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3천자, 오마카세
정말 지치지도 않으시는군. 그게 브루노의 첫 소감이었다.
B 가문의 집사장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일해온 지 어느덧 육십 년이었다. 호그와트를 졸업한 직후부터 몸담아 온 덕에 B 가문과는 이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웬만한 사건은 브루노의 손짓 아래 쥐 죽은 듯이 처리됐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가주에게 올라가는 일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을 본인의 사명으로 생각했고 지금껏 그렇게 행동해 왔다. 하지만 지금, B 가주의 집무실에서 어색하게 옷매무시를 만지작거리는 순간, 브루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나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산처럼 쌓인 서류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퍽 서늘했다. 지팡이로 서류를 아무렇게나 쿡쿡 찌르는 모습에선 숨길 생각이 없는 권태와 무료함이 묻어났다. 브루노는 안 그래도 조용한 걸음을 죽이려 애쓰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깊이 파인 주름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B 경.”
“거기 두고 가.”
그렇지만 차가 식을 텐데. 차와 다과를 사랑하는 영국인으로서 걱정이 앞섰으나 입은 역할에 충실했다.
“차가 식으면 다시 데워 드리겠습니다. 부디 불러주세요.”
젊은 가주 대리는 그제야 괴롭히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집요하게 다문 입이 고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여 열린 입에서는 사뭇 부드러운 말이 나왔다. 선대와 꼭 닮은 점이었다.
“차 정도는 혼자 데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 정도도 도와드리지 못해서야 집사장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바쁘신 와중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드리고 싶답니다.”
“짐이라.”
가주 대리가 중얼거렸다. 시선은 다시 서류로 떨어졌다. 집사장은 서류에 시선을 던지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았다. 저게 무슨 서류일진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아도 가주 대리는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이유 없이 서류 하나를 콕 집어 괴롭힐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꿎은 서류를 태웠다가 복구하기를 거듭할 만큼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궂은 행동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불만을 꼬치꼬치 캐물을 정도로 어리석은 집사도 아니었다. 집사장으로서 브루노는 그가 섬기는 주인의 심기를 묻지 않아도 알아야 했고, 드러내지 않아도 눈치채야 했으며, 기민하게 파악한 심기가 꼬였다면 주인조차 모르도록 자연스럽게 그를 풀어야 했다.
브루노는 조심히 물러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가주 대리에게 방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숨죽인 주문과 함께 방이 소리 없이 요동쳤다. 너저분하게 바닥에 흐트러졌던 서류와 책이 벌떡 일어나 책장에 꽂혔다. 커튼이 완전히 젖혔고 창문은 살짝 열렸다. 격변을 맞는 방안을 훑어보던 가주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제 허리를 두 번 툭툭 두드렸다. 가주 대리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했다. 구부정하던 등을 꼿꼿하게 펴고 앉은 가주 대리, A는 브루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가주의 품위는 행실과 더불어 주 생활공간에서도 묻어납니다.”
브루노는 자신의 대답이 어린 가주 대리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브루노가 보기에 가주 대리는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저택에 처박혀 서류 처리만 하는 게 명문가 자제의 숙명이라지만, 브루노는 호그와트에 다닐 적 A가 아직도 망막에 선명했다. 브루노는 아직도 A라는 이름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살짝 붉게 상기되었던 뺨과 채 여물지 않은 목소리 따위를 떠올렸다. 늙은이의 미련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브루노는 종종 A를 보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라면 조금 더 느긋하게, 세상을 알기 위해 여행을 다녀도 좋았을 것을.
하지만 브루노는 제 개인적인 안타까움을 내뱉는 대신 깊이 절했다. 앞서 말했듯이. 궂은 행동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A가 집무실에서 서류와 농밀한 데이트 시간을 보내는 데에도 결국엔 까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유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집사장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없었다.
“이만 가봐도 좋아.”
