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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1] 던전의 개연성 : 상태이상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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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들에게 있어서 예정에 없던 전화는 불안과 두려움의 상징 그 자체이다.

모르는 연락처, 혹은 아는 연락처에서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가 약간의 머뭇거림과 함께 가장 듣고 싶지 않았을 소식을 조심스럽게 풀어놓는다. 그것은 헌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악몽이었고, 그렇기에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어떤 헌터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을 때 곽현철은 그 전화가 가져다 줄 어떤 결말을 예상하고는 조금 늦게 전화를 받았다.

북극성이다. 그렇게 답하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주변의 술렁이는 공기까지는 다 걷어내지 못한 듯 부엌 쪽에 있었던 이리프가 다가와 무언의 시선을 건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피해 곽현철은 무거운 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헌터로 살고 있다면, 헌터를 사랑하고 있다면 언제건 그런 날은 온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칼처럼 가슴을 저미는 감각과 함께 전해졌다.

북극성 헌터…. 저, 방금 막 던전 공략을 끝내고 나왔습니다만…. 바쁘시지 않다면 바로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데바쉬 헌터가….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머리부터 묻어버리겠다, 현철.”

분명 진심어린 말이었을텐데도 옆자리에 앉아 싱글벙글 웃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곽현철은 씨알도 들어먹지 않는 게 분명했다. 진짜 못 묻어버릴 줄 아나보지. 세 사람의 집 앞 뜰 풍경을 가늠하며 이샤가 묻을만한 자리를 고민하는 순간에도 곽현철은 찰칵찰칵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어어, 알았어. 집 가면 할게. 그러니까 이쪽 좀 봐봐. 정말 단 하나도 듣지 않고 있음이 분명한 성의 없는 대답에 이샤는 두 주먹을 꽉 쥐었고 그 모습에 옆에서 곽현철의 탄식이 한 번 더 터져나왔다. 어카냐, 너무 귀엽다…. 어카기는. 아무래도 제대로 묻혀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다급히 현장으로 달려간 곽현철과 하임우가 발견한 것은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이샤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던전 공략은 마지막에 던전의 주인을 쓰러뜨리며 이루어지기 때문에 꼭 몸 성히 돌아오는 일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짐작하고 간 두 사람이 만난 이샤는….

어쩐지 일곱 살 남짓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샤의 머리 위로 시스템창이 반짝이며 상태이상을 알리고 있었다. 약 백 시간 정도의 지속시간이 표시된 창을 보고 상황은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집으로 가기는 커녕 냅다 차를 돌려서 골목마다 쇼핑센터가 있는 번화가로 왔다는 뜻이었다. 몇 번을 가다 멈추다를 반복한 차 안에는 지금 옷 짐이 가득했다. 반짝반짝 알록달록한 쇼핑백들에 들어있는 그보다 더 귀여운 옷들을 보며 이샤는 이리프의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아쉬워했다. 불살라버리고 싶어했다는 뜻이었다.

형, 저기. 뻔질나게 사진을 찍고 있더니 지도는 또 언제 켰는지, 곽현철은 창 밖으로 아동복 가게를 하나 더 가리켰다. 부드럽게 차를 세운 이리프가 내릴 준비를 하다가, 멱살을 잡혀 흔들리고 있는 곽현철을 보고는 한 번 웃음을 흘렸다.

“이샤, 한 번만 더 봐주자.”

“너라고 무사할 줄 아나보지. 너도 돌아가면 머리만 내놓고 묻어버리는 수가 있다, 임우.”

“왜 형은 머리만 내놓고…. 아.”

그건… 묻을 수 없다. 이샤의 말에 곽현철도 채 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건 묻으면 안되지…. 그 황당한 회화에 이리프는 그럼 곽현철은 머리부터 묻혀도 괜찮은거냐고 묻고싶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이 백 시간을 더 알차게 써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럼 조금만 이샤랑 놀아 주고 있어. 그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옷가게 안으로 뛰쳐 들어가는 이리프를 이샤는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죽고 싶은가? 알맹이는 마흔 다섯 살 그대로라는 말을 해야만 정신을 차리겠는가? 곽현철은 이리프가 돈을 쓰는 일에 사사건건 기겁을 하더니 왜 이런 때만 죽이 착착 맞아서 이리프가 옷들을 쓸어오는 동안 이샤를 탱킹한다는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러나 어쨌든 일곱 살의 몸은 마흔 다섯의 몸보다 약하다. 이 상태이상만 풀리면….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이르다고 하지만 이샤는 군자가 아니니 그 복수는 백 시간 뒤에 훌륭하게 이루어질 것이라 다짐하며 이샤는 한 번 더 손에 잡힌 곽현철의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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