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파워디지몬 더 비기닝에 관한 간단한 감상

불호 의견입니다. 비난은 안 합니다.

통모짜 by 모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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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극장판,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와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의 감상입니다.

* 영화에 트리거요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에서도 이런 부분에 관하여 다룹니다.

* 신 캐릭터, 오오와다 루이에 대한 사감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오오와다 루이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불편한 글이 될 수 있으니 열람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캐릭터 혐오 발언은 아니나, 캐릭터성에 관하여 주관적으로 고찰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제작진에 대한 불호 의견이 많습니다. 열람시 주의 부탁드립니다.

* 세계관 충돌이나 설정 붕괴 요소를 최대한 제외하고, 작품 내 짜임새에 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 아래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디지몬 서바이브 게임 스포일러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4년 9월 1일. 거의 1년 만(9-10개월 정도인 듯합니다)에 라프텔에 <파워디지몬 더 비기닝> 극장판이 올라왔습니다.

극장에서 상영할 때 관람하지 못했던 터라, 라프텔에서 결제하여 감상했습니다. (대여: 5000원, 소장: 9900원)

아래부터는 가벼운 감상입니다. 주관적인 감상이며, 주의사항을 읽어주신 후에 열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스토리 라인에 관하여

“욕망은 징벌의 대상일까요?”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난 이후,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함부로 욕망하는 것은 단죄받아 마땅한 것이며, 그렇기에 욕망하는 것 자체는 두려운 일이 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 맴도는 이유는 바로, 이 극장판의 주인공인 ‘오오와다 루이’의 존재 때문입니다.

오오와다 루이. 제로투 세대로 분류되며,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의 나이가 아닙니다.

바로 그가 최초로 선택받은 아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는 팬덤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단 영화 내에서 제시된 정보로만 판단합니다.) 이야기는 그가 도쿄 타워를 맨몸으로 오르면서 진정으로 시작됩니다.

도쿄 타워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디지몬 알. 루이는 그 디지몬 알이 자신의 파트너 디지몬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로투 아이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말해주지요. 물론, 그가 처음부터 자기 사연을 늘어놓은 것은 아닙니다. 제로투 아이들은, 디지몬과 관련된 소년을 붙잡았고, 나아가 그의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원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디지몬과 관련된일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듯 묘사되었습니다. 이는 이전 극장판, 라스트 에볼루션 (통칭 라스에보)과 연결되는 듯 보입니다. 디지몬과 이별한 선배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마치 자경단처럼 디지몬과 관련된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루이는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더 비기닝은 루이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루이로 시작해 루이로 끝납니다. 제로투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조자이자 방조자로 묘사됩니다. 방조자라는 표현은 심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영화 자체가 지독하게 루이의 서사를 ‘전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이스케와 켄은 루이의 과거를 엿봅니다. 다이스케는 루이의 불행한 상황을 타개해 주고 싶어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뿐, 미래의 그들이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루이는 제 과거를 타인에게 무방비로 노출당하게 됩니다. 이 부분이 참으로, 뭐랄까… 참담했습니다. 루이라는 캐릭터를 불행서사, 혹은 불행 전시라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사가 너무나도 그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노출’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더라고요. 루이는 담담하게 그 상황을 넘겼다고는 하나, 영화를 보는 이들까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루이를 주인공으로 서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감상자들도 절로 그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대상이 루이가 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분명히, 등장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굳이 다이스케와 켄에게 그 상황을 목격하게 했어야 하나? 싶은 의문이 남습니다. 그가 가정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웃코몬이 구원자처럼 등장하기에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지만… 이후에 루이가 자기 입으로 사연을 이야기한다는 점을 보면, 이 장면의 필요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루이가 외로운 아이라면, 그래서 웃코몬을 만났다면…… 이미 루이는 그 장면을 반복하며 후회하고 있을 텐데 굳이 또 이렇게 전시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습니다. 영화 자체가 그 해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장면을 타인에게 노출시킨 것은, 루이가 ‘욕망’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소원을 비는 장면이었고, 그 소망이 모든 불행을 몰고 왔기에 다른 이들이 직접 봐야 했던 것이지요.

