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환마-2
루시엔이 죽기 전 아이슬란드의 이바를 찾아온 IF / 썸네일 @tyaxjfsla
그날 본 야경은 과연 아름다웠다. 루시엔의 낙마를 막기 위해 밧줄을 칭칭 동여맨 채 말을 타야 했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었지만 적어도 한 명은 문제 삼지 않았다. 너울지는 광막한 오색 커튼 아래 천지를 덮어쓴 그들은 발밑이 진동하도록 우짖어대는 폭포에 하늘의 빛이 섞여 드는 것을 보았다. 태양이 밤에 보낸 연서는 그런 색이었다. 사방을 둘러치는 빛의 파도. 대지에 하사하는 왕관. 상서로운 춤. 허공에 거하는 물비늘. 소리 없이도 폐부를 울리는 오르간. 이만한 장송곡이 어딨겠어요. 루시엔은 수긍했다. 밤은 밝았고 서로의 얼굴을 보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루시엔은 은은한 광채를 흘리는 이바의 옆얼굴을 평생 기억할 것임을 알았다.
날이 변덕스러웠고 그즈음 밤은 어김없이 추웠다. 이바는 방 한가운데 서 고민하다 소파에서 그날 일탈의 대가로 기침을 쏟아내던 루시엔에게 비켜 있어보겠냐고 했고 곧 마룻바닥이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이바는 기어코 러그를 밀어내고 벽난로 앞까지 침대를 끌어왔다. 그는 가쁜 숨을 고르며 루시엔의 등에 받칠 베개를 세워준 뒤 긴 소파에 드러누웠다. 잘 자요. 불편하면 깨워요. 간결한 인사를 남기고 그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기에 루시엔이 무어라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웅얼대는 목소리로 ‘당신이 단명하면 시체를 치우는 수고는 내 담당이 아니겠느냐’는 일축이 돌아왔다. 루시엔은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이바를 지켜보다가 잠에 들었다.
며칠간 이바는 루시엔의 머리를 땋아주고 식사를 차린 뒤 줄곧 거실 탁자에서 글을 썼다. 쏟아지던 글의 흐름이 한 번 가로막히자 비로소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 첫 문장부터 하나하나 훑으며 손에 잡히는 흙을 조각하듯 세밀하게 고쳐나갔다. 기침 소리가 적막을 깬들 이바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최선의 위안임을 알고 있었다. 루시엔은 난롯불을 쬐며 기꺼이 그런 이바를 관찰했다. 구불진 머리칼을 익숙하게 넘겨 하나로 묶고 턱을 괴는 모습. 왼손을 써도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세 손가락을 길게 빼고 끼적이는 습관. 검은 눈은 그때처럼 잉크를 흘리지 않아도 글을 흘렸다. 자신을 관찰의 대상으로 위치한 이바는 자신을 푸르게 훑는 눈과 굳이 마주치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아, 탄성을 흘리며 돌아보았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식사를 나누어 먹고 밤이 깊었을 무렵이었다. 이바는 서랍을 뒤져 사 년간 루시엔 그르니에 앞으로 쓰고 부치지 않은 네 통의 편지를 꺼냈다. 일 년에 하나씩. 루시엔은 사 년을 조금이라도 따라가려는 듯 시간을 들여 읽었다. 그 안에서 이바는 영국을 떠나 거세게 흔들리는 배를 타 아이슬란드에 오고, 수많은 책을 읽고, 기억을 더듬어 아일랜드어로 시를 쓰고, 조국에 다녀온다. 해묵은 상처의 해설도 그곳에 쓰여 있었다. 루시엔은 그날 목 끝까지 채운 단추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큼직한 화상흔을 떠올린다. 눈을 들자 가슴께까지만 잠가둔 셔츠 아래로 그날과 다름없는 상처가 고개를 내민다. 대강 묶어 넘긴 붉은 머리칼이 상처 위로 자유로이 흐늑거린다.
불가해의 마지막에 붙일 이름을 찾고 있군요.
예. 펜대를 깨문 잇새에서 뭉그러진 발음이 새어 나왔다. 몇 초 더 지면을 바라보던 그가 펜을 내려두고 잉크가 번지지 않게 신경 쓰며 탁자의 빈자리에 엎드렸다. 가로로 누운 얼굴이 침대에 곧게 기대 누운 루시엔을 마주 보았다.
