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04.

S by 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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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안개가 자욱했다.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일 정도로 짙고 빽빽한 연무였다. 그래서 B는 장마가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본래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야 할 빗줄기는 없었다. 땅에서 모락모락 피는 열기가 물기를 바싹 말린 탓이었다. 어렵사리 형성된 비구름에서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과일에서 즙을 쥐어짜듯 억지로 비틀어봤자 전부 땅에 닿기 직전 허옇게 기화했다. 물이 증발하며 피어오른 수증기가 안개처럼 보였다. B는 구릉 위에 앉아 그 모든 것을 빤히 관찰했다. 발치에서 바싹 마른 들꽃이 열풍에 바스라졌다.

세상은 열에 들끓고 있다. 비유하자면 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솥이 되었다. 요리 실력이 끔찍한 초짜에게 불 조절을 맡긴 격이었다. 적당함을 모르고 들끓는 지구는 수분이란 수분을 죄 날렸다. 동식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인간은 그나마 오래 생존했으나 어느 기점부터는 무서운 속도로 죽어났다. 동식물들이 대체로 불타 죽었다면 인간들의 사인은 대개 아사였다. 먹고 마실 것이 없으니 굶어 죽고 약해진 몸을 견디지 못해 앓아 죽었다. 인류의 마지막 방송사에서 내보낸 최후의 뉴스는 간략한 한 마디로 종말을 선언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고루한 말이었다.

B는 사실 그 모든 난리와 거리가 있었다. 인류는 몇 세기에 걸쳐 멸망의 끝자락까지 갔다가 기어코 번영하기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세계대전이니 뭐니 하며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결국엔 어떻게든 될 거라고 B는 나름 확신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겠으나, 뭐, 어차피 그래봐야 인류사에 있어 장대한 첫 걸음일 테니 그다지 걱정도 되지 않았다.

B는 인간이 아닌 그들의 멸종을 우려했다. 그들이라 함은 B가 속한 종을 뜻했으며, 이는 즉 B가 인간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인외의 존재에 관심이 많던 인류가 밝혀내지 못한 지구의 수많은 비밀 중 하나였다. B는 고개를 들었다. 뿌연 안개 덕분에 하늘은 보이지도 않았다. 수분을 바싹 말렸다더니 안개를 이룰 물은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이 바로 B가었다.

저 멀리서 오밀조밀 뭉친 안개가 서서히 다가왔다.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구릉 바로 밑에서 재촉하듯 빙글빙글 도는 안개 뭉치를 내려다보던 B가 몸을 일으켰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며 머리칼을 휙 스쳤다. 드러난 목덜미엔 인간의 것이 아닌 비늘이 돋아 있었다. 윤기가 없고 가뭄 든 땅처럼 쩍쩍 갈라졌음에도 피부라고 보기엔 어려운 형태였다.

“기다려!” 하고 B가 소리를 높였다. 비탈진 길에서 가볍게 걸음을 떼자 몸이 훌쩍 날아올랐다. 바람이 한 번 불자 인간의 형태는 완전히 흩어졌다. 네 발로 땅을 디딘 짐승이 경사를 달려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물을 다스리고 화기를 억누른다는 상서로운 짐승.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B는 해태였다.

 

 

“몸은 좀 어때?”

B가 방에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작은 방이었다. 단칸방 벽면엔 녹과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온통 쿱쿱한 냄새가 났다. 빈 말로도 깨끗하다 말하지 못할 공간은,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딘가 미묘하리만치 괴상한 구석이 있었다. B는 손을 들어 뺨에 맺힌 물기를 닦았다. 일견 무심하게까지 보이는 손짓이었다.

반응은 그러고도 조금 후에 돌아왔다. 작은 방 구석진 모서리의 어둠이 꿈틀대더니 갈라져 나온 것이다.

그것은 세간에서 부르는 사자를 꼭 닮았다. 하지만 수염이 길고 사자보다 풍채가 컸으며, 결정적으로 짙푸른 빛이었다. 털인지 비늘인지 모를 것들이 걸음마다 우수수 떨어졌으나 흔적은 남지 않았다. 바닥에 닿자마자 연기를 피워내며 기화한 것이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방안 가득 습기가 들어찼다. 눅눅한 공기는 모두 저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B의 발치에서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뜨거운 숨과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B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목덜미에 깊이 손을 넣어 쓸어내리자 그것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볍게 얼굴울 비비던 그것은 이내 B의 무릎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많이 더워?”

대답은 약간의 앓는 소리로 돌아왔다. B는 고민하다가 그것을 완전히 끌어안았다. 눈을 감자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품에 들어찼던 부슬부슬한 털과 짐승의 형태는 점점 인간의 것으로 바뀌어갔다. 짐승의 숨 넘어가는 소리처럼 들렸던 웃음도 점차 사람의 것이 되었다. 마침내 제 등을 마주안듯 등을 감싸는 두 팔을 느꼈을 때 B는 다시 눈을 떴다. 네 발 짐승은 어디로 가고 잘생긴 남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A.”

