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

익명의 환마-1

루시엔이 죽기 전 아이슬란드의 이바를 찾아온 IF / 썸네일 @tyaxjfsla

선이네 by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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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물은 치명적이며 처염하다. 물살이 한 번 돌아 굽이치면 물안개가 일어 거대한 바위에 한 겹 흠을 내며 우르르 쏟아진다. 파도는 몸을 일으키며 물러서고 다시 온몸을 부딪쳐 바위를 깎는다. 폭포는 용맹한 물살에 굉음을 더하며 낙하하여 물은 서로를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서로와 온몸으로 맞서 싸운다. 그 격렬한 화해의 풍경을 홀몸으로 관조하노라면 근 몇십 년 입방아에 오른 생물학자가 주장한 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실인 듯하다. 모든 유기체가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말. 고대인들이 신화로 주장했던 가설은 과학으로 입지를 다져간다. 이바 오설리반은 그들이 은밀히 바다를 기억하고 있다 상상해 본다. 일평생 육지에 산 인간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그토록 맹렬히 싸울 수 없고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 없음을 슬퍼해 일어나는 재앙들, 그것은 필히 향수일 것이다.

이바는 높은 벼랑까지 올라오는 물안개에 옷이 젖도록 두었다. 두꺼운 털 코트는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지고 무릎을 말아쥔 몸이 옹송그려진다. 상념이 바위를 안고 흐르다 맥이 풀려 끊긴다.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날은 하릴없이 추워지고 있었다. 저만치서 서성거리던 백마에게 손짓했다.

자, 갑시다. 아흐트러eachtra.

말은 익숙하게 걸어 몸을 낮췄다. 이바는 등자쇠에 발을 걸어 체중을 싣고 몸을 올렸다. 고삐를 천천히 당기자 수뇌에서 지시받은 사지인 양 말은 매끄럽게 몸을 돌려 언덕을 향했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그들은 하늘하늘 나부꼈다. 붉은 머리칼과 놀면한 하얀 갈기가 허공에 뿌려졌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으슬으슬하도록 바람이 불어오자 고삐를 바짝 쥐고 고개를 움츠렸다.

드넓은 벌판을 백마 탄 채 홀로 가로지르는 여자. 그는 십이 년을 아일랜드에서, 이십 년을 잉글랜드에서, 그리고 오 년을 아이슬란드에서 보낸 자다. 십이 년 철없는 소녀였고 이십 년 천애고아 하녀였으며 오 년간 그 모든 삶을 지면에 올린 작가였다. 평생을 바친 글은 막힘없이 흘렀다. 지어내기보단 게워내듯이, 풀어놓기보단 쏟아내듯이 폭포처럼 글은 흘렀다. 설령 울분과 고뇌를 온전히 담아낼 언어를 찾지 못한들 이바 오설리반이란 인간만큼 격렬히 쏟아지는 폭포는 언제고 답을 주지 않은 적 없었다. 하여 그는 매서운 대지에서, 굉활한 바다에서 그 자신을 쉽게도 선언하며 오 년을 소리쳐왔다. 이바 오설리반의 삿되고 추악한 삶이 자아낸 궁극의 희망론은 순탄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때의 얼굴은 그의 저주스러운 삶 어느 구석을 뒤져서라도 찾을 수 없었던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그는 지평선의 끝을 노려본다. 주인공은 모두가 이해하길 포기한 신사적인 살인자에게 수 번을 죽으면서도 그를 설득하려 했다. 여자는 살해당하길 각오했고, 자신의 삶을 고해했다. 살인자가 죽고 얼핏 모든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 듯했지만 자신이 끝내 이겼음을 알았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어째서 각오했으며 어째서 신부 아닌 살인자에게 고해했을까. 왜 그였을까. 어째서 그것만으로 그 표정이 그토록 맑았으며……. 이십 년 얼어붙었던 얼굴에 오 년간 수없이 환희와 슬픔과 격정을 펼쳤던 그였지만 아직도 충분치 못한 것인가? 답은 분명 그의 안에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어 하나를 고른다고 골머리를 앓다 문장 하나를 고치며 종이 몇 장을 낭비하는 작가와 거리가 멀었지만 근래에는 그들을 이해하게 됐다. 며칠을 손에 쥐고 있던 결말부의 문장은 오늘도 완성되지 못했다. 안개가 없는 벌판, 저 끝 어디선가 한 이방인이 걸어온대도 훤히 알아볼 듯 바람이 말끔히 대지를 쓸어간다. 그 사이를 맹렬히 헤쳐 집으로 당도한 이바에게 불청객이 찾아온들 잠시도 그의 눈을 가리지 않도록.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살바람은 돌풍으로 바뀌었다. 창틀이 몸서리친다. 오늘은 다시 밖에 나서긴 어려울 테다. 난로 곁을 지키며 귀는 창의 비명에 눈은 불꽃에 둔 채 이바는 손에 말라붙은 잉크를 만지작거린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 검은 눈에 불길이 그림을 그리고 지우길 반복했다. 공기의 선율이나 불의 상형문자로 단어를 해독하던 이바의 귓가에 선명히 끊기는 두 음절이 가닿았다.

