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영구낭만지대

총 29,287자

S by 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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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합니다. 나이/성별/인종/능력 무관.’

A이 팸플릿을 발견한 건 유월 이십육 일 오후 세 시경이었다. 점심시간 십 분 전에 걸린 긴급 출동으로 끼니를 거른 에스퍼들이 급식실로 대거 몰려들었던 바로 그때. 팸플릿은 홍보라는 제 탄생 이유를 착실히 수행하는 듯 배식처 바로 옆 벽면에 붙어 있었다. 촌스러운 파란색 배경에 얼기설기 누끼를 딴 설원이 합성된, 반짝거리는 A4 용지를 들여다보며 A은 생각했다. 이런 게 잘도 붙어 있군.

급식실은 굶주린 에스퍼들로 득실거렸다.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허기는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었으며 민간인보다 감각이 예민한 에스퍼들은 그 정도가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덕분에 급식실은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득시글거리는 에스퍼들 덕분에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문제가 생겼다. 곧 찢어지거나 구겨지거나 바닥을 구르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팸플릿을 보며 A은 아주 조금 유감스러웠고, 뒷줄에서 일어나는 드잡이질을 깔끔히 무시하며 팸플릿에 명복을 빌었다.

뜻밖의 사실을 깨달은 건 이튿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긴급 출동이 걸려 끼니를 걸렀다.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식판을 집을 수 있었다. 앞선 이들이 싹싹 긁어간, 마치 태풍이라도 맞은 양 엉망이 된 배식소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던 찰나에 A은 발견했다. 모집합니다. 나이/성별/인종/능력 무관. 촌스러운 파란색 배경에 어설픈 합성 실력. 반짝거리는 A4 용지 팸플릿이 어제 그 자리에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저것이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일어나는 인재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A은 그날부터 매일 같이 벽면을 살폈다.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일어났을 난장판을 뒤로 한 채 꼬박꼬박 벽을 훑었다. 팸플릿은 어김없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붙어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백 번의 전장을 뚫고 생존한 백전노장의 기세를 풍기는 듯했다. A은 거의 터줏대감처럼 느껴지는 팸플릿에 미약한 존경심까지 품기 시작했고, 그랬기에 일주일 후 팸플릿 앞에 섰다.

모집합니다. 나이/성별/인종/능력 무관. 가장 큼지막하게 쓰인 문구 아래로 깨알같은 글씨가 이어졌다. 자간은 너무 좁았고 행간도 터무니없이 작았다. 덕분에 A은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상체를 디밀어야만 했다. 흐릿하던 시야에 간신히 글씨가 잡혔다. ‘최북단 미궁 <영구동토층>을 공략할 용감한 에스퍼를 찾습니다. 관련한 사항은 담당자에게 문의 바람.’ 아래쪽엔 더욱 개미 같은 글씨체로 담당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관심 있으세요?”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A은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며 뒤를 돌았다. 낯익은 여자였다. 이름과 직급, 소속 따위는 기억나지 않으나 오가며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상대를 떠올리려 애쓰는데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수사1과 한예슬입니다. 단정한 말씨와 단단한 입매, 각이 잡힌 악수에서 A은 여자가 이 일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직후 팸플릿을 힐끔 곁눈질했다.

‘담당자 – 수사1과 한예슬 (010.4877.1392). 전화 대신 문자로 연락 요망.’

잘못 걸린 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A은 엉거주춤 쥔 식판을 도로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현장3과 소속 서A입니다. 마주 인사하자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알고 있어요, 하는 목소리에 A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담당자 연락처는 저기에 적혀 있는데. 아니면 지금 문의하셔도 괜찮고요.”

예슬이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A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팸플릿 내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난감함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메마른 손끝을 문지르며 A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했다. 괜찮습니다, 로 시작할까. 제가 관심을 가진 건 팸플릿의 지난한 일생이지 최북단 미궁 공략대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게 나을까. 이렇게 말하면 조금 이상한 사람 같으려나. 먹구름처럼 뭉게뭉게 자라는 생각을 털어내려 애쓰며 A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았는데.”

