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번의 이야기
커미션, 19,28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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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에 지쳐서 나는 사라질 작정이었다지. ¹
눈을 뜬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날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숲 공기가 피부에 찐득하게 달라붙는다. 이불처럼 저를 덮은 안개에 몸을 뒤척이다가 찌르르 울리는 새 소리를 듣는다. 아침의 희미한 햇살은 아직 숲 밑바닥에 닿지 않고, 그렇기에 사위는 어두운 채지만. 그래도 모노는 몸을 일으킨다. 풀어헤친 머리를 도로 묶고 축축해진 이불을 쥐어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면 번잡한 생각은 곧장 뒤따른다. 그것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모노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가장 먼저 몸을 쭉쭉 늘려 뻗는다. 목부터 어깨, 가슴부터 옆구리, 허리부터 골반, 이후에는 다리와 발목까지. 몸을 차례로 푼 후에는 하룻밤을 지낸 자리를 정리한다. 모닥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한 흔적은 젖은 나뭇잎과 가지로 잘 덮는다. 이 숲의 중심부엔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아 강도당할 염려는 적으나 그만큼 온갖 마물이 득시글거린다. 냄새를 남기지 않아야 추적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침 이슬에 푹 젖은 나뭇잎들로 자리를 덮을 때. 문득 모노는 목구멍을 찌릿 울리는 통증에 눈을 찌푸린다. 당장 자신을 둘러싼 공기는 물 속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습하니 건조함 때문은 아닐 테고.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이 통증의 정체는 아마도 몸살 기운이라거나 갈증 때문일 것이라는 판단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목울대를 몇 번 쓰다듬은 모노는 이내 걸음을 옮긴다. 수통을 향해 손 뻗다가 너무 가볍다는 사실에 탄식한다. 뚜껑을 열어 들여다보면 역시나 바닥을 드러냈다. 물을 채운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깨달음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근처에 냇가가 있을까. 오는 길에 물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수통을 만지작거리며 모노는 귀에 신경을 쏟는다. 힘없이 늘어져 머리칼처럼 덜렁거리던 귀가 쫑긋 솟는다. 찌르르, 맴, 부스럭, 바시락, 콕콕, 찰박. 이르게 깨어난 숲에서 나는 온갖 소리를 마구잡이로 주워섬기다 보면 원하는 소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물웅덩이가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밟고 지나갔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경 쓰인다. 더럽더라도 물을 찾으면 끓이거나 정수해 마실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단 낫지. 게다가 물웅덩이 근처엔 냇가가 있기 마련이니까. 우려를 다독이며 판단을 마친 모노는 짐을 꾸린다. 배낭을 메고 육포 하나를 입에 문다. 허리춤에 질끈 동여맨 단검을 들어 기댔던 나무에 작은 흠집을 내고는 이윽고 자리에서 출발했다.
집을 나온 지도 벌써 반년쯤 되었다. 그간 모노는 에오르제아를 크게 한 바퀴 선회했다. 기라바니아 지대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몽크들과 몇 달간 동고동락한 게 가장 최근의 일이었다. 모노는 그들에게서 격투를 배웠다. 아직 몽크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몸을 직접 움직인다는 점에서 마음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조금 더 지내고 싶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첫째는 몽크들이 알라미고 독립군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모노가 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요즘 왜 연락이 뜸하냐는 부모님의 걱정 가득한 편지를 보고 그들은 모노를 짐과 함께 쫓아내듯이 내보냈다.
몽크들의 마음은 이해했다. 생판 모르는, 이제 기껏 몇 달을 알고 지낸 새파란 어린애에게 생판 남의 나라 독립군이 되라고 권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두고 가자니 신경 쓰이는 와중에 온 부모님의 편지는 좋은 구실이자 핑계였을 것이다. 모노는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을 사지로 내몰지 않기 위해 내린 상냥한 선택이라는 점도 알았다. 지나친 나무에 성의 없이 흠집을 내며 모노는 이마를 문질러 닦았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내심 그들과 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매정해도 그렇게 매정할 수가 없지. 대뜸 자신을 내쫓았던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뱃속 한구석이 쿡쿡 아린다. 그렇다고 그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고 싶냐고 물으면 또 고개를 내젓겠지만.
뭘 원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내내 모노는 무언가 어긋난 사람처럼 불편했다. 몸과 영혼이 미묘하게 비틀린 느낌이랄까. 탈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덜그럭거리는 몸으로 사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땅히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없고 편히 내놓을 마음이나 정신 같은 건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질감 같은 건 밀어두고 어찌저찌 살아가고 있을 뿐.
