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실제 작업물
날숨이 안개처럼 핀 밤이다. 땅거미 내린 지평선 위로 간헐적인 불빛이 깜빡였다. 일정하지 못한 거리를 두고 박힌 가로등이 꼭 이쑤시개 같다고 생각하면서 B는 모자를 한껏 눌렀다. 우산이 없었다. 출근길에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대가가 이렇게 돌아왔다. 나직이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굵지는 않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회사 건물 처마의 끝단에 맞춰 서 있노라면 사방에서 우산 펴는 소리가 났다. 팡, 팡, 안녕히 가세요, 팡, 내일 봅시다, 팡, 수고하셨습니다, 네 당신도요, 그리고 다시, 팡. 접혔던 우산 살이 강한 압력에 밀치듯 뼈대를 펼치는 모습을 짧게 관찰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가로등이 있다. 불빛은 빗속에서 흐늘거리더니 움칫움칫 흔들렸다. 물방울이 빛을 품은 것 같군. B는 짧게 독백했다가, 지금 빗속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까닭이 고작 우산이 없기 때문인가 고민했다가, 이윽고 정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음에 혼란스러워하며 한 발을 내디뎠다.
어깨가 차츰 젖었다. 세차다고 생각하진 않았거늘 맞고자 하니 폭우가 됐다. B 씨, 그냥 가십니까, 우산 없으십니까, 하는 질문은 빗소리에 듣지 못한 양 자연스레 흘린다. 지금 B의 귓속에서 울려대는 건 그 자신을 붙잡는 직원의 말이 아니다. 아득하게 들리는 천둥소리도, 지나치는 가로등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길 듯 직직 우는 소리도 아니다. 쏟아진 비가 벽면을 타고 떨어지고 하수구까지 흘러가며 만든 폭포 소리였다. 그에 열중한 제 입이 살짝 벌어질 때마다 희고 뿌옇게 번지는 날숨이 빗줄기에 흩어지는 소음이었고.
기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B는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다. 아무런 것에도 집중하고 싶지 않기에 온갖 곳에 감각을 돋쳤을 뿐이지. 모퉁이를 돌아 꺾으며 B는 중얼거린다. 피곤하다. 집에 가고 싶다. 축축한 날은 사람을 쉬이 지치게 한다. B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항상 예외가 되지 않는다.
축축한 경성의 밤이 B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어깨가 차갑다 못해 싸늘해지기 시작하자 B는 조금 더 걸음을 재촉했다. 피곤하다. 집에 가고 싶다. 이후에 한 단어가 새로이 붙는다. 춥다. 직원의 말을 무시하지 말 걸 그랬다는 짧은 후회가 불꽃처럼 따닥, 하고 일었다. 그 직원이 제게 우산을 주었을 수도 있지. 아주 우연찮게도 며칠 전 우산을 회사에 두고 온 참이라 두 개였다면서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택시를 불러주었거나, 사실 경성에서 택시를 타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이렇게 미련하게 맨몸으로 빗줄기에 맞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동그랗게 모았다가 하, 뱉은 숨이 작은 포탄처럼 터졌다. 몸을 살짝 떨며 B는 목깃을 세운다. 모자를 더욱 눌러 쓴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집에 가자마자 따뜻한 음료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다.
평범한 지명수배지다. 지명수배지라는 명사 앞에 평범함이 붙기 시작한 지는 제법 되었다. 사위가 어둡고 유일한 빛인 가로등은 골목 저편에 있는 탓에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B는 한 걸음 내디뎠다. 이번엔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헤진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 오밀조밀 나열한 글자를 읽었다.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암살기도범을 보면 종로경찰서에 신고…….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친다. 그림이 B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요.”
B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한다. “찾았습니까?”
“찾았고말고. 회사 앞에 당신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상대방이 걸어오는 듯하다. 물웅덩이가 밟히며 깨지는 찰박찰박 소리가 여간 선명한 게 아니다. “우산도 없이 우두커니 서서 뭘 해요. 혹시 갑자기 퇴근하기 싫어졌다거나?”
“보고 있습니다.”
B는 잠시 입을 다문다. 무엇을, 이라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어림한다. 하지만 이 또한 알지 못하게 되었음에 짧게 탄식하는 것이다. 뱉을 수 있는 말이라곤 어색하게 뭉그러진 질문뿐이다. 하물며 어울리지도 않는.
“닮았습니까?”
상대, A는 벽에 붙은 종이와 B를 번갈아 바라보다 말했다. “조금. 둘 다 비에 젖어 쭈글쭈글해졌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닮았다니 다행입니다.”
“다행인 게 맞습니까?”
“애먼 사람을 닮은 것보다는 낫겠지요.”
이번엔 A 차례다. 수배지를 들여다보던 A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그렇군요, 하고 만다. B는 그 순간 A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새까만 우산과 그 그림자로 가린 낯이 어떤 빛일지. 그렇군요, 라는 대답에 싣지 못한 감정이 얼굴에는 드러났을지가 궁금하다. B는 아주 조심스럽게 A에게 다가갔다. A는 물러나지 않는 대신 우산을 조금 더 높이 든다. 다가와도 좋다는 허락이요 어깨를 나란히 해 비를 피하라는 아량이다.