똑똑.

그리고 귀를 의심한다. 노크 소리. 가장 가까운 이웃도 찾아오려면 말을 타야 하는 외진 곳이다. 이런 날에? 누가? 그는 뜸을 들이기보단 소파에서 단숨에 일어나길 택한다. 나갑니다Ég kem núna. 익숙해진 아이슬란드어와 함께 큰 보폭이 마루를 가로지른다. 문을 열어젖힌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동시에 무엇도 상관없었다. 오 년 잠든 발음은 그날로부터 한 번 낭비 없었기에 닳음 없이 흘러나온다.

뤼시앵?

해쓱한 낯을 한 채 홀로 선 망명자.

에이바. 안색이 좋군요.

그리고 생기를 찾아 머리를 풀어 헤치고 선 작가. 이방인들은 서로를 호명한다. 밟은 땅은 그들 중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으나 이들은 잠시 제자리를 찾고 그대로 있는다. 바람이 잠시 말을 고르며 침묵할 때 그들은 여백에 남겨진다. 찰나. 에이바 오설리반은 환하고 뤼시앵 그르니에가 미소를 지을 듯하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고, 불청객이 성큼 걸어 집 안으로 들어서며 순간이 깨진다.

당신을 봐야 할 필요를 느껴서 찾아왔습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까?

스치는 루시엔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따라서 이바는 걸음을 옮긴다. 발자국마다 질문이 솟아난다. 한 걸음, 배를 타고 온들 여기까지 걸어오긴 쉽지 않을 텐데요. 괜찮으신 겁니까? 한 걸음, 연락하셨더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한 걸음. 날 생각했나요? 아. 불필요한 질문이다. 변함없는 호명만으로, 여기 위치한 루시엔의 존재만으로 이는 기정사실이다. 모든 의심보다도 이바는 오 년만큼 기뻤다.

짐은 얼마 없으니 잠시만 신세 지도록 하겠습니다. 욕실을 쓸 수 있으면 좋겠…….

그러므로 루시엔이 그 순간 밭은기침을 쏟아내며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이바는 팔을 한 아름 벌려 루시엔을 끌어안았으리라. 이바는 이곳의 칼바람이 얼마나 유독한지 알았기에 놀라지 않는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이바는 루시엔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난 사라지지 않습니다. 뤼시앵. 진정해요. 들어오십시오. 난로 곁에 앉아 있으면 담요와 차를 내오겠습니다.