나무에 칼집을 하나 더 내고 걸음을 옮긴다. 이제 물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가는 것 특유의 유속이 있었다. 소리로 보아 작지는 않을 터였다. 부스럭, 찌르르, 맴, 달칵, 쪼르르. 습하다. 흐르는 땀을 문질러 닦으며 모노는 생각한다. 춥고 습하다. 피부에서 끈적이는 물기가 불쾌하다. 밤을 지낼 곳을 찾아 숲에 들어온 제 선택이 어쩌면 실책이었을지 모른다. 죽을 거라면 사람보다야 날짐승이, 날짐승보다는 마물이 좋다지만 그 누구도 습기를 고려하지 않았나 보다. 호흡 한 줌에도 불쾌해지는 가장 은밀한 복병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 모노도 매한가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노는 물안개를 발견했다. 멀지 않은 곳의 안개가 유달리 자욱하고 짙었다. 모노의 걸음이 달가움에 조금 빨라졌다. 마음 같아선 습기를 잘라 마시고 싶어질 즈음이었다. 마른 육포를 씹고 있자니 확연한 갈증이 목구멍을 가르고 있었다. 뿌연 물안개를 해치고 들어가자마자 모노는 언뜻 물비린내를 맡았다. 동시에 졸졸졸,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에 얼굴은 단숨에 밝아진다.
배낭은 냇가 근처에 내려두었다. 수통을 열기 전 냇물을 손으로 떠보았다. 물비린내는 나지만 불쾌한 정도는 아니다. 아마 물안개 탓도 있을 테니 물 자체에 나는 냄새는 없다시피 하다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맨눈으로 보기에도 멀끔했다. 모노는 배낭 속에서 부싯돌과 마른 장작을 꺼냈다. 사방이 습하니 불이 잘 붙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불씨는 단번에 붙었다. 그걸 황급히 불어 작은 모닥불로 키우고 나서야 물을 떴다. 제 눈에 깨끗해 보이더라도 식수가 아닌 이상은 한번 끓여 마시는 게 현명했다.
모닥불 위에 물을 올렸다. 끓을 때까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턱을 괴고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한참이나 내려다볼 때였다. 축 늘어졌던 귀가 단숨에 쫑긋 펴졌다. 어찌나 빠른지 주인인 제가 까닭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매섭게 날이 선 귀로부터 온갖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찌르르, 부스럭, 살금살금, 우지끈, 바스락, 자박. 모노는 그것들을 차근히 곱씹다가 몸을 흠칫 굳혔다. 숲의 소음. 그 틈바구니에서 분명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몸이 삽시간에 굳었다. 근육이 긴장하며 솜털이 오소소 섰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수 있게 몸을 긴장하며 모노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숲의 중심부엔 마물이 자주 나왔다. 사람들은 당연히 진입을 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부득불 숲에 들어가는 사람은 두 부류였다. 첫째, 자신처럼 어쩔 수 없는 까닭이 있거나. 둘째, 노란 셔츠의 눈을 피해 도망쳐 왔거나. 첫 번째라면 대화로 잘 구슬릴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두 번째라면 안전을 장담하기가 힘들다.
몸을 빳빳하게 굳힌 모노가 허리춤을 더듬어 단검을 꼬나쥐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몸 너머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었다. 모노는 모닥불을 한번 곁눈질하고 입술을 길게 물었다. 냇가가 근처였다. 부득이한 사고에 불이 번진다고 해도 몸집을 부풀리진 못하리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만일 상대가 중범죄자라고 한다면. 그래서 모닥불을 보고 무기로 삼을 생각을 한다면. 모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대처 방안을 떠올리는 사고가 제법 잽쌌다.
자박.
만일 상대가 먼저 덤벼든다면, 최대한 제압을 위주로 진행하되 여차할 땐 단검을 쓰자. 상대의 덩치가 크다면 단검으로 목을 긋고 작다면 발목 정도로 충분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고 내버려두었다가는 피 냄새를 맡은 마물들에 꼼짝없이 죽을 테니, 간단한 지혈이나 처치만 해주고 바로 자리를 이탈해야겠다.
자박.
하지만 만일 자신이 상대에게 당한다면? 곧장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도망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자. 어차피 집은 하루 이틀쯤밖에 걸리지 않고 숲만 나선다면 여관이 있다. 간단한 지혈은 옷을 찢어서도 할 수 있고. 상대가 나를 단숨에 죽이려고 든다면……. 운에 맡겨야지. 크게 별수는 없겠구나.
자박.
그리고 모노는 본다. 안개 너머에서 일렁이던 인영이 느리게 나타나는 것을.
처음에는 당황했다. 이후에는 의아했다. 상대 또한 비에라였다. 귀를 납작하게 내린 채였으므로 순간 헷갈렸으나 머리칼이 흔들릴 때마다 언뜻언뜻 기다란 귀가 보였다. 근방에 우리 가족 말고 다른 비에라가 있었다고? 옆 마을의 한 여관에 비에라 하나가 일손을 돕는다는 소문은 들어보았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모노는 지난 반년간 사람으로 위장할 수 있는 마물도 얼마든지 보았다. 긴장을 푸는 대신 모노는 빠르게 상대를 훑었다.