“아니요. 없습니다. 그냥 신기해서요. 어떻게 안 뜯어지고 계속 붙어 있나 싶어서 봤습니다. 그뿐이에요.”

A이 짧게 말했다. 예슬은 흠, 하고 턱을 문지르더니 곧 팔짱을 꼈다. 디밀었던 상체를 바로 하자 거리가 한결 멀어졌다. 손을 만지작거리던 A이 다시 식판을 집어 들었다. 궁금했던 건 정말 그뿐이었다. 내용을 알았으니 흥미는 식었다. 애초에 미궁 공략이나 탐사 같은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A은 그럼 이만, 하고 가볍게 인사했다. 아침부터 내내 굶은 배가 이젠 견디지 못하겠다고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언가가 A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하는 예슬의 목소리였다. A은 곧장 뒤돌아보는 대신 자리에 우뚝 멈췄다. 무언가에 쏘이는 듯한 두통이 엄습한 건 직후의 일이다. 관자놀이를 힘주어 누르며 그는 몸을 반만 뒤틀어 예슬을 보았다. 팔짱을 낀 모습 그대로 예슬은 A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심 정말 없으세요?”

“없습니다.”

“최북단 미궁인 영구동토층은 설원 지대에 나타난 S급 규모 미궁이에요. 여태껏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 아니니 내버려두었지만, 그 규모가 점점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 전 밝혀졌죠. S급 규모가 더욱 커진다면 감당하기 힘들다는 게 상부의 판단이에요. 갑작스럽게 모집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렇게 설명하셔도 관심은 없습니다.”

“미궁은 삼 년 전 칠 월 십삼 일에 나타났어요.”

예슬이 툭 던지듯 말했다. 동시에 A이 움칫 굳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무언가가 쿵 떨어졌다. 소음의 근원은 멀지 않았다. 거구의 에스퍼 하나가 다른 에스퍼를 땅에 메치는 소리였다. A은 에스퍼들이 서로 머리를 쥐어뜯고 땅을 구르며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달려온 보안요원들에게 진정제를 맞는 모습까지 전부.

“추적 결과 미궁의 씨앗은 크레바스 지역에서 발아한 것으로 추정돼요. 수사1과의 결론은 틀린 법이 없다는 건 A 씨도 잘 아시겠죠.”

축 늘어진 에스퍼들이 보안요원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갔다. 그들이 싸우면서 튀긴 피가 육중한 몸에 짓눌리며 긴 흔적을 남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소부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하얀 청소복을 입고 바닥을 슥슥 닦았다. 물걸레질 한 번에 핏자국은 사라지고 바닥은 윤기를 되찾는다. 사람들은 그 위를 밟고 지나쳤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급식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 정도면 구미가 당기실 거라고 보는데요.”

예슬이 말을 마치는 순간 A은 깨달았다. 애초부터 이건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발판이었는지도 모른다. 쥐었던 식판을 다시 내려놓으며 A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예슬을 보며 말했다.

“그냥 서면으로 보냈어도 됐을 텐데요.”

“최북단 미궁 영구동토층 공략대는 참여자 전원의 자발적인 선택을 중요시합니다. 팸플릿 가장 아래쪽에 적혀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런 거죠.”

예슬은 입을 다물었고 A은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 걸린 팸플릿을 다시금 훑다가 고개를 숙였다. 한숨을 참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그 시간이 전부 무용하다는 건 예슬도, 그 자신도 알았다. 애당초 A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A은 급식실에서, 빈 식판을 곁에 둔 채, 최북단 미궁 <영구동토층> 공략대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바야흐로 칠 월 십삼 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중략)

 

 

*

 

시간은 무용하게 흘렀다. 범위를 더욱 넓혔음에도 그 누구도 씨앗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튿날엔 기어코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두 번째 조에서 실종자가 나온 것이다. 같은 조원은 그와 잠시 말다툼이 있었고, 거리를 둔 채 수색을 진행하다가 어느 순간 굉음이 났다고 했다. 조원의 안전이 걱정되어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으나 찾은 건 그가 쓰고 있던 모자뿐이었다고. 예슬은 모두에게 조원과 떨어지지 말라는 형식적인 경고를 되풀이하곤 사태를 마무리했다. 사람들에게는 부차적인 임무가 하나 더 주어졌다. 씨앗과 더불어 실종자를 찾는 것이었다.