실내로 울리는 날파람의 외침 속에서도 속삭임은 선명했다. 이바는 팔에 힘을 주어 몇 걸음을 뒤로 물리며 문을 닫았다. 바람의 마지막 입김에 난롯불마저 흔들렸다. 루시엔은 이바의 팔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선다. 난로 곁 의자에 몸을 파묻은 그는 이바가 방에서 가장 두꺼운 담요를 꺼내 덮어주고 물 주전자를 올리는 동안 영영 일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로 있다. 주황색 불빛에 파리한 옆얼굴이 적셔진다. 혈색이라곤 남김없이 빠져나간 채로도 그의 두 뺨엔 어떤 생기가 감돌았다. 기이하게도. 정열에 달뜬 청년인 양 흥분한 기색, 어쩌면 그것은 눈앞의 여자 때문일 수도 있고 발뒤꿈치를 바짝 쫓아오는 망명의 계기 그 당시의 감각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몇 차례 숨을 고른 뒤 그는 눈을 뜨고 이바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좇는다.

내가 왜 왔을지, 당신의 추측을 듣고 싶군요.

시선 끝에서 이바는 정연한 동선으로 움직인다. 자신을 돌보는 일은 다섯 해째 애를 써야 하지만 타인을 돌보는 건 습관적인 일. 등을 돌리고 선 채 주전자의 몸통에 손을 몇 번 대더니 잔에 물을 따르고 찬장에서 꿀단지를 꺼내는 일련의 행동엔 걸림이 없다. 마치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의자를 끌어와 맞은편에 앉고서 꿀차를 쥐어 줄 때 그는 입을 연다. 비로소 짧은 침묵이 추론의 시간이었음을 루시엔은 알아챈다.

당신이 온 이유요. 글쎄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움푹 팬 뺨과 푸석해진 연갈색 머리카락 아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다. 외려 얼음장처럼 차다. 산 자보단 죽은 자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눈앞의 청년에게서 빈민의 죽음과 눈싸움을 마치고 막 돌아온 소년의 발개진 뺨 그 생기를 동시에 본다. 손을 거둔 채 깍지를 끼고 등을 세우는 그는 글을 쓰는 순간만큼이나 진솔하고 진중하다.

내 추측을 듣고 싶어서. 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시엔 그르니에는 가쁜 호흡을 다스리려 애쓰다 맥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김이 오르는 잔을 그러쥔다.

예,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제게 소망이랄 게 있다면 영구한 수수께끼로 남는 것. 정확지도 않은 답지를 펼쳐서 제시하는 것만큼 제가 혐오하는 행위는 없습니다만…….

그리고 그는 찻물을 조금 들이킨다. 속에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고, 한참 뜸 들인 끝에 속삭인다. 이미 그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이바 오설리반에게 완벽한 수수께끼로 남는 데 실패했음을 안다. 이내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새벽 어스름이 걷힐 무렵 런던의 어느 종탑을 향한다. 포박된 남자와 루시엔 그르니에는 교회 종이 코 끝에 스칠 거리에 누워 있다.

설명하지 않고서야 당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러했으나 당신께 말하지 않았는데, 끝이 임박한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멋진 죽음을 계획했었지요. 자애로써 오 년을 보내고 살인으로 끝을 맺으려 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삶을 쌓아 올리기보다 소모하기에 급급했는데 매 순간이 즐거웠으니 후회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최후의 순간, 여명의 종이 울리며 머리통을 부수어놓기 직전. 나의 마음은 아주 평온하였는데, 어째서인지 못다 본 글이 아쉬웠습니다. 모든 게 덧없을지언정 당신이 내가 죽지 못한 이유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창문의 흔들림이 멎어 고요하다. 색색대는 숨과 타오르는 불씨만이 소란하고 이바와 루시엔만이 있는 시간이 지난다. 이바가 모든 함의를 읽어내는 것은 빠르다. 그는 평생 세계를 이해하려 애썼으므로, 타인의 행간을 유추하는 일에 익숙하다. 파리한 낯, 담담한 어조, 수수께끼가 되고 싶었으나 저 자신을 설명하는 시한부 환자. 죽음에 가닿는 다섯 해와 자애를 희구하고서 살인을 저지른 것.

