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휴] 바벨의 탑-1

선이네 by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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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 물살과 함께 부서지는 그날의 향기. 그들은 기다란 해변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날씨에 대해 물 내음에 대해 미뤄두고 온 업무 더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핀잔을 주다 누가 먼저 누구를 물에 빠트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햇살은 따스했다. 다음 날 감기에 걸릴 걱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들은 겨우 걸어 나온 해변에 실없이 주저앉아 모래성을 쌓았다. 아네사가 두 손 가득 퍼 올린 모래 더미와 휴버트의 모래 한 줌이 비슷했다. 미끄러지고 달라붙으며 탑은 얼추 모양새를 갖추었다. 맨손으로 쌓은 것치곤 썩 괜찮은 태였다. 깃발 비슷한 것을 찾으려 주변을 헤치다 겨우 나뭇잎을 꽂으려고 돌아보면 그사이 작은 풍랑에 부스러진 형체. 아네사는 서운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휴버트는 아네사가 애쓴다는 걸 모르는 척하려 애썼다. 이윽고 아네사는 모래 더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잔해를 그러모으며 말했다.

무너뜨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뭐든. 수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쌓은 탑도 땅이 한 번 움찔대면 흩어지죠. 그러니까 무너지는 걸 두려워해선 안 돼요. 몇 번이고 다시 쌓아 올려야 해요. 애당초 무너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고도를 낮추며 활강하는 햇빛. 물에 젖은 손은 반짝거린다. 녹색 눈은 곧은 시선을 내리며 완성된 모래성을 그리고 있다. 그가 어떻게 거역할까. 휴버트는 잠자코 마주 앉아 잔해를 퍼담았다.

그린우드 경위. 듣고 계십니까?

아. 예. 죄송합니다.

휴버트 그린우드 경위 들어오세요.

예.

젖은 모래는 따듯했었다.

거기 앉으세요. 우선 부인의 일은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공무수행 중 입은 피해가 아니라 재해보상은 불가합니다만 사망조위금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안내받으셨습니까?

부르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경위. 무리하면서까지 검거한 범죄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형량을 받았을 때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건 당신만 겪은 일도 아니고 당신만의 고통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날의 과잉 진압은 용납이 불가한 수준입니다.

제가 그날 한 일은 과잉 진압이 아니었다고 누차 진술 드렸습니다.

그게 정당한 직무수행이었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제발. 그 부분에 대해선 이야기가 이미 된 거 아닙니까. 이렇게 나오면 당신에게만 불리해집니다. 여기 중에 당신 사정 모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꼬박 일 년을 괴로워하다 비보를 들었으니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서장님.

말씀하세요.

그는 이 상황이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피로감이 덜해지는 건 아니었다. 언제 이 모든 게 끝날까. 오른손으로 만져지는 왼손가락 사이 금속의 질감. 그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되새긴다.

서장님이라면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게 아닙니다.

무너뜨리는 건 어렵지 않다. 뭐든.

치밀하게 계획했고 그랬기에 동료들조차 끌어들이지 않았습니다. 부하 직원을 향한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재판도 끝난 치들이 이송 중 반항할 이유가 어딨겠습니까. 제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애당초 퇴사에 성공했다면 직무 이행 중 죽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라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사직서를 반려했겠습니까? 당신이 얼마나 이 일을 아꼈는지 아는데 잠깐의 괴로움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그런 거죠.

서장님을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제 부탁은 하나뿐입니다. 절 사무실이 아니라 취조실에서 보게 해주십시오.

그린우드 경위.

직무의 일환이었다는 변명 따위 할 생각 없습니다. 경찰이라는 이름 아래 제 죄를 가볍게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린우드.

저는 살인자입니다.

그러니까 무너지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휴버트 그린우드는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형량을 받았다. 업무의 일환이었다는 변론이 어려우니 동료들은 심신미약 처분을 권했지만 변호사조차 선임하지 않은 그를 설득하기란 불가능했다. 허나 그는 거짓을 보태가며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진 않았으므로 가중 처분도 없었다. 제 입으로 그걸 요구하지도 않았다. 계획에 따른 두 명 이상 살인. 정확히는 중상자 네 명에 사망자 서른일곱 명. 폭주와 맞먹는 규모. 반성의 기미 없음. 극단적 인명경시 살인으로 삼십 년형을 선고. 테러 집단의 수뇌가 받았던 형보다 칠 년이 길었다. 우스웠다. 잿빛 건물에 들어선 첫 소감은 담백했다. 여긴 며칠마다 빨래를 돌리는 거람. 그리고 두 번째 소감. 오래전에 여기 왔어야 했는데. 늦기 전에.