“응, B.”

B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A는 그러거나 말거나 B의 목덜미에 얼굴울 비비기 바빴다. 뜨끈뜨끈한 열기가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머리칼만 헤집던 B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경계까지 다녀왔어. 인간은 찾지 못했어.”

“응.”

“시체만 한가득이었어. 전부 묻어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러질 못했어. 형님들은 여전히 어디 계신지 모르겠어.”

이번 대답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돌아왔다. “응.”

망설이던 B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했다.

“A. 많이 더워?”

조금 전에도 물은 말이었다. A가 자연스레 흘린 질문이기도 했다. 비비적거림이 우뚝 멈췄다. B는 고개를 내려 제 아래에 파묻힌 A를 빤히 바라봤다. 열기에 벌게진 얼굴과 온몸을 적신 땀. 이마는 뜨거웠고 하다못해 날숨조차 열감으로 가득했다. 물과 불은 본질적으로 상극일진대. 물을 다스리는 해태가 이렇게까지 열에 달아오르는 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러다가 A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은 집요하리만치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유치한 눈싸움 같기도 했다. 그 끝에서 A가 웃었고, 곡선을 그린 눈매에 시선의 행방을 쫓지 못했고, 그래서 B는 이어진 A의 말에 조금 울고 싶어졌다.

“조금?”

해태는 물을 다스리고, 화기가 많은 땅에 정착해 열기를 빨아먹으며 땅의 균형을 잡는다. 그들은 유일한 해태가 아니었다. 해태라는 존재를 먼 옛날 인간이 구상했을 때부터, 첫 해태가 태어났을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가족으로서 생활해왔다. 그들은 생명이 아니었으므로 죽음 또한 그들을 비껴갔다. 하나의 무리를 넘어 군락, 군락을 넘어 사회가 될 만큼 그 수가 늘었거늘 지금 B가 생사를 아는 해태라곤 A과 그 자신밖에 없다. 하나의 사회를 이룰 만큼 수가 많았던 해태들로도 들끓는 열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생명이라기보단 관념체에 가까웠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기묘한 데가 있어 그렇게 될 거라 믿으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땅의 열기를 잠재우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해태가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하고 B는 뒤늦게 생각했다.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태어난 해태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불가능의 영역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도 해주지 않았다. 만일, 이미 몸에 치사량의 열을 담은 채로, 어딘가에서 게워내지도 못한 채 안에서부터 말라가고 있다면. 열이 한기를 전부 집어 삼킨다면 그 해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A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에겐 죽음이 없다. 그들은 태어날 뿐 사라지지 않았으며 사라짐이 죽음과 같을 수도 없다. B는 입을 달싹이다가 그냥 A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웠다. 눈물조차 말라버릴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해, 하고 형이 말했다. 동네를 두 바퀴 정도 돈 직후였다.

그들은 시찰을 나온 참이었다. 장로님이 근래 들어 무언가가 심상치 않으니 각별한 주의를 요하라고 한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다. 형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살피더니 얼굴을 와장창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더워. 남이 듣기엔 우스꽝스러운 투덜거림 같을지언정 B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다. 그들은 해태였고, 그들이 말하는 더위란 인간의 더위와 같지 않았으며, 덥다는 말 앞에 너무하단 수식어가 붙는 순간 일은 심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형은 하루 빨리 복귀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들은 곧장 돌아와 보고를 준비했다.

보고서는 길지도 않았다. 긴급 사태를 알리기 위함이었기에 진상 규명은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허겁지겁 준비한 보고서를 장로회에 올렸을 때 돌아온 대답은 비슷한 보고서가 수십 개 올라왔다는 말이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보고서를 받은 장로는 심상치 않은 열풍이 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B가 할 수 있는 건 괜찮을 겁니다, 항상 그랬잖습니까, 같은 의미 없는 위로뿐이었다.

A네 조와 만났을 때는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원인 모를 열과 뒷순위가 된 진상 규명. 우선 순위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기는 한다고 했다. A는 B가 조원들과 떠들 동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평소와는 다른 조용함에 B는 고개를 돌렸고, A과 눈을 마주했으며, 눈꺼풀이 여닫히는 그 몇 번의 찰나 틈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파견 나갔던 해태 하나가 실종되었다는 비보가 도착한 것과 A의 몸이 허물어진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B는 낯선 인기척에 눈을 떴다. 무언가 달그락대는 소리였다. 한껏 죽인 숨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가냘픈 동시에 가쁘게 몰아쉬는 호흡은 A의 것도, B의 것도 아니었다. 정자세로 누운 자세 그대로 B는 천천히 감각을 넓혔다. 모르는 인간이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다급하게 찬장을 들쑤셨다. 그러다가 A가 조금이라도 뒤척인다면 지레 놀라 흠칫거렸다. 손에는 냉기 어린 것을 쥐고 있었다. B는 인간이 식칼을 쥐고 있으며, 식자재를 손질하기 위해 만들었을 의도와는 달리 누군가를 해할 수도 있는 도구임을 알았다.