왜소한 체구가 가장 먼저 보였다. 자신보다 눈높이가 한 뼘은 작은 듯했다. 날개뼈 부근에서 흔들리는 머리칼과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모두 검었다. 상대를 그림자의 일종이라고 판단하지 않은 건 그와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 때문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흰 피부는 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 시선은 마침내 굳게 다물린 입으로 향했다. 길게 감쳐문 입술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모노는 알 수 있었다. 상대도 모노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주 집요한 눈길로 모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낱낱이 파헤쳤다. 모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에 쥔 단검을 도로 칼집에 넣었다. 상대는 체구가 작았다. 팔다리도 마른 편이었다. 순수 힘으로 부딪혔을 때 질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무기를 숨기는 기색 또한 없었으니 제 쪽에서 괜히 단검을 들고 위협하고 싶지 않았다.
모노가 단검을 넣자 상대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빛이 한 점 들지 않는 눈이 모노를 들여다보았다. 새까맸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시선에 모노가 얼핏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로 손을 뻗었다. 요란하게 끓는 물을 모닥불에서 내려두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내 배낭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건넸다.
“먹을래?”
상대는 대답하는 대신 사과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서 모노는 무언의 질문을 읽었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소매로 사과를 문지르고는 대답했다.
“독 같은 건 안 들었어. 정말이야.”
상대는 그러고도 한참 후 사과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모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입 베어 물었다.
비에라는 자신을 카엘이라고 밝혔다. 길을 잃어 숲에 다다랐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찾아왔다고도 했다. 모노는 숲을 나가면 헤어지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얇은 옷자락을 질끈 그러쥔 채 고개를 푹 숙인 카엘의 모습에 모노는 제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시고 있다는 사실을 맥없이 인정했다. 내리깐 시선과 머뭇거리는 입매, 잠긴 목소리 따위에서 모노는 카엘이 이야기하지 않은 수많은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래서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갈 곳이 없다면 나랑 같이 갈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본래라면 모노는 숲을 지나 본가로 향했어야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동행인을 얻은 덕분에 모노는 숲의 출구가 아닌 입구로 고스란히 나왔다. 가장 가까운 마을 여관으로 돌아가 종이와 펜을 빌렸다. 숲에서 콱 죽어버린 줄 알았다는 여관 주인의 농담 아닌 농담을 넘기며 모노는 부모님께 사죄의 말을 썼다. 이런저런 미사여구가 붙었으나 알맹이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 편지지를 밀봉하고 모그레터에 맡긴 후 모노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튿날 카엘과 함께 떠났다.
이유는 사소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카엘을 데리고 본가로 내려가기엔 조금 불안했다. 카엘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나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모노는 지난 반년간의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개중 하나가 바로 사람의 악의였다. 의도치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점화하는 타인의 악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급류와 같았다. 해일보다 빠르고 격렬한 그것에 휩쓸리면 초가삼간 잃기 십상이었다. 모노는 아주 조금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카엘과 일대일로 맞붙었을 때 그를 다섯 식 안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지만. 뭐 확실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종착지를 잃은 여행길은 마치 꼬인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어느 날엔 북동으로 향하다가 다음날엔 남서쪽으로 향하는 식이었다. 같은 여관을 이틀 간격으로 세 번이나 묵은 적도 있었다. 정처 없이 빙글빙글 도는 모노와 카엘을 두고 몇몇 사람들이 손을 뻗어왔으나 모노는 그것들을 전부 거절했다. 용병 제의, 심부름 제의, 하다못해 여관에서 손을 거들지 않겠냐는 물음까지 전부. 대신 모노는 그 모든 걸 뒤로 한 채 매일 밤 고민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게 좋을까. 어디로 가는 게 옳을까. 그리고 그보다 본질적인 물음. 카엘이 원하는 건 뭘까.
모노는 딱딱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의미 없이 들쑤셨다. 불이 제대로 붙은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만 둔다면 아마 내일 새벽까지도 불씨가 살아 있을 터였다. 불쏘시개로 근처 마른 잎들을 몇 번 더 쑤신 모노는 길게 한숨을 내쉬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은 절로 그늘진 나무로 향했다. 두툼한 방수 이불을 덮은 카엘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작은 체격과 그림자, 그리고 커다란 이불 덕분에 카엘 그 자신의 인영을 헤아리긴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하루를 꼬박 이동하다가 간신히 숲속에 자리 잡은 참이었다. 불침번을 서겠다는 말에 카엘은 오랫동안 모노의 곁에 앉아 있었다. 먼저 자러 가라고 두어 번 권유했으나 카엘은 족족 거절했다. 모노가 여섯 번째로 말을 걸었을 때야 비로소 카엘은 졸음 섞인 눈을 비비며 나무 밑동으로 향했다. 담요를 덮은 채로 한참이나 자신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카엘은 잠귀가 밝았다. 모노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눈을 곧장 떠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냐는 질문에 거짓 한 점 없는 대답을 내놓아도 그는 잠들지 않았다. 같이 가자고 억지를 부리거나 돌아올 때까지 뜬 눈으로 앉아 있을 뿐. 카엘의 행동에는 불분명한 집요함이 있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확실하게 존재하는 끈질김. 모노는 그 절박함의 정체가 궁금했다. 기실 카엘과 자신은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모닥불의 붉은 빛이 시야에서 어른거렸다. 거리감 덕분에 불이 카엘의 턱 밑에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모노는 그림자가 집어삼킨 카엘의 상반신을 들여다보다가 슬그머니 불쏘시개를 들었다. 중심부를 몇 번 찌르자 모닥불은 성가시다는 듯 딱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카엘이 미간을 언뜻 찡그렸다가 푼 것도 바로 그때였다.