한나와 A은 매일 같은 부근을 빙빙 돌았다. 날이 갈수록 반경은 점점 넓어졌으나 궁극적으로는 전부 비슷비슷했다. 일주일째 되던 날 A은 자신이 이 수색에 얼마나 회의적인지를 셈해보았다. 청년의 말이 맞다면 이 임무는 죽고자 하는 이들을 모아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일부러 씨앗을 외면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다가 곧 가라앉았다. 그리고 잊혔다.

이변을 발견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A은 엊그저께 둘러보았던 A-4.32구역을 의미 없이 맴돌고 있었다. 이곳은 며칠 전 샅샅이 수색했으므로 씨앗이 있을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같은 구역을 맴도는 데에는 약간의 피로와 귀찮음, 그리고 임무에 대한 후회가 밀접하게 엮여 영향을 주었다. 한나는 제법 멀리 떨어져 독자적으로 수색을 진행 중이었고, 그랬기에 A의 발아래가 급작스럽게 무너지는 순간 빠르게 대응할 수 없었다.

굉음이 났다. 디디고 있던 대지가 쩍 소리를 내며 그 아가리를 벌렸다. A은 제 발치에서 갈라지는 빙하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아주 느리게만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 걸음만 내디디면 이 균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멀리서 한나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A은 한나를 한 번 바라보았고, 다시 고개를 내려 제 신발코를 보았다. 그 아래서 움트는 새까만 어둠과 저변에서 빛나는 희미한 빛까지도.

A은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항 없이 추락했다.

 

 

“일어나요.”

A은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렸다. 몸이 노곤했고 정신은 흐렸다. 잠기운은 진득하게 눈꺼풀에 들러붙어 있었으므로 A은 자신이 더는 깨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목소리에 따르는 대신 몸을 뒤척였다. 등을 돌리고 눕자 상대는 코웃음을 쳤다. 어딘가 반갑기까지 느껴지는 익숙한 웃음이었다.

“일어나라니까.”

A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단전 깊은 곳에 갇힌 듯 나오지 않았다. 메마른 입술이 갈라지며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을 간신히 뱉었다. 몸은 빙하 아래 깔린 것처럼 무거웠고 어떤 의미에선 아늑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채근하는 목소리에 A은 고개를 돌렸고 이내 중얼거렸다. 싫습니다.

“일어나기 싫어요?”

잠시 후 상대가 말했다. A은 속으로 혼잣말했다. 네. 상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어왔다.

“왜?”

지금이 좋습니다. 나는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 이대로 계속 잠들어 있는 것이 안온합니다. 내 위에 덮인 담요와 나를 품은 요람이 나를 지켜줄 테니까……. A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비틀린 잇새에선 엷은 신음만 흘러나왔다.

조금 뒤 상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여전한 겁쟁이구나.”

A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숨을 거칠게 집어삼키다가 사레에 들렸다.

사방이 어두웠다.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누워 있는 줄 알았던 자신이 실상은 무언가이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은 한발 늦게 머릿속에 박혔다. A은 거칠게 호흡을 씹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주위를 마구잡이로 살폈다. 안온하다고 느껴지던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손과 발끝이 산 채로 얼어가고 있는 쏘이는 듯한 감각. 온몸이 조각난 것처럼 깨어질 듯 울리는 고통만이 선명했다.

