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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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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들이 쓸모없단 걸

깨닫기까지

그리 길어질 필요는 없었어

날 위해 한다는 말도 결국에는

- 버둥, <이유> 중


집에 들어오면 희뿌연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곽현철이 잠시 발도장을 찍듯 들렀던 사십 구 일의 시간동안 대부분 비어있었던 집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위로는 정직하게 시간의 냄새가 쌓여 있었다. 한 순간인 듯 지나갔던 그 시간들이 그토록 길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도 같았다. 잠시 비어있는 그 풍경을 현관에 서서 바라보다가 곽현철은 얕게 쌓인 먼지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갔다.

닫혀있던 커텐을 젖혀 열고 창문을 열자 나른한 오후 빛에 부서지는 먼지들이 하얗게 춤을 추며 흩어졌다. 오래도록 닫혀있었던 창을 통해서 드디어 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것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청소 도구들을 가지러 거실을 가로지르던 때에, 어쩔 수 없이 곽현철은 한 번 거실의 빈 쇼파에 시선을 두었다.

이리프 헌터가 돌아왔다. 이곳에 하임우가 돌아올 것이다. 이전과 같이.

마냥 기쁘기만 할 사실을 떠올리고 있는데도 가슴이 욱씬 어딘가 깊게 찔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곽현철은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는 끌리는 듯한 걸음으로 거실을 지나쳤다.

우리는 서로의 공간 대신 함께 있는 것을 택했다. 누가 먼저 그러자고 제안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 추위 속에서 온기에 이끌렸던 것처럼.

그렇기에 각자의 물건이 놓여있는 방은 특별히 손 댈 것도 없었다. 주인들이 떠나있으니 방을 채운 물건들조차 움직일 겨를이 없어 그 사이 쌓인 먼지나 조금 털어 내고 바닥을 쓸어내면 그것이 전부였다. 유일하게 물건들이 나와 어질러져 있는 곳은 곽현철의 옷방 뿐이었다. 길드 관련으로, 구조 일이 아닌 공식 석상에 참여해야 할 일이 있어 옷을 고르기 위해 들렀을 때였다. 뭘 입어야 하지. 멍하게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이것저것 꺼내고 있을 때 부길드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대신 갈테니 눈이나 붙이라는 연락이었다. 그렇기에 옷은 입지도 않은 채 그렇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 만났을 때 부길드장은 툭 그런 말을 던졌다. 언제나 태연과 평정을 두른 길드장에게 감히 그런 말을 던져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오래 함께 있었던 탓인지, 대부분의 감정을 덮어 누르는 일에 이골이 난 곽현철도 그의 눈은 피해가기 힘들었다. 티 나냐. 그렇기에 솔직하게 답하면 그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대부분은 밖에서 보기에 크게 문제는 없다는 평이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이리프가 눈을 뜨지 않고 있는 것이 세상에 조난자가 없다는 말과 동치는 아니었다. 사 십 구일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대장이자 구조대원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부길드장의 평가는 북극성이 여전히 밖에서 북극성으로서 빛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티 나냐.

몇 년 전인가 그가 두서 없이 ‘오래 됐지?’ 하고 물었을 때에도 곽현철은 그렇게 한 마디만을 돌려 주었다. 둘 사이에서 오간 말은 단 일곱 글자였지만 의미가 오가기에는 충분했다. 그 때도 곽현철의 시선 끝에는 이리프가 있었다.

긴 짝사랑에 대해서 곽현철의 대답은 티 나냐, 그 세 글자였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말끔하게 그 티가 나지 않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갖추는 데에는.

마음을 잘라내는 것은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밖에 드러난 것들은 오며가며 한 번씩 손길이 닿았지만 냉장고만은 아무래도 그러기 힘들었다. 식사를 거르지는 않았다. 이리프의 옆에서 떠나지 않는 이샤를 달래 밥을 챙겨 먹여야 하는 것은 곽현철의 역할이었다. 그마저도 오가는 데에 시간을 쓸 수 없으니 거진 병실에서 간단히 먹는 형태가 되었고, 그 사이 방치된 반찬들이 냉장고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 십 구 일의 길을 떠나기 전 이리프가 만들어 둔 것들이었다.

