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헤이즈 인 액션

#아머드코어 #러스티

스틸 헤이즈는 러스티가 베스퍼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용하던 AC였다. 처음에 바쇼 프레임으로 구성되었던 중고 공업용 AC는 필요에 의해서 혹은 성능을 위해서 그 부품과 무장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어느날 플랫웰 아저씨가 슈나이더제 AC 풀프레임을 들고 왔다.

"어이, 부탁했던 HG 나흐트라이허 백병전 사양은 못 구했다. 알고봤더니 발매 당일에 다 나갔다더라. 대신 실물을 구했으니 이걸로 봐줬으면 좋겠군."

당연히 중고품이었다. 하지만 러스티는 이미 모델링에 있어서 도색과 웨더링까지 해야 완성이라고 보는 타협 없는 모델러였고, 그는 자신의 스틸 헤이즈에 웨더링까지 공들여 완성시켰다. 베스퍼의 메카닉들은 그의 심오한 취향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켰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첫째로, 러스티는 AC를 사랑한다. 둘째로, 스틸 헤이즈는 아르카부스의 것이 아닌 러스티의 개인 물품이다. 슈나이더와 아르카부스 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계약에 의해서 러스티는 자신의 출격을 베스퍼 부대 기록에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기술연구도시라는 것도 꼬라지가 말이 아닌데. 눈 앞에 코랄을 두고서 도둑질이라니, 스틸 헤이즈가 울겠어."

"여기는 특히 아이비스의 불 당시에 탈출하려던 시민들이 억지로 부숴놓은 공사로라서 더욱 엉망이긴 하다. AC 하나 들이기 위해 굴을 넓히는데 고생이었어."

"뭐, 기업들보다 먼저 보게 되었다는데 만족해야겠지. 플랫웰, 오퍼레이팅을 부탁할께."

러스티는 플라즈마 미사일 대신 어께에 적재된 보존 컨테이너의 무게를 느끼면서 통상속도로 이동했다. 결국 루비코니안의 생존이 걸린 화물이었다. 가볍게 취급할 생각 따윈 없었다.

"러스티, 225 방향에서 이동이 포착되었다. 침입자를 인식한 방어병기로 보인다. C병기일수도 있음을 유의해라."

"확인. 교전은 최대한 회피하겠다.“

러스티는 오랜만에 여유를 가지고 MT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조사기술연구소의 병기는 그 MT부터 질이 달라보였다. 지금 루비코니안들은 모든 것을 잃고 잿더미 속에 살아가는 처지지만, 언젠가 저 기술은 루비코니안을 위해 쓸 날이 올 것이다.

"300 방향에서 MT 군집이 스틸 헤이즈를 향하고 있다. 아마 꼬리가 밟힌 거 같군."

지금은 저 한 무리의 병기들에게서 살아남아야 되겠지만 말이다.

"보인다. 피할 수 없으니 이쪽이 먼저 뒤를 잡겠어."

스틸 헤이즈는 건물 사이로 엄폐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한 끝에 빌딩 옥상에 올라가 기습할 순간을 골랐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펄스 블레이드로 무장한 대형 MT겠지만, 소형 MT가 얹고 있는 레이저 포 또한 스틸 헤이즈의 장갑에게는 부담되는 화력이었다. 따라서 러스티는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낮을 대형 MT를 따돌리고 주변의 소형 MT부터 해치우기로 했다.

"시스템, 매뉴얼 에임으로 전환해줘."

러스티는 등에 적재된 란세츠 RF를 꺼내들어 눈과 손에 의지하는 조준을 시작했다. 고철은 넘쳐도 FCS 같은 전자제품을 구할 수 없던 시절에 익힌 가난한 루비코니안의 재주였지만 FCS 조준 지원 너머로 일방적인 사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베스퍼에서도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MT 1기 격파."

버스트 라이플에게서 쏘아진 3발의 총탄은 수백미터 너머의 MT의 관절에 정확히 꽂혀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굳이 스캔하여 격파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오래된 경험으로 검증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스틸 헤이즈는 즉시 다음 타겟을 조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사격 역시 빗나감 없이 정확히 MT를 격파했다. 조준하고 사격한다. 이런 간단한 행위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MT의 갯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벌써 잔탄이 떨어진건가. 재장전....을 하고 싶지만 저쪽도 눈치를 챘군. 돌입하겠어."

어설트 부스트를 발동시킨 스틸 헤이즈는 이름 그대로 강철의 안개가 되어 진형을 파고들었다. 용케도 조준에 성공한 몇몇 MT들이 사격을 가했지만, 이미 그 궤적에는 부스트가 남긴 불꽃만을 맞출 뿐이었다.

쾅하는 충격음과 함께 최후방에 있던 미사일 포대형 MT가 날아갔다. 역시 어설트 부스트의 끝에는 부스트 킥으로 마무리해야 기분이 좋았다.

"어이, 그렇게 멀리 안가도 된다고. 도망치면 이쪽이 더 힘들어져."