그들은 재회의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어렵지 않게 오 년 전 볼링브로크 공작저에 발을 딛고 서 있다. 그날에 루시엔 그르니에는 영국으로 추방된 지 일 년 된 살인자였으며 이바 오설리반은 영국에 떠밀려 온 지 스무 해 된 하녀였다. 세간의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마저 불사르며 혼란을 향하던 자와 세간의 모든 기대를 짊어지고 자신을 죽이며 속세를 향하던 자. 이름 모를 잣대 위에 선 이방인들. 세상의 저울에 올려 그들 삶의 가치를 평가하긴 쉬우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바 오설리반은 살해당하길 각오했고, 자신의 삶을 고해했다. 나는 그릇되이 살아왔고 당신 또한 그러하므로 날 오 년만 기억해달라고, 그 정도면 모든 걸 바꾸기엔 충분하다고. 오 년……. 좋습니다. 제 인생에 남은 햇수 중에선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하니, 그 정도는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거짓말. 그리고 루시엔 그르니에는 약속의 기약이 다다른 지금 죽음을 고하고 있다.

오 년. 되새긴다. 이 이기적일 만큼 두려움을 버린 여자는 눈물을 보이거나 삶을 부정하거나 운명을 저주하는 대신 해끔하게 웃는다. 그리고 누설할 수 없는 비밀을 쉽게도 묻는 공범자.

난 당신의 평생이었나요?

범죄자는 몸을 구부리고 발작적으로 기침하더니 헐떡인다. 어쩌면 웃는 것도 같고. 그렇다. 이내 패배 선언이다.

예, 당신이, 나의 평생이었군요.

이로써 이바 오설리반의 승리는 확정이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루시엔이 힘겹게 말을 끝마치고도 그 미소는 몇 찰나를 더 이어진다. 하지만 인내심이 좋지 못한 여자는 전부 놓아버리고 허파에 바람이 찬 듯 웃어젖힌다. 무릎 위에서 치마를 부여잡고 천장을 향해 터뜨리는 웃음이 언덕 위 작은 집에 울려 퍼진다. 그는 몇 번이고 답을 채근해 모르는 이야길 듣고 싶었다. 몇 번이고 답을 줄 듯 앗아가며 골려 주고 싶었으나,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남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눈앞의 호적수를 마주 보는 동공은 난롯불의 타는 불씨가 비쳐 이글거리듯 빛난다. 헐떡임을 다스리고 겨우 몸을 펴는 루시엔의 양 뺨을 끌어당겨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행운의 여신께 바치는 헌사처럼. 떨어진 그의 얼굴은 흐트러진 붉은 머리 사이로 희게 빛난다.

루시엔은 인간미라곤 없는 화가가 착실한 붓질로 그려낸 것만 같았던 하녀의 무표정을 떠올리며 넋을 놓고 바라본다. 오 년 전, 그가 서른여섯이고 이바 오설리반이 서른둘일 무렵에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던가. 그러나 부정적인 감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이 여자가 삶을 움켜쥐는 이 순간을 그의 눈으로 확인하고자 여태 달려왔으므로. 삶, 그것은 붉은 머리와 흰 이마를 지닌 여인의 형상으로 그에게 왔다.

이바는 루시엔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이 그들에게 그러지 않듯이.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분주한 뒷모습이 활짝 열린 문틈으로 훤히 보였다. 떨어진 종이를 줍고 정렬하고 책상에 탁탁 쳐 모은 뒤 두꺼운 종이 다발을 들고 문턱을 나섰다. 몸을 숙이느라 어깨로 떨어진 머리칼을 한 손으로 넘기며 다른 손으로 빳빳이 편 종이를 건넸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 루시엔의 곁에 바짝 붙어 앉기까지는 아주 순식간이다. 그는 여전히 미소 밴 얼굴로 말했다.