그의 소망은 곧 불행의 씨앗입니다. 원숭이 손에 간절한 소망을 빌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루이는 그렇게 했고, 그는 징벌을 받습니다. (*징벌이라는 단어가 좀 강한 것 같지만,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루이의 소원은 단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선택받은 아이들이 생기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기에, 다이스케와 켄이 목격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일관적입니다. 루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웃코몬이 말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처럼…… 루이를 주인공으로 모든 서사를 끌어모아준 것 같지만, 결국 그는 철저하게 대상으로만 묘사됩니다.

스토리 라인은 간단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루이가 자기 사연을 말하고, 디지몬 알이 부화하며, 웃코몬과 대화하기 위하여 루이가 홀로 나섭니다. 그리고 둘은 생각보다, 아주 쉽게 화해합니다. 그리고 웃코몬은 제로투 애들에 의해 죽고 사라집니다.

어디서 많이 본 플롯이지요? 황금 디지멘탈, 워레스와 초코몬, 구미몬이 나온 그 극장판과 플롯이 비슷합니다. 마지막에 웃코몬이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까지 똑같습니다. 그러나 황금디지에서는 워레스의 불행이나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초점을 맞추었지요. 디지몬과 함께한 시간은 없어도, 누구에게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더 비기닝이 초점을 맞춘 것은, 루이의 소원 자체입니다. 결국 소원을 빈 당사자가 모든 걸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주인공의 역할을 맡았으니, 그가 서사를 끌어나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건 서사를 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책임을 지는 것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방식은 철저히 보여지는 쪽에 집중되어 있고요. 루이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루이에게 이 대사를 뱉게 하기 위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욕망하는 것은, 소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요.

그저 바랐을 뿐인데도, 순수는 변질되고 삶은 한순간에 뒤바뀐다고요.

그렇지만, 디지몬이라는 것은 본래 ‘마음의 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장르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루이가 가진 마음의 힘은, 그가 소망하는 것은 과연 위험한 것 그대로 남아버리는 걸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2. 디지몬 어드벤처의 ‘후속작’

디지몬 어드벤처의 후속작, 그것도 디지몬 어드벤처 02 (파워디지몬)의 후속작으로 나온 극장판인 만큼, 제로투 팬들의 기대가 대단했습니다. 저도 나름 기대를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전 작품 라스에보의 엄청난 결말을 수습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였죠….

그리고 더 비기닝은 수습을 장렬하게 포기합니다. 파트너십 해지에 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루이와 웃코몬 얘기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라스에보를 관통하는 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디지몬 트라이와 라스에보를 관통하는 태도입니다. 이 극장판 시리즈는 ‘헤어짐의 각오’와 ‘양자택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트라이 얘기를 잠깐 해볼까요? 디지털 월드 리부트 때문에 기억을 잃는 디지몬들을 앞에 두고 선택받은 아이들은 헤어짐의 각오를 합니다. 신 등장 캐릭터 메이코와 메이쿠몬 역시 마지막에 헤어짐의 각오를 하고 이별합니다. 라스에보 역시, 타이치와 야마토는 헤어질 각오를 하고 메노아와의 마지막 싸움에 임하며, 헤어질 각오를 하지 못한 메노아는 패배합니다.

그리고 더 비기닝 역시, 헤어질 각오를 얘기합니다. 루이의 소원과 웃코몬의 ‘선물’을 통해서요. 전세계 사람들이 갑자기 선택받은 아이가 되면 혼란이 가중될 테니, 웃코몬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웃코몬을 막으면 그들 또한 선택받은 아이가 ‘아니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세계이기에, 아이들은 우리의 유대는 그런 걸로 없어지지 않아! 라고 말하며 각오합니다.

