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운] pesante

<러브앤딥스페이스> 공모전 「교차하는 시선」 응모 원고.



*BGM : BEASTARS Main Theme(All versions) OST

*BGM은 추천 사항으로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듣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진운 메인/메모리 스토리의 서사 및 설정 스포일러 있으며, 개인의 캐릭터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는 픽사베이(PIXABAY)의 저작권 프리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레드 문(Red Moon).

N109 구역의 밤하늘은 유독 어둡게 느껴진다고 누군가가 말했다던가. 비단 그것이 단순히 명암(明暗)의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유독 붉게 보이는 달을 올려다보던 진운은 저답지 않은 감성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어둠이 두려운 것은 그 안에 숨겨진 것을 알 수 없는 데에서 오는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인 만큼, N109 구역의 지배자인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는 탓이었다. 진운에게 어둠이란 그저 숨 쉬듯 익숙한 일상이었으므로.

“헌터랍시고 하도 큰소리를 쳐서 내버려 두었더니, 저렇게 허술해서야.”

메피스토에게서 실시간으로 보고를 전해 받던 그는 결국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임천시 내에서야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이곳은 자신의 강함만을 생존의 담보로 삼을 수 있는 무법지대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온갖 흔적을 흘리고 다니다니. 심지어 에테르 코어를 탐내고 있는 하이에나들의 이목이 쏠린 이 시점에서.

“The Nest에서 대뜸 정보를 흘린 게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저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이미 따라붙은 꼬리가 한둘이 아닌 것 같은데요, 보스.”

서준과 서훈이 번갈아 가며 제멋대로 떠드는 것에 진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와중에도 자기 나름대로는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는 여자의 모습에 헛웃음을 삼키고 있던 차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따라붙은 꼬리들 조용히 처리해.”

“굳이 조용히 처리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보스?”

“저 헌터 아가씨에게 닥친 위험을 생각하면, 크로우의 기지를 벗어난 이상 보스께서 확실하게 경고하시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은데요.”

굳이 사족을 다는 ‘동료들’을 노려보던 진운이 쯧, 작게 혀를 찼다.

“너희가 24시간 붙어서 지킬 게 아니라면 관련지을 만한 단서를 남기지 않는 편이 좋아. 그리고 저 여자의 직업, 잊었어? 헌터 협회 쪽에 괜한 빌미를 줄 필요는 없어.”

그의 짜증스러운 대꾸에 서준과 서훈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이곳 N109 구역의 절대 강자인 진운이 그 강함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쌍둥이 형제는 방금 자신들의 발언이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을 뻔했음을 깨달았다. 일순 조용해진 서준과 서훈을 향해 진운은 귀찮다는 듯 대강 손을 흔들어 보였고, 알겠습니다, 보스, 답한 두 사람은 이내 바람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흥미가 생기는 것과는 별개로… 일이 귀찮아지겠는데.”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그의 입가에 야살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흥미로운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의 그것 같기도 했고, 흥미로운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아이의 그것 같기도 했다. 다시금 메피스토를 날려 보내는 진운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연히 빛났다.

거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 ✷

“크로우의 규율이라는 건, 거래 상대를 감시하는 거야?”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진운이 코웃음을 쳤다.

“거래라는 건 서로 대등한 조건을 걸고 각자의 이득을 취하는 거야. 내가 제시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이상, 네가 거래를 충실히 이행할지 내가 어떻게 확신하지?”

“이건 공정하지 않아. 내가 왜 너와 공명하지 못하는지, 너도 그 이유를 모르잖아!”

점입가경이네.

세상 물정 모르는 아기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고 야옹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지는 듯해 진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지금 ‘N109 구역’에서 공정을 논하는 건가? 이곳은 자신의 강함이 곧 공정이고 논리야. 더 할 말 있나?”

가차 없는 그의 말에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마지못해 입을 다무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진운이 몸을 돌려 턴테이블에 레코드판을 얹었다. 이내 방 안을 가득 메우는 클래식 선율에 눈이 동그래진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왜, 클래식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비꼬는 게 취미야? 전에 이야기했잖아, 꿈을 꾼 적 있다고.”

꿈이라. 진운은 한풀 꺾인 듯한 목소리로 툭 답을 내어놓는 여자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그래, 자신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기억하느냐고. 늘 철저히 계산하고 짐작하며 대화를 이끌던 제가, 순수하게 무언가를 기대하며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던가. 그 실낱같은 기대는 결국 그 어떤 의문도 해소하지 못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너와 함께한 순간은 그저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잔재이자 너의 ‘꿈’일 뿐인가.

그의 붉은 눈동자를 스쳐 지나가는, 씁쓸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박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이렇게 심각해지는 거야? 꿈은 그냥 꿈일 뿐이잖아, 진운. 그리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어. 네게 이야기했던 대로만 행동했고, 그건 너도 동의했던 사안이잖아.”

“그래, 그랬지. 네가 ‘행동’하는 동안 네게 들러붙었던 꼬리가 몇인지를 안다면 내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을 테고.”

움찔한 여자가 그제야 미안, 하며 사과를 건넸고, 진운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동전을 던졌다 받는 동작을 반복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한 번 마음 먹은 일에서만큼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주변을 살피느라 그 걸음이 때로는 속절없이 느려지기도 한다는 것 또한.