인간이 저 칼로 제 배를 쑤신들 B는 죽지 않을 것이다. 통증이야 물론 있겠으나 칼을 뽑은 자리엔 피가 흐르는 대신 구멍만 뻥 뚫려 있으리라. 상처는 내버려두면 알아서 붙을 테지만, 음, 지금 같은 몸 상태로는 사실 장담할 수 없기도 했다. 특히 A는 안 됐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위태로운 마당에 상처를 늘려서 좋을 건 없었다. 그렇다면 저 인간을 자극하지 않는 게 나았다. 생각을 정리한 B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러 소리를 크게 냈다. 인간은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식칼을 꼬나쥔 채로 몸을 휙 돌렸다.

“우, 움직이지 마.” 하는 말이 들렸다. B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기까지 했다. A 곁에서 훔쳐 봤던 인간들의 드라마나 영화 속, 인간들은 자신이 악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런 모습으로 표출하곤 했다. 귀 언저리에서 달랑거리는 두 손이 조금 어색했으나 인간은 조금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B과 제 식칼, 그리고 구석에 누운 A를 번갈아 살피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B에겐 그가 열 덩어리로 보였다.

“가만히 있으면 다치진 않을 거야. 나도 사람을 찌르기는 싫어.”

“뭘 원하십니까?”

“뭘 먹지 못한지 벌써 사흘째야. 목도 제대로 못 축였어. 뭐라도 좋아. 나는 입술이라도 적시고 싶을 뿐이야.”

그렇다면, 하고 B는 입을 열었다. 그들은 무언갈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이 좁은 단칸방엔 음식이랄 것이 없었다. 이를 잘 설명해 인간을 구슬려 내보내는 게 최우선 목표였다. B가 보아온 인간이란 무언가를 이해한 순간 그와 상반되는 의지를 상실하는 종족이었으므로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B는, 더없이 차분하고 일목정연하게, 이곳엔 먹을 것이 없고 있는 것이라곤 환자와 간병인뿐이니 돌아가주십사 부탁했다.

B가 말을 끝맺자 인간은 얼굴을 왕창 찡그렸다. 얼굴만 보면 숫제 악귀였다. 눈치 없는 B조차도 인간의 심기가 불편함을 넘어 증오에 가깝게 변했음을 알았다. B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 순식간에 되짚어 보았으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사실만을 말했고 거기엔 모순점 또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꼬나쥔 식칼을 디밀며 “거짓말은 안 통해!” 하고 고함을 쳤다. 너도 내가 우습냐는 자학이 뒤따랐으나 B는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턱 밑에서 위협적으로 오가는 칼이 신경 쓰인 건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B는 A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처음 쓰러진 이후로 A는 열감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오랜만에 깊이 잠든 A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도 그걸 알았나 보다. 그의 눈치는 B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기민한 게 분명했다.

다음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인간은 고개를 훽 돌렸고, 이성을 잃은 시선 끝엔 A가 있었다. 인간이 걸음을 뗐고, B는 그 직후 움직였다. 인간이 치켜든 식칼을 찍어내리기 직전 B는 인간을 막아섰다. 칼이 제 복부를 파고들 때 B는 승리감과 정복감, 불쾌감과 공포 따위로 번들대는 인간의 눈이 꼭 수라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찔한 고통이 일었다. B는 쓰러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줬다. 통증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인간은 광기 어린 웃음을 나직이 흘리다가 점차 얼굴이 시허옇게 질려갔다. 의미 없는 물음표 몇이 튀어나왔다가 산화했다. B는 칼을 뽑았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찰흙을 도려낸 것처럼 뻥 뚫린 구멍 틈을 멍하니 바라보던 인간이 경련하며 괴성을 질렀다.

“괴, 괴물……!”

그리고 다음 순간 A가 깨어났다.

이불 접히는 소리가 났다. A는 잠기운에 가라앉은 눈으로 B과 인간의 대치를 가만히 응시했다. B는 A의 눈에서 점차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구멍 난 B의 복부를 마지막으로 A는 모든 것에서 눈을 뗐다.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안 자?”

“잠 다 깼어.”

A가 한 걸음 내디뎠다. 인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B는 그 순간 A가 인간을 죽일까 덜컥 겁이 났다. 인간으로부터 태어난 그들은 인간을 해해서는 안 됐다. 어기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적어도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B는 자신을 지나치려는 A를 다급하게 불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되는 대로 말을 뱉어냈다.

“밖에 비가 올지도 몰라. 비구름을 불렀어.”

“…….”