주홍빛 불을 쬐며 모노는 가만히 생각했다. 카엘의 말. 부모님은 없고, 어쩌다가 길을 잃게 되었는지도 모르며, 그냥 어느 순간부터 여기에 있었다고. 그러다가 인기척을 들었고, 어느 순간 나무에 난 인위적인 흠집을 발견했으며, 흠을 따라 걷다 보니 모노와 맞닥뜨렸다고.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모노는 궁금했다. 카엘은 설명을 요구하는 제게 만남 이전의 이야기를 전부 잘라먹은 채 설명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가장 손쉬운 핑계기도 했다.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쿡 쑤시며 모노는 생각했다. 게다가. 카엘의 이야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카엘은 모노와의 헤어짐을 가정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기묘한 감각이었다. 너무 미세하고 가늘어 단순한 기시감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모노는 알아챘다. 카엘은 만난 지 고작 며칠 된 모노와 아주 오랫동안, 이를테면 평생 혹은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직접 말한 건 한두 번에 불과하나 모노는 알 수 있었다. 카엘은 자신과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별은 불가해한 것이었다. 알 수 없었으므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취급하는 느낌이었다. 카엘이 확신에 차 있었기에 되레 모노까지 혼란스러워졌다. 모노는 입술을 잘게 물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래 들어 모노는 가끔 뒤를 돌아보았다. 차오른 숨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제 뒤를 따르는 카엘이 있을 것을 알았다. 그럴 때마다 모노는 한발 앞서간 채 카엘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묻고 싶어졌다. 그거 아니, 카엘. 널 볼 때마다 나는 종종 괴상한 그리움에 휩싸여. 아주 오래전부터, 이를테면 거진 만 이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던 것처럼 지리멸렬한 설움이 목구멍 끝까지 몰려와. 나는 고작 열여덟인데도 널 본 게 꼭 고대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너는 알까? 그 까닭을? 날 괴롭히는 답답함의 출처를?
조금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모노는 그 감각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전에서부터 단숨에 북받치는 감정은 마치 오래 묵은 억울함이나 원통함과 닮아 있었다. 가슴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해도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이 농밀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전에, 목구멍에 돌멩이가 걸리기 전에, 가슴이 지끈 하고 울리기 전에 서둘러 등을 돌리는 것만이 모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다. 모노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인 모를 감정에 휘둘려 머리가 아픈 건 딱 질색이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때면 모노는 뜨겁게 불타는 심장을 잡아 뜯어내고 싶었다. 그러지 못할 바에는 까닭이라고 알고팠다.
결국에는 간단한 일이었다. 모노는 카엘이 낯설었다. 그는 이제껏 저만치 또렷하고 확신에 차 제게 접근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뿌옇지 않은, 어렴풋하지도 않은, 다만 존재가 확실한, 매 순간 곁에 존재하리라고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카엘이 처음이었다. 제 곁에 머물렀던 이들은 대개 그러지 못했다. 약속은 부질없었고 대화는 의미가 없었으며 감정을 담은 신체 접촉 같은 건 마냥 어렴풋했다. 그러지 않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제 존재에 한 점 의구심조차 품지 않는 건 카엘이 처음이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를까. 이대로 여행을 지속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카엘이라는 특이점을 보존하기 위해 그의 수상함에서 애써 눈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모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몸을 웅크렸다. 명징한 게 없었다. 뚜렷하게 답이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물음표였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모노는 카엘을 보았다. 곤히 잠든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카엘의 평온함에 단박에 금이 갔다. 그가 깨기 전 곁자리에 앉고 몇 번 머리를 쓰다듬자 그는 곧 잠잠해졌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카엘.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모노는 이내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건 두루뭉술한 직전의 물음보다 훨씬 정곡을 찌르는 존재였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모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니까, 카엘.