그런데 그 한마디의 거처가 이다지도 묘연합니다. 내게 영감을 주었던 뤼시앵 그르니에, 당신마저 연소하고 있으니 막연하군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도 난 언제나 당신을 그릴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제 존재가 아니라 당신의 감흥입니다……. 당신이 날 그릴 수 있다면, 당신에게 있어 저는 살아있는 것과 다름없지요.
그리고 내 글은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테니 이 글을 읽는다면 누군들 나만큼이나 당신을 그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루시엔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근거를 댈 수 없었다. 이바는 한 손으로 리본을 끌어당겨 머리카락을 풀었다. 머리칼이 불빛을 받아 주황으로 반짝였다. 그는 침대로 다가가 바깥쪽에 파고든 채 루시엔의 허리께를 끌어안고 기대 누웠다. 체온이 미약했다.
하지만 당신이 찾아오고선 더욱 모르겠습니다. 내 다섯 해가, 서른두 해가, 마침내 서른일곱 해가 한 점으로 낙착하려 들고 있는데 그게 내가 원하는 결론이 아니라면 어떡합니까?
루시엔에겐 그 체온이 뜨거웠다. 그는 창백해진 손을 뻗어 하얀 셔츠 위로 이바를 끌어안았다. 이바는 웅크리고 안겨 루시엔의 허리께에서 중얼거렸다.
당신이 찰나여서 빛난 걸 아는데도 당신 미소를 영원히 보고 싶은 건 어째서입니까? 우리 이야기가 끔찍이도 상투적인 단어로 끝나게 되면 어쩌죠?
같은 단어라도 발화자의 삶에 따라 그 뜻은 판이해지지 않습니까. 장미는 장미라고 불릴 때마저도 저마다 다른 향기를 풍깁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독자는 장미에서 시체 냄새를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음.
생각에 잠긴 짧은 답.
어떤 향을 바라십니까?
취향이 아주 독특한 조향사가 희석을 깜빡한 것 같은 독한 향수 냄새요. 뇌리를 지질 듯 매캐하지만 자욱한 가운데서 결국 본연의 향을 맡고 정신이 멍한 채로 매료되죠. 그렇게 맡은 향은 평생 기억할 겁니다. 평이한 언어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자인 당신 또한 당혹게 하는 결론인데 독자라고 그 앞에 태연할 리가요.
그럴까요.
독자의 기침 소리가 간간이 섞인 대화 끝에 저자는 확답을 내놓진 못하나 분명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시트를 짚고 고개를 든다. 움푹 팬 뺨에 거뭇해진 가는 손가락을 대어 끌어당기자 그들은 서로의 지근거리에 놓인다. 그들이 서로를 마주한 시간은 총합해도 보름 남짓이었을 테지만 그것은 오 년이기도 하며 동시에 평생이므로 지극히 당연한 얼굴이다.
난 당신이 없는 곳에서도 당신을 그릴 수 있고, 당신은 찬연히 불타 사라지지만…… 당장 눈앞에 당신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건 단언할 수 있어요.
붉은 머리카락이 말라가는 몸 위로 흐드러진다. 뤼시앵, 키스해 주세요. 요청은 행동에 대한 해설일 뿐이다.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맞춘다. 입술이 맞닿는 동안 거짓말처럼 기침 소리는 멎는다. 마치 숨을 넘겨받은 듯이. 조용히 밀랍을 삭이던 촛불은 공간의 숨을 낭비하지 않도록 예를 지켜 소등했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선명하다. 고서의 종이 향이 배어 나오는 집. 어디선가 새어드는 옅은 바람. 난로에서 전해오는 훈김. 발그스름하게 빛을 받으며 윗입술에 숨을 뱉는 여자가. 아름다웠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끼어 압사하는 날에 그들은 입을 맞추리라. 루시엔 그르니에는 그림자 속에서 구불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쌀쌀한 기운에 눈을 떴다. 사그라드는 깜부기불이 끔뻑대고 있었다. 이바는 몸을 돌려 침대에서 벗어나고는 난로 옆 바구니에 담긴 장작을 몇 개 불의 먹이로 주었다. 쏘시개로 뒤척이자 불씨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몸집을 불렸다. 열을 졸음 묻은 얼굴로 받아내며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로 이불 속에 파고들며 말했다.