냉장고 안을 한참동안 보다가 곽현철은 병원에서 옮겨온 짐을 뒤져 즉석 밥을 꺼냈다. 무른 오이, 묵은 김치, 쿰쿰한 냄새가 나는 고기 반찬 같은 것들이 하얀 밥 옆에 나란히 놓였다. 혼자 먹어 치우기에는 쉽지 않을 양이었으나 곽현철은 묵묵히 숟가락을 들었다.

삼키고 없애서 치워버리는 일련의 일들은 그에게 있어 퍽 익숙한 것이었다.

욕실 청소를 마치고 거울을 보면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굳어진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앞에서 곽현철은 크게 쩍 입을 벌려 보았다. 씹어 삼킨 것들 중 생선은 없었는데도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꼼꼼히 보아도 걸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차라리 걸려 있었다면 뽑아내고 시원해지고 싶었으나 쿡쿡 아프도록 목에 박혀오는 것은 그 분명한 존재감에 비해 드러나보이지 않았다. 찾지 못한 것이라도 있나 싶어 억지로 손가락을 우겨 넣어 보면 구역질만 올라와 서글픈 기분과 함께 그만 두었다.

그래, 뽑아내서 무엇 하겠는가. 그 끝에서 딸려나올 끔찍한 것들을 생각하면 그냥 피딱지와 함께 굳어져 살 아래에 묻히게 두는 게 나았다. 그 아래 걸린 불안과 흉터의 응어리는 분명 추하고 흉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는 끝내 아무 소리도 토해내지 못한 목구멍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집어 삼키는 것 외에는 도통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형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건 안될 말이지.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형이 이러는 거 나 힘들어. 차라리 그렇게 말했어야 했을까. 그랬다가는 힘들면 그만 해도 괜찮다고 다정한 웃음과 함께 돌아오는 말을 들었겠지. 나는 형을…. 그래서 뭐. 형이 알면 뭐가 달라져?

형이 착해서 나랑 만나 주는 거야. 그러니까 그 많은 말들을 집어삼키고 난 다음에는 그런 농담같은 말로 얼버부리고는 했던 것이다. 사실은… 그것조차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리프가 자신의 곁에 남아주기로 한 것은, 그 고마운 선택은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곽현철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으나 그는 그것을 깨달았을 때도 또한 목 너머로 말을 삼키는 것을 택했다.

잡으면 안되니까, 욕심 내어 말했다가는 그의 옆 자리를 잃을 뿐이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것들은 조금도 필요치 않으니까, 그에게는 지금까지도 놓아주지 못한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어디에도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그토록 많았다.

마음을 저며내는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으므로. 그렇기에 곽현철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를 수 백, 수 천 개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곁에서 얇디 얇은 박애의 한 조각이라도 얻어 마실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사랑하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자신도 존재한다면, 곽현철은 그것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이 마음을 안다면 분명 그마저도 끊어지고 사라지리라. 그렇기에 사랑을 말하는 것은 그의 오래된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형에게 있어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 일이야.

그것은 곽현철이 가장 마지막으로 삼킨 이유였다.

쌓여있던 침구를 한 번에 집어 삼킨 세탁기가 멀리에서 울리는 소리를 냈다. 이불장 안에 있던 다른 침구를 꺼냈지만 먼지 냄새는 여전했다. 세탁이 끝나면 볕 아래에 널었다가 새로 깔아야지. 햇빛 냄새를 가득 담은 잘 마른 이불로 이리프를 데려 오리라고. 지금은 먼지 냄새를 머금은 침구에 코를 박고 엎드려 곽현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졸음이 밀려오는 가운데에서 더부룩하게 가득차 울렁거리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명치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속이 이상한 것은 필히 한 번 짚는 것조차 과분한 그의 사랑을 지나치게 생각한 탓이다.

그럼에도 완전히 잠이 그를 집어 삼키기 전까지, 곽현철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수 천 번의 이유를 뒤로 하고 이제는 새로운 이유를 찾아내야 할 때였다. 오랜만에 눈을 뜬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넬 수 있는 이유를 단 한 가지라도.

하나만이라도 찾아낸다면, 그동안의 수많은 이유들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침대에는 희뿌연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였다. 오래도록 쌓인 것을 들이마시듯 깊게 숨을 들이쉬고 곽현철은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마지막 줄은 황인찬의 <무화과 숲>을 인용.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황인찬, <무화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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