레노바 경.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한순간 파티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흡사 왕 본인인 행차한 줄 착각했을 법도 했다. 모든 시선이 검은 제복을 입은, 말에서 내린 붉은 머리의 기사에게 몰렸다. 그 관심에 압도될 만도 했으나, 시선의 중심에 선 본인은 그저 담담하게 말고삐를 대기하던 관리인에게 넘기고, 금박을 입힌 초대장을 꺼내 시종에게 건넬 뿐이었다.

불길을 닮은 검을 휘두르는 왕국 최고의 기사. 왕국 최연소 기사단장. 그에게 붙은 화려한 이명과 수식어만 한 손을 넘는 카이멜 시레노바를 다른 이로 착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사실 초대장 확인이라는 절차는 필요 없었다. 그러나 괜히 생략했다가 주어진 일을 대충한다는 불호령이 떨어질까 시종은 꼼꼼하게 초대장을 확인한 뒤 돌려주었다. 카이멜 시레노바가 파티장으로 들어서는 발길에 호기심과 경외심 담긴 수십 명의 눈빛이 따라붙었다.

오랜만일세, 시레노바 경. 기사단장님, 이곳에서 뵙게 되네요. 이곳저곳에서 반갑게 들려오는 인사에 화답하며, 카이멜의 빛나는 금안이 넓게 파티장을 훑었다. 그 시선이 어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돌아오는 답이 예의 바르게 단조로워,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덧 사그라들었다. 새로운 손님은 계속 도착했고, 파티의 분위기도 와인 기운과 섞여 점차 무르익었기에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 카이멜을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파티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카이멜은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교적인 자리를 크게 꺼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이 왁자지껄 어울리는 분위기와는 영 맞지 않는다 싶었다.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열기에 숨 돌릴 겸, 카이멜은 2층의 발코니로 향했다. 보라색 휘장이 드리워진 작은 발코니 대부분은 연인들에 의해 점거되어 있었지만, 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발코니는 비어있었다.

한기가 도는 발코니로 나와 등 뒤로 두꺼운 휘장을 치고, 카이멜은 손에 들고 온 와인잔을 옆에 내려두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왕궁 정원엔 나무 위의 빛나는 장식과 몇몇 움직이는 사람 실루엣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은 아직이려나. 중얼거리는 카이멜의 입술에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춥게 느껴질 만도 했지만, 파티에서 옮아온 열기를 식히기에 그 바람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카이멜은 어둑해진 겨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가 수놓은 별이 맑게 빛나고 있어, 인위적으로 꾸며진 정원보다 눈길을 끌었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눈이 하얗게 쏟아져 별이 잘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나, 카이멜은 한 손을 하늘 아래로 뻗어보았다. 혹시라도 눈 대신 별이 떨어지지 않으려나 싶어.

차가운 눈의 결정이 카이멜의 손끝에 닿아 녹았다. 카이멜은 생경한 감촉에 눈을 잠시 깜빡이다 아직도 맑은 하늘을 확인했다. 구름 하나 없이 별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카이멜이 보일 듯 말듯 입가를 끌어올렸다.

“파티장에 안 보인다 했더니, 언제 도착한 건가?”

텅 빈 허공에 말을 거는 카이멜을 다른 이가 봤다면 이상하게 여겼겠지만, 카이멜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분하고 진지했다. 카이멜의 눈길이 닿은 허공에서 작게 푸른 빛이 어우러지더니, 새파란 연기 속에서 점차 사람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짧고 푸른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생겨나고, 그보다 어두운색의 로브가 허공에 펄럭였다. 별처럼 밝게 빛나는 하늘색 눈이 카이멜을 보며 접혔다. 빛 사이에서 나타난 청년의 입술이 휘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시레노바 경.”

발코니 바깥,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마치 중력을 거부하듯이, 겨울바람에 로브를 휘날리며 그가 가볍게 웃었다. 카이멜은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도 놀라지 않고,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가볍게 안부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마법사 시라.”

사실 둘은 친구라 정의하기엔 애매한 사이였지만, 친구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서로 오래 얼굴을 보고 지냈었다. 왕국의 유일한 기사단장인 카이멜 시레노바와 대륙에서 몇 되지 않는 대마법사 리비에르 시라는 좋든 싫든, 일 년에 몇 번은 공적으로 꼭 얼굴을 맞대야 했다.

그러나 역시 사적인 자리에서 둘이 만난 적은 별로 없었기에 이렇게 깍듯이 존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는 것이겠지, 카이멜은 그리 생각했다.

따지자면 일 년에 몇 번이 아닌 달에 몇 번을 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둘을 필요로하는 일은 많았지만, 리비에르 시라의 방랑벽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혀를 내두를 만큼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은 둘째치고서라도, 무력으로 그를 붙잡아 둘 수 있는 위인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순간이동은 고위 마법이었지만, 리비에르 시라에겐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만큼 쉬웠을 텐데.

그나마 그가 본 왕국에는 의외로 때가 되면 얼굴을 보였기에, 왕조차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그가 밥 먹듯이 사라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카이멜 역시 처음 몇 번은 그를 따끔히 책망하려 했지만, 그는 특유의 유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참다못한 카이멜이 그에게 한바탕 쓴소리를 쏘아붙인 이후로, 그가 정기 회의에 늦는 일은 없어졌다.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둘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둘 다 공과 사가 확실했기에 공적으로 생긴 불화를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이젠 주기적으로 만나 얼굴을 보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여유가 있을 땐 짧게 안부도 나누다 보니 친구라 부를 만큼 친밀하지는 못해도 이런 곳에서 만나 가벼이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카이멜이 리비에르 시라가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예기치 못했어도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카이멜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저자는 지금 왜 이곳에 와있는 거지?