수감이 확정되자 그는 줄곧 거부했던 면회를 승낙하기 시작했다. 실망이에요. 왜 그랬어요? 당신의 인생을. 그들이 그런 걸 바랐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당신이 두려워. 선배님을 존경했었습니다. 이젠 그러지 못할 것 같군요. 더는 널 보고 싶지 않아. 휴버트.

응.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

이후로는 같은 방의 재소자가 말해준 대로 됐다. 얼마나 날린 범죄자든 간에 며칠 내로 묻혀버리고 면회는 점점 뜸해지고 하루이틀은 바깥 생각이 날지라도 곧 잊어버린다고. 그러다 가끔씩 떠올라 고통에 밤잠을 못 이룰 날이 올 거라고. 아니 마지막은 틀렸다. 가끔이 아니었다. 의무관은 불면증 약을 전달하며 오남용에 대해 신신당부했지만 그 또한 너무나 익히 아는 부분이기에 흘려들었다. 동료 재소자는 도통 긴 답을 돌려주지 않는 수감 번호 8136번에게 금세 흥미를 잃었다. 고립은 편했다.

그는 출소 후 자신에 대해 그다지 많은 상상을 하지 않았기에 시간을 할애할 것도 없었다. 복역 중 월급이 나오면 편지지를 샀다. 보는 눈이 좋지는 않았지만 나름 오랜 고민을 거쳐 골랐다.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는 글을 다 쓰고 나면 새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길면 안부 인사까지 짧으면 받는 이에 대한 수식어의 첫 글자까지 적고 버려졌다. 잘 지내요? 지운다. 거긴 어떤가요? 지운다. 미안해요. 지운다. 늘 그리운. 사랑하는.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나의……. 열 장들이 편지지를 세 묶음쯤 사면 네 장은 부치고 스물여섯 장은 버렸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하루 세 시간씩 허락되는 낡은 브라운관이 그에게 세속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세 시간의 제한을 다 채운 적은 없었는데 단 하루만은 예외였다. 엄선된 폭력과 범죄를 낭송하던 브라운관에서 지겹도록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을 때. 낯익은 만큼 섬뜩한 단어를 들은 날. ……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국은 오 년 만에 그것도 연달아 등장한 폭주자에 대해 정예 부서를 신설할 것으로 밝혔으며 이례적인 폭주 규모에 대해. 그는 모든 채널을 뒤져가며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날 그는 의무관의 말을 어겼다.

 

그가 몸을 수그리고 누우면 벽에 걸린 헤진 포스터가 보인다. 웃는 표정으로, 범죄를 근절합시다. 그래서 그는 행했다. 악을 뿌리 뽑았다.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를 죽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였다. 하지만 기만이야. 그도 알고 있었다. 악은 실재가 아니라 현상이다. 바람을 붙잡고 파도를 가둘 수 있을까?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 일몰을 자를 수 있을까? 전쟁의 목을 조르면 평화가 따라오나?

그러니까 이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2.

수감자들이 이송되는 건 마지막 순서였다. 주민들은 일찌감치 떠나갔지만 수감자들의 생사에 대해 걱정하는 높으신 분은 몇 없었다. 도시를 건너던 중 수감자들에 의해 호송용 블루버드가 망가지자 탈옥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어떤 난동이 있든 간에 자리를 지키고 앉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그들을 포기했고 황폐해진 땅에 흩어진 죄수들을 모아 또 다른 감옥으로 옮기려 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을 철창에 넣을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주 쉽게 형기의 삼십 분의 일을 지내고 휴버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정확히는 더 넓은 감옥으로 나왔다. 비닐을 벗어난 금붕어는 어디로 갈까. 어항으로 간다.