식은땀에 푹 젖은 머리를 두어 번 털며 A은 등을 받치는 딱딱한 물체에 기댔다. 뒤통수가 맹렬한 속도로 식었다. 힐끔 뒤돌아본 후에야 알았다. 그건 빙하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두꺼워 빛조차 굴절되지 못하는, 그래서 마냥 까맣게만 보이는 빙하였다. 그제야 A은 의식을 잃기 전 제 마지막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추락했다. 추측건대 이곳은 크레바스의 최하점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용했다. 이 높이라면 더더욱. A은 뻣뻣한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빙하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조차 몰랐다. 햇볕이고 달빛이고 닿지 않았다. 소름 끼치도록 추웠다. A은 얼얼한 몸을 가누려 애써 움찔거렸다. 얼마나 오래 기절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기적과 다름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거였다. 저 높이에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떨어졌는데, 어디 부러진 구석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건 괴이할 만큼 운이 좋은 일이었다. 왼쪽 발목이 불안하게 욱신거렸으나 기껏해야 인대가 늘어난 정도일 터였다.

빙하에 기댄 채 A은 생각했다. 운이 좋은 걸까. 그건. 단숨에 떨어져 고통 없이 끝났다면 그것이 행운 아닐까. 크레바스는 깊었다. 에스퍼들의 힘을 사용한다면 자신 하나 끌어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그때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전 실종자가 생겼을 때 예슬은 실종자 수색을 우선시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임무였다. 씨앗을 찾는 와중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구조할 수 있을 법한 능력자를 데려와 크레바스 위로 끌어올린다는 발상은 낙관적이라고 말하기도 뭣할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A은 길게 고민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들숨 한 번에 폐부 위에서부터 서리가 끼는 감각이 싫었다. 패딩에 달린 목깃을 바짝 세우면서도 A은 그런 자신이 황당했다. 당장 죽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텐데도 자신은 차가운 숨이 싫다며 어떻게든 발악하고 있었다.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없이 되감다가 문득 청년 또한 이랬을까, 했다. 청년은 죽고 싶어서 자원했다고 했으나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땐 망설임 없이 낙하산을 펼쳤다.

A은 잠시 기다렸다. 뿌연 이성을 또렷하게 하려 애썼다. 추락한 후 살아남았으니 이젠 할 일을 찾을 차례였다.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첫 번째 단계였다. A은 욱신거리는 팔에 힘을 줘 바닥을 짚었다. 누군가 갈고리로 걸어 끄집어내는 듯한 지리멸렬한 고통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자각하기도 전 손에서 새까만 것이 울컥울컥 튀어나와 주인을 받쳤다. 자신을 지탱하는 농도 짙은 어둠을 바라보다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빙하에 몸을 기대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품에서 더듬더듬 약병을 꺼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살고 싶어요?”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A은 목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여전했다. 누군가가 서 있는 건지, 아니면 전부 제 환청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A은 욱신거리는 팔뚝을 지그시 누르며 상대가 있을 법한 곳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셋, 둘, 하나, 속으로 셈하자마자 허공에서 어둠이 불쑥 치솟았다 사라졌다. 무언가에 닿는 감각은 없었다. 목소리는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물었잖아요. 살고 싶냐고.”

“모르겠습니다.”

헐떡이며 A이 말했다. 상대는 다시금 침묵했다. 이번엔 A 차례였다. A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어둠이 뱃속에서 울컥거렸다. A은 어쩐지 조금 울고 싶었다. 상황의 좌절스러움 때문은 아니었다.

“살아 있습니까? 당신은.”

상대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되물었다.

“어떤 것 같아?”

A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삼 년 전 일에 파묻혀 있었다.

A이 말이 없자 상대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얹혔다. A은 가빠지는 숨을 억누르기 위해 옆구리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머리가 울렸다. 제멋대로 튀어 나가려는 능력을 붙잡느라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가이딩 약물은 고작 닷새분이었다. 멋대로 휘두르다가는 이후 감당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알았으나 능력은 이성보단 감성에 조금 더 민감히 반응했다. 상대가 서 있을 법한 장소를 닥치는 대로 뒤집어엎고 싶다는 욕망이 혀뿌리에서 스멀거렸다. A은 그마저 집어 삼켰다.

