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렘
* ‘모집합니다. 나이/성별/인종/능력 무관.’ A이 팸플릿을 발견한 건 유월 이십육 일 오후 세 시경이었다. 점심시간 십 분 전에 걸린 긴급 출동으로 끼니를 거른 에스퍼들이 급식실로 대거 몰려들었던 바로 그때. 팸플릿은 홍보라는 제 탄생 이유를 착실히 수행하는 듯 배식처 바로 옆 벽면에 붙어 있었다. 촌스러운 파란색 배경에 얼기설기 누끼를 딴 설원
온종일 안개가 자욱했다.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일 정도로 짙고 빽빽한 연무였다. 그래서 B는 장마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본래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야 할 빗줄기는 없었다. 땅에서 모락모락 피는 열기가 물기를 바싹 말린 탓이었다. 어렵사리 형성된 비구름에서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과일에서 즙을 쥐어짜듯 억지로 비틀어봤자 전부 땅에 닿기
00. 너는 떠날 거라고 했다. 01. 우스운 이야기를 해볼까. B는 봄과 겨울이 닮았다고 믿었다. 문학적인 의미보단 자조적인 믿음에 가깝기야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이별이 있고 그들 모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느 날에는 만남만 있기를 바라고 어느 날에는 이별만 있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
오. 안녕해요. 거기는 어때요? 여긴 좀 망했어요. 좀이 아니라 많이? 아무튼, 음, 산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나 때문은 아니에요. 나는 최선 다했어요. [죽겠답시고 블랙홀로 뛰어드는 사람 뒷덜미 붙잡으면서 인생 설교하는 것도 한두 번이죠. 그거 은근히 빨리 질린다니까요.] 오늘 날짜가……. 2043년 7월 14일이에요. 딱 일주일 지났어요. 음, 그러니
정말 지치지도 않으시는군. 그게 브루노의 첫 소감이었다. B 가문의 집사장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일해온 지 어느덧 육십 년이었다. 호그와트를 졸업한 직후부터 몸담아 온 덕에 B 가문과는 이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웬만한 사건은 브루노의 손짓 아래 쥐 죽은 듯이 처리됐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가주에게 올라가는 일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을 본인
날숨이 안개처럼 핀 밤이다. 땅거미 내린 지평선 위로 간헐적인 불빛이 깜빡였다. 일정하지 못한 거리를 두고 박힌 가로등이 꼭 이쑤시개 같다고 생각하면서 B는 모자를 한껏 눌렀다. 우산이 없었다. 출근길에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대가가 이렇게 돌아왔다. 나직이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굵지는 않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회사 건물 처마의 끝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