“아무리 주판을 튕겨 봐도 내가 손해 보는 장사인데.”

“그래, 고마워.”

제 밉살스러운 말에도 굴하지 않고 너스레를 떨며 눈을 휘어 웃는 그녀를 바라보던 진운이 피식 웃었다. 그래, 여자가 N109 구역에 자신을 미끼로 던졌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모든 일은 이미 안배된 것이었다. 훼방을 놓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거니와, 그녀가 손에 넣은 힘이 어떤 위험을 불러올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또한 그였으므로.

오랜 시간을 건너 여자의 앞에 선 진운은 더 이상 무력하게 상처 입은 채로 그녀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 의지해 겨우 숨을 붙들고 있던 누군가가 아니었다. 비록 살아 있는 식물을 보기 어려운, 햇빛조차 들지 않는 거대한 무덤이 안식처일지언정 ‘이 행성’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게 또박또박 말대꾸하며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 아기 고양이를 제외하고는.

“이번에도 말로만 때울 건가?”

“너와의 거래 조건을 지키는 것과는 별개로, 소원 하나 들어줄게. 어때?”

해사한 얼굴로 제게 소원을 이야기하는 여자를 바라보던 진운이 동전 대신 권총 한 자루를 그녀에게 가볍게 던졌고,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살피는 여자에게 진운이 툭 말을 던졌다.

“잘 가지고 있어. 네가 살아 있어야 소원도 들어줄 수 있겠지.”

물론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내가 어떻게든 살려둘 테지만.

✷ ✷ ✷

“진운!”

약속 시간에 한참이나 늦은 걸 알고는 있는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제 앞에 서서 숨을 고르는 여자를 빤히 올려다보던 진운이 혀를 찼다.

“기왕 늦은 거 이렇게까지 뛰어올 필요는 없었는데. 뻔뻔함이 네 장점 아니던가?”

진운의 말에 여자가 여전히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입을 비죽이 내밀었다.

“내가 뭘 그렇게 또 뻔뻔하게 굴었다고 그래?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 정도는 할 줄 알거든.”

늦어서 미안, 사과를 건네는 그녀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진운이 픽 웃었다.

“그래, 미안해해야지. 내가 기꺼이 임천시까지 나왔는데 네가 늦으면 안 되잖아?”

“나오는 길에 갑자기 구조 요청이 들어와서. 여유 있게 나왔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길이 막히더라고.”

기왕 미안한 마음을 덜어 줄 거라면 천천히 와도 됐다고 말해 주면 입에 가시라도 돋아?

제 마음을 읽은 듯 투덜거리는 여자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며 진운은 제 손에 들려 있던 동전을 가볍게 던졌다 받는 것을 반복했다. 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못내 괘씸해 조금 더 놀려 볼까, 싶었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그는 그것이 못내 낯설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했으면 기다리게 했지, 제가 기다리는 쪽이었던 적은 없었으므로.

“그래서, 이 더운 날씨에 굳이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분수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여전히 동전을 가볍게 던졌다 받는 진운의 느긋한 몸짓을 바라보던 여자가 그의 질문을 받고는 배시시 웃었다.

“네가 전에 이야기했던 적 있었잖아. N109 구역은 해가 들지 않아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고. 날씨가 조금 덥긴 하지만 수국이 예쁘게 피어 있기에, 너와 함께 보고 싶어서.”

“설마 이걸로 네가 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소원을 대신하려는 건 아니겠지?”

웃음기 섞인 진운의 질문에 그녀가 발끈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네 소원’이라고 했잖아. 이건 내 소원이니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같이 보러 갈래?”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진운이 몸을 일으키며 동전을 가볍게 뒤로 던지고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분수 안으로 떨어지는 동전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방금 동전 버린 거야?”

“…너야말로 대체 날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저 동전에게 고마워해, 네 소원을 대신 들어준 거니까. 트레비 분수, 못 들어 봤어?”

아직 자신과 공명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Evol 링크가 다시 꼬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건지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제 손을 잡아 오는 여자의 손을 맞잡으며 진운은 피식 웃었다. 역시나, 이 거래는 이미 짐작했듯 누가 보아도 자신이 손해 보는 장사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잠들어 있을 시간에 나와 햇빛 아래를 걷는다는 것은 굳이 스스로 고를 선택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굳이 거래를 무를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그 이유를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냈다.

아직 공명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이 거래의 조건이었으니까.

“저녁은 어떻게 할래? 근처에서 먹을까? 네가 부탁 들어준 대가로 내가 살게!”

제가 바라던 대로 되어서 기쁜지 종알종알 말을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진운이 픽 웃었다.

“좋은 풍경을 보여주는 답례로 저녁은 내가 대접하지. 걱정하지 마, 집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해 줄 테니까.”

“걱정 마, 브로치도 잘 챙겨 왔으니까. 그래서 오늘 저녁 메뉴는 뭔데?”

네가 먹고 싶은 것, 가볍게 답한 진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스페이스 헌터로 임천시의 일상을 누리던 그녀가 양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처럼 양지에서 살 수 없는 사람 또한 있는 법이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자는 과연 제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게 될까, 아니면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할까.

기대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힐끗 시선을 던진 그는 이내 웃음을 참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상대가 거래에 응한 이상, 자신도 그 거래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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