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언] 호접지몽(胡蝶之夢)

이서언 첫 번째 생일 연성.

*BGM : 그리그(E. Grieg) -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Song)

*<러브앤딥스페이스> 2024년 이서언 생일 기념 연성입니다.

*BGM은 추천 사항으로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듣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2024년 이서언 생일 이벤트 스토리와 생일 메모리 <깊은 곳에 닿은 감정> 내용 스포일러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원치 않으실 경우 열람을 재고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개인의 캐릭터 해석과 드림 요소(드림주 이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는 인게임 일러스트와 픽사베이(PIXABAY)의 저작권 프리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이서언은 잔뜩 신이 나서 파티를 즐기는 천소명을 가만히 응시하며 무심코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난 이후로 자신이 ‘처음’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다 생일이라는 단어가 우연히 흘러나왔을 때부터, 아니지. 정기검진일도 아닌데 소명이 병원을 찾아와 그의 시선이 닿지 않을 만한 병원 구석에서 곽헌, 그리고 소원과 머리를 맞대고 누가 봐도 수상하게 작당 모의를 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서언은 그저 제 앞다리 사이에 머리를 숨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한 줄 아는 강아지와 닮았다고만 생각했고, 그것이 패착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명이 일을 벌일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닌, 별장을 예약하고 제 동료들까지 끌어들인 생일 파티를 기획할 거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내년의 오늘도 이렇게 즐거웠으면 좋겠네요.”

 평소의 간호사 복장이 아닌 사복 차림의 소원은 옷차림만큼이나 느슨해진 태도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고, 올해는 여름이 길고 가을이 따뜻해 극지방의 빙산이 얼지 않을 것 같다는 곽헌의 잡담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소명을 곁눈질로 흘끗 바라본 이서언은 그의 손을 슬그머니 찾아 잡았다. 밤의 어둠이 맞잡은 손을 가려줄 테니, 제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굳이 마주하지 않은 채로. 별장에 도착했다며 곽헌이 뒷좌석을 돌아볼 때도 황급히 손을 빼내려는 소명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것은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작은 심술이기도 했다.

 “…곽 선생님이 보고 있는데 이렇게 손잡고 있어도 돼? 소원 간호사님이 돌아보셨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 종알종알 항의하는 그의 목소리가, 눈치껏 소원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준 곽헌 덕에 오롯이 두 사람만이 남아 있는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웃음기 담긴 눈동자로 소명과 시선을 마주한 이서언은 새삼 실감했다. 대체로 고요한 자신의 일상에 자유분방하게 끼어드는 한 사람 덕분에 비로소 무채색에 색채가 덧입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손잡는 게 뭐 어때서? 부끄러워?”

 “그런 뜻이 아니잖아. 곽 선생님과 소원 간호사님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오해하고 말고 할 게 있나?

 누가 그랬던가, 주머니 속에 든 송곳과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숨길 수 없다 했었지. 이서언은 여전히 종알종알 불평하고 있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의 일터인 병원에 굳이 사적인 관계로 인한 소문이 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은 알지만 작금의 그는 소문이 난다고 한들 굳이 막을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애초에 곽헌과 소원이 소명의 계획에 적극 협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작게 웃은 이서언은 소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라지만, 모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   ❅   ❅

 이서언의 예상대로 별장 문을 열자마자 요란하게 폭죽이 터지며 알록달록한 색깔의 색종이가 허공을 수놓았다. 성 주임과 곽헌, 소원이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차 눈을 반짝이며 거실 중앙에 놓인 케이크 곁에 서 있는 것을 본 그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촛불을 불어 껐고, 평소보다 다소 높은 톤으로 어색함이 묻어나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다들 고마워요, 정말 예상 못 했어요. 이건 누구의 아이디어죠?”