“그러니 어쩌면 목을 축일 수 있게 될지도 몰라. 형님들도 비구름을 통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실 수 있으리란 희망도 가지고 있어!”

A는 걸음을 멈춘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B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 열을 나한테 줘. 형들과 만나면 네 열병도 방도가 있을 거야.”

A는 그제야 움직였다. 앞으로 나아가던 걸음을 천천히 물린 것이다. 그는 주저앉은 인간을 두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B를 마주봤다. 지척에 다가서자 숨 하나하나에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했고 현기증이 이는지 눈이 탁했다. A가 손을 뻗었다. 품에 기대듯이 안기는 몸이 무거웠다.

“B는 괴물이 아니야.”

뜻밖에도 A가 한 말은 그거였다. 조금 뜬금없고 유별난 말이었다. B는 A가 무슨 의미로 저렇게 말했을지 잠시 고민해보았으나 그 또한 찰나였다.

“B는 괴물 아냐.”

“…….”

“우리는 괴물이 아니야.”

인간이 부리나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B는 A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채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B를 깊은 잠에서 깨운 건 나지막한 신음이었다.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단칸방 구석에 처박힌 A가 작게 앓는 소리였다. B는 정승처럼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갈증이 났다. 물을 마시지 못한지 한참이 지났다. 가슴의 답답함이 무엇 때문인지 몰랐다. 마른 침만 삼키며 B는 A 앞에 앉았다. 반쯤 뜬 눈으로 B를 올려다보던 A가 입술을 달싹였다. 마르다못해 쩍쩍 갈라진 표피가 비늘처럼 올라와 있었다.

“B는 안 더워?”

A가 그렇게 물었을 때 B는 조금 망설였다. 덥다고 대답하면 안 그래도 티를 내지 않는 A가 완전히 멀쩡한 척 돌아다닐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부정하자니 끝까지 숨길 자신이 없었다. 대답을 신중히 고르는데 A가 킥킥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만큼의 기력만 있었다.

“B도 더우면서 내 열을 뺏어가려고 해.”

“뺏어가는 게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너와 나 중 그나마 상태가 나은 사람은 나이기 때문에, 네게 있는 열을 적당량 흡수해서 나누려고 했을 뿐이야.”

“그게 그거야.”

“전혀 달라! 뺏는다는 말에는 강제력이 깔려 있기 때문에 나누는 것과는 천지 차이야, 바보야!”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A가 웃었다. B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짧게 고민하다가 대신 A의 머리맡에 앉았다. 땀에 젖은 축축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A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얕은 침묵이 나앉았다.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B 요즘 생각이 너무 많아.” 적막을 깨고 A가 말했다. 비밀을 속삭이듯 은밀한 목소리였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힘들어. 가끔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놓아야 해.”

“내가 무슨 생각이 많다고 그래.”

“매번 궁금해하고 있잖아.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A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고통 때문인지, 아님 그냥 시선을 회피하기 위함인지. B는 A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해태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어쩌면 해태라는 종족이 아닌 A에 국한되는 궁금증인지도 몰랐다.

대답이 없자 A가 몸을 뒤척였다. 무릎 위에 놓인 머리통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가만히 있어, 하며 뺨을 쿡 누르자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퍽 심술 맞은 목소리였다.

“인간들은 본인들이 천국에 갈 거라고 믿던데. 왜 우리는 못 갈 거라고 생각해?”

“바보야. 우리가 인간이야? 인간은 우리랑 다르잖아.”

“인간이랑 우리랑 뭐가 다른데?”

당당한 되물음이었다. 그래서 B는 할 말을 잃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A가 정신을 놓아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인간과 같을 수 없었다. 애당초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였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부모가 없으나 인간이라는 종 하나가 거대한 어버이였다. 적어도 B는 그렇게 배웠다. 인간을 위해 일할 것. 인간을 위해 살 것.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자 A가 감았던 눈을 떴다. 닫혔던 눈꺼풀이 말려 올라가며 형형한 눈을 드러냈다. 머릿속을 꿰뚫는 듯한 시선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고 속삭이며 A는 손을 들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가락이 이마를 쿡 찌르더니 콧대를 타고 내려왔다. 그렇게 입술에 안착했다.

“우리는 인간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지, 인간이 아니야.” 그제야 B가 버벅거리며 말했다. “다른 점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런 거라고 배웠잖아.”

말에는 한 치 거짓도 없었다.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그러니까 갓 태어났을 적부터 그렇게 배워왔다. 의구심을 지닌 자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자도 있었으나 배움에 있어선 모두가 똑같았다. 인간과 우리의 다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 모아 인간과 우리는 다르다고 말하는 어른들 틈에서 호기심을 내비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과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는 차분히 생각해보라는 말 아래에 묻혔다. 그렇게 B는 커가며 정말로 다시 생각해보았고, 어른들의 결론이 옳다고 판단했으며, 그 순간부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자 A는 도로 눈을 감았다. 몸을 뒤척여 등을 돌렸다. 어딘가 심통 난 듯한 몸짓이었다. B는 A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A는 앳된 자신이 이의를 제기하고 다닐 때도, 모든 것을 수긍했을 때도 아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곁을 졸졸 따라다녔을 뿐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진다는 격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들은 인간이 말하는 사람이 아닐 테지만 엇비슷한 요소는 있었다. 어쩌면, 하고 불쑥 드는 생각에 B는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A.”