한참 후에 상대가 말했다.

“느껴봐요. 당신은 할 수 있어. 멀지 않은 곳에 당신을 도울 무언가가 있어요.”

A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했다. 감각을 얇고 넓게 퍼뜨렸다. 그러자 정말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웅크린 성인 남성 정도의 크기였다. 그것은 크레바스와 숨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게 설원과 함께 태동하고 있었다. A의 고개가 재빠르게 그것을 향해 돌아갔다. 일직선으로 난 크레바스의 벽을 짚고 가다 보면. 까마득했지만 영영 닿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씨앗이 그곳에 있었다.

A이 삐걱거리는 몸에 힘을 주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빙하에 손톱을 박아 넣어가며 일으켰다. 숨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욱신거리는 왼쪽 발목을 내려다보는데 상대가 문득 말했다. 평온한 말투였다.

“살아있냐고 물었죠.”

“…….”

“당신이 궁금해할 때마다는 그래요. 때때로 죽어 있고 때때로 살아 있어.”

A은 상대가 있을 법한 장소를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한 걸음 내디뎠다.

 

(중략)

 

삼 년 전. A에게는 파트너가 있었다. A급 가이드인 그는 A과 제법 합이 좋았다. 그들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A은 가이딩 약물에 의존할 필요도, 까닭도 없었으며 그랬기에 매 순간 다양한 재난에 몸을 갈아 넣었다.

균열을 처음 목격한 건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A은 건물이 붕괴했다는 신고를 듣고 출동했다. 신고대로였다. 건물은 무너져 있었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과 숨죽인 절규가 공간을 떠들썩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A은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그는 사람들을 구하고 건물을 무너뜨린 장본인을 찾아 헤맸다. 지난한 추적 끝에 범인을 무력화해 경찰에 넘겼다. 그리고 며칠 후 범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사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발작이었다.

A은 범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파트너도 함께였다. 그곳에서 A은 뜻하지 않았으나 보았다. 에스퍼의 예민한 감각은 타인이 숨기고자 하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가슴팍에 검은 와팬을 단 사람이었다. 서류와 두툼한 봉투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그날부터 A은 계획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훗날에야 알았다. 판에 박힌 어설픈 자작 소동이었다. 밝혀낸 진상을 읽으며 A은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였다. 건물 가장 위층에는 호화로운 사무소가 있었다. 대리업자들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돈이 다른 이의 계좌로 옮겨갔다. 하필이면 그 계좌 중 하나가 고위 간부 아들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누군가가 냄새를 맡았고 관심이 하나둘 모였다. 그러나 세상에 공표되기 전 건물은 무너졌다.

진부했다. 당연했다. 이제는 클리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판에 박힐 정도로 뻔하고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으나 그걸 실제로 실행한다는 점에서 기상천외했다. A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알게 된 사실을 외면할 만큼 낯짝이 두껍지도 못했다. 자신이 출동했던, 재난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건들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던 것들의 증거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A은 그것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지쳐갔다. 그는 빠르게 낡기 시작했다. 사람도 물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삐끗하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로 인해 시작된 마모는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그의 이변을 가장 먼저 감지한 건 파트너였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몹시 밀접하게 붙어 지냈다. 파트너는 A에게 질문했고 A은 답했다. 문답은 아주 오래 이어졌다.

시간은 흘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A은 여전히 평소과 같았다. 재난에 출동했고 범죄자를 잡았다. 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망설임이 늘었으나 그건 부차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파트너는 A을 지켜보았다. A도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초여름의 어느 날 파트너는 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A은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자 파트너는 웃었다. 조금도 즐거워하는 웃음이 아니었다.

“당신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수수께끼 같지 않다는 건 아니야.”