어서 읽어보세요. 당신 삶에 여한을 남기게 하긴 싫으니까.

루시엔은 곁에 앉은 여자의 체온과 숨결에 잠시 주의를 빼앗겼다가, 이내 종이로 시선을 돌린다. 기력이 쇠한 손이 문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기상천외하고 괴기한 단어의 조합을 넘어 문장을 읽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인물을 보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든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얼굴을 밝힌다. 수많은 사람이 나오는 군상극, 삼류 소설과 같은 추잡함과 비현실성. 하지만 말라붙은 잉크와 갈라진 펜으로 파낸 초상은 눈에 박힐 듯 선명했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 유령을 닮은 불길한 여자. 식인을 일삼는 아가씨. 교수형을 당하는 귀족. 죽고 죽이는 몇 날 며칠의 연회. 그곳에 놓인 두 명의 독자만은 실화를 읽는다. 그들과 아주 닮고 또 다른 이들이 종이 위에서 숨을 얻고 움직인다. 검푸른 눈과 새카만 눈이 지면을 훑고 지난다. 작가는 자신의 글에 준엄한 시선을 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트를 집어 더할 부분과 뺄 부분을 써 내리며 흑요석처럼 검은 눈이 종이와 노트 사이를 바삐 오간다.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는 동안 현실은 묵언수행 해야 할 때를 알고 침묵을 지킨다. 해는 지면이 수백 년을 거론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첫 장을 펼친 순간에 고정된다. 같은 이야기 속 그들은 현재에 없는 어느 순간에 영원하다.

그리고 완결되지 않은 마지막 문장에 다다르자 현실은 틀어막은 숨을 천천히 뱉어내기 시작한다. 시들하게 죽은 장작 위로 난롯불이 허약한 숨을 캑캑대는 소리가 들렸다. 해그림자는 종이를 붙든 손가락 밑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독자는 고개를 들어 저자를 본다.

생각했던 대로 저주스럽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역겨우며…… 동시에 무엇보다 아름다운 글입니다.

그럼요.

저자는 자신이 적은 글씨 아래로 줄을 몇 번씩 그으며 찡그리다 이마를 편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는 이미 받았다는 양 독자를 마주 보며 만족스러운 그리고 당연한 미소를 보낸다. 독자는 진솔하다.

당신의 글은 백 년쯤 뒤에 역작으로 읽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 또한 이 글이 사장되어 흙으로 돌아간대도 좋습니다.

노트에 펜을 끼워 넣고 덮으며 중얼거린다. 내가 읽고 당신이 읽었으면 전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바는 몸을 돌려 노트를 탁상에 올려둔다. 루시엔의 기침 소리가 몇 번 있은 후 평이한 문장이 이어진다.

이것은 당신이 불가해에 붙인 이름이군요. 서른두 해 쓰고 다섯 해 갈무리한 결과물……. 살인자가 죽은 이후 주인공은 어떻게 됩니까?

미소는 엷어진다. 등받이에 깊이 기대며 가늘게 내쉬는 숨에는 긴 침음이 담긴다. 그는 주저하는 얼굴이나 명료하고, 확신에 찬 얼굴이나 막연하다.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는 죽을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 살다가 홀연히 사라져 영생을 사는 것은 아닐까 의심케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그다운 결말이지요. 언제나 부족한 것은 동기입니다…….

동기는 당신만의 것이고, 독자들의 몫이 아닙니다. 에이바.

이바는 말을 곱씹으며 몸을 늘어뜨린 채 있다. 이윽고 등을 쭉 뺐다가 반동으로 조금 일으키며 묻는다. 어땠으면 좋겠습니까, 그의 결말이요.

죽어야 한다면…….

이바 오설리반은 전제를 읽는다.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사실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지만’. 어째서? 살인자는 죽고 루시엔 그르니에도 죽는다. 주인공과 이바 오설리반 또한 죽을 것이다.

