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해!
3화
서준은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1. 엘로이 쪽에서 이혼을 막고 있다.
2. 공작가는 나를 죽일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3. 아그네스를 만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무튼 이제 사망 플래그는 피한 거지?’
서준은 길었던 하루도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어느새 마차는 공작저에 도착했다. 왕궁만큼은 아니지만,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집 진짜 넓네.”
서준은 밤이라 그런지 조용한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 방은 어디야?”
“이 쪽입니다.”
네메녹스 대신 노후한 집사가 대답하고 서준을 3층의 방으로 안내했다.
“공녀님의 방과 같은 크기에, 같은 품질의 가구들을 채워 넣었습니다. 불만족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저를 통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서준이 으리으리한 방 안을 둘러보는 사이, 집사가 자신의 주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가씨.”
네메녹스는 대답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서준의 방과는 중앙의 거대한 계단을 중심으로 대각선에 위치한 방이었다.
‘성격하고는.’
서준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젓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서준은 아침 일찍 기사 견습생들이 훈련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창문 밖으로 내다 보았더니, 어제의 그 단발 기사가 견습생들이 입는 빨간 조끼를 입고 훈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실하긴 하군. 서준은 괜히 자기 잘못도 아닌데 보고 있자니 머쓱했다.
서준은 기사 이데에게 달려갔다.
“어이.”
“무슨 일이십니까?”
이데가 순간 눈깔을 희번득하게 떴지만, 곧 공손하게 물었다.
“말 좀 가져와.”
“왜 지라, 아니, 왜 말이 필요하신가요?”
“왕궁 갈 거다.”
“......”
얼굴에 멍을 달고도 실실 웃던 이데는 처음으로 정색하더니, 온갖 핑계를 늘어놓으며 도망갔다.
다른 누구에게 부탁해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해하고, 공녀님의 허락을 미리 받으라며 도망쳤다.
“참나, 안도와주면 못 갈 줄 알고?”
어쩔 수 없이(?) 직접 마구간에서 말을 훔쳐 막 성을 벗어나던 서준은, 팔짱을 낀 채 그를 기다리고 있던 네메녹스를 발견했다.
아침인데도 완벽하게 단정한 얼굴, 와인 색 드레스에 금색 가운을 걸친 네메녹스가 서준을 향해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제 아버지이신 에든 공이 보자고 하십니다.”
말을 압수당한 서준은 공녀에게 질질 끌려갔다.
에든 공의 집무실이 아닌, 테이블이 있는 거대한 투왈렛 룸으로.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와 있어야 하는거야?”
“아버님을 만나려면 기본적인 준비는 되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 기본이 얼마나 까다롭고 엄격한 것인지, 서준은 몰랐다.
오찬을 함께하기 위해 서준은 테이블 매너부터 걸음걸이, 화법 등을 속성으로 교육받았다. 교육이 끝나기 전까진 방에서 나갈 수도 없었다.
“이익......!”
“아직도 칼질을 하다가 갑자기 고블린 소리를 내시네요.”
“하아...... 내가 다섯 살 때 뗀 예법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을 줄이야. 아버지께 오찬을 만찬으로 미루자고 말씀드려야겠네.”
“아니야, 이 악마들아! 칼질을 몇 백 번을 시키는 거냣?!”
서준은 진저리를 치며 반항했다. 그러나 예법 선생과 네메녹스의 독한 수업은 12시를 딱 맞춰서 겨우 끝났다.
정작 오찬장에 들어가자, 네메녹스와 가족들, 그리고 무엇보다 에든 공은 의례적인 인사만 겨우 한 채로 식사를 끝냈다.
오죽하면,
“자네가 서준 경인가?”
“네, 맞습니다.”
이게 대화의 끝이었다. 서준이 공들여 연습한 예법은 별로 신경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엄격하고 깐깐하게 생긴 에든 공은 서준이 존재하지 않는 듯 자신의 식사에만 열중했다. 다만 나갈 때, 서준이 급하게 식기를 놓느라 챙그랑 소리가 나자 그제서야 처음 고개를 들어 서준을 바라보았다.
겨우겨우 오찬이 끝났지만, 그 외에도 업무가 몰아쳤다. 공녀와 결혼해 이제 공작가의 업무를 일부 맡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년 내내 칼질만 했던 서준은 30분이 지나자 귀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난 공부 같은건 해 본 적 없다고......”