A은 손안에 든 커피를 굴렸다. 무어라 대답하기 뭣한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는 A을 두고 파트너는 물었다. 사는 게 그렇게 죄스러워요? A은 파트너를 힐끔 곁눈질하고, 입을 몇 번 여닫았다가, 정확히는 그런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파트너는 더 캐묻는 대신 다 마신 캔을 발로 찌그러트리고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로 파트너는 바빠졌다. 자신과 함께 붙어 다니는 대신 독단적인 출동 명령을 받는 일이 늘었다. 그때부터 A은 가이딩 약물을 조금씩 사용했다. 널뛰는 능력을 임시로 제어하다가 파트너가 귀환하면 부탁하는 식이었다. 파트너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이딩은 거리를 둔 채 말없이 이어졌다. A은 가이딩이 시작되고 매번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칠월 십 일. 한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던 그날. 매미 소리가 유난히 컸던 그날. A의 능력이 크게 요동쳤다.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거칠게 파동치는 능력과 함께 A은 안정실에 갇혔다. 시간이 지났고, 파트너가 찾아왔으며, 그들은 역시나 멀지 않은 곳에 거리를 두고 앉아 말없이 서로의 일에 집중했다.

감각이 가라앉을 무렵에 A은 알았다. 파트너는 끊임없이 제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자각 이전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깨달은 순간부턴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A은 파트너의 말에 반응했다. 정말로 그러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파트너는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아주 오래간 말하지 않았다. 입술을 일직선으로 짓씹은 채 침묵했다.

“나랑 같이 떠날래요?”

한참 후에 그가 물었다. A은 대답하는 대신 몸을 웅크렸다. 그는 알았다. 지금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방안은 다시금 적막으로 물들었다. 파트너는 작게 웃다가 한숨을 쉬었다. A은 욱신거리는 머리와 쾅쾅 울리는 심장을 한 데 묶어 짓누르려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중얼거렸다.

“사는 게 죄스럽다고 한 건 당신이잖아.”

A은 거기에서 자신을 향한 질책 같은 건 읽지 못했다. 그랬기에 반박할 마음도, 정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A은 침묵했으며 파트너 또한 긴말을 잇지 않았다.

이틀 후 파트너이자 A급 가이드인 이B은 최북단 설원 지대로 임시 파견을 나갔다. 그리고 하루 뒤 사망 처리가 되었다. 사인은 크레바스로 인한 추락 및 실족사였다.

 

(중략)

 

 

밑바닥엔 눈조차 쌓이지 않았다. 눈 결정조차 이곳에 내려앉지 못했다. 그만큼 깊고 좁았으며 추웠다. 이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익히 있었던 것들만이 차츰 얼어가는 곳에서 A은 하나의 이방인으로서 기능했다. 그는 환경과 결합하지 못했다.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남았다. 그렇기에 꾸역꾸역 나아갈 수 있었다.

때때로 A은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앞뒤와 좌우를 가로막는 짙은 어둠이 시야를 가린 탓이었다. 뱃속에서 느글거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A은 잘 알고 있었다. 외면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는 두려웠다. 나아간 줄 알았거늘 걸어왔던 것이 전부 제 착각일까 무서웠다. 더더욱 걱정스러운 건 설령 제 가설이 틀렸대도 증명할 방도가 마땅찮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A은 B을 불렀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나 B은 B이었다. A은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B을 못 알아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면서 한두 사람쯤 있기 마련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과정을 거쳐도, 형태가 마모되거나 새로운 가지가 돋아도, 그래서 원형을 알 수 없게 되더라도, 기어코 알아보고야 마는 사람이. 몰라볼 수 없는 존재가. A에게는 B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B은 침묵으로써 부정했으나 A은 캐묻지 않을 뿐 확신을 거두지도 않았다.

