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오늘 조선 호텔에 있을 뮤지컬의 배우 김혜순을 죽여주십시오. 사례는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편지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마쓰시타, 척 보니 일본인 같은데, 일본인이 조선인 배우에게 한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있나하고 괜히 이상한 일에 엮일 것 같아 거절 편지를 보내려던 찰나, 같이 딸려온 봉투에 들어있는 현금을 보고 마음을 접기로 했다.
조선 호텔에 들어가려면 돈과 의상이 필요할 터인데, 어디서 구할지 고민하던 금윤은 자신에게 온 택배를 보고 안심했다. 마쓰시타라는 이름으로 온 택배에는 은은하게 화려한 감색 드레스가 들어있었다.
* * *
뮤지컬장 안쪽은 3개의 층으로 나뉘어있었다. 마쓰시타가 구매한 좌석은 3층이다. 3층을 향하는 계단을 찾아 두리번 거리며 뮤지컬장 안을 헤매다가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혔다. 깜짝 놀라 나가 떨어진 남자는 구보였다. 어라?
'뭐야, 얘가 왜 여기있어?? 얘가 여기 있으면 이상도 왔다는 소리잖아! 아 이런 악재가.'
금윤은 잠깐의 절망 후, 구보에게 얼굴을 들키지 않도록 페이스 베일을 짓누르며 사과를 건넨 후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겨우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뮤지컬의 절정에 다다를 무렵, 조명이 꺼질것이다. 그 틈을 타면 성공적으로 이번 의뢰를 완료할 수 있게된다. 유일한 변수는 이상과 그 조수, 구보였지만.
* * *
'와... 쟤 죽이기 너무 아까운데?'
공연을 감상하던 금윤은 김혜순의 연기와 노래를 보고 즐기며 그녀를 죽이기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절정이다. 이미 수락하고, 옷과 사례비까지 받은 의뢰를 거절할 수 없던 금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허벅지 부근에 장착해둔 권총을 꺼내 표적을 조준했다.
그때, 이상과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불이 꺼졌다. 금윤은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과 함께 불이 켜졌다. 금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충격받은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입을 틀어막은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있었다.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을 보고 금윤은 생각했다.
'바보같은 것들. 너희같은 걸 죽이는 것에 돈 쓰는 사람은 없단다.'
그리고 뮤지컬장을 빠져나가려 수많은 인파 사이에 끼어들어갔다. 이상이 금윤에게 다가간다. 눈을 마주치려하지 않는 듯 실크해트를 한껏 눌러쓰는 이상을 금윤은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상과 금윤의 어깨가 부딪혔다.
"어이쿠, 미안하오."
이상이 사과하며 실크해트를 올려들어 금윤과 눈을 마주쳤다. 금윤은 당황해하며 자신을 부르는 이상을 뒤로하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환복후 다급히 탐정사무소로 돌아온 금윤은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이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 그것이 생긴날부터.
금윤은 평범히 제 어미와 살던 여인이었다. 어미는 기생이었고, 기생촌에 자리 잡고 살아가던 금윤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은 컸다. 그러다 어느날, 금윤은 첫 살인을 저질렀다. 큰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남학우 한명이 금윤에게 평소와 같이 조롱을 했을 뿐이었고, 평소와 달랐던 것은 금윤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윤은 옆에 놓인 의자로 남학우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고, 남학우는 정신을 잃고 의원으로 실려가 결국엔 사망했다. 어리고, 초범에다가 살인을 할 의도가 없었다는 이유로 딱히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금윤의 이야기는 신문으로 퍼져나갔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금윤에게 살인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한게.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금윤은 그대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니, 어쩌면 정말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알 수 있는건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이 흐려졌고, 눈을 뜨니 다음날이었다는 것 뿐.
금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탐정사무소로 나가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상과 그 조수들이 탐정사무소에 당도하리라 예상한 그녀는 의자에 앉아 어찌 해야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들렸다. 아직은 꽤 이르니 아마 이상과 구보, 가화는 아닐 터, 금윤은 별 생각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어서오십시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문 앞에 서 있는 이상이 눈에 들어왔다. 금윤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이 곳에 찾아 오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거 기쁘군요."