나는 너의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그리다니아 산맥을 넘기 전 있는 마지막 여관에서 그들은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제법 오랜만에 맞는 노숙이 아닌 밤이었다. 모노는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숙박비와 밥값을 치르고 방을 구했다. 근래 산맥을 넘는 사람들이 많아 마땅한 방이 이것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앞뒤로 길게 붙었다. 모노와 카엘에게 떨어진 건 어른용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낡은 방이었다. 모노는 카엘을 한번 곁눈질하고 저기서 잘 수 있지, 물어본 후 그렇다는 대답을 받고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 비싼 멧돼지 고기로 식사했고 식당 안 모두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자’가 찾아온 건 식사가 끝난 직후였다. 물로 입가심하고 자리를 뜨려는 모노의 앞자리에 대뜸 앉는 것이 첫인사였다. 그때 모노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서 있었다. 남자의 옆자리던 카엘은 의자가 시소인 양 벌떡 일어나 모노의 곁으로 도망쳤다. 모노는 제 등 뒤에 숨듯이 몸을 감춘 카엘의 손을 문지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덩치가 컸고 뺨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숱한 전투를 거쳐왔다는 걸 반증하듯 녹록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데다가 등 뒤엔 커다란 도끼까지 맨 채였다. 사람 좋게 웃고 있으나 빈틈을 찾기는 어려웠다. 모노는 잠시 상대를 짧게 훑어보곤 카엘을 제 등 뒤로 욱여넣었다. 그러자 상대는 사람 좋게 웃었다.
“무슨 사이? 형제? 동료? 평범한 모험가 파티는 아닌 것 같은데. 일방적으로 보호받는 걸 보아서는.”
호탕한 목소리에 모노는 잠시 카엘을 곁눈질했다.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카엘은 모노의 옷소매를 꾹 쥔 채 순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맹점 같은 까만 눈을 들여다보던 모노는 카엘의 손 위에 제 것을 겹치고는 몸을 굳힌 채 남자에게 대답했다.
“형제예요. 제가 형이고요. 제 동생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아하. 머리색이 완전히 달라서 못 알아봤지, 뭐야. 이것 참 미안하군.”
상대는 별달리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모조는 제 뱃속에서 똬리 치는 기묘한 감각에 몸을 흠칫 떨었다. 주먹이 절로 쥐였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급작스러운 갈증이 덮쳐 목을 더듬거리는데 남자가 끙, 하고 몸을 움직였다. 반쯤 테이블을 보던 거구가 이젠 완전히 모노와 카엘을 향했다.
“제안이 있어서 말이야. 너희는 둘이 다니지? 산맥은 꼬마애 둘이 넘기엔 너무 위험해. 그러니 산맥을 넘을 때까지만 함께 대규모 파티를 구성하는 게 어떨까 해서.”
모노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카엘을 힐끔 보았다. 얼굴에 짙게 깔린 어둠은 극심한 경계심과 맞닿아 있었다. 모노는 거절하기 위해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남자가 한발 빨랐다.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거절의 기색을 읽은 것처럼 잽싼 대처였다.
“아니, 들어봐. 최근 들어 산맥에 마물 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소문, 못 들었어? 능숙한 모험가들도 실종되거나 사체로 돌아오기 일쑤라니까. 우리를 믿어 봐. 우리는 이 산맥만 열댓 번은 오갔거든. 사람이 많으면 마물의 습격도 쉽게 받아칠 수 있고, 식량도 넉넉할 테고. 여하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텐데.”
“왜 저희를 영입하시려는 거죠? 별다른 도움은 안 될 텐데요.”
“도움은 안 되지. 너희 같은 꼬맹이들이 싸우길 해, 뭘 해. 그냥 때마침 잔심부름할 녀석들 자리가 비었는데 너희가 보였을 뿐이야.”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태연자약한 태도에 모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비단 산맥이 아니더라도 모험은 그들 둘이 헤쳐 나가기엔 쉽지 않은 일들투성이였다. 잠시라도 어른에게 의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한 일일 것이다.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씩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상체를 훅 수그린 그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모노는 머뭇거리다가 카엘을 힐끔 돌아보았다. 카엘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으나 맞잡은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간 채였다. 잠시 고민하던 모노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펴고 말했다.
“제안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끼리 가볼게요.”
“아주 위험할 텐데?”
“지금껏 산맥은 두어 번 건너봤어요. 마냥 어리숙하지만은 않아요.”
담담한 대답에 남자가 턱을 문질렀다.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린 그는 테이블을 침착하게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아무튼, 너희는 둘만 있는 게 맞는 거지? 다른 어른들은 없고.”
“네.”
“그럼 이걸 가져가라. 호신용 마도구야. 여차할 때 깨트리면 강한 빛이 나오지. 마물들 상대할 때 좋을 거다.”
남자가 동그란 구 형태의 무언가를 건넸다. 묵직하고 차가웠다. 검은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지문이 뿌옇게 찍혔다. 모노는 그걸 두 손으로 받았다. 껍질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허리를 숙여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양손을 내젓고는 떠났다.
“그거 이상해.”
남자가 자취를 감추자마자 카엘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마도구에 꽂혀 있었다. 모노는 마도구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선의를 베풀어주신 거니까. 마침 호신용품이 필요하기는 했고.”
“응. ……형.”
카엘이 말을 끝맺자마자 모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멋쩍은 웃음이 이어졌다. 급한 대로 핑계를 대려던 게 그만. 미안해. 부산스러운 사과에 카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곤 시선을 내리더니 발바닥을 바닥에 문지르며, 마치 수줍어하는 아이처럼 작고 느리게 말했다.
“마음에 들어. 모노 형.”