“갑시다.”
A가 먼저 말한다. 먼저 걷기 시작한 건 B가다.
그들은 말없이 걷는다. 모퉁이를 꺾고 돌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순간 잰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B가 그랬다.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그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다는 듯이 우직하게 앞만 본다. 그에 A가 한숨을 쉬었다. 연신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다가 그럽시다, 당신 편한 대로 합시다, 중얼거린다. 모든 건 깔끔하게 정리된 일자로 진행된다. A의 말이 확실하게 끝맺어진 후에야 B가 뒤를 돌았다.
바닥을 두드리는 지팡이가 딱, 따닥, 하며 만드는 조급한 박자에 서툰 걸음을 맞춘다. 다시 모퉁이를 돌고 꺾고 거울도 아니거늘 제 얼굴이 비치는 벽을 마주한다. 손을 들어 수배지를 뜯고 머뭇거리다가 차곡차곡 접는다. 종이는 이미 충분히 젖었다. 악력이 들어가자 힘없이 뜯어졌다는 뜻이다. 종이를 찢는 빗줄기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B는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웅덩이가 깨지는 찰박찰박 소리를 듣는다.
“내가 만일.” 멀지 않은 곳에 선 A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면.”
“…….”
“그러면 당신은 그에 응할까?”
무슨 제안이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때때로 어떠한 사실은 구태여 말이 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고개를 든다. 빗줄기는 이제 거의 멎었다.
“회사 앞에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B가 느릿느릿 말한다. A는 말이 없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이유 아니야?” A가 물었다. B는 그의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내린다. 손에 담긴 수배지가 이젠 거의 죽처럼 변했다. 대답하지 않자 A가 조용히 덧붙였다. “닮았습니다. 그림이랑 당신. 그래서 더 곤란해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의 뜻.”
이번엔 A가 앞장선다. B는 캐묻지 않고 뒤따랐다.
그들은 돌아온 길을 되짚어 걸었다. 모퉁이를 다시 꺾고, 돌고, 곧게 나아가다가 건물 처마 안쪽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비는 거의 그쳤으나 젖은 옷이 칼바람에 마르며 한기는 한층 심해졌다. B는 몸을 가볍게 떨며 A의 말을 곱씹었다. 닮았습니다. 그림이랑 당신. 지명수배지에 오른 그림과 자신이 닮았다는 건 아마 투명한 칭찬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이어진 말도 신경 쓰였다. 그래서 곤란해요. A는 무엇이 곤란한 걸까. 너무 닮아서 그럴까. 제가 얼굴 정중앙에 칼자국을 내온다면, 그래서 더는 닮지 않게 된다면, 그러면 A는 더는 곤란해지지 않을까.
아니. 사실 그런 종류의 해결책으로 일단락될 사건이 아니다. B는 그걸 안다. 알기에 외면하고 싶어질 뿐이다. 본디 사람이란 속속들이 알아야만 진정으로 두려워할 수 있다.
닮았습니다. 그림이랑 당신. 당신과 그림.
그래서 곤란해요.
“무엇이 곤란합니까?”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B가 중얼거렸다. A는 돌아보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훈훈한 공기나 맛있는 음식 냄새 대신 찬바람과 약간의 먼지 묵은내가 그들을 반긴다. A가 우산을 접는 동안 B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내가 당신을 곤란하게 합니까?”
“글쎄.” 우산꽂이에 우산을 꽂은 A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않습니까?”
A는 집 안쪽에서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B는 그걸로 몸을 구석구석 닦는다. 머리를 쥐어짜고 얼굴을 닦고 젖은 겉옷을 벗고 물기를 훔친다. 그러는 동안 A는, 조금도 젖지도 추워하지도 않는 A는, 우두커니 서서 B의 얼굴과 손짓과 손끝에 남는 종이 부스러기와 그걸 닦아 없애는 수건을 지그시 바라보다 물었다.
“미국에 가는 건 어떱니까. 같이.”
B는 A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제안입니까?”
A는 고개를 끄덕인다. B는 젖은 수건을 단정히 개고 집안에 들어선다. 아무리 추워도 확실히 바깥보단 살만했다. 적어도 이곳엔 비를 막아줄 처마가 있으니까. 동그란 숨이 툭툭 터지는 걸 지켜만 보지 않아도 되니까. 한계가 있더라도 보일러로 몸을 데울 수 있고, 뜨거운 물로 샤워할 수도 있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분을 풀 수도 있어서.
B는 대답하지 않으며 A는 그 침묵을 B가 제시한 답으로서 받아들이기로 한다.
“밥이나 먹을까요.”
“그럽시다.”
“배가 고픈데.”
“준비는 금방 끝날 겁니다.”
“뭘 먹으면 좋을까요.”
“있는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뭐든 좋다는 말은 싫습니다.”
키득키득 웃으며 부엌으로 사라지는 A의 뒤통수를 빤히 좇는다. 이 집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따뜻해질 수 있음을 안다. 당신은 우산을 가지고 있었고 회사에서 만났다면 지금보다 덜 젖은 채로 귀가했을 것이다. 처마 없는 바깥보단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따라가지 않는 건 안타깝게도 그 까닭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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