교도소까지 돌아가는 덴 금방이었다. 입소할 때 맡겨둔 짐은 헤집어져 있었지만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현금을 제외하고는 전부 그대로였다. 발 빠른 동료들이 지갑째로 가져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진 속 아네사는 행복해 보였다. 지문이 한없이 겹쳐 구석이 닳았지만. 들어올 때 입었던 옷은 어제 벗어둔 것처럼 잘 맞았다. 그는 그대로였는데 세상은 고요했다. 묵언수행을 하는 세계. 행선지를 물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 며칠을 걸었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 보면 하늘은 소등한다. 지상의 누구도 불을 켜지 않아 길잡이는 발아래 버석이는 풀잎과 단단한 아스팔트의 감각뿐이었다. 어스름은 긴데 날이 흐려 달이 없었다. 그는 서쪽을 바라보고 적당히 추위를 피할 곳에 기대앉았다. 아직 완전한 밤이 찾아오지 않아서 그래. 곧 달이 뜨겠지. 그러면 다시 걸어야겠다. 어디로든 상관없다. 어디든. 어디도. 맞아줄 곳은 없으니까. 상관없다. 그는 미래를 소진했고 과거는 헤지고 닳아서 가진 거라곤 현재뿐이었다. 흑암 사이로 초점을 맞추려 애쓰다 그는 눈을 감았다.

꿈속의 아네사는 지쳐 보였다. 머리칼은 정리되지 않은 채 어깨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으며 품이 맞지 않는 옷은 어색해 보였다. 그러한들 아네사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고생을 많이 한 낯이었다. 두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게 그가 사랑한 아네사였다. 그가 이쪽을 보고 눈을 크게 뜨자 푸른 새벽녘 속에서도 눈동자가 선명히 빛난다. 한두 발짝 신중히 내딛던 걸음은 어느새 달음질이 된다. 숨을 몰아쉬며 묻는다.

휴버트?

아네사. 오랜만이네요.

당신 맞아요?

수면제를 먹으면 꿈을 잘 안 꿔요. 그래서 당신 얼굴 보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듣고 있는 거죠? 나예요. 정신 차려 봐요.

그래요. 당신이죠. 꿈을 꾸면 언제나 당신이니까. 머리가 꽤 길었네요. 하기사 일이 년인가 지났으니까. 마르긴 왜 이렇게 말랐어요? 내가 그동안 밥 안 챙겨줬다고 시위하는 거예요? 미안해요. 만났을 때 집밥이라도 싸줄걸. 뭐가 그리 급하다고.

휴버트, 나 죽지 않았어요. 멀쩡히 살아서 여기 있잖아요.

울지 마요. 이런 적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지금까지 당신은 아주 행복한 모습으로만 나왔어요.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마주친 당신은 내가 알던 사람이랑 너무 달라서…… 뭐가 꿈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참. 내가 행복에 너무 절여졌나 봐요. 그건 반성할 수 있었어요. 다시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죠. 그런데 당신에게서 행복을 뺏은 건…….

휴버트.

일이 년이 아니에요. 정확히 일 년 십일 개월 하고도 십사 일 지났어요.

휴버트.

오늘은 왜 이렇게 생생하지. 이번에도 꿈이면서.

꿈 아니에요.

이번에도 꿈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네사는 휴버트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도록 내버려두다가 그의 품에 파고들어 많이 울었다. 휴버트는 울음소리에 맞춰 가볍게 튀어오르는 등에 양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미안해요. 휴버트는 중얼거렸다. 아네사가 냉기에 곱은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그는 손을 겹쳐 잡았다. 날이 차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조직원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몇몇은 동료의 대부분이 사라지자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본거지는 경찰과의 충돌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모두가 잔재 아래 깔린 아네사의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은 조직원들이 복수를 꾀하려 건물을 샅샅이 뒤지기 전까지 아네사는 완전히 혼자였다고 한다. 허기에 잡아먹힐 지경이 되자 자신을 발견해 준 게 누구인지 알면서도 기뻐할 뻔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더욱 깊은 곳에 숨어 아네사를 연구했고 많이 절박해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어째선지 자신을 바깥에 보내는 일이 없었단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이 소규모로 테러리즘을 행할 작정인지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서도 궁금증이 들었다. 분명 비능력자라고 알고 있었던 조직원이 폭주를 일으키자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지만.

인공적으로 폭주를 일으킬 방도를 찾은 게 분명해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 틈을 타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신계 이능력이라 탈출할 때 목숨에 지장은 없었지만 막상 나와 보니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예상은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소규모 집단이 저질렀다기엔 폭주자가 너무 많던데. 어떻게 된 건지 알아요?

구체적인 경로는 모르겠지만 특정 행위자가 없어도 이능력을 증폭하도록 하는 인자를 퍼뜨린 것 같아요.

전염처럼요.