모노는 카엘의 입에서 발화하는 단어의 파동을 헤아리다가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이질감을 눈치챈 건 산맥 등선에 진입하고 십여 분쯤 지난 때였다. 모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당연하다는 것처럼 카엘이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낯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욱한 안개 때문도,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주위 탓도, 생기 없이 바싹 마른 땅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모노는 잠시 고개를 치들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기다렸다는 듯 온갖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바스락, 쿵쿵, 철벅, 찌르르, 우지끈, 저벅. 날카로운 바람을 타고 쏟아지는 산맥의 소음 사이에서 모노는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카엘.”
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불편하다는 듯 낯을 일그러트렸을 뿐이었다. 카엘은 감각이 남들보다 배는 예민했다. 제가 알아차렸다면 카엘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모노는 쓰게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널찍한 공터였다. 야영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모노와 카엘처럼 소인원이라면 숲 등지에 자리를 잡아 모습을 숨기는 게 나았다. 모노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이윽고 멀지 않은 곳에 빽빽이 선 나무들을 가리키며 모노가 말했다.
“오늘은 저기서 좀 쉬었다가 갈까? 저녁은 꿩고기 어때?”
카엘이 입을 잠시 달싹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말 대신 그는 그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노는 카엘을 데리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평평한 곳을 골라 자리를 폈다. 배낭 속에서 부싯돌과 장작, 마른 잎사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모노는 틈틈이 귀를 기울였다. 바스락, 철벅, 지르르, 저벅, 우지끈, 쿵쿵. 소리는 조금씩 커지거나 작아졌다. 모닥불을 내려다보던 모노는 이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배낭에서 붕대를 꺼내 감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카엘이 곁자리에 앉았다.
“가게?”
“응. 저녁 식사는 해야 하잖아.”
“같이 갈래.”
붕대를 단단히 동여매던 모노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잠시 카엘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카엘은 아마도 대답을 알고 있을 터였다. 모노는 카엘이 싸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기실 카엘이 싸울 수 있을지부터 의심스러웠지만. 아무튼 간에.
마땅한 대답을 내려놓지 않자 카엘의 미간에 줄이 그어졌다. 그는 무릎을 가슴팍에 끌어당겨 앉고는 얼굴을 기댔다. 어딘가 좀 시무룩한 낯이었다. 모노는 핏기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 여기에 있어. 위험하잖아.”
“가면 안 돼?”
“음…….”
“가만히 있을게. 근처에서 숨어 있을게. 아무것도 안 하고.”
카엘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물었다. “안 돼?”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눈을 돌리기도, 모르는 척하기도 애매할 만큼 적나라하게. 모노가 잠시 눈을 찡그렸다. 고민은 짧았다. 한숨을 내쉰 모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카엘에게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손을 맞잡은 카엘이 순순히 따라 일어섰다.
“약속이야. 위험해지면 도망치기로 해.”
“응.”
카엘이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기에 모노는 함께 야영지를 떠났다.
그들은 조금 더 깊숙한 군락으로 향했다. 모노의 귀는 틈틈이 쫑긋거리며 주위 소음을 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진 통나무가 잔뜩 있는 공터에 다다랐다. 모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카엘의 손을 꾹 잡았다. 숨어 있어, 하고 이르자 카엘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모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굳게 다물린 입매를 보고 포기했는지 곧 손을 놓았다. 모노는 카엘이 통나무 틈바구니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동그란 마도구를 꺼냈다.
얼굴이 비쳤다. 높게 묶어 올린 머리칼이 바람에 언뜻언뜻 흔들리는 모습까지. 아주 또렷했다.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모노가 걸음을 뗐다. 카엘이 숨은 장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 그러나 통나무들이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위치에서 그는 멈췄다. 구체는 오묘한 푸른 빛으로 반짝거리는 중이었다. 모노는 구체를 내려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마도구를 들어 힘껏 바닥에 내리쳤다.
펑 소리와 함께 사방이 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참 후에야 떴다. 산산이 부서진 마도구 파편을 발로 짓밟고 문질렀다. 손에 차가운 감촉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단순히 체온이 떨어진 걸지도 몰랐다. 사실 둘 중 무엇이든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모노는 숨을 고르고 단숨에 훌쩍 뛰어 나무 위로 모습을 숨겼다. 이제 추측이 현실로 변모하길 기다릴 시간이었다.
오 분이 지났다. 얌전히 늘어졌던 귀가 움찔한 건 그맘때쯤이었다. 나뭇잎 사이에 숨은 모노가 몸을 더욱 낮췄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낯선 목소리들 사이에서 모노는 익숙한 걸걸함을 찾았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속이 쓰렸다. 타는 듯한 갈증에 목젖 부근을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큼직한 덩치, 등에 동여맨 도끼, 뺨에 난 흉터. 어젯밤의 그 남자가 맞았다.
“뭐야, 어디 갔어?”
“가방도 없는데.”
“제대로 온 거 맞아?”
“맞거든. 이거 안 보이냐? 열기가 남은 걸로 보아선 얼마 안 됐는데. 설마 꽝이야?”