아직 반응이 늦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던 MT들이 러스티의 도발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일제히 그를 향해 조준을 시작했다. 하지만 러스티는 스틸 헤이즈가 더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단 한번의 퀵 부스트로 도약한 스틸 헤이즈는 백여미터를 뛰어넘어 MT에게 샴푸의 영거리 사격을 먹일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머지 MT가 조준을 완료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러스티는 사격 타이밍을 읽은 퀵 부스트로 회피와 접근을 동시에 해냈다.

"볼 때마다 자네 실력은 감탄스럽군."

마지막 소형 MT가 영거리에서 맞은 총탄으로 폭발하는 모습을 보며 남긴 플랫웰의 감상이었다.

"칭찬은 나중에 해줘, 플랫웰. 아직 큰 놈 하나 남았어."

어설트 부스트로 거리를 좁힌 스틸 헤이즈는 대형 MT에게 부스트 킥을 먹이는데 성공했지만, 놈의 장갑은 어찌나 두꺼운지 킥만으로는 ACS 부하의 반절만 채워졌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총탄을 때려박으면서 두들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도탄되지 않게 근거리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러스티는 스틸 헤이즈의 속도를 믿고서 주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포구를 피해 회전기동을 하는 모습은 마치 스틸 헤이즈가 대형 MT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추는 느낌이었다.

"잠깐, 대형 MT의 출력이 급상승한다!"

"나도 봤어!"

결국 대형 MT 쪽에서 참지 못하고 펄스 파동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빼들었다. 스틸 헤이즈는 반사적으로 퀵 부스트를 발동하여 거리를 벌렸지만,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도 MT 쪽에서도 부스트를 뿜어내며 따라잡기 시작했다.

러스티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였지만 그 한순간만으로도 러스티는 칼날의 방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브레이크를 걸어 기체를 멈춰세운 러스티는 대형 MT의 정면 우측으로 파고들어 왼쪽에서부터 베어내려지는 칼날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부하가 오기 직전 마지막 발악이었던건가. 그렇다고 해서 스텝을 꼬면 안되지. 그러면 상대방만이 너무 부각되잖아."

레이저 슬라이서를 휘두르는 스틸 헤이즈의 화려한 춤사위에 대형 MT는 조각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끝인가?"

"그래, 이 배수구만 들어가면 해방전선이 확보한 안전지대다.... 잠깐, 이 열반응은....!"

루비콘의 황야에 적응된 러스티의 눈이 하늘 속에 다가오는 점을 포착할 수 있었다. 아르카부스도, 발럼도 아닌 비대한 머리의 실루엣을 가진 경량의 AC였다.

“보인다, 루비콘제 AC인 거 같아. 50년 동안 기술연구도시에서 살아남은 파일럿이 있을 리는 없겠고, 역시 무인 AC라는 거겠지. AI 패턴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아니, 무인 조종을 AC에까지 적용하는 건 성간기업에서도 성공 못한 일이다. 일단 탈출에 우선해라. 길만 막으면 어떻게든 따돌릴 수 있어."

"그러면 뒤가 노출되잖아. 이 쪽은 등짐을 안전하게 배달할 의무가 있다고."

"네 목숨이 더.... 아니, 어차피 달려들겠지. 무장 분석부터 시작하겠다. 섣불리 접근하지는 마라."

"고마워, 아저씨!"

스틸 헤이즈의 출력이 다시 한번 상승하기 시작했다. 같은 경량 AC와의 전투라면 속도와의 싸움이었다. 얇은 장갑을 조금이라도 먼저 깎아내는 쪽이 전투의 유리함을 가진다는 것을 러스티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비콘 기술조사연구소를 지켜온 IA-C01: 이페메라 역시 대응 알고리즘을 실행하고 있었다.

스스로 재생하는 코랄 제너레이터와 코어 블록이 들어갈 공간을 희생시켜 동력을 끌어올린 코어 파츠의 조합은 경량이라는 체급의 한계를 뛰어넘는 출력을 뿜어내고 있다. 그 거대한 출력이 이페메라의 왼팔에 장착된 곡검에 실리고 있었고, 스틸 헤이즈의 접근에 맞춰 충전된 광파가 뿜어져 나온다.

“참격에 실린 파동이 다가온다….?”

분명 스틸 헤이즈는 이페메라의 동작을 보고, 반응할 수 있었다. 단지 참격의 범위가 너무나 거대해 미처 피하지 못했을 뿐이다.

“괜찮나, 러스티!”

“아니, 안 괜찮아. 빔 병기는 충격력이 약하다는 게 상식 아니었어? 근데 저 광파가 기체를 통과하니 ACS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지금 스틸 헤이즈가 격파되지 않은 이유는 단지 피격의 충격으로 운좋게 무너진 건물 속으로 빠져들어가 엄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공세에서 같은 행운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연구소에서 코랄의 형질을 재현하기 위해 레이저와 펄스의 융합을 개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치만 저런 위력일줄은….

어쨌든 상대는 츠바사와 같이 공중에서 도망치며 다가오는 상대를 요격하는 타입이다. 근접전이 놈의 약점일테지.“

“츠바사 타면서 베스퍼까지 이겨본 파일럿이라면 뻔한 돌격을 해봤자 도망치면 그만이라는 건 알잖아? 좀 더 쓸모있는 오퍼레이팅을 해달라고.”