‘고1 때의 악몽이 몰아친다, 으윽.’
서준은 네메녹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창문으로 도망쳤다.
“아네스 만나러 가야지!”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반나절만에 기사들에 의해 다시 잡혀 왔다.
아그네스는 서준을 만나 주지 않았고, 어쩌다 만나도 겉으로만 친절하게 응대할 뿐, 서준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나 엘로이 쪽의 사람이 붙어 있어 대화하기도 힘들었다. 실망해서 집에 돌아오면, 네메녹스의 한심한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났지만 그녀의 한심해 하는 듯한 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결정적인 일이 발생한다.
그날따라 네메녹스는 쉽게 비켜주지 않았다.
“어딜 나가는 거죠?”
“아네스 만나러.”
“......당신의 집착은 비정상적인 수준이에요. 그리고, 일은 다 하고 나가도록 하세요.”
그날따라 어두운 눈빛이었지만, 서준에겐 신경쓰이지 않는 일이었다. 서준은 무시하고 네메녹스를 지나쳤다. 그렇게 세게 민 것도 아닌데 네메녹스가 휘청거렸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충성스러운 이데가 공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네메녹스는 무언가 대답했다.
“......더 이상은 기대할 것이 없구나. 이제 나도 더는 막지 않겠다.”
‘이제야 포기한 건가. 제발 날 포기해 달라고 시위한 수준이었는데, 참.’
서준은 찝찝한 마음도 있었지만, 공작가의 구속은 정말 너무 심했다. 네메녹스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하루 20시간 동안은 10초의 자유시간은 없이 일정의 연속이었다.
‘다 살려고 이러는 거라고......’
그 일정을 다 해냈다간 과로사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준은 궁전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성 안은 조용했다. 아그네스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엘로이 녀석은 마침 공무로 외국에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서준이 양심에 찔려 하면서도 오늘만큼은 꼭 가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네메녹스는 이해해주지 않겠지만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차, 마침 그에게도 익숙한 장미 정원에서 아그네스가 걷고 있었다. 웬일인지 시녀도 없이 혼자였다. 아그네스의 옆모습은 쓸쓸하고 고민이 깊어 보였다.
서준은 몰래 다가가, 산책하고 있는 아그네스를 꼭 끌어안았다.
“아네스!”
“핫......! 서준 경?”
“아네스, 보고싶었어.”
더없이 진솔한 서준의 말에, 아그네스는 잠시 침묵했다.
“저도요. 서준 님.”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어쩐지 냉기가 도는 듯한 것은, 그만의 착각일까?
“하지만 다시는 이렇게 찾아오지 말아주세요.”
“아네스.”
서준도 사랑에 빠진 남자 행세는 그만둔다.
“언제부터야?”
“무슨 말씀이신지?”
“언제부터 내가 아니라 엘로이를 마음에 뒀어? 넌 내게 결혼을 약속하던 순간부터..... 이미 내게 마음이 떠나 있었잖아.”
아그네스의 아름답고 순한 눈망울에는 오히려 이렇게 묻는 서준을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신비한 마력이 있다. 아그네스는 침묵했다.
“이 결혼이 강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네가 동의했던 일이지? 너도...... 엘로이를 사랑하잖아.”
“그렇게 보이시나요?”
서준은 이미 봤다. 저번 삶에서, 자발적으로 그의 결혼식에 불참한 아그네스와 엘로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봤으니 마음 아픈 것과는 별개로 확신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사이 좋은 연인이었다.
“내가 지금 함께 떠나자고 한다고 해도...... 떠날 마음 없지?”
떠나자고만 하면 서준은 아그네스의 손을 잡고 세상 끝까지라도 갈 텐데.
그녀를 위해 마왕을 죽이려 했던 3년 전 그 날처럼.
“제 남편이자 왕이 된 엘로이는 어떻게 하고요?”
“그런 머저리따위, 싸우면 내가 이겨.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알지? 당신만 동의하면, 일단 이 나라를 떠나면 돼. 다른 나라에서도 내 이름은 영웅이라고 유명해. 분명 이 곳이 아니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아그네스가 질문했다.