“핏자국이 없는 걸 봐선 어디 물려간 건 아닐 테고……. 아, 어쩌면 그건가.”
모노는 더 듣지 않았다. 대신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착지는 소리 없고 가벼웠다.
“유인이군.”
남자가 중얼거리며 도끼를 빼 들었다. 동시에 남자를 둘러싼 다른 이들도 일제히 무기를 꺼냈다. 모노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이쪽은 하나. 상대는 넷. 일반 파티겠지. 날카로운 시선이 적군을 뜯어 살폈다. 가장 오른쪽부터 환술사, 도끼술사, 창술사와 궁술사. 제법 모범적인 파티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산전수전을 겪은 노장의 낯을 하고 있었다. 모노는 붕대를 단단히 감은 주먹을 천천히 들며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며 스승의 말을 되짚었다. 무로부터 세상이 발아했듯 몽크의 품새 또한 무형으로부터 시작된다…….
“맹랑한 꼬맹이로군. 유인할 생각을 다 하고 말이야.”
도끼술사가 즐겁기 그지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모노는 대답하는 대신 느리게 중심을 낮췄다. 발을 단단히 땅에 박아 넣고 흔들리지 않는 균형을 잡는다. 시선은 정면으로. 호흡은 일정하게. 부동심이야말로 몽크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
“언제부터 알았지?”
모노는 팔자 좋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벼락같이 잽싸게 환술사에게 따라붙었다. 예상치 못한 속도인지 환술사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모노의 첫 번째 품새가 그의 옆구리에 정통으로 박혀 들었다.
“아악!”
모노가 모험하며 뼈저리게 경험한 또 다른 점은, 사람 몸은 의외로 쉽게 부서지고 뭉그러진다는 거였다.
환술사의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냥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모노는 멈추지 않았다. 곧장 궁술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도끼술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으나 모노가 한발 빨랐다. 정권 지르기와 연격이 연속으로 파고들자 궁술사가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모노가 발을 디디고 반동을 주었다. 몸이 가볍게 튀어 올랐다. 비운 자리엔 곧장 도끼날이 파고들었다.
“너!”
도끼술사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모노는 다시 침착하게 무형 품새를 다듬었다. 기습이 두 번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더욱 까다로워질 터였다. 모노는 차오르는 숨을 다시 골랐다. 그리고 땅을 박차 도끼술사에게 달려들었다.
맹렬한 기세로 휘두르는 도끼를 피하며 유효타를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합이 잘 맞는 창술사가 있을 때는 더더욱 어려웠다. 상처는 빠르게 늘었다. 팔이 베이고 뺨이 긁혔다. 도끼가 아슬아슬하게 머리칼을 자르고 지나가기도 했다. 모노는 그럴 때마다 강하게 첫 보를 내디디며 주먹을 꼬나쥐었다. 흐트러져서는 안 됐다. 이들의 목적은 자신과 카엘에게 있었다. 지금 패배하면 노예 시장에 팔려 가거나 재수 없을 경우엔 이 자리에서 죽임당할 터였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제가 죽는 건 크게 상관이 없었으나 카엘이 걱정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민감한 카엘은 죽거나 아파하는 것을 끔찍이 두려워할지도 몰랐다.
잡념을 밀어 치운 순간. 도끼술사가 크게 도끼를 치들었다. 빈틈을 발견한 모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허점이 났다. 몸을 크게 벌린 이상 타격점은 차고 넘친다. 모노가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다가 달려들었다. 도끼의 사정거리 안이었으나 모노가 훨씬 빨랐다. 꼬나쥔 주먹이 급소를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도끼술사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꽥 내질렀다.
“움직이지 마!”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모노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물리고는 훌쩍 멀어졌다. 주저앉은 도끼술사를 바라보는 대신 등을 반쯤 돌렸다. 궁술사와 환술사였다. 처리한 줄 알았던 것들이 버젓이 두 발로 서 있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저보다 작고 왜소한, 어둡고 평온한 카엘. 어디선가 쿵, 하고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라앉힌 숨이 단숨에 차올랐다. 카엘이다. 궁술사가 카엘의 목에 단도를 대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은 희미한 햇빛에 파르라니 빛났다. 맞댄 살이 점차 달아오르더니 이내 목에 붉은 선이 그였다.
쿵.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 움직이면 네 동생 목숨은 없는 거야.”
모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붕대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맨손이 드러났다. 까진 상처로 뒤덮인 손이 질끈 주먹을 쥐었다.
쿵.
“어어, 잠, 잠깐, 기다려! 움직이지 말라니까!”
모노는 대답하는 대신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모노.”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모노는 허허벌판에 드러누워 있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카엘이 전부였다. 모노는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을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관절부터 근육 하나하나가 쑤셨다. 으, 하고 앓자 카엘이 손을 뻗어 어깨를 주물렀다. 그 손길에 작게 터트린 웃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카엘.”
“응.”
“괜찮아?”
카엘은 잠깐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응.”
“그럼 됐어.”