B은 제멋대로였다. A이 말을 걸었을 땐 죽도록 대답하지 않다가도 그의 무릎이 꺾이기 직전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여왔다. B이 말을 걸 때마다 A은 멈추려던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주먹으로 두드려가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며 대화했다. 대개 실없는 이야기들이었다. B은 상부와 본부, 급식실과 팸플릿 따위와 얽힌 질문을 성의 없이 던졌고 A은 그에 맞추어 대답을 쥐어 짜냈다. 괴롭지 않다면 거짓일 테지만 마냥 즐겁지 않느냐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A은 깨달았다. 그냥 하릴없이 그렇게 되었다.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뺨을 찢어가며 부는 칼바람에 몸을 웅크리던 A은 자신의 깨달음을 숨김없이 토로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B이 반응했다. 바람 소리가 유달리 요란스러워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퍽 즐거워 보이는군요. 정착한 곳이 마음에 드는가 봅니다.”

B이 목소리를 깔고 하하 웃었다. A은 살벌한 북풍이 지나기를 기다리며 옷깃을 다시 끌어 올렸다. 그리고 얼어붙으려는 눈꺼풀을 녹이려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짓눌렀다. 시야가 까맣게, A을 둘러싼 어둠보다도 어둡게 물들었다. 그러자 A은 문득 자신이 홀로 협곡에 내던져진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건 결코 유쾌한 감각이 아니었다. 얼얼한 손끝을 말아 쥐며 A이 다소 성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B은 A을 향해 냉소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말소리는 조금 더 가까이서 들렸다.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네.”

“어째서?”

A은 한 박자 쉬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마땅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A은 조금 조급해졌다. 바싹 마른 목에서 나온 소리는 쇳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갈라진 목소리를 꾸역꾸역 갈무리하며 A이 말했다. 침착하려 애쓰는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내가 궁금해할 때마다 살아 있다고.”

“…….”

“생각 또한 하나의 궁금증 아닙니까.”

그건 대답을 바라는 말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B 또한 마땅한 정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A은 입을 다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B이 느껴졌다. 삼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B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B은 살아생전에도 아리송했지.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골랐다. 북풍이 잦아들었다. 폭풍우는 치지 않는다. 제 등을 떠미는 건 살바람뿐이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느 순간 B이 말을 걸었다. 당신, 하고 A을 불렀다. A은 대답하려 했다. 뜻밖의 순간 몸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빙벽에 어깨를 부딪치며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당혹감에 A은 그대로 눈을 끔뻑였다. 벽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추락으로 인해 유일하게 결손된 부위였다.

“얼어붙은 채로 놔두는 편이 현명한 것들도 있어요. 당신도 아는 줄 알았는데.”

B이 말했다. 목소리는 또렷했다. 선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바로 곁이었다. A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가르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휑한 바람이 막힘없이 협곡을 쌩하니 훑고 가자 A은 도로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처럼 말입니까.”

“그건 당신 고질병이야. 가만히 놔두지를 못한다는 것. 생각을 떨치는 법을 모른다는 것.”

A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낱말 하나하나가 신랄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폐부에 살얼음이 끼는 듯 쨍한 고통이 찾아왔다. 동시에 억눌린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목구멍에서 자라난 가시에 들숨과 날숨이 전부 걸리는 느낌이었다. 몸이 들썩였다. 주먹을 질끈 쥐고 가슴팍을 두드리는데 B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침 소리에도 묻히지 않을 만큼 지척이었다.

“당신을 단죄해달라고 했지. 나보고.”

며칠 전, 몇 년 전, 혹은 몇 분 전의 이야기였다. A은 밭은 숨을 연신 토해내며 애써 눈을 올려 떴다. B이 궁금했다. 그의 표정을 알고 싶었다. 삼 년이었다. 고작 삼 년 새 너무 많은 것이 잊혔다. A은 지금 B이 무슨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B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조금의 즐거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건조한 투로 말했다.

“낭만적이네요. 단죄라니.”

“…….”

“나는 낭만주의가 싫어.”

B이 중얼거렸다. 마침내 기침이 멎었다. 덕분에 A은 이번에야말로 B의 물음을 잡음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당신을 살게 해요?”

대답할 새도 없이 B은 사라졌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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