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00.
너는 떠날 거라고 했다.
01.
우스운 이야기를 해볼까. B는 봄과 겨울이 닮았다고 믿었다. 문학적인 의미보단 자조적인 믿음에 가깝기야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이별이 있고 그들 모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느 날에는 만남만 있기를 바라고 어느 날에는 이별만 있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B는 조금 늦게 체감했다. 불현듯 찾아온 관계의 시작 또는 끝에 어떤 우주적인 이끌림이 있을지 당장으로선 알기 어려운 까닭인지도 몰랐다.
봄과 겨울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려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관계를 똑하고 부러뜨리는 범우주적 손놀림. 다양한 창작물에서 운명 또는 필연이라고 불리는 것들. 똑같이 붙들었는데도 어떤 관계는 유달리 구질구질한 까닭도 그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붙들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해서.
B는 그러한 이별을 겪었다. B과 그의 인연은 부러질 때 엔진 소리가 났다. 누가 밟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고막을 터트릴 것처럼 우렁차게 우는 비행기 엔진을 끝으로 그들은 정말로 이별했다. 그때가 꼭 겨울이었다.
걔랑 처음 만났을 때도 비행기 엔진 소리가 났다. 그때는 봄이었다. 새순이 채 돋기도 전인. 날이 풀리지 않았던 이른 봄. 유사성에 관한 주장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02.
B는 얼굴을 덮은 마스크를 만지작거렸다. 깊이 눌러 쓴 모자며 검정 마스크까지. 완전히 얼굴을 꽁꽁 싸맨 제가 조금 낯설었다. 이렇게까지 감출 필요는 없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갈 곳 잃은 손은 마스크를 건 귓등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행여 줄이 끊어질라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조금 더울 정도로 빵빵한 난방 탓이었다.
인천 공항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제 갈 길 바쁜 사람들도 들끓었다. 웅성거림과 웃음과 안내방송이 겹겹이 겹치기를 거듭했다. B는 중앙 라운지 어드매에 앉아 있었다. 근처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일행과 함께였다. 이어폰을 끼지도 누군가와 대화하지도 않는 건 근방에 B뿐이었다. 주위를 살피는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누나랑 같이 올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혼자 다다른 인천 공항은 조금 낯설고 어색했다.
스마트폰을 꺼내는 대신 B는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전광판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온갖 비행기들의 이착륙 일정표였다. 실시간으로 깜빡거리며 모습을 바꾸는 숫자들에 눈이 조금 아팠다. 어젯밤 늦게까지 혹사한 눈이 인제야 파업하는지도 몰랐다. B는 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시야가 까맣게 가려졌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 피로는 그 어둠을 시작으로 몰려왔다. 터지려는 한숨을 꾹 삼키고 얼굴을 다리 사이에 묻었다. 몸을 옹송그리자 소음마저 아득했다.
얘는 왜 안 와. 불편한 허리에 나직이 앓으면서도 그런 생각이나 했다. 올 때가 됐는데. 아니. 사실 이미 지났는데.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했는데. 근데 왜 안 보이지. 전광판에 B이 찾는 비행기는 없었다. 기록할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너 또 어디 간 거야?
이런 종류의 불안은 습관이었다. 불온한 분위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길러진 눈치 같은 것.
“B.”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렀다. 타인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나직이 깐 채였다. B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눈을 떴다. 빛이 시야 가득 번졌다. 울렁이고 일렁이고 흔들려서 인영 하나 똑바로 안 보였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자 너는 그제야 보였다.
“여기서 뭐 해.”
건조한 질문이었다. 오랜만의 안부 인사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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