 그 질문의 답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서언이 답을 알면서 묻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곽헌이 생글거리며 소명의 아이디어임을 어필했고, 소명은 다소 억울하다는 듯 곽헌의 말에 하나하나 반박해 ‘모두의 아이디어’임을 강조했으며, 소원을 빌라는 성 주임의 말에 ‘소원은 생일 당일에 빌어야 한다’고 소원이 짚어 주는 모습을 가만히 둘러보던 이서언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소명이 씌워 준 생일 왕관을 머리에 얹은 채로 박자가 엉망진창인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며 케이크를 잘랐다.

 부모님이 먼 곳으로 의료 봉사를 나가신 탓에 늘 혼자 생일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명이 ‘모두와 함께 보낼 수 있도록’ 신경 써서 준비한 것임을 알면서도 굳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자신의 유치함을, 이서언은 1년에 한 번뿐인 생일이라는 변명으로 합리화했다. 그렇게 함께 즐겁게 웃고 즐기던 와중 성 주임이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 주임과 천소명 씨는 원래 알던 사이인가?”

 그 질문에 이서언은 새삼스레 기억을 더듬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이지만 함께 보낸 시간은 짧았고, 말수가 적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를 무서워했으며…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한없이 짧았던 그 시간을 그보다 몇 배나 더 오래 떨어져 있는 동안 되새길 추억으로 만들어 주었던 사람. 성 주임의 질문에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답한 이서언은 굳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놀리고 싶은 마음과 솔직한 속내를 듣고 싶은 마음 중 어느 쪽이 이길 것인지를 가늠하면서.

 “지금도 그래?”

 좀 더 지켜봐야지, 케이크를 한 입 떠서 먹으며 제 질문을 슬쩍 피해 가는 소명에게 다가선 이서언은 그의 손을 잡았다. 주변에서 워커홀릭이라 평할 만큼 일 외의 다른 것에는 대체로 관심이 없는 편인 그였지만 천소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케이스 중 그 어느 쪽에도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서언은 그 유일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그는 늦은 밤 제 방에 손수 만든 케이크를 들고 찾아온 소명과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고, 이 생일 파티에 모인 사람이 얼마나 ‘이 주임’을 좋아하는지를 강변하는 소명을 심장에 담았으며, 생일 당일 아침 어딘지 익숙한 모양의 물범 모양 쿠키를 직접 만들어 선물한 ‘낯선 사람’에게서 영험한 첫 축하를 받았다. 선물하기 전 미리 맛본 것인지 계화꽃 아래에서 맞닿은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달콤한 맛이 났다. 마지막까지 빈틈없이 준비한 선물을 남김없이 받은 이서언은 그가 반드시 이룰 소원 중 가장 가벼운 것을 소명에게 고백했다.

 “앞으로는 누군가와 보내는 나날을 상상으로 채울 필요 없게 해달라고 했어.”

 그 순간…

❅   ❅   ❅

 이서언은 꿈에서 깨어났다.

 으레 이 꿈을 꿀 때면 늘 그러했다. 유난히 길었고, 유독 생생했으며,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은 채 그의 뇌리에 아로새겨졌다. 마지 그 꿈이 자신의 또 다른 기억이기라도 한 것처럼.

 잠들었던 사이 이미 해가 졌는지 집 안은 어두웠고, 창가의 재스민 화분이 창밖의 불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날이 밝을 때까지 유랑체를 처리하고 집에 돌아와 눈을 붙였던 탓인지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애써 일으킨 이서언은 담담한 눈동자로 제 방에 설치된 홀로그램 스크린을 확인했다. 웬일인지 감지 범위 내에 그가 간섭해야 할 만한 붉은 점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을 확인하려 책상에 놓인 디지털시계로 눈을 돌린 이서언의 눈동자가 얕게 흔들렸다.

 오늘이었나.