뤼시앵. 잡니까?
루시엔은 불의 다사로운 빛과 푸른 달빛을 함께 받아 한 얼굴에 두 얼굴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고르게 내뱉어지는 숨에 어깨가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이바는 루시엔의 자는 모습을 며칠간 온전히 지켜본 사람이다.
이봐요. 지금 내 앞에서 자는 척을 하겠다고요?
……잠이 안 오십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보십시오.
이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질문은 단조롭고 평이하다. 계산서를 작성할 때와 다름없이.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얼마나 더 살 것 같냐라. 장담할 수 없겠군요.
닷새?
그럴 수도 있겠죠.
오십 일?
글쎄요.
어쩌면 오십 년.
하하.
오백 년…… 그 정도가 제일 좋겠네요.
뭘 하기에?
살기에.
살기에?
이바가 끄덕였다. 루시엔은 길게 숨을 뱉으려다 중간에 걸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난 남은 오 년의 생을 불꽃처럼 소진하는 데에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그게 내가 알아낸 삶의 방식입니다. 오백 년은 시간이 꽤 남겠군요.
태우는 것만 알고 잇는 법은 모르지 않습니까. 죽음 없이도 죽을 것처럼 사는 방법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오백 년을 산다면 할 게 아주 많을 텐데요.
말해보시죠. 어떤 일을 하며 오백 년을 보내실 셈입니까?
책을 아주 많이 쓰겠죠. 책이란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사는 걸 게을리하지도 않고요. 마음에 안 드는 길거리 양반네한테 시비를 붙여 보기도 하고. 해본 적은 없지만 꽤 주먹을 잘 쓰리란 확신이 있거든요.
아하, 정말입니까?
병상 신세라고 걸려 오는 싸움 피하지 않아요.
루시엔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여기저기 많이 설치고 다닐 생각입니다. 총을 맞아도 다시 살까요? 그럼 때를 노리다 사람들을 충동질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끌겠어요. 매번 선두에서 총알받이 노릇을 하고 영국군의 포탄을 다 쓰게 만들어야죠. 남정네인 척하고 사는 것도 할 만할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렇죠.
조언을 주자면?
조언을 줄 처지는 아니군요. 어딜 가나 가장 시끄럽게 굴며 전문가 행세를 해야 하는데 거기엔 소질이 없어서요. 다만 멍청한 소리에 적당히 함께 웃어주면 됩니다.
주먹을 날린다면요?
신사답진 못하지만 ‘남자’답겠죠.
이바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게 전해졌다. 루시엔은 어둠 속에서 조금 미소 지어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이바가 한숨처럼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문학적 허용으로 당신과 내가 다르게 만나는 세계도 있을 겁니다. 어린 도련님들을 재우는 일도 꽤 해보았으니 그중에 그르니에 씨의 장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재밌었을 것 같은데요.
그다지 재밌는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소름 끼칠 만큼 조용하고 께름칙한 눈으로 사람들을 관찰했으니. 놀려보겠다고 손에 쥔 사탕을 뺏어 들어도 한 번 울먹이지 않아 편하고 껄끄러운 어린애였죠.
하지만 유모에게 철학서 읽는 걸 허락해 줬을 거죠?
예. 그자에겐 그럴 자유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재밌을 테니까요.
재밌을 테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내게 그럴 자유가 있다는 걸 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죠. 당신이라면 그 조용하고 께름칙하다는 눈으로 내가 모든 것이 되도록 전부 지켜볼 것만 같습니다. 대문호, 유럽 미술계의 떠오르는 샛별, 독립 영웅부터 괴물까지…… 동시에 뇌물이나 먹고 사는 경찰 간부도 가능하긴 하겠군요. 그럼 전 재산을 기부한 뒤 자살했으면 좋겠지만. 당신은요?
글쎄요……. 삶의 크고 작은 조건들이 바뀔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장전된 탄환이었고 격발의 순간은 차라리 지당한 것이었으므로 언젠가는 엇나갔겠지요. 멀쩡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기대를 전부 무너뜨리면서요. 난 내게 배당된 역할을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역할을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모든 게 달린걸요.
