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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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W: 총살 등 살인 언급 붉은 물줄기가 수직으로 낙하한다. 코모도어 레드는 쿠프리 40의 빛바랜 유리창을 적시며 기울어진 표면을 따라 길을 내었다. 유월의 온화한 공기 위로 달큰한 와인 향이 퍼져 나간다. 가장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럽던 날들의 향기. 해리 드 부아는 여전히 앞유리창을 바닥에 맞대고 고꾸라진 쿠프리를 보면 가슴이 쑤셔오는 걸 느낀다. 그
CW: 위계에 의한 폭력, 직장 내 따돌림, 청소년의 죽음, 가까운 이의 죽음, 청소년을 향한 공권력 집행, 마약 언급, 총격 및 그에 대한 비윤리적 발언, 살인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 눈앞의 광경이 횡으로 늘어지며 빠르게 회전한다. 사방이 먹먹하게 조용한 건 비단 한쪽 고막 탓만은 아니다. 뿌연 시야로 멀리 작고 반짝이는 형체가 떠오른다. 삽시간의 착
여름은 끝났다. 지난 계절에 추억할 일은 없었다. 더위 속에 아가미를 벌리듯 호흡하는 나날은 숨 쉬는 것만으로 오멸의 날이었다. 다녀올게요. 태헌이 문간을 나서자 매미 시체가 발에 챘다. 한 철 구애 끝에 결실 없이 말라죽은 곤충은 개미떼가 들끓어 시커먼 덩어리로 남았다. 불에 탄 주검처럼.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시선을 두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태헌이 걸음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기분 이상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제이 잭슨은 여전히 웃음기 머금은 미소를 띠고 킬그레이브를 바라보았다. 킬그레이브는 못마땅한 신음을 내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제이는 키득거리며 쿠션을 끌어안았다. 남자는 무시하는 데 소질이 없었고 얼마 후 다시 몸을 돌렸다. 망할,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나도 좀 알자. 아냐, 별거 아냐.
그날 본 야경은 과연 아름다웠다. 루시엔의 낙마를 막기 위해 밧줄을 칭칭 동여맨 채 말을 타야 했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었지만 적어도 한 명은 문제 삼지 않았다. 너울지는 광막한 오색 커튼 아래 천지를 덮어쓴 그들은 발밑이 진동하도록 우짖어대는 폭포에 하늘의 빛이 섞여 드는 것을 보았다. 태양이 밤에 보낸 연서는 그런 색이었다. 사방을 둘러치는 빛의 파도.
아이슬란드의 물은 치명적이며 처염하다. 물살이 한 번 돌아 굽이치면 물안개가 일어 거대한 바위에 한 겹 흠을 내며 우르르 쏟아진다. 파도는 몸을 일으키며 물러서고 다시 온몸을 부딪쳐 바위를 깎는다. 폭포는 용맹한 물살에 굉음을 더하며 낙하하여 물은 서로를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서로와 온몸으로 맞서 싸운다. 그 격렬한 화해의 풍경을 홀몸으로 관조하노라면 근 몇
주의사항: 조류 시체의 간접적 묘사, 유혈 펌블 <소년, 여인, 욕망> 中 https://glph.to/qf3y0t
주의 사항: 전통적인 종교적 메타포를 현대적 재해석을 거치지 않은 채 차용하여 여성혐오적 표현이 있습니다. 교리 내 차별과 혐오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또한 성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을까요? 여자가 찬 수건을 가져다 대자 창백한 살갗이 전율했다. 맞닿는 자리마다 물수건에 선홍색이 퍼져나가 이윽고 새하얬던 아마포의 촘촘히 짜인 실은 한올 한올 불
1.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네요. 물론 이 편지가 바로 당신에게 닿을 것도 아닐 테니 당신이 이걸 볼 때면 정말 오래간만이 되겠죠. 당신은 마흔하나가 되고 전 서른일곱이겠군요. 제가 당신의 나이를 하나 넘어선다니. 난 당신에게 오 년을 내건 만큼 그간은 당신께 귀찮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구태여 그러지 않더라도 당신은 내 생각을 할 테니까요.
배신자. 그게 남자가 하루 만에 여자에게 꺼낸 첫마디였다. 이전의 그라면 해본 적 없는 짓이다. 숱한 행적과 기이한 습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의 자신이 하는 일을 악취미라고 부를 거다. 여자는 말이 없다. 남자는 바이올렛색 벨벳 소파를 손끝으로 긁다가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내려와 손등에 닿았다. 넌 내 곁에 머무르겠다고 했어.
3. 휴버트는 교도소에서 나설 때 생존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첫 며칠을 걸을 때도 견디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서만 식량을 찾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전부 걸었다. 여행을 떠난 것 같지도 방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집을 잠깐 나섰다가 영영 돌아갈 곳을 잃은 차림. 아네사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휴버트의 눈가에서 묻어나는 회한을 보면 꼭 그게 자
1. 바다. 물살과 함께 부서지는 그날의 향기. 그들은 기다란 해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날씨에 대해 물 내음에 대해 미뤄두고 온 업무 더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핀잔을 주다 누가 먼저 누구를 물에 빠트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햇살은 따스했다. 다음 날 감기에 걸릴 걱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들은 겨우 걸어 나온 해변에 실없이 주저앉아 모래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