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왕 김헌터
[리즈, 리즈리즈! 나 급해! 그 변태가 보낸 메시지 아직 삭제 안 했지? 그거 필요하거든? 나한테 전송하지 말고 기기 그대로 우리 집으로 와줘……. 내가 이렇게 빌게!]
루흐가 보낸 메시지였다. 리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지 말자고 말렸는데(사실 그렇게까지 열심히 말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 재미있는 장난이었으니까!), 결국 뭔가 일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리즈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변태가 루흐의 집 근처에 잠복해있다가 루흐에게 칼을 들이민다.
너! 너 이 자식, 날 갖고 장난을 쳐?
변태가 소리친다. 변태는 40대 정도. 이제 15살이 된 루흐가 반항하기엔 변태는 나이가 많고 힘도 훨씬 세다. 루흐가 겁에 질려 소리친다. 엄마! 아빠! 리즈는 자신의 상상에 몸서리치며 손목에 찬 데이터패드를 켰다. 방금까지 침대에서 데굴거리며 띄워놓은 별 시덥잖은 검색 결과들을 치우고, 변태가 자기에게 보낸 메시지를 찾아냈다. 별건 아니었다. 리즈는 시간을 보고 로젠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로젠. 나 루흐 빈트 나기의 집에 갈거야. 혹시 내가 오지 않는다면 연락 한번만 해줘.
로젠은 비장한 표정의 리즈를 보고 도움을 줘야할 것이 있을지 물었지만, 리즈는 그냥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이건, 나와 루흐 둘 만의 일이니까. 리즈가 루흐의 집에 가자 루흐는 리즈를 현관문에 세워놓고 미안하다며 수십번 수백번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리즈를 집 안으로 들였다. 집에는 루흐네 부모님이 있었다. 나기 아저씨는 억울한 표정으로 서있었고 나기 아줌마는 화가 난(그러면서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리즈가 집에 들어가자 모두 리즈에게 시선이 쏠렸다. 정확히는 리즈 앞을 막듯 선 루흐에게 시선이 쏠렸다.
엄마, 아빠, 내가 증거 가져왔어. 그러니까 화해 해…….
루흐는 부모님에게 리즈의 데이터패드를 보여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건 딱 하루 전의 일이었다. 리즈의 SNS 닉네임에서 시작된 일……. 루흐는 리즈가 SNS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SNS 계정을 같이 만들어줬다. 루흐의 SNS 닉네임은 “나무왕” 이었다.
왜 나무왕이야? 이상해. 촌스러.
리즈가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야, 이렇게 아저씨 같은 닉네임을 써야 강해보이는거라고.
루흐는 그러면서 리즈에게 닉네임을 맞추자고 했다. 그러니까 리즈도 나무왕처럼 무슨“왕” 으로 닉네임을 만드는게 어떻냐는 뜻이었다. 리즈는 나무에 대응하는 단어를 생각해내다 학교 창문으로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별 생각 없이 “바람왕” 이라고 지었다. 바람은 리즈를 설레게 했다. 물론 그 설렘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사춘기의 우수가 리즈를 적셨지만.
나무와 바람.
두 청소년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건 리즈식 하이파이브라고, 리즈의 친구들이 하는 하이파이브였는데, 리즈가 네 손바닥을 보이면 친구가 두 손으로 그 손바닥들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드럼 치듯이 말이다. 엘리자베스 “리즈” 알포트는 그렇게 SNS 계정을 만들었고, 바람(자연 현상)을 바람(불륜)으로 착각한 변태 계정이 메시지를 보냈다. 리즈는 소리를 지르며 루흐에게 신고하면 일이 복잡해지는지 물었다. 루흐는 엘리자베스의 데이터 패드를 자신 앞으로 끌어왔다.
이런 놈들을 섹계라고 하는데, 신고해도 좋지만 그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어.
싫어. 그냥 신고할래.
재미있을텐데?
…….
리즈는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자극적으로 즐거움만을 쫓는 15세 여중생 두 명이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충 짐작을 했을 것이다. 리즈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말리긴 말렸으니까, 자기에게 불똥이 떨어지지는 않겠지. 루흐는 변태가 보낸 메시지를 중얼거리며 읽었다.
[반려,,, 몰래,,, 만남을,,, 같지 않으시겠,,, 습니까,,, 변녀 있음,,,]
그리고 루흐는 주변을 슥슥 둘러보더니 어른 목소리를 흉내내며 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건 솔직히, 웃겼다. 리즈는 위의 두 손으로 입을 가렸고, 아래쪽 손으로는 루흐를 퍽 소리 나게 쳤다. 루흐는 쿠흡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웃겨서 둘은 또 웃었다. 그렇게 별 것 아닌 걸로 웃다가 루흐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자신의 아버지 전화번호를 변태에게 보낸 것이었다.
누구 전화번호야?
리즈는 내심 자신을 괴롭히던 조그마한 여학생의 전화번호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 일은 없었다. 당연하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루흐는 아버지 번호를 보낸 거니까.
내 아버지 전화야.
뭐? 그거 안 되잖아! 너희 가족이잖아.
이런 새끼들은 강약약강이야. 아버지인거 알면 곧장 꼬리 내리고 도망갈걸?