극장판 시리즈는 어째서 이렇게 양자택일과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리고 각오를 좋아하는 것일까요…?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뚝 잘라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고, 하나를 선택한다 해서 다른 걸 영영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물론 선택의 기로는 매번 삶에서 우리를 찾아오겠지만, 선택의 기로는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지며, 결국 선택의 연속이 우리의 삶이 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더 비기닝과 앞선 극장판은, 선택으로 모든 것을 끝나게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선택권은 등장인물들에게 넘겨주지만, 사실 결과는 정해져 있지요. 감상하는 사람들은, 시리즈의 팬들은 거기서 허무함을 느낍니다.

세상과 디지몬을 택하라면, 당연히 전자를 택하겠죠. 그리고 극장판은 이를 위하여, 디지몬을 ‘친구’의 위치로 고정시킵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후술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각오’ 장면을 위하여, 루이의 소원에 더 책임을 지웁니다. 결국 그의 소원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기에, 디지몬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대상으로 격하됩니다. 운명적 만남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건 언제든 끝날 수 있는 한시적인 관계로 변모합니다. 단지 디지몬과의 관계를 천칭 위에 올리기 위하여, 루이는 소원을 빌어야 했던 겁니다…….

선택받은 아이들은, 그들의 관계가 루이의 소원에 의한 결과라는 걸 알게 되고 경악하지만 이내 금방 추스릅니다. 그들의 유대는 진짜라고요. 당연히 그렇겠지요, 하지만 유대가 진짜라고 한들 그 기반이 저울에 올려질 수 있는 개념이란 걸 알게 되는 건 큰 충격입니다.

마지막, 디지바이스가 사라지는 장면은 그런 태도를 강화합니다. 디지바이스가 사라진 이후,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나레이션은 더욱 그렇지요.

시간과 함께 변하는 것이 있다

때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소중한 인연의 끈을 떠나보냄으로써 정해진 미래로 가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하던 날은 끝났다

이리하여 무겁고 견고했던 족쇄는 없어지고

이 세상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첫발을 내딛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제로투의 결말이 저주와 같다고 발언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나레이션입니다.

꼭 헤어질 각오가 필요할까요? 꼭 하나만 선택해야만, 세상을 우선해야만 하는 걸까요? 소망하면 안 되는 걸까요? 소중한 존재를 천칭 위에 올려야만 하는 걸까요?

디지바이스가 사라지는 장면은, 전작 라스에보에서 파트너 디지몬이 사라지는 장면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더 비기닝을 통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설명하지요. ‘정해진 미래로 가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하던 날’. 작품 외적인 암시는 다 밀어두고, 오직 이 문장만 해석해 보겠습니다. 정해진 미래, 디지몬과 디지바이스와 함께하는 것이겠지요?

더 비기닝은 계속해서 선택을 강요합니다. 그것도 단발적으로 끝날 선택을요.

하지만 선택하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소망하기를 바란다면…….

3. 디지몬은 친구일까? 혹은 또 다른 나 자신일까?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게 꼴사나웠어.” (대충 비스무리합니다.)

루이는 웃코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건 의외로, 제가 느끼던 감상을 꿰뚫은 대사이기도 합니다.

웃코몬은 시종일관 루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말합니다. 파트너 디지몬이 인간에게 품는 당연한 애정과 호의 같지만… 조금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 웃코몬의 태도는 지나치게 시혜적입니다.

더 비기닝은 디지몬을 친구라고 말합니다. 친구, 친구…. 무조건적인 나의 친구가 있겠느냐고 묻는 질문은 현대인에게 사뭇 다른 의미로 와닿겠지요. 공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친구를 갖고 싶어서, 디지몬과 함께하기를 바라느냐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하지만, 살짝궁 무시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디지몬은 정말 친구에 불과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디지몬은 비인간이자, 내가 아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카쿠도 감독의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를 보면, 디지몬은 친구를 떠나 또 다른 나로 표현됩니다. 친구가 아무리 가까워도 내가 아닌 존재인 걸 감안한다면, 또 다른 나는 무게가 다른 존재로 다가오지요.