침묵. 고요하다. 이미 잠기운은 멀리 달아난 지 오래다. 그들은 말하지 않은 채 모든 가능성을 참으로 둔다. 흉곽이 부풀고 꺼지는 순간마다 수만 개의 세계가 생겨나고 수만 개의 세계가 사라진다. 참과 거짓이 서로를 물고 갈라지며 빽빽이 가지를 뻗도록 내버려둔다. 이바는 눈으로 그것들을 더듬다 하나의 가지를 골라 꺾어낸다.
우리가…… 아예 영원이 되어서 육신을 버리고 환마還馬한다면 그 또한 재밌겠네요.
환마한다고요?
우리가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는 거죠. 당신과 난 고향이 다르지만 태곳적의 고향은 같잖습니까.
이바는 달빛 담긴 눈으로 루시엔을 바라보지만 루시엔은 여즉 눈을 감고 있다. 이바는 베개 위로 몸을 기울여 속삭임과 낭송 사이의 어조로 줄줄이 설을 읊어댄다.
다윈이라던가, 그 학자 말 믿습니까? 우리가 전부 바다에서 왔다고요. 꽤 낭만적인 와해긴 하지만. 풍랑 속에서 뒤섞이고 춤을 추며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도 없는 곳에서 비로소 이해한다는 선언 따위 필요치도 않은 채로 있는 거죠. 그처럼 문학적일 수가. 신이 우리 운명을 다 짜두어 놓고 천국에 갈지 지옥에 떨어질지를 선택하게 했다는 소리보단 훨씬 아름답지요. 당신이 그렇게 영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섯 해를 살고 마침내 이름도 언어도 벗은 채 영원이 된 청년의 이야기. 멋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네 죽음의 형태가 전부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당신과 마주 볼 날을 원해요. 그때에 나는 나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겠죠……. 지금 자는 겁니까?
이바 오설리반은 가설을 펼치다 말고 고개를 조금 들어 루시엔의 옆얼굴을 살폈다. 일정한 박자로 내뱉어지는 숨. 달빛을 받으며 떨림 없이 내리감긴 속눈썹. 고르게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몸. 연기다. 이바는 눈감아주기로 한다. 맞붙은 심장이 엇갈려 뛰는 걸 느끼자 흰 손을 뻗어 여린 맥동을 달랬다. 차분하고 고른 손짓이 닷새나 오십 일 혹은 오십 년 어쩌면 오백 년을 남겨둔 심장 위로 토닥거린다. 그는 그들 심박이 완전히 같아질 때까지 아이 어르듯 토닥이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이바는 루시엔의 머리카락을 땋아주고는 저 벌판 너머 사는 이웃에게서 버터를 얻어오겠다고 했다. 그에게 아이슬란드어를 가르쳐주던 어린애와 그 가족이 사는 집이다. 어린애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며 얼굴의 구석구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의 애마는 이미 망아지 태를 완전히 벗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흐트러에게 짐을 맡기고 갈색 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인사를 나누던 그에게 소년의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그 얘기 들었습니까? 여기까지 왔을까 싶지만.
무슨 얘기요?
영국에서 도망친 살인자가 아이슬란드로 넘어왔다더군요. 사람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죽였답니다.
어떻게 생겼는데요?
갈색 머리에 푸른 눈. 배를 타고 북쪽에 도착해 요쿨사아푤룸을 따라 내려왔다는데.
혼자서요?
혼자서.
걸어서?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설마 그랬을까요. 죽으려는 게 아니고서야.
그랬으면 굳이 찾지 않아도 지금쯤 죽었을 게 뻔할 텐데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하지만 그만한 광인이 굳이 여기까지 왔다면 무슨 속셈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정신이 아니었군.
뭐라고 했습니까?
위험하겠다고요. 발견하면 알려주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당신도.
이바는 되는 대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고르고 창고에 식료품을 밀어 넣은 그는 책을 읽던 루시엔에게 대뜸 말했다.
당신 유명해졌네요.
뭐라고 했습니까?
이웃이 말해줬습니다. 영국에서 건너온 살인자가 강을 따라 내려왔다고. 멀쩡한 사람도 그 날씨에 그랬다간 앓아눕습니다.
당신이 웬만큼 찾기 쉬운 곳에 살았어야지 말입니다.