조급함이 목소리로도 드러났다. B는 등을 돌리고 누운 A를 살살 흔들었다. 반응은 없었다. 눈을 찡그린 B가 다시 한번 말했다.

“A.”

“왜?”

“너 죽는 거 아니지?”

내뱉고 나서야 모순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을 되감을 수도 없었고, 말을 주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A를 향한 염려스러운 감정을 요약하기에 알맞은 단어는 죽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B는 입술을 꾹 짓씹었다.

“우리는 인간 아니잖아. 그러니까 안 죽는다고 했는데 B는 뭘 걱정해?”

“나는…….”

“말이 앞뒤가 안 맞아.”

A가 중얼거렸다. B는 조금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A를 내려다봤다. 이럴 때는 좀 져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지금 눈앞에서 시름시름 앓는 오랜 친구를 향한 불안함 정도는 이해해줄 수도 있잖아. 애당초 B는 해태가 앓는다는 전제부터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관념체였다. 관념체에는 삶이 없었고, 그들은 생명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죽음도 아픔도 그들을 비껴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을까.

그때 A가 돌연 입을 열었다.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심술부렸어. B가 답답해서.” 내가 답답하냐고 되물으려는데 A가 한발 빨랐다. 여전히 눈을 맞추지 않은 채 그가 말을 이었다. “B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나도 똑같은 걱정 해.”

A가 뻗은 손은 이내 찰흙처럼 뭉그러진 복부로 향했다. 상처는 어느 정도 붙었으나 채 아물지 못해 여전히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부근을 꾹 누른 A는 직후 손을 떨궜다. 영 관심이 없는 것도, 상처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도 같았다.

“혼자 남는 건 싫어.”

A가 중얼거렸을 때 B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들불 같은 갈증이 일었다. 목이 바싹 말라서 울음도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문득 B는 인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그저 입술을 축이고 싶을 뿐이라던 그 말. 어째서인지 조금 이해가 갔다. 분에 넘치도록 퍼마실 물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한 방울이라도 좋았다. 입술을 적시고 갈라진 표피에 맺힐 무언가가 필요했다. 제 호흡이 되어줄 무언가가 한 방울이나마 절실했을 것이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다. 욕심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랬다. 탐욕스럽게 양껏 채우기엔 상황이 여의찮았다. B가 바라는 건 고작 물 한 방울이었다. 입술을 적시며 괜찮을 거라고 속삭여줄 누군가였다. 기왕이면 A가길 바랐다. 이 미쳐버린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제 곁을 지킬 사람은 기왕이면 A가기를 원했다.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A는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끝자락부터 함께 해왔으므로. 자만했던 거다. B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눈에 힘을 줬다. 그러지 않으면 아까운 수분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형들도, 누나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전부 없어진 지금 B에게 남은 건 A 하나였다. 그마저 잃는다고 생각하면 무저갱 같은 외로움이 덮쳐왔다.

그때 따뜻한 무언가가 뺨에 닿았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순간 몸이 흠칫 굳었다. 그러나 손의 주인은 A임을 알았기에 B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골랐다. A는 항상 또래 해태보다 열이 많았으나 이렇게까지 뜨겁다고 느껴지는 건 근래 들어 일어난 일이다. 손은 완전히 불덩이 같았다. 본인이 느낄 열기는 얼마나 심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염려의 말을 뱉기도 전에. A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른 입술이 움직임에 따라 다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들 영화에서 본 거. 따라 하면 화낼 거야?”

B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A가 웃으며 부드럽게 목덜미를 당겨왔다. 입술과 입술이 가볍게 맞았다. 뜨겁고 버석했다. 입안이 바싹 말라 축축함은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도 젖어 드는 입술과 입안을 헤집듯 파고드는 살덩이에 B는 눈을 감았다.

 

 

인간 무리가 찾아온 건 다음 날 꼭두새벽이었다. A는 자려고 애쓰고 있었고 B는 그런 A의 머리맡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 중이었다. 넋을 놓았던 B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터지는 굉음에 반사적으로 A를 바라보았다. A 또한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여기에 괴물이 있다면서.”