떨어트릴 수도 없고, 호의를 받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또 다른 나 자신이니까요. 다른 말로 하면, 소울메이트 정도가 되겠네요. 그렇지만 디지몬을 또 다른 자신이라고 가정하면…… 이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라스에보도 그렇고, 더 비기닝도 그렇고 디지몬을 내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친구’라는 단어가 반복되기도 하는 데다가……, 루이가 빈 소원의 내용도 친구와 관련된 것이었던 것도 고려하면요. 그리하여 디지몬은 헤어질 대상이 되었습니다. 더 비기닝에서는 소통을 강조하는데, 이 또한 디지몬을 친구로 납작 캐해하면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어린 시절의 친구도 아니고, 나를 구원해주는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라면… 어떻게 소통 문제를 다룰까요?

예전에 <디지몬 서바이브> 감상을 쓸 때, 디지몬 시리즈는 인간과 디지몬, 혹은 디지몬과 디지몬의 만남을 다루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는 꼭 소통이 동반됩니다. 소통은 아주 중요하지요. 루이와 웃코몬도 대화만 했다면 괜찮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대화와 소통에 모든 것을 밀어두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루이의 가정환경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하여 이 이야기는 애초에 소통의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던 이들의 문제를, 소통을 통하여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조금 게으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디지몬이 꼭 필요했나? 싶은 마음도 듭니다. 웃코몬이 인외라는 점이 부각되어서, 비인간과 인간의 만남으로서 나름의 포인트가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글쎄요. 그렇기엔 갈등의 전개 과정과 봉합 과정이 너무 얄팍합니다.

3-1. 피해자-가해자 관계

할 말 많지만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피해자에게 대화를 먼저 시작하라는 태도는 굉장히 모욕적이더라고요…. 감상 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4. 캐해석 문제

캐해석. 할 말 많지만…… 최대한 덜어내고 말해보겠습니다.

다이스케는 어째서 라멘 광인이 되었을까요? 말 끝마다 라멘 라멘, 제가 아는 다이스케는 좋아하는 것에 진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는 애는 아니었을 텐데요… 막무가내인 모습도 낯섭니다. 분명히 제로투 후반부의 다이스케는 적당히 상황 파악을 하며 친구들을 북돋았던 아이였는데 말이지요.

타케루는… 트라이와 라스에보의 그 소년 그대로입니다. 디지몬과 헤어지는 게 두려운 소년 말이지요. 파닥몬과 헤어지는 게 무섭다는 것은, 어드벤처에서 데블몬과의 결전으로 파닥몬을 잃었기에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타케루가 그 일을 신경 쓰는 것은, 어둠의 힘 때문이지 기실 파닥몬과의 이별 자체 때문만은 아닙니다. 타케루는 이별 뒤에 만남이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한 사람이기에, 조금 낯설었네요…….

히카리……. 제 최애입니다. 웃코몬이 루이에게 한 짓을 듣고 “웃코몬이 불쌍해.”라고 말했습니다. 아… 미치겠다, 아뇨 네… 그렇습니다. 제가 히카리를 좋아하는 건, 그 애가 디지몬을 사랑하는 소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디지몬만을 사랑하는 애가 아닙니다. 어드벤처, 제루투를 겪은 히카리는 아마도 저 장면에서 “그 후로 웃코몬을 만나지 못했어?”라며 상황 파악에 신경 썼을 것 같습니다. 감성적이면서도, 의외로 이성적인 아이니까요…….

이오리…. 아니 정말 착잡해서… 네……. 이오리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제로투에서 이오리는 꽤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이오리는 제로투의 후반부 등장인물이자, 히든 캐릭터 오이카와 유키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이카와 유키오는 제로투 최종 보스 베리얼반데몬의 숙주로서 악행을 저지르고는, 마지막에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디지털 월드를 향해 속죄하는 인물이지요. 그는 계속 디지몬을 갈망해 왔습니다. 단순히 친구로서의 디지몬이 아니라, 그의 세계를 이해해줄, 네… 자기 반쪽을 찾아 헤맸습니다. 더 비기닝에서, 웃코몬에 의하여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선택받은 아이가 되면 혼란이 빚어질 거라며, 이오리는 당장 웃코몬을 막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 안 된다고요.