루시엔은 푸른 눈으로 책을 천천히 훑다가 책장을 덮었다. 이바의 간호로 이제 밭은기침은 줄어들었고 드문드문 말이 끊기는 일도 없었지만 그에게선 완전히 생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묵한 눈 아래로 깊게 그림자가 졌다. 그는 침묵을 지키다가 몸을 일으켜 바닥에 내려섰다. 구겨진 이불을 펴는 손길은 모든 것을 준비해 둔 이처럼 정갈했다. 옷매무새를 고치며 그가 말했다. 이만 마무리하고 싶군요. 이바는 예비한 순간을 대하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그래요. 가는 동안 추울 테니 챙겨 입으시고요.
가져온 트렁크는 필요 없었다. 이바 또한 빈손이면 되었지만 한 번 더 창고에 들르길 택했다. 차근차근 옷가지를 껴입던 루시엔이 문득 다급하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밧줄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탁합니다.
루시엔의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이슬란드의 기나긴 겨울도 끝나가던 참이었으나 그날도 오로라는 허공에 들불을 지핀 듯 고아하게 타올랐다. 외려 첫날보다 더욱 맹렬했다. 루시엔은 밧줄에 쓸려 뻐근한 허리께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았군요. 내가 보고 싶어 했으니까 운이 좋았던 거죠. 이바 오설리반은 과연 주사위의 눈마저 자기 뜻으로 포섭할 자였다. 바위 끝에 밀려나 발을 헛디딘 물줄기가 갈래갈래 찢겨 쏟아졌다. 물은 물 사이로 침투해 발을 차며 헤엄쳤다. 자색과 푸른색이 반짝임 아래 하나로 섞였다. 이바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듯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한 손을 뻗는다.
춤을 가르쳐주겠어요? 이곳보다 무도에 적격인 자리는 없을 테니까요.
기꺼이.
루시엔은 코트를 내려두고 이바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단단하고 거친 돌부리가 걸려도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며 천천히 서로를 감싸고 이바는 루시엔이 이끄는 대로 스텝을 밟았다. 이따금 이바가 루시엔의 허리에 손을 감으면 루시엔이 이바의 손끝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코트 자락이 넓게 펼쳐졌다가 내려앉았다. 품에 들어오는 루시엔을 안으며 이바가 속삭였다.
완벽한 결말을 지어주고 싶었는데.
완벽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 그대로를 보여줬고 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이만하면 죽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한 문장, 고작 한 단어입니다. 당신은 내 최초의 독자이므로 끝까지 도움을 줬으면 해요. 죽을 때가 다가오면 현자가 된다지 않습니까? 이왕 불타 사라질 거라면 그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이바가 두 손을 맞잡고 멀어졌다가 돌아서며 팔 사이를 빠져나갔다. 다시 이바의 손은 루시엔의 어깨 위에 얹히고 수천 번 곱씹은 문장은 매끄럽게 흘러나온다.
‘그는 지금 절벽 위에 서 있다.’
루시엔은 이바를 감아 안고 신중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는 바람과 물과 이바 오설리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는 쉽사리 자신을 저자의 페이지 안에 둔다.
‘살인자는 환영으로서 영광스럽게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 발아래 고동치는 물소리는 천지를 깨부수지 못하는 듯 유유히 장막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대자연이 울컥거리고 휘몰아치며 평생 언제나 그래왔듯 작은 인간을 지옥으로 몰아내려 드는 가운데 여자는 태연하게 묻는다. 이상해요. 아무것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나는 당신 탓에 삶에 확신을 얻었는데 당신이 죽음을 알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 무엇도 확실치 않습니다.’
‘살인자는 자신이 그자의 마음속에 있는 말만을 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답변은 간결하다. 당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십시오.’
‘답은 정해져 있는 걸까요?’
‘당신 안에서 답이 정해져 있다면.’
‘내가 내뱉은 말을 내가 모른대도.’
‘당신이 몇십 번이고 죽은 이유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있었으므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죽을 만큼은.’
‘여기에서.’
‘여기에서…….’