“당신의 아내인 공녀님은요?”
“신경 쓰지 마.”
그 때 침착하던 아그네스의 분위기가 바뀐다. 그녀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여전히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네요. 아무것도 책임질 수도 없고요.”
“뭐......?”
서준이 당황한 사이, 아그네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두어발자국 물러났다.
“경비병!”
“아네스! 잠깐만!”
“다가오지 마세요!”
“왕비님! 괜찮으십니까!”
순식간에 도망친 아그네스. 서준은 수많은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였다. 하지만 서준은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네스? 내가 뭘 모르는데?”
‘젠장, 죽어도 정보는 알아내고 죽어야 할 것 아니야.’
그러려면, 사랑에 미친 남자 행세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
서준도 아그네스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은 알고 있다.
단서를 찾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나 이미 경비병이 몰려 오자 아그네스는 입을 다물고, 창백해진 얼굴로 기둥에 기대어 설 뿐이었다.
서준은 지하 감옥에 끌려들어갔다.
서준이 마음만 먹으면 탈출할 수 있지만, 서준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아네스와 대화를 더 해보고 싶어. 지금 상태로는 엘로이를 죽여도 아네스의 마음은 그대로겠지. 게다가 내가 모르는 게 있어.’
근데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답답하기만 했다.
생각을 반복하는데, 감옥문 앞으로 인기척이 다가온다.
“꼴 좋구나, 사냥개.”
“흠?”
눈 앞에는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옷을 보니 경비병도 아니다. 수상한 회색 로브를 뒤집어 쓴 녀석.
“마왕을 사냥하고 나면 넌 버려질 거라고, 진작 짐작하셨다. 설마하니 그 폐기 처분 직전의 사냥개를 우리가 맡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 공작가 녀석인가.’
정말이지, 라비나 공작가 녀석들은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쫓아다녔다. 하다 하다, 지하 감옥까지 따라오다니. 이 정도면 사랑이다.
“게다가 억지로 데려온 사냥개가 쓸모라곤 조금도 없고, 자리 가리지 못하고 분변이나 싸고 다니는 더러운 똥개였을 줄이야.”
“......”
서준은 공작가의 개가 뭐라고 하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의 아내인 공녀님은요?’
‘신경쓰지 마.’
그 말을 하자마자, 아네스의 태도가 바뀌었다.
즉, 서준은 다른 대답을 했어야 했다.
신경을 쓰고 있었어야 한다는 말인가.
공작가가 국왕인 엘로이보다 더 무서운 건가?
심지어, 아그네스는 엘로이를 죽이겠다는 말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도 안된다는 냉소조차 없었다. 서준이 정말로 그럴 수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서준이 딴 생각을 하는 동안 눈앞의 기사는 긴 비난과 장광설을 모두 끝냈는지, 후련한 태도로 서준에게 약병을 던져주었다.
“먹고 자결해라.”
“독약이냐?”
“이건 널 위한 자비야. 넌 고통스럽게 살해당할 거니까.”
“뭐? 누구 마음대로?”
“모르겠냐? 넌 갇힌지 5일이 지났고, 그런데 아무도 밥을 주지 않았어. 멀쩡한 척 앉아 있지만 쓰러지지 직전인 거 안다. 국왕 전하는 널 아사해 죽일 생각이야. 며칠 뒤 상태를 확인하러 사람을 보내고, 아직도 살아 있으면 그때야말로 처형하겠지.”
‘벌써 5일이나 지났다고?’
어쩐지 갈수록 생각이 둔해진다 했다. 하지만 서준은 그 정도로는 죽지 않았다.
‘얜 내가 소드마스터인 것도 모르나?’
서준의 육체는 이미 인간을 초월했다. 서준은 일주일 굶은 것 가지고는 죽지 않는다. 볼모의 땅, 오염의 땅, 마의 땅까지 헤쳐 나온 서준이다. 그곳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땅이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았으면 진작 죽었다.
“야, 궁금한 게 있는데.”
“뭐?”
뒤돌아 나가려던 기사를 서준이 붙잡았다.
“사이 좋았던 여자친구한테 갑자기 차인 이유가 뭘까? 난 분명 최선을 다했는데.”
기사의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이 날아왔다.