금윤은 의자에 앉아 책상에 놓인 커피잔을 들고 한모금 마시며 최대한 태연하고 당당히 말을 건넸다. 혹시나 이상이 자신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찾아 왔소."
이상이 말했다.
"무엇이 궁금하시기에..."
금윤은 곱게 눈웃음을 지으며 이상에게 답했다. 이제 피할 수는 없다.
"금윤, 자네가 어젯밤 8시경 김혜순을 살해하였소?"
질문을 예상했지만 이리 단도 직입적으로 들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금윤은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곤 좋은 방법이 생각났는지 미소를 지으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40분쯤 그저 사무소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하고 있었는데, 도플갱어를 뵈신 게 아닐지요."
도플갱어라니,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온갖 미신이 판치는 이 시대에 어쩌면 믿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이상은 금윤의 말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사무소를 나갔다.
"아– 인생 망했다."
금윤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상은 녹음기를 가지고 있었다. 금윤은 특유의 촉으로 알아차렸지만, 거기서 뭐라 말한다하더라도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은 없으니 그저 모른척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 중 실수는 없었는지 다시 천천히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잠시후, 금윤은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 씨X... 망했다."
이상이 오후 8시경이라 하였을 때 자신도 모르게 정확한 시간을 대며 답해버린 것이 떠오른 것이었다. 녹음기를 가지고 있던 이상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터, 분명 다음날 다시 찾아오겠지.
“이상… 얕볼 수 없어.”
커피잔을 든 금윤의 손이 덜덜 떨렸다. 금윤의 떨리는 손에는 이상에게 들켰다–라는 공포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혜순을 죽인 죄책감, 아니, 더 나아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자신에게 느끼는 자괴감등이 섞여 금윤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코앞까지 다가와 자신을 부르던 이상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왜 자꾸 생각나고 난리야, 씨…”
* * *
다음날 아침, 금윤은 일찍 탐정사무소로 나가 어제 깨트린 찻잔 세개의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바보같은 긴장감과 두려움, 자책이 만든 결과였다.
금윤은 전화기로 손을 뻗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달칵
한번의 전화음이 지나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금윤은 반갑게 인사했다.
“아, 엄마. 잘 지내요?”
잠시후, 금윤은 얼굴을 다 가린 채 차를 잡아 어딘가로 향했다. 덜커덩 거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금윤의 눈빛은 어딘가 씁쓸해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금윤은 한 기생촌 앞에 차를 세우고는 값을 지불했다.
금윤은 적판관이라 적힌 간판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히 달려있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그 안에서 남자를 접대하는 한 여인이 보인다. 나이는 젊지도, 늙지도 않아보이고, 아직까지 남자를 상대하는 것에 손색이 없을만한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여인은 금윤을 발견하고 금윤에게 다가와 말했다.
“네가 이곳은 어쩐 일이니? 평생 연을 끊을 것이라 호통을 치고 나간 것은 아희 너일텐데.”
금윤은 그런 여인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뭐, 가끔은 짐승새끼도 제 어미를 보고 싶어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 어미가 짐승이라 하여도.“
여인은 금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따라오라는 한 마디를 남긴채 앞장 서서 금윤을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여인은 차를 내오라 시킨 후, 차가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후, 차가 나오자 여인은 한모금 마시더니 다시금 말했다.
“어쭙잖게 말장난 할 생각은 말거라. 솔직히 대답해, 이 곳엔 왜 온거냐.”
금윤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만 들이켰다. 그런 금윤을 여인이 못마땅하게 바라보자 금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쩌면 오늘이, 제가 이 세상에 밝은 하늘을 보은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아까도 말했지만, 짐승새끼도 저가 죽을 때가 되면 어미를 보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인은 한참동안 금윤을 바라보다 말했다.
“네 결정이 그렇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이건 기억하거라. 나는 네 어미고, 충분한 모성애를 가지고 널 사랑한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아희야, 진아희, 난 널 낳고 한번도 후회란 것을 해 본적 없다. 네 얼굴을 처음 봤을 때 기구한 운명일 것이란 것을 알아보았지만, 널 사랑했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었기에 너의 운명을 같이 짊어지기로 결심했다만… 결국 널 지킬 수는 없었던 것 같구나. 이제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도 많이 늙었으니.”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더니 현금이 잔뜩 들어있는 봉투를 금윤에게 내밀었다.