그들은 이제 발아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옷자락을 나부끼며 춤을 춘다. 치마를 흩날리던 이바가 루시엔의 손을 잡고 돌아 등으로 안겼다. 정해져 있던 말이다. 오롯이 그가 정한 말이다. 그러니 떨릴 것은 없었다. 문장은 막힘이 없고 그다음을 모르는데도 이미 쓰인 것을 읽는 듯 매끄럽다. 마침내 택했다.
‘절벽 끝에서마저. 그는 살인자를 생각했다. 느끄름한 눈알 속에서 시퍼런 울음이 쏘삭거리며 몸을 뒤채는 모습만을 보고도 그는 순간 안에서 영속을 보았다. 그러니 그 여자는 그때의 살인자를 의식의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영원할 듯했다. 그는 신의 눈 아래서 함부로 태곳적이며 후대며 영원을 입에서 쏟아낼 수 있었고 그때의 얼굴은 그의 저주스러운 삶 어느 구석을 뒤져서라도 찾을 수 없었던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걸음을 멈춘다. 엇갈린 팔이 풀리고 그들은 마주 본다. 거짓이 끼어들 틈 없이, 하늘 아래 지고지순한 사실만이 놓인다. 이바 오설리반은 입술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끄트머리가 조금 올라가더니 바람 새는 소리가 난다. 이내 하얀 이가 드러나고, 코를 찡그리듯 한다. 오색으로 부서지는 밤하늘 아래서도 그의 뺨이 붉어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검은 눈이 눈꺼풀 아래로 숨으며 호선을 그리고 그는 조금 헐떡인다. 그리고 아주 개운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못 견디겠단 듯이, 차고 넘치도록 기쁘다는 듯이. 찰나에 그 모든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는.
‘사랑을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물소리를 가르고 쾌청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죽음을 앞둔 청년은 붙박인 듯 그 자리에 가만히 놓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심장을 붙들고 성급히 달려 소설의 끝을 확인하려 여기까지 왔지만 그 끝에 놓인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 탓이다. 어쩌면 그의 답은 정해져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어 말하기에는 너무도 긴 발음이어서, 오백 년도 남겨두지 못한 그는 침묵을 지킨다. 태고. 후대. 영원. 그리고. 이바 오설리반은, 말했다. 웃음을 겨우 추스르며.
그 친구는 사랑을 하고 있었군요! 내가 당신을 사랑함과 같이. 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가 봅니다. 이제 의문이 없습니다. 마침내 완벽한 결말을 지어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이바는 맞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오래전 어느 공작저에서 그러했듯이. 그때의 선택은 변하지 않고 남았다. 루시엔은 고개를 내젓거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심장이 허락하는 한 가장 세차게 뛰는 맥동을 삼키며 그곳에 있는다. 감히 거부할 수 없이.
당신과 내가 죽어야 한다면, 등장인물인 우리만이 이 세계의 비밀을 죽음으로 간직한 채 멀리 떠나기로 해요. 그렇게 해서 비로소 그 종이 뭉치만으로 내 삶을 내 사랑을 유추해 나의 고향으로 따라오도록.
점점 손을 끌어당기며 이바는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루시엔은 절벽을 향해 한 걸음을 따라갔다. 루시엔은 누군들 이바 오설리반만큼이나 루시엔 그르니에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우나 맥없이 갈라져 있다.
에이바. 당신은 유모가 될 수 있습니다. 대문호, 미술계의 샛별, 독립 영웅, 하물며 괴물까지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세계를 포기하고 여기서 죽겠다고요.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로.
그 모든 게 되는 거죠. 죽을 때가 다가오면 현자가 된다던데 틀린 말인가 보군요.
바보. 이바 오설리반은 키득거리며 덧붙였다. 얼굴에는 한 점 티가 없었고 노상 짙게 검붉던 눈가가 색채 쏟아지는 하늘 아래 맑았다.
난 이 세계의 에이바 오설리반이고, 이 세계에서 가장 끝내주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기한은 영원입니다. 행선지는 태곳적, 우리의 고향. 비로소 그 모든 가능성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선장이 포고하자 메아리가 울렸다. 절벽 너머로 연이어 들리는 굉음이 적적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그들을 타고 정처 없이 먼 곳으로 향한다. 그런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시간이었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낭송조를 흉내 냈다.
‘살인자는 그의 사랑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알면서도 돌려주지 못하는데도요. 아, 하지만 그건 그에게 더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겠죠. 당신이 나를 사랑함과 같이.’