“결혼까지 약속했는데, 그게 다 정말 거짓이었을까.”
“왕비님을 말하는 거라면.”
“거라면?”
“그분은 사랑이 아니라 대의를 선택하시는 분이다.”
의외로 순순히 기사가 답을 해준다. 서준은 창살에 바짝 붙었다.
“그럼 나를 사랑하지만 대의를 위해 엘로이와 결혼했다, 이건가?”
“그렇지 않겠는가? 네가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면.”
“그렇지만 처음부터 거짓이었을 수도 있잖아? 나와는 손 잡는 것도 부끄러워하던 사람이, 그놈과는 껴안고 뽀뽀하고. 나와의 만남도 거절했다고.”
서준은 투덜거렸다.
“네놈이 생각하기엔 어떤 것이 그분의 진짜 모습인가? 손 잡는 것 하나도 신중한, 표현은 적지만 마음 속에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쪽. 그리고 처음부터 거짓으로 점철되어 남자를 속이며, 정숙한 척 하지만 사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기의 탕녀.”
서준은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것은 네가 알고 있을 터다.”
생각보다 진지하게 답해준 기사는 마저 걸음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
“난 어차피 죽잖아? 고마워서 그런데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빈 로첸.”
“라비나 공작이 거느리는 장미 기사단의 로첸? 그게 너야?”
로첸 경은 대답 않고 뚜벅 뚜벅 걸어나갔다.
서준은 결심을 굳혔다.
‘엘로이가 아네스를 협박한 내용을 알아내고, 그 즉시 회귀해서 막는다.’
심플한 결론.
그는 어렵지 않게 건물 벽을 부수고 탈옥했다. 과연 너무 오래 굶어서 그런가, 좀 핑핑 돌긴 했지만,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드니 금세 검기가 돌았다.
소드마스터는 몸 전체가 무기.
서준은 그대로 알현실로 달려가 엘로이를 살해했다.
“전하! 꺄아악....!”
아그네스의 비명이 서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두었지만, 이건 어차피 없는 일이 된다.
“아네스, 말해줘.”
서준은 피로 물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그네스를 내려다 보았다.
“네가 나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네가 무슨 협박을 받았는지-.”
“멍청하긴!”
아그네스가 오열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 놓고, 나보고 대체......!”
“울지 마, 아네스.”
서준이 아그네스를 안아들었다. 그는 경비병의 손이 닿지 않는 탑의 꼭대기로 올라왔다.
“말할 때 까지,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아그네스는 망연자실해 있을 뿐이었다.
‘이미 늦었어, 다 끝났어.’ 라고 중얼거리며.
“대체 무슨-.”
“내가 한 거에요! 됐어요?”
“아네스.”
“내가 당신을 속이고, 엘로이를 유혹했어요. 왕비가 되고 싶어서요! 당신같이 멍청하고 비천한 남자랑은! 같이 살고 싶지 않아서! 끔찍해서! 흐윽, 흐어엉.”
울어 버리는 아그네스를 보며, 서준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거짓말 하지 마. 내가 당신을 모를 것 같아?”
“진짜에요!”
“엘로이가 당신을 협박한 거지?”
아그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흐윽, 그냥, 저는.”
“응.”
“당신이랑은 행복해 질 수 없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어째서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하고 알려주진 않는거야.”
서준에게는 배울 기회가 무한하다. 그는 회귀자니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주기만 한다면......!
“당신은 이미 망쳐버렸어요.”
“제발 알려줘, 이렇게 부탁할게.”
그제서야 아그네스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회한, 사랑, 슬픔, 공포가 엿보였다.
“당신을 얻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그날 밤.”
“응?”
“내 곁에 있어주지 그랬어요.”
그 말만 남기고, 아그네스는 서준을 포옹했다. 서준이 아그네스를 꼭 끌어안는데, 아그네스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피를 토했다. 그 사이 서준의 주머니에 비스듬히 꽂혀 있던 물약을 손에 넣어 삼킨 것이다.
굶주린 탓에 좁아진 시야는 거기까진 시선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품 안에 죽은 아그네스를 가만히 무릎 위에 올려둔 서준은 검기를 두른 나뭇가지로 자결했다.
그리고 서준은 다시 눈을 뜬다.
“......사랑합니다.”
그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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