부서진 문 너머에서 인간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하나같이 행색이 남루했으나 두 눈에 깃든 탐욕만은 빛 하나 없어도 선명했다. 그들은 번들대는 눈으로 방안을 훑었다. B 또한 몸을 굳힌 채 그들을 살폈다. 깡마른 몇과 덩치가 제법 되는 몇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개중 마르고 힘없어 보이는 이들은 덩치들을 연신 힐끔거리기 바빴다. 이내 가장 앞장선 덩치를 살피던 B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의 손엔 낯선 쇳덩이가 들려 있었다. 그 순간 B는 가장 처음 들었던 굉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총소리였다.

B는 입술을 사리물며 나직이 몸을 낮췄다. 긴장한 태가 역력한 B를 보며 그들이 이죽거렸다. 쓰임새에 따라 생활용품이 될 수도 있는 칼과는 달리 총은 명백한 무기였다. 누군가를 해하거나 위협하기 위한 용도였다. 총을 들고 있다는 건 그들이 긴장감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작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괴물이라면서. 딱 우리에게 필요한 놈이군.”

우두머리가 말했다. 그는 B과 A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눈을 살짝 찡그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어쩌면, 하고 B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 필요하다는 건 곧 살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B가 입을 열기 직전, 뒤에서 누군가 태연하게 말했다. 뒤돌아볼 것도 없었다. A가었다.

“우리는 그쪽이 필요하지 않은데.”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우두머리가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필요한 건 한 놈뿐이야. 말 많은 놈은 필요 없어.”

“우리는 말 없는 놈도 안 필요한데. 그것참 슬픈 일이야.”

B는 직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굉음이 울렸다. 그것도 여러 번. 사지 곳곳이 꿰뚫리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려던 찰나 몸이 기화했다. 구름으로 변한 몸을 누군가가 낚아채는 과정에서 몹시 어지러웠다는 사실만 확실했다. 시야가 핑글핑글 돌고, 어지럼증에 시달리다가 너절한 팔다리를 꿈틀거리면, 미안하다는 나지막한 사과가 의식을 저 멀리 끌어 무저갱 속에 던져놨다.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B는 허허벌판에 드러누워 있었다. 주위는 온통 갈대밭이었다. 제 허리만큼 자라난 갈대들이 바람을 따라 휘꺽휘꺽 흔들렸다. 갈대가 이만치 자라려면 물이 필요했을 텐데. 비현실적인 광경에 B는 잠시 자신이 아직도 꿈을 꾸나 의심했다. 물론 그 예상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불어온 바람이 유달리 무겁고 습했다. B는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로 똑바로 서려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에 구멍이 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주위에 굴러다니던 기다란 막대를 지지대 삼았다. 그렇게 일어나 걸었다. 목적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또렷했다.

그렇게 B는 A 앞에 다다랐다.

A도 바닥에 누워 있었다. B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그가 조금도 미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등을 보인 채였다. 심통 났을 때 A는 종종 등을 보이고 누웠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줄만 알았다. 인간을 살려 보낸 안일함을 탓하는 줄 알았다. 괴물이라는 소리에 진짜 괴물이 누구냐 묻지 못해 아쉬워하는 줄만 알았다.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균형을 잃고 땅을 굴렀을 때 무언가가 명백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땅이 축축했다. 서늘한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땅은 한없이 차가웠다.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니. 남은 정도가 아니라 소낙비에 젖었다가 막 마르기 시작한, 딱 그 정도의 척척함이었다. 손아귀에서 젖은 흙이 뭉쳤다가 부서졌다. B가 고개를 들었다. A가 있었다. 제가 넘어졌거늘 등 한 번 돌리지 않는 A가 있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B는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천천히, 아주 느지막하게 A에게 다가갔다. 손을 내뻗으려다가 닿기 직전 멈췄다. 내민 손이 둥글게 말렸다. 꾹 쥔 주먹은 바르르 떨리다가 떨어졌다. B는 대신 고개를 떨궜다. 미동 없는 몸과 이마가 툭 맞닿았다. 진동에 따라 잘게 흔들리더니 이내 잿더미처럼 흩어졌다.

B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참을 떨군 채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낮과 밤이 수십 번 반복될 동안에도.

 

 

*

 

 

“갈대밭에 들어가면 안 돼.”

또 그 얘기였다. A는 질린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입을 비죽 내밀었다. 갈대밭에 보물이라도 숨겨놨는지, 어른들은 그곳을 거진 성역처럼 극진히 모셨다. 가뭄이 인 땅에서 유달리 비가 자주 내리는 땅이라는 이점만으로도 성스러운 구역이라 불리기엔 충분했으나 아직 어린 A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가고 싶다는 말에도 칼같이 거절하는 어른들이 야속할 뿐이었다.

갈대밭에 몇 번인가 숨어들려고 했었다. 그럴 때마다 족족 목덜미를 잡혀 돌아왔다. 어른들은 엄한 표정을 꾸짖기도, 화를 내기도, 또 살살 구슬리기도 했으나 A는 포기하지 않았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정 때문이기도 했고,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 탓이기도 했다. A는 기어코 갈대밭에 발을 들일 생각이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미운 일곱 살의 본능이었다.