이바는 웃었다. 손끝만을 맞대어 길게 뻗었다가 회전해 루시엔의 품에 안기며 그는 오래된 고국의 언어로 선언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Tá grá agam duit.
그리고 해석해 주지 않은 채, 오롯한 자신의 언어로만 그것을 남겨둔 채 묻는다. 프랑스어로는 어떻게 말하죠? 루시엔은 검푸른 눈 위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다. 평온한 목소리에 잔금이 간 채로 그는 내뱉는다.
‘저는 모르겠습니다Je ne sais pas.’
저는 모르겠습니다Je ne sais pas. 저는 모르겠습니다Je ne sais pas…….
이바 오설리반이 되뇐다. 그는 어리석은 치가 아니다. 마음이 정착하지 못한 탓에 이곳저곳을 헤매었고 그 가운데 로마자로 표기하는 언어를 셋씩 배웠다. 프랑스 땅에는 심부름을 하러 사나흘 다녀온 것이 전부였으나 고상한 분들께서 사랑의 언어라고 이르는 불어 그 낭만의 극치 ‘당신을 사랑합니다Je t’aime’쯤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루시엔 그르니에가 내뱉은 것과는 음절도 발음도 맞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바 오설리반은 늦바람에 첫사랑을 배운 아둔한 어른을 놀리는 어린애 투로 그의 말을 따라한다. 실없이 웃는다. 모르겠습니다Je ne sais pas…….
허리를 감싸안고 한 손을 맞잡는다. 도망자의 구두는 은둔자의 단화보다 낡아 끌리는 소리가 둔탁하다. 몸을 지닌 채 항해하듯 여유로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몸이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고 왈츠 곡은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폭포수의 진혼곡이면 되었다. 이바가 한 발을 빼면 루시엔이 한 걸음 다가서고 루시엔이 한 발을 물리면 이바가 한 걸음 내딛는다. 둘은 오랜 시간 합을 맞추어 온 것처럼 벼랑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어둠 속에 희게 으슬대는 폭포는 새신부의 드레스처럼 레이스를 하나하나 흩날린다. 각 개인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대자연이 손짓하는 기척. 낭떠러지의 끄트머리는 허술해 몇 발 스텝 뒤에는 불길한 땅의 비명이 들려온다. 갈라지고, 깨어지고, 그들의 평생을 떠받치던 대지가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이다.
이바 오설리반은 소설의 완벽한 결말을 구상하였다. 상투적이어도 좋다. 그는 삶을 바쳐 이를 구했다. 마침내 죽음까지 거머쥔 그는 하늘과 대지와 폭포에서 그러했듯 루시엔 그르니에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쉽사리도 사랑을 읽었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승자임을 안다. 그들은 가벼운 걸음으로 대지와 작별을 나눈다.
며칠 후 물에 불어 성치 못한 시체가 떠오를까? 붉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의 시체 그리고 등에 채찍질의 흔적이 만연한 시체를 보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일랜드 여자와 프랑스의 범죄자라니. 누가 이 아득한 높이에서 산산조각난 당신 얼굴을 보고 잔악한 수배자가 죽었다며 기뻐할 것인가. 누가 이름 모를 붉은 머리 아일랜드인 생사를 염려할 것인가. 우리 이방인은 한 걸음을 내디디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비로소 가슴을 연 땅에서 말 없이도 말을 하고 술이 흐르지 않아도 웃음이 가실 일 없으며……. 지금이라면 죽어도 좋다. 당신이 뭘 바라든 좋다. 말만 해, 뭘 원해!
이바 오설리반은, 삶에 무엇도 남겨두지 않은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Tá grá agam duit.
그것은 그의 마지막 비상이자 최초의 추락이었다.
아이슬란드의 물은 치명적이며 처염하다. 파도가 온몸으로 바위를 깎고 폭포는 물살과 부둥켜안고 맞서 싸운다. 그 가운데 어느날 시체가 떠오른들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서 크게 중요한 이물질이 될 순 없었다. 어느 이방인들은 모두가 은밀히 바다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안다.
마침내 파도처럼 맹렬히 싸우고 폭포처럼 맹목적으로 사랑한 뒤에 향수는 하루 추억이 되어 물안개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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