모노는 자리를 완전히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피투성이 손을 옷에 문질러 닦고는 카엘에게 내밀었다. 가자. 짤막한 말에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손을 맞잡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유일한 변화라면 모닥불이 꺼진 채였으며 들짐승이 배낭을 헤집은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모노는 흐트러진 배낭 내용물을 켜켜이 쌓아 담았다. 모닥불을 다시 붙이고 그 앞에 앉았다. 카엘이 쪼르르 다가와 곁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손을 뻗어 모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피딱지가 얹힌 손등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안 아파?”
카엘이 그렇게 물었을 때 모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핏 욱신거리는 듯도 했으나 그보다는 꿈을 꾸고 있는 양 온몸을 사로잡은 부유감이 더욱 심했다. 모노는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펴고는 힐끔 카엘을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손등이 열감에 화끈거렸다. 먼저 잘게, 무슨 일 있으면 깨워, 하고 말하자 카엘은 얌전히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꿈 없는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카엘이 옮긴 것인지 모노는 나무 밑동에 기대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모닥불을 살피는 카엘의 등이 보였다. 역광이 진 탓에 그림자와 몸의 경계가 흐렸다. 덕분에 작은 몸이 더더욱 커 보였다. 모노는 길게 우짖는 부엉이 소리에 맞추어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눈은 여전히 뻑뻑했으나 잠기운은 말끔히 달아난 채였다.
잠들기 전 확인한 카엘의 목에는 분명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핏방울이 맺혔다가 그대로 굳은 것처럼 딱지가 선명했다. 그건 즉 모노가 겪은 경험이 제 망상이나 착각, 혹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도끼술사 일행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노는 그들을 영원한 불가해로 두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건 일종의 불안감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알게 되는 순간부터는 돌이킬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노에겐 아직 일렀다. 그는 어쩌면 돌이키고 싶었다. 또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다. 바싹 마른 입과 동시에 몰아치는 타는 듯한 갈증에 모노가 목울대를 지그시 눌렀다.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난 걸까. 카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모노가 문득 중얼거렸다. 궁술사가 붙든 카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노를 사로잡은 건 분명한 분노였다. 어떤 분노는 들불보다 맹렬히 상대를 불태운다는 사실을 모노는 이번 기회에 배웠다. 다만 그 깨달음이 물음에 대한 답은 될 수 없었다. 분노가 들판을 태우는 마른 불이라면 모노는 그 불의 근원지를 알아야 했다. 제가 그토록 분개한 이유. 이성을 놓고 기억조차 날아갈 만큼 참지 못한 까닭. 결론을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때때로 명확한 지표가 된다.
카엘이었다. 인질로 붙잡힌 그 상황에서마저 자신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언뜻 맹한 눈으로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카엘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모노는 솜털이 비죽 선 팔뚝을 한번 쓸어내렸다. 피로가 짙었다. 마음은 복잡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불쑥 떠오른 건 궁술사의 한 마디였다. 움직이면 네 동생 목숨은 없는 거야.
네 동생 목숨.
네 동생.
나의 동생, 카엘.
묘한 어감이었다. 나의 것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부터 기이하게도 모노는 제가 카엘의 부스러기 한 톨까지 소유한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가장 온전한 형태로 제 손에, 제 손에만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일곱 살 아이처럼, 추억 어린 물건을 고집하는 늘그막 노인네처럼 모노는 주먹을 질끈 쥐었다. 나의 것. 나의 동생. 나의 카엘. 목구멍 속에서 알 수 없는 응어리가 간질거렸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이야기라고 속삭이는 듯한 덩어리를 모노는 마른침과 함께 삼켜냈다. 그리고 다시 카엘을 보았다.
빛을 보며 어둠을 등진 카엘. 그 윤곽이 그림자와 뒤섞이듯 뿌예진 카엘이 지척이었다. 모노는 손을 뻗어 보았다. 카엘의 인영과 맞추어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허공에 쓰다듬은 손인데도 카엘은 꼭 반응하는 것처럼 굴었다. 몸을 슬그머니 뻗어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몸을 웅크렸다. 모노는 카엘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허락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닿지 않을 속삭임이 날숨을 타고 꼬불꼬불 올라갔다. 쓰다듬던 손을 거두어 제 몸을 감싼 모노는 이내 나무 동이에 완전히 기댔다.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이내 호흡을 깊이 고르고 뱉지 않은 말들을 차례로 허파에 쑤셔 넣었다. 기다렸다는 듯 무저갱 같은 졸음이 쏟아졌다. 모노는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깜빡이는 의식 속에서 맹세했다. 나의 카엘. 나의 동생. 소중한 나의 것. 나를 믿어. 오직 나만을 믿어.
형이 지켜줄게.
다음 날 아침. 모노는 동이 틀 꼭두새벽에 눈을 떴다. 물을 뜨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대신 모닥불 앞에 웅크린 카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졸음 섞인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든 카엘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깊이 입을 맞췄다.
다만 내가 죽으면 내 사랑 홀로 두어서. 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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