깊은 밤 A는 움막에서 나왔다. 갈대와 젖은 흙으로 만든 움막은 마을 사람들의 주 거처였다. 예전에는 흙보다 딱딱한 돌 같은 것으로 건물을 쌓아 올렸다고 하는데 A는 본 적이 없어 상상이 잘 안 갔다. 그건 거의 신화시대 이야기에 가깝기도 했다. 이 움막조차 갈대가 자라는 밭이 없으면 만들 수 없었다. A는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걷다가 주위를 한번 훑었다. 경비원들은 모두 곯아떨어졌거나 A를 등지고 있었다.

몸을 한껏 낮춘 채로 걸었다. 몸집은 왜소했기에 갈대밭에 들어간 이상 누군가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성인 남성의 키를 웃도는 갈대들은 A를 훌륭하게 은닉해줄 터였다. A는 희망과 기대감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 첫발을 디뎠다.

갈대밭은 고요했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밭은 어디가 시작점이고 어디가 끝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광막했다. 그러나 그 크기와는 달리 어딘가 묵직한 고요함이 가라앉아 있었다. 한없이 낮은 적막감이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두어 걸음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았을 때 출발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똑같았다. 어딜 가나 갈대뿐이었다. 그를 숨겨주리라 자신했던 갈대는 A로부터 마을을 숨겼다. A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덜컥 겁이 났다. 한도 끝도 없어 보이던 갈대밭이 자신을 집어삼킨 것 같았다.

그때 A는 보았다. 어떤 남자였다. 새빨간 머리칼이 꼭 A의 것과 비슷했다. 남자는 A를 보며 눈을 접고 웃었다. 가까이 오라는 듯한 손짓에 A가 머뭇거리자 남자가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몸이 반투명했다. 귀신이라기엔 상서로웠고, 사람이라기엔 의미심장했다. 그 뒤로 뿌옇게 비치는 갈대가 한 번 흔들렸다.

부탁을 하나 들어줘.

남자가 말했다. 어쩌면 속삭였는지도 모른다. 의미가 전달되어 오기는 했으나 어떤 방식을 썼는지는 감이 안 잡혔다. A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남자가 다시금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안 다쳐.

“엄마가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조심하랬어요.”

멋진 보호자네.

남자가 뒷짐을 진 채 빙긋 웃었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아이의 천진함이 묻어나는 듯하면서도, 마을 이장님이 짓곤 하던 근심 어린 표정이 스며 있었다. 남자는 이내 춤추듯 가볍게 발재간을 부리며 말했다.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정말 하나만.

“왜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 어떤 바보 때문에.

“난 힘도 약한데요.”

오, 힘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A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럼 무슨 부탁일까?

“유령이에요?”

어쩌면?

“무슨 부탁인지 미리 알려줄 순 없어요? 알려주면 엄마랑 어른들이랑 같이 올게요.”

그건 조금 곤란해. 걔는 인간 어른을 별로 반기지 않을 것 같거든.

특이한 말이었다. 인간 어른이라는 건. A는 유령의 독특한 단어 선택에 잠시 눈을 굴렸다. 어쩌면 갈대밭에 있다는 게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 끔찍한 괴물 같은 건지도 몰랐다! 저 유령은, 음, 자신 같은 어린아이들을 꼬드겨서 괴물에게 바치는 수하일지도 모르고. A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그러자 유령이 킥킥 웃었다. 눈치 하난 재빠른 것 같았다.

뼈밖에 없어서 잡아먹고 싶지도 않은데.

“진짜 잡아먹으려고 했어요?”

나는 유령인데?

“당신이 아니더라도요.”

뜻밖에도 유령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언뜻 쓸쓸한 기색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어깨를 으쓱인 유령은 이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짓궂은 낯이었으나 어딘가 조금 슬프게 들리는 말이었다.

글쎄. 걔는 항상 애한테는 친절했어.

“지금은요?”

지금은 몰라. 대화 안 한 지 꽤 됐거든. 부탁하려던 것도 걔랑 관련된 일이야.

유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근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 도와주지 않을래?

A는 고개를 주억거린 후에야 본인이 아무 거리낌 없이 제안을 승낙했음을 깨달았다.

무효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돕겠다고 말했을 때 유령의 표정에서 미미하게 스미던 안도를 알아챈 탓은 아니었다. 단지 엄마로부터 한번 수락한 부탁은 끝까지 들어주어야 한다고 거듭 당부받았기 때문이었다. 유령의 부탁은 조금 유감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A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니 유령이 슬쩍 앞장서며 말했다.

닮았네.

“내가요? 누구랑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

유령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A는 눈만 깜빡였다. 그 사람이 누군진 모르지만, 확실히 유령이 그 사람을 몹시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문장을 끝마칠 때 부드럽게 풀리던 얼굴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유령은 짧은 시간 동안 표정을 휙휙 바꿔댔는데도 말이다.