아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버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작은 돌멩이를 집어 아스팔트에 약도를 그렸다. 긴 도로를 그릴 때 돌조각은 마찰하며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우리가 여기에 있고, 집은 저기에 있어요. 이곳은 위험구역으로 지정돼서 정부에서 다른 지역으로 대피하도록 조치를 취했어요. 대피 지역까지는…… 무리하지 않고 걸어서 닷새쯤. 국도를 따라서 서쪽으로 쭉 가면 되니까 헤매진 않을 거예요. 다만 우리 집은 경로의 정반대라 시간이 너무 오래 소요될 것 같아요. 길에서 필요한 걸 챙겨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주인 없는 거라도 손 대기가 꺼려지지만……. 대피 지역이 그렇게 멀어요?

처음엔 가까운 지역으로 배정됐는데 점점 위험해지다 보니. 거긴 아직 괜찮다고 들었어요. 다들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걸을 수 있겠어요?

다시 끄덕. 휴버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네사의 손을 잡아주었다. 일어서며 묻는다. 그런데 휴버트는 왜 지금까지 여기 남아 있었던 거예요? 휴버트는 아네사의 손을 쓸어주곤 입을 연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아네사는 어디선가 들고 온 낡은 가방에 거리에서 챙긴 식료품과 옷가지를 넣어둔 상태였다. 휴버트는 빈손이었다. 아네사는 이 먼 곳까지 가져온 게 단 하나도 없냐며 놀랐지만 휴버트는 지갑 속의 아네사 사진을 보여주는 걸로 답했다. 그날은 보이는 족족 상점에 들어가 쓸모있는 물건을 챙기며 걸었다. 어디나 물건은 거의 사라져 있거나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휴버트는 음식 상태에 아랑곳않고 빈 다이너에서 캔 수프와 스포츠 음료를 내 주며 직원 흉내를 냈다. 아네사는 금세 잘 웃었다. 출발할 때마다 그들은 손을 잡았다. 놓았다간 눈 깜빡할 새 사라질까 봐 무섭다고 말하지 않아도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상 같은 당신. 겨울 바람이 살을 부르트게 했지만 손을 집어넣으라는 말을 못내 하기 싫어 둘 다 한 손씩 새빨개진 채로 밤을 맞이했다. 운 좋게 편의점 카운터 아래서 발견했던 라이터로 지푸라기에 불을 지필 때 아네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캠핑 온 것 같다. 도로 요금소에 비좁게 들어가 옷을 깔아두고 잠을 청할 때마저 아네사는 행복해 보였다.

아네사는 도착하면 뭐 하고 싶어요?

우선 아버지들을 만나야겠어요. 그리고 동료들도요. 괜히 걱정시키고 마음 고생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해야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많이 궁금하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싶어요. 당신이랑 마시는 맥주 한 캔이 엄청 간절했고 또…… 실종 신고해뒀다가 돌아오면 처리할 게 엄청 많을 것 같긴 한데 그건 나중에 생각할래요. 위기 상황이니까 내가 도울 게 있으면 일단은 돕고 싶은데.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그는 하얀 손으로 휴버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반쯤 먹먹하게 묻힌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말한다. 그냥 당신이랑 이렇게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난 이것만으로 괜찮아요. 아네사의 귓가에서 휴버트의 심장 소리가 울린다. 아네사의 등에 올려둔 손 밑으로 심장 고동이 전해진다. 휴버트. 사랑해요. 휴버트는 연인의 머리에 입을 맞춘다. 아네사는 행복하게 웃었다. 그는 얼마나 황폐한 세상 가운데 있든 기쁨에 겨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잘 자요. 휴버트가 속삭였다.

그리고 침묵한다. 고요 속에 그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나도 사랑해요 아네사.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입 안에서 수 번이고 단어가 맴돌았다. 사랑한다고 답할 차례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간 손 아래서 뛰는 심박이 끔찍이도 두렵다고 실토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이능력을 사용했을 때 수십 명을 죽였고 이후로는 쭉 구속구를 찼던 그가 과연 실수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당신의 뜻을 거스른 제가 사랑을 말한다면 그건 둘도 없는 죄악일 것만 같았다. 어느 신 어느 법의 잣대 아래보다도 그의 연인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 가장 공포스러웠으므로. 그는 엇갈리며 뛰는 맥동이 시끄러워 잠을 설친다.

창밖에서 짓쳐들어오는 한 줄기 달빛은 저 멀리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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