“도망치거라, 네 마음이 내킨다면. 이정도 돈이라면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할 수 있을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어미로써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것이니, 거절하지 말도록하고.”
여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한동안 무언갈 생각하는 듯 움직이지 않던 금윤은 현금봉투 위로 눈물을 한두방울 떨구더니 이내 자리를 벗어나 다시 탐정사무소로 향했다.
* * *
금윤이 탐정사무소에 도착해 커피를 끓이고 서류를 정리할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이상 씨 때문에 고생이 많죠?”
가화가 들어왔다.
“아, 가화 씨군요.”
금윤은 보던 서류를 덮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어제는 미안해요.”
금윤은 가화의 사과를 듣고는 한번 더 단단히 결심했다. 자신이 주는 악영향을 없애버리기로.
“아니에요. 어차피 사실인데.”
“…네?”
“제가 김혜순 씨를 죽였어요.”
만감이 교차하는 가화의 눈빛을 보았다. 이제 돌이킬 수는 없다.
“그게 정말이에요?”
“네, 제가 죽였어요.”
가화의 떨리는 손을 곁눈질로 힐끗 보던 금윤이 태연스레 말하자 가화가 말했다.
“……못 들은 거로 할게요. 형사님들에게는 알리지 않도록 하죠.”
어라? 이것은 뜻밖의 답이었다. 살인 사건을 맡은 탐정이 범인을 찾으면 경찰에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금윤은 탐정사무소를 나가는 가화의 서글픈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경찰에게 알리지 않는다니 차라리 잘됐다 하고 생각하려 자신에게 세뇌를 걸던 그녀는 결심했다. 쓴웃음을 띠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금윤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탐정사무소를 나온 그녀의 눈에는 새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하늘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금윤은 여러 생각을 하며 바닥을 보고 종로 경찰서를 향해 걸었다.
이내 경찰서에 도착한 금윤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기무라 형사가 있었다. 자신에게 무어라 하는 그가 오늘따라 두려웠고, 미안했다.
“자백하러 왔습니다.”
“네?”
“이번에 조선호텔에서 김혜순 씨를 살상한 범인이 저입니다, 형사님.”
금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 * *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그녀는 작은 철창 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과 새소리를 벗삼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형무소의 문이 열렸다. 교정시설장이 하는 이야기 소리를 들어보니 기무라인 것 같았다.
아, 마지막을 친우의 권총이 장식한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기무라가 권총을 장전하며 말했다.
“원래는 고문 후 진술을 받아 재판서에 넘기는 것이 관례겠으나, 이번 사안은 이례적으로 금윤을 즉결 처형하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그 뒤 이어진 교정시설장과 기무라의 대화는 딱히 금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금윤은 그저 어찌해야 멋진 마지막을 만들 수 있을까로 머릿속이 가득 찬 상태였으니까.
기무라가 금윤을 조준했다. 금윤은 눈을 감고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였다.
탕
총소리와 함께 둘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아프지 않다.
‘어? 아프지 않다고?’
허공을 응시하던 금윤은 다급히 제 몸을 살펴보았다. 피로 뒤덮였지만 그것은 금윤의 피가 아니었고, 정작 금윤은 심한 상처가 나지 않은 듯 했다.
금윤은 헛웃음을 치며 조용히 소리쳤다.
“이상…!”
어두운 밤, 제비에는 이상, 구보, 가화, 금홍, 기무라, 그리고 금윤이 모여있었다.
구보가 이상과 기무라에게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며 물어보았지만 이상은 그대로 자리를 피했다.
금윤 또한 남아있는 기무라에게 물었다.
“저를 왜 살려두셨습니까.”
기무라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상 선생님의 부탁이셨거든요.”
“면죄부 주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말은 저리 하지만 사실은 저를 살려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후, 이상이 들어와 금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린 이제 한배를 탄 거네.”
이어 금윤이 살아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저도 사형이라며 어색히 웃는 기무라를 보고 금윤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금홍의 잔소리와 철 없는 이상, 즐거웠다. 이런 일상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기도 했고.
구보와 이상이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지금 금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보이는 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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