그런데… 유키오를 아는 이오리라면… 분명히 여기서 멈칫했을 것 같습니다. 제로투 마지막에서, 유키오를 부축하며 디지털 월드로 가자고 했던 그 애라면, 디지털 월드에서의 모험으로 변호사가 되기로 한 그 애라면… 분명히 디지몬을 만나지 못할 사람들, 어쩌면 디지몬을 기다렸을 사람들을 생각했겠지요……. 이오리는 이성적이고 똘똘한 아이지만, 결코 냉정한 애는 아닙니다. 오히려 뜨거운 마음을 이성으로 다스리는 아이지요. 유키오를 생각하는 이오리라면, 절대 그렇게 반응하지 못했을 겁니다….

미야코… 저는 미야코를 참 좋아하는데요. 왜 이렇게 다이스케에게 츳코미만 거는 캐릭터가 되었는가 의문입니다……. 게다가 은근 상황 뒷편에 빠져있고요… 미야코가 밝고 명랑하지만 마냥 태클 거는 애는 아닐 텐데요… 미야코는 켄과 붙어 있는 장면으로만 나와서 사실 캐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켄… 개인적으로, 루이에게 웃코몬과 마주보라고 말하면서 추추몬이 켄과 자기 예시를 드는 게 좀.. 그랬습니다. 경우가 아예 다르니까요. 앞서 말했듯이, 웃코몬은 어찌 보면 루이에게 시혜적인 태도로 다가왔습니다. 동등한 동료로서 모험을 시작했다가 오랜 길을 돌아온 켄과 추추몬과는 사정이 다르지요. 물론, 이 부분은 그렇다고 칠 수는 있습니다….

5. 잔인성의 문제

마지막으로 이 얘기를 하며 끝내겠습니다. 왜 이렇게 길어졌는지 의문이네요.

더 비기닝 리뷰를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너무 잔인해요. 잔인하다는 말로 함축된, 트리거요소와 연출 얘기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디지몬 서바이브> 게임도 그렇고, 요새 디지몬은 왜 이렇게 잔인한 기조로 가지?

그러게요, 저도 의문입니다만…… 살짝 둘을 비교해 볼까 합니다.

<디지몬 서바이브>에 나오는 잔인한 부분은 아마도 이 부분일 겁니다. ‘파트너 디지몬 학대와 그로 인한 파트너 디지몬의 파트너 인간 살해 장면.’ 이 장면 때문에 서바이브에는 혹평이 쏟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굳이 이런 장면을? 하는 물음이죠, 물론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서바이브는 게임이기에, 돌이킬 기회가 있습니다. 캐릭터의 불행과 디지몬의 고통은 반복되는 루트 속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며, 비극으로 남거나, 갈래길로 변모합니다. 과정이면 다 괜찮은 건가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비극을 어떻게든 딛고 일어나는 캐릭터의 결말이 존재하긴 합니다. 이후, 그 비극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루트가 따로 있기도 하고요.

더 비기닝 역시 잔혹성이 존재하나…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입니다. 과거를 보여줘도, 앞서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전시하고 말하는 데 그칩니다. 관여할 수 없는 과거는, 어떤 결과로도 이어질 수 없기에 더 무력함을 느끼게 합니다. 서바이브의 그 장면은 이후의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쳐도, 루이의 ‘고통스러운’ 과거는 서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웃코몬과의 사연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사실 뭉뚱그려 표현했어도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따지면 서바이브도 그렇긴 합니다만…)

아마도 게임 플레이어와 관람객은,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 지켜보기만 하는 게 더 괴로우니까요.

정말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다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감사합니다…….

두서없이 쓴 글이네요. 거의 1만자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렇다면 감상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 디지바이스를 없애고 디지바이스를 팔다니, 토에이와 반다이는 조속히 합의를 보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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