 꿈속의 ‘그’가 말했던 날짜, 9월 5일. 그제야 이서언은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그는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굴로 방금 꾸었던 꿈을 곱씹었다.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한 ‘의사’는 역시나 닮은 음성으로 생일 파티를 준비해 준 소녀와 동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고, 제게는 다소 낯선 미소 띤 얼굴로 소녀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마치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재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밀랍으로 깃털을 이어 붙인 날개를 단 이카루스가 뜨거운 열기에 밀랍이 녹아 버릴 것이라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던 것처럼.

 가질 수 없는 존재를 갈구하는.

 해맑게 웃는, 이제는 성숙한 어른이 된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꿈을 꾸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이서언은 ‘의사’가 기억하는 소녀의 모든 순간을 함께 했고, 소녀를 바라보며 그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공유하듯 함께 느꼈다. 장자가 꿈을 꾸고는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다 했다던가.

 꿈속의 그는 철저히 저와 다른 사람이기도 했고, 또한 그 자신이기도 했다. 검은색과 흰색, 킬러와 의사, 안정된 삶과 뿌리부터가 뒤흔들린 불안한 삶. 꿈속의 삶에 일견 탐욕을 느끼는 제게 네 것이 아니라고, 저와 그는 다른 사람이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 것만 같은 존재를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서언이 그 꿈을 바라게 되는 것과도 맥이 닿는 아이러니였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이서언은 혼몽한 머리를 부여잡고 막연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왜 자신에게는 소녀가 허락될 수 없었던 것일까. 

 한참을 표정 없는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는 몸을 일으켜 겉옷을 걸치고는 집을 나섰다. 8시, 조금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아직은 문을 연 디저트 가게가 있을 터였다. 발길 닿는 대로 허랑하게 걸음을 내딛던 이서언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 진열장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생크림 케이크를 샀다. 이제는 끝물일, 설탕에 달콤하게 절인 복숭아가 장식으로 올라가 있는 것이었다. 로봇이 건넨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고 돌아서려던 이서언은 알록달록 소담하게 담긴 마카롱과 투명한 유리병에 든 사탕에 시선을 두었고, 잠시 망설이다 그것들까지 함께 구매한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 마지막으로 앉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식탁에 케이크를 놓고 다소 서툰 손놀림으로 초를 꽂은 이서언은 그 앞에 가만히 앉아 애초부터 적막했던 이 집에 온기를 더해 준 여린 목소리를 떠올렸다. 12살 생일을 함께 보내달라고 했던, 그를 기념하는 초와 케이크 부스러기 앞에서 검은 안개로 변해 제 삶에서 사라졌던 소년. 석양을 바라보며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로봇이 만든 온기 없는 케이크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처럼 먹어 치우던 천진한 얼굴.

 그는 담담히 제가 꽂은 초에 불을 붙였다. 꿈속에서 들었던 박자라곤 맞지 않는 엉망진창인 생일 축하 노래를 떠올렸고, ‘의사 선생님의 꿈속에서도 형이 제 생일을 챙겨 주겠느냐’고 묻던 소년을 떠올렸다. 제가 건넸던 답은 사실 정답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소녀와 함께 보내는, 그에게서 축하받는 생일.

 으레 함께 부를 생일 축하 노래조차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그는 오래도록 품었던 단 하나의 단어를 속삭이듯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양.

 천소명.

 촛불을 불어 끈 이서언은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작은 접시에 담고는 꿈속의 소녀가 그랬듯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입에 넣었다. 진하고 묵직한 달콤함과 복숭아의 상큼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고, 불 꺼진 초 특유의 희미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케이크의 단맛을 음미하듯 한참이나 신중하게 맛을 보던 그는 엄지로 제 입술을 가볍게 더듬었다. 계화꽃 아래에서 맛보았던 단맛은, 이런 맛이었을까.

 불을 켜지 않아 여전히 어두운 집 안으로 새어 들어온 희미한 빛이 그의 실루엣을 그려냈고… 그 위에 적요한 침묵이 더께처럼 내려앉았다.

이서언의 27번째 생일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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