그가 죽든 죽지 않든 중요한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그의 죽음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지역 신문에 작은 부고조차 실리지 않고, 무덤에는 묘비가 없길 바랍니다.

유한하기에 빛났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발포하고, 징벌받고, 쾌락을 탐하고, 몇 번이고 사는 여자를 몇 번이고 죽이며 간절히 해답을 갈구하는 일이 비로소 성립했다는 것을. 루시엔 그르니에는 사형수였기에 자유로웠다. 기침 소리. 어깨가 들썩이고, 얼굴엔 병색이 완연하다. 그런 중에도 입술은 희미한 미소를 내건다.

그래서, 누구도 그의 죽음을 확신할 수 없도록. 언젠가 먼 미래에 그의 글이 발견되었을 때 생몰 연도가 미상으로 남도록.

하지만 옆얼굴을 타고 흐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창백하게 바랜 얼굴과 검게 물드는 눈동자를 맞닥뜨리는 순간 그는 깨닫는다. 터무니없게도. 그 미소를 영원히 보고 싶었다.

그들이 주인공을 이해할 방도가 이 종이 뭉치밖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바 오설리반은 그가 오백 년을 살길 바랐다.

루시엔은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에 대해 논하듯 말을 맺었고 이바는 그의 입에서 서술되는 죽음을 정독했다. 이 집의 벽 사면이 종이로 만들어졌대도 놀라지 않으리라. 그는 지금 절벽 위에 서 있다. 광활한 물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곧 있으면 활자로 이루어진 세상 속 그 누구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생사를 모른다. 그자는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고, 그는 하나의 명료한 형언이 그 표정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정적. 낮에 거세게 언덕을 활주하던 바람은 온데간데없다. 불티의 끊기는 잡음은 불규칙한 마침표를 찍어대고 이곳은 독백으로 가득 찬다. 검게 드리우는 그림자와 손 위로 얼룩져 사라지지 않는 잉크 자국이 뒤섞여 일렁인다.

노을이 물러나고 어스름을 부르는 초저녁,

아이슬란드의 한 언덕 위 외딴집 안,

에이바 오설리반 그리고 뤼시앵 그르니에.

에이바 오설리반, 선뜻 입을 열지만 말을 꺼내지 않는다.

다음, 그는 소리 내어 양 발로 바닥을 딛고 훌쩍 일어선다.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 이어지는 말은 맥락에서 벗어난다. 불을 많이 쬐어두세요, 뤼시앵 그르니에.

이걸 보지 않고서 세상의 모든 쾌락을 탐했노라 말하는 이가 있다면 난 실컷 비웃을 테니까요. 당신 모습을 보아하니 밧줄이라도 필요할 것 같군요. 자, 가장 두꺼운 코트를 꺼내오겠습니다. 설마 죽을 만큼 무리하긴 싫다고 하진 않겠지요? 끝까지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가 되어야죠. 그래, 한창 바람이 많이 불었으니 하늘의 비밀을 엿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겠군요. 이래서 의지만 있으면 세계는 따라와 준다니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허영이 든 시인처럼 그는 팔을 휘저으며 눈을 감고 낭송조로 읊는다. 큰 보폭으로 집안을 헤집으며 늘어놓는 말은 두서없고 불친절하다. 바삐 움직이는 그가 얼굴을 비출 때마다 반짝거리는 눈빛이 들어온다. 이바 오설리반은 재킷에 코트를 껴입고 뒤늦게 생략된 많은 것을 유추하느라 바쁜 루시엔 그르니에에게 느닷없이 옷가지 한 덩이를 안겨준다. 작은 문을 열려다 별 대수롭잖은 것인 듯, 그는 돌아보며 대뜸 묻는다. 두꺼운 털 코트를 헤치고 어렵사리 ‘오로라’ 그 비슷한 말이 들어가는 질문을떠올리던 루시엔은 선수를 빼앗겼다.

승마를 즐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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