잠시 입을 다물었던 A가 말했다. 더 머물 핑계도 이유도 없었기에 브루노는 다시 한번 깊이 절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호출 벨이 울린 건 점심시간이 막 지난 무렵이었다. 브루노는 가장 먼저 메이드를 찾았다. 식사를 제 손으로 올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집무실로 걸음을 서둘렀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으나 좁은 문틈으로 찬 바람이 불었다. 문을 닫아야겠군. 아직도 열어두셨을 줄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브루노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 대신 문이 벌컥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집무실로 들어가며 브루노는 빠르게 다과상을 살폈다. 찻잔 대신 주전자만 덩그러니 놓인 데다가 다과는 줄어 있었다. 옆에 놓인 식기는 A가 식사를 마쳤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빈 식기 옆에는 하얀 깃털이 바람을 따라 들썩였다.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러 식기와 깃털을 방 밖으로 내보낸 브루노가 마침내 A를 바라봤다. 그리고 지난 육십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숙련된 집사는 언제 어디서든 능숙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깜빡 잊은 채, 당황했다.
“음.”
“……B 경, 그건…….”
“쏟았어. 이놈의 올빼미가 잘못 착륙하는 바람에.”
횃대에 앉아 깃털을 정리하던 올빼미가 항의하듯 크게 날갯짓했다. 푸드덕대는 소리와 함께 깃털이 사방으로 날렸다. 불행하게도 그 정도 소란은 관심도 받지 못했다. 브루노의 시선은 온통 A에게 쏠린 채였기 때문이었다.
나갈 때만 하더라도 깨끗하던 책상이 끈적한 차와 깃털로 난장판이었다. 서류와 차와 깃털로 끓인 수프를 책상에 엎은 모양새였다. 브루노는 얼떨떨한 채로 바닥에 떨어진 찻잔을 주웠다. 부엉이 깃털과 찻잎이 그를 놀리는 것처럼 얌전히 담겨 있었다. 다시 A를 바라봤다. 신경질적인 기색은 없었다. 표정은 온화했으나 브루노는 문득 저건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은 경지인가 의심했다.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아주 화려하게 구르던데. 멀린이시여,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내 책상이 마법부의 새로운 출근길이 된 줄 알았어.”
올빼미가 불만스럽게 울었다. 삑삑대는 울음에 브루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A를 빤히 쏘아보던 올빼미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부리를 몇 번 딱딱거리더니 등을 돌려버렸다. 완전히 토라진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브루노에겐 올빼미의 말을 알아듣는 재주가 없었다.
“치우는 동안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서류까지 복구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아서요.”
“별로 끌리는 제안은 아닌데.”
“무슨 일이든 휴식과의 균형이 중요한 법입니다. 가주 대리.”
“그건 충고인가?”
“조언이지요. 그 둘은 조금 다릅니다.”
A는 한참 말이 없었다. 브루노는 찻잔을 손에 쥔 채 차분히 기다렸다. 원칙상 방 주인이 머무는 방은 청소할 수 없었다. A는 제법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차의 단내가 조금 거슬리게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A는 횃대에 앉은 올빼미를 향해 걸어갔다.
“이리 와, 장난꾸러기 녀석. 이참에 착륙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어.”
올빼미가 부리를 딱 소리 나게 부딪혔다. 강경한 거절이었다. A는 지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브루노는 둘의 은근한 싸움을 멀리서 구경하며 방안을 가볍게 둘러봤다. 수라장이 따로 없는 책상 말고는 치울 곳이 그다지 없었다.
“다녀올게.”
“느긋하게, 하지만 늦지 않게 돌아오세요. 날이 춥습니다.”
올빼미가 한숨 같은 미묘한 소리와 함께 날개를 펴고 힘껏 날아올랐다. 매끄럽게 활강하며 집무실을 벗어나는 올빼미의 뒤를 A가 뒤따랐다. 문이 닫혔다. 브루노는 호흡을 가다듬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반쯤 뜯긴 편지가 지팡이 궤적을 따라 흔들렸으나 브루노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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