연말 회의까지는 아직 닷새나 남아있었다. 리비에르 시라가 회의에 불참하는 사고는 없어졌다지만, 그가 일찍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가 그만큼 성실하길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공적인 일이 아니라면 사적인 일로 찾아온 건가? 휘장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카이멜은 파티의 존재를 머릿속으로 상기시켰다.

“자네도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러 온 건가? 초대장은 당연히 받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니? 초대장은 안 가지고 있는데?”

질문에 돌아온 것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경쾌한 부정이었다. 카이멜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자 리비에르는 허공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아니다, 초대장 받았었나? 얼핏 그럴듯한 내용의 서신을 본 것 같기도 한데, 그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참 리비에르 시라 다운 대답이었다. 카이멜은 실소하고 옆에 놓인 잔을 들어 붉게 찰랑이는 달콤쌉싸름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하긴, 리비에르 시라가 초대장을 들고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파티장으로 들어왔다면 그것이 더 놀라웠을지도 모르겠다.

“자네 정도면 초대장을 분실했다 하더라도 별다른 절차 없이 들여보내 줄 것 같긴 하다만. 불청객으로 찾아온 거라면 내가 여기서 자네를 체포해야 할까?”

“하하, 대마법사의 이름을 걸고 공식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니 봐줘~ 어차피 올해 파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굳이 저 홀에 얼굴 보이지는 않을 텐데.”

그런가. 카이멜은 잔에 남은 와인을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 파티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물어보기엔 때로 그는 시끌벅적한 곳에 곧잘 어울렸으니, 그저 마법사의 흔한 변덕이 아닐까 예리하게 짐작했다. 싫다는 사람을 굳이 등 떠미는 취미는 없었기에 카이멜은 짧게 감상을 마쳤다.

“기껏 시간 맞춰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좀 아쉽겠군.”

리비에르 시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초승달처럼 휘는 그 눈매에 거짓 한점 보이지 않았다.

“전혀 아쉽지 않은데? 내가 오늘 여기 온 목적은 이미 이뤘거든.”

“목적?”

의아하게 되묻는 카이멜에게 리비에르는 둥글게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그가 창백한 손을 우아하게 허공에 휘젓자 밤하늘을 닮은 물방울이 그의 손 주변에 모여 휘감겼다. 카이멜은 그가 손가락을 튕겨 물의 형태를 잡고 얼려 투명한 얼음 와인잔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게 보이는 만큼 쉬운 마법이 아닐 텐데. 재능 낭비 아닐까 싶어 헛웃음을 잠깐 지었지만, 리비에르가 미소지으며 얼음 잔을 내밀자 카이멜은 건배하듯 가볍게 자신의 유리잔을 부딪쳤다.

“올해도 자네의 정기적인 회의 참석을 기원할까?”

“처음에 그렇게 혼난 뒤로 불참은 지양하고 있는데 말이지.”

입을 약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그의 모습에 카이멜은 전 질문에 대한 답이 오지 않을 거라 깨달았다. 미약한 아쉬움을 담고 카이멜은 와인잔을 완전히 비웠다.

“그래, 연말 회의까지는 머무를 생각이겠지. 그다음엔 또 언제 들릴 생각인가?”

언제 사라질 것이냐는 질문이 아닌 언제 들릴 생각이냐는 질문에 놀랄 정도로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카이멜은 이번에도 그가 늘 그러듯, 애매모호한 답 아닌 답으로 회피하리라 생각했다.

“시레노바 경이 내 얼굴을 잊기 전에는 다시 와야지.”

그랬기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이멜은 잠시 눈만 깜빡였다. 그러나 기분 나쁜 답은 아니었던지라 카이멜은 이내 쿡 웃으며 리비에르에게 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적어도 시레노바 경과 마법사 시라라는 딱딱한 호칭에서 벗어날 만큼 자주 얼굴을 보여야 하진 않겠나?”

리비에르는 환하게 웃었다. 휘황찬란한 달빛이 그의 미소에 머물렀다. 그의 주변에서 푸른 빛이 반짝이는 것이 참 마법사다운 모습이라고, 카이멜은 생각했다.

“그래야겠지. 그럼 다음에 다시 왔을 땐, 내게 네 이름을 허락해주지 않을래?”

“좋아. 그 약속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보기를 기대하지.”

시레노바 경, 계신가요! 멀리에서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파티장에서 자리를 비운 지 시간이 한참 흘렀을까. 카이멜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리비에르에게 눈길을 주었다. 리비에르는 가보라는 뜻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말 회의 때 보도록 하지. 인사를 남기고 카이멜은 휘장을 젖혀 다시 파티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리비에르는 차가운 발코니 끄트머리에 앉았다. 서늘한 손끝으로 매만진 입꼬리는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비에르의 입이 소리 없이 뜻 모를 모양을 읊조렸다.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간단한 단어 몇 개만으로 날씨를 바꿔버린 마법사는, 그 어떤 마법 주문보다도 강력한 마법 같은 이름을 입에 담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붉은 설렘을 담아, 푸른 마법사는 크리스마스 밤, 새벽이 새도록 하늘을 향해 겨울을 속삭였다.


Written 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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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솦(@soph_wh3)님의 트레틀 그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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