“무장의 출력은 어떻게든 감당하더라도 중량과 발열은 해결하지 못했을 거야. 한차례 쏟아지는 미사일과 광파를 한번만 피하면 그다음은 네 차례다.”

러스티는 피가래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계기판을 살펴보았다. 잠깐이나마 숨은 덕분에 ACS 부하는 회복되었지만 저 터무니없는 광파뿐만 아니라 모든 무장들이 재충전할 시간을 준 것이기도 했다. 엄폐물을 끼고 숨거나 도망치는 걸 반복할 수도 있겠지만 버틴다고 유리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남은 장갑과 잔탄을 생각하면 질질 끌고갈 여유 따윈 없었다.

“스틸 헤이즈, 현 시간부로 통신을 종료하겠다. 방해받기 싫거든.”

스틸 헤이즈의 역각 관절이 접혔다 펴지며 기체를 하늘 위로 끌어올렸다. 분명 나흐트라이허의 얇은 회전축과 피스톤이 비명을 지르고 있겠지만, 쫓아가야하는 입장에서 EN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엄폐물을 포기하고 공중에 올라온 덕분에 스틸 헤이즈는 루비콘제 AC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자아, 어디 한번 쏟아내보라고.”

한편, 이페메라는 스틸 헤이즈가 뛰어오르기 전부터 스캔을 통해 기체를 포착하고 이미 락온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스스로를 개방된 공간에 노출시킨 스틸 헤이즈에게 알고리즘의 판단은 전탄 발사.

이페메라는 우선 넓은 면적을 제압할 수 있는 IA-C01W2: MOONLIGHT의 충전된 광파를 날려보낸다. 그러나 침입자 기체는 종방향에 약한 광파의 특성을 학습하여 급격한 고도 변경으로 회피에 성공한다.

알고리즘은 침입자 기체의 경로를 계산하여 근접전을 노리고서 반응 사격 대신 회피에 집중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어설트 부스트에 소모되고 있는 EN 고갈을 유도하기 위해 경로를 제한시킨다는 판단을 내린다. 따라서 이페메라는 IA-C01W1: NEBULA의 넓은 범위의 플라즈마 폭발을 노리기 시작한다.

침입자 기체와의 거리가 200까지 줄어들기 시작한다. 질량 에너지가 이페메라를 가격한다. 하지만 IA-C01W3: AURORA의 유도거리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하다. 연속적인 후방 퀵 부스트로 교전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광파 캐논을 발사한다. 침입자 기체는 광파의 경로를 비껴나가는 기동을 취했으나, 지나친 광파는 재유도되어 기체의 등을 노린다.

그리고 피격 직전 침입자 기체의 변칙이 인식된다. 스스로의 속도를 희생하면서까지 기체를 뒤돌려 코어의 정면으로 피탄당하는 행위. 알고리즘은 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투에 변수는 없다. 침입자 기체의 퀵 부스트 도약의 비거리가 계산된다. 아무리 퀵 부스트를 해도 상대가 목표하는 근접전은 허용되지 않는다.

IA-C01W1: NEBULA에 출력이 집중된다. ACS 시스템에 할당된 공급량은 사격 반동을 줄이는데 사용된다. 이페메라가 순간 정지한 것을 포착한 침입자 기체가 대응을 준비하지만, 단순한 회피 경로로는 플라즈마 폭발에 휘말릴 뿐이다.

다음 순간 침입자 기체가 무장 해체하고 투척하는 동작을 취한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물체가 MA-J-200 RANSETSU-RF라는 것을 인식하지만, 이페메라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너무나도 가벼운 물체다. 이미 플라즈마 응집체가 발사되었고 근접신관은 침입자 기체를 닿기도 전에 분해할 것이다. 잠깐, 저 물체가 플라즈마 응집체를 자극한다면?

“잡았다!”

이페메라의 카메라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플라즈마 폭발의 자가 데미지는 크지 않을 것이다. 라이플은 닿지도 못하고 융해되어 바스러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인 기체는 현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방 컨테이너를 보호하기 위해 변칙적인 기동을 했을 때, 이페메라가 잠깐 굳었다는 것을 포착한 러스티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무장을 버리고 가벼워진 스틸 헤이즈는 단 한번의 도약만으로 이페메라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도 한번 그 좋은 칼 써보자고!”

가벼워졌다고는 하나 AC 중량의 충격을 담은 부스트 킥은 간단하게 이페메라의 왼팔을 짓이겼다. 밀웜 사냥할 때 나이프 다루던 솜씨로 튕겨져나온 곡검을 잡아챈 스틸 헤이즈는 단 한번의 일격으로 깔끔하게 이페메라의 목을 잘라냈다.

“이제 진짜 끝인거지?”

“그래, 근방에 어떠한 반응도 없어. 돌아오면 내가 한턱 쏘지. 오늘 꽤나 무리했으니까.”

“뭐, 운이 좋았어. 그 플라즈마 탄이 란세츠에 딱 맞지 않았으면 내가 당했을꺼야.”

플랫웰은 어쩌면 그게 아직 러스티가 루비콘에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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