루흐는 몇 달 전, 자기를 성희롱하며 번호를 따려고 한 고등학교 2학년 선배를 아버지 전화번호로 퇴치했다. 선배의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며 선배를 나무랐고, 선배는 그 다음부터 루흐를 보면 빙 돌아갔다. 루흐는 가족이 변태들을 퇴치해줄거란 과한 확신에 젖어있었다. 그렇게 루흐는 결혼기념일에 변태에게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보냈다.
오늘 재밌었어! 내일 봐, 리즈.
루흐는 리즈와 변태에게 쳤던 장난을 까맣게 잊고 부모님을 위한 케이크를 샀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고함소리를 들어야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열심히 쪼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비참하고 불쌍하게 구겨져있었다. 루흐는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친구들이 싸울 때 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를 말리려고 했다.
나가서 놀고 있어! 애가 끼어들 일 아니야!
어머니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엄마……. 엄마, 제발! 왜 그러는지만 알려주면 안돼? 오늘 결혼기념일…….
그렇다. 오늘 결혼기념일이란 말이 갑자기 루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변태에게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보낸 것도. 일종의 가능성이었지만 루흐는 갑자기 터져나온 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황해 루흐에게 달려왔다.
엄마 아빠가 풀어야 할 오해가 있어.
아버지가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니 잠깐 나갔다 올까?
루흐가 코를 쿨쩍였다.
아마, 그거, 나, 때문인 것 같아.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루흐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왈가닥 공주님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루흐는 리즈를 불렀고, 리즈는 별별 생각을 하며 루흐의 집으로 왔다.
그러니까, 나무왕이 우리 리즈 계정인데.
나기 아줌마가 화를 꾹꾹 누르며 루흐에게 말했다.
네가 그 계정으로 온 스팸 메시지에 아버지 전화번호를 보냈다, 이거니?
루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흐는 나기 아줌마의 분노를 짐작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기 아저씨 역시 어마어마한 표정이었다. 리즈는 눈치만 보다가 그 집에서 도망 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루흐와 나기 부부는 엘리자베스 알포트의 존재를 까맣게 까먹었다.
그것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놀랬는 줄 알아!
나기 아저씨는 나기 아줌마의 고함에 맞춰 자신의 데이터 패드를 보여주었다. 그 곳에는 변태의 문자 메시지 폭탄이 있었다. 다 자기랑 바람을 피자고 하는 내용이었다. 루흐는 그제야 변태가 랜덤하게 붙은 것이 아니라 리즈의 닉네임을 바람(불륜)으로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아빠도 당황했다. 왜 내 번호를 준거야?
하, 하지만, 아빠……. 저번에 변태 선배가 내 번호 따갔을 때는…….
그건 아빠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니까 그런거지! 이건 그냥 신고를 했어야 했어!
몰랐어!
오늘 아빠랑 엄마 결혼기념일이잖니!
좀 더 적극적으로 말릴 걸. 리즈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루흐가 혼나는걸 듣고 있자니,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기 아줌마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너무 화를 내 쉬어버린 목소리로 문을 열었다. 거기엔 중무장을 한 로젠과 리오가 서있었다. 내가 찾으러 오라고 했지 무장을 하라고 한 기억은 없는데. 리즈는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누, 누구……. 혹시 수호자 님이신지……?
안녕하세요. 리즈,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알포트 양을 찾고 있습니다.
리오가 점잖게 말했다. 과했다. 덕분에 나기 아줌마는 자기가 리즈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 커다란 반인간 반엘릭스니를 까먹었다는 것은 분위기가 지나칠 정도로 과열되었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두 분은 리즈와 어떤 사이인지.
나기 아줌마는 별 생각 없이 리즈를 넘겨주려다 수호자가 리즈를 찾는 것이 이상해 물어보았다. 리즈는 나기 아줌마 등 뒤에서 속삭였다.
부끄럽긴 하지만 제 양어머니와 양언니에요.
앗! 로젠이랑 리오 언니다, 안녕!
루흐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엄청 혼나느라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목도 살짝 메여 있었다. 로젠이 조심스럽게 대체 이 안에서 애들과 무슨 일이 있는 지 물었고, 나기 아줌마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일단 들어오라고 했다. 리즈는 파랗게 질렸다. 루흐와 리즈(아! 나는 말렸다고!)의 만행을 듣고 로젠은 노발대발해서 리즈를 혼내기 시작했다. 리오가 남의 집에서 애 혼내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끌고 나갈 때 까지 로젠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리오가 90도로 인사를 했다. 나기 아줌마는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 쳤다. 어차피 자기도 리즈 앞에서 아이를 혼냈으니 피차일반이라고. 리즈는 고개를 살짝 틀어 루흐가 있는지 봤는데, 아마 나기 아저씨한테 엄청 혼나는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로젠이 말했다.
널 절대 수호자가 되게 하진 않겠지만. 넌 수호자 되면 백퍼센트 헌터야. 닉 바꿔. 바람 안 들어간걸로.
헌터에 바람이 아닌 다른 것……. 폭풍왕 김헌터? 리즈는 촌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닉네임이 머릿 속을 뒤흔들었다. 리즈는 쿠흡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위기 때문에 이빨로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이미 터진 웃음이었다. 로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에 가면 2차전이 시작되겠네. 하지만 리즈의 입꼬리는 씰룩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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