A는 유령을 따라 한참 걸었다. 깊숙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외곽으로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추워졌다. 이런 추위는 처음이었다. 옛날엔 여름 말고도 겨울이란 것이 있었다는데, 눈이 오고 서늘하다는 겨울이 딱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몸을 부르르 떨자 유령은 가볍게 손을 튕겼다. 내가 많은 건 못 해주지만, 하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이후 A는 한껏 낮아진 온도를 체감했다.

거의 다 왔어.

유령이 그렇게 말한 건 십여 분을 걸은 이후였다. 원래도 말이 그다지 없던 유령은 이젠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A는 유령과 발맞추어 걸으며 유령의 안색을 힐끔 살폈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꼭 화가 났을 때 엄마와 똑같아 보였다. 웃지 않으니 조금 냉랭한 인상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눈동자가 데굴 굴러왔다. A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후에 다시 바라보자 앞만 바라보는 유령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부탁이 뭐예요?”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A는 물었다. 그러자 유령은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친구가 잠들어 있어. 슬슬 깨어날 때도 되었는데 일어나지 않으려 해. 네가 깨워주었으면 좋겠어.

“그냥 흔들어서 깨우면 돼요?”

편한 대로.

잠시 뜸을 들인 유령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아무리 일어나라고 외쳐도 깨지를 않아.

A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유령이 뭔가 심기가 불편해 보인 탓이었다. 대신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어서 부탁을 들어준 후에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사위가 어둑하니 불안감이 목구멍에서 나직이 박동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A가 그것을 본 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갈대들이 일순 크게 뒤로 꺾였다. 숨겨진 무언가를 드러내듯 길이 트였다. 유령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암순응을 마친 A의 눈은 어두운 곳에서도 쓰러진 무언가를 찾아냈다. 쭉 뻗은 몸과 힘없이 늘어진 팔다리를 보는 순간 A는 벼락처럼 깨달았다. 사람이었다.

“사람이에요!”

A는 순식간에 달려 나갔다.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눈을 크게 뜬 유령을 보았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A의 시선은 쓰러진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A는 황급한 손길로 쓰러진 이에게 다가가 맥박을 살폈다. 아주 옅었다. 하지만 분명히 들렸다. 혼자 들기엔 터무니없이 컸다. 어른을 불러와야 했다. 갈대밭을 나갔다가 오기까진 시간이 없을 것만 같았다. A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명백히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이 차가운 곳에서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부탁은 나중에 들어줄게요. 이 사람부터 살려야 해요! 길을 알려주세요. 어른들을 불러올래요.”

간곡한 부탁에 유령은 쓰러진 사람과 A, 그리고 갈대밭을 번갈아 응시했다. 조금 놀란 것도 같았다. 그러다가 그는 그래, 그렇군, 하고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퍽 느긋해 보였고 반쯤 정신이 나간 듯도 했다. A가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이자 유령은 그제야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함께 갈대밭에서 내보내 줄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럼. 나는 유령인걸.

유령들은 전부 초능력을 가지나. 생뚱맞은 궁금증을 꾹 삼킨 A가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서둘러요. 죽을지도 몰라요.”

그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유령이 차분하게 물었다. A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 닿은 사람의 체온은 가면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었다.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유령은 우리와 시간 감각이 다른 건지 영 느긋한 게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를 재촉하려 입을 여는데 유령이 느리게 물어왔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질문이었다.

혼자 두지 않을 자신은 있어?

“환자를 혼자 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낫기 전까진 꼭 붙어 있을 거예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요.”

그러자 유령은 희미하게 웃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가벼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A는 이별을 직감했다. 유령은 조금 무섭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 질문과 부탁도 영 신경이 쓰였다. A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부탁을 못 들어줘서 미안해요.”

이미 충분해.

뜻 모를 대답과 함께 A는 움막 코앞으로 떨어졌다. 의식을 잃은 남자와 함께였다.

며칠 후 남자는 깨어났다. 그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사람들을 차근히 살피다가 자신을 어디서 찾았느냐 물었다. A는 자신이 본 것을 곧이곧대로 일러주었다. 유령을 설명할 때 남자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머리를 짚었다가, 또 쥐어뜯었다가, 다시 숨을 골랐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호흡이 꼭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쇠약해진 몸을 회복했을 때 남자는 갈대밭으로 향했다. 아무도 남자를 막지 못했다.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간 듯 남자는 한참이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기 직전, 남자는 뿌연 까치놀을 등진 채 비척비척 돌아왔다. 당분간 신세를 져도 괜찮겠냐는 남자의 말에 이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자 남자는 웃었고, 정중히 인사했으며, A는 아주 멀리서 유령의 웃음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튿날부터는 비가 내렸다. 가뭄 끝의 단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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