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휴] 바벨의 탑-2

선이네 by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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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휴버트는 교도소에서 나설 때 생존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첫 며칠을 걸을 때도 견디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서만 식량을 찾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전부 걸었다. 여행을 떠난 것 같지도 방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집을 잠깐 나섰다가 영영 돌아갈 곳을 잃은 차림. 아네사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휴버트의 눈가에서 묻어나는 회한을 보면 꼭 그게 자신의 지분인 것 같아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뭐라도 묻었냐며 능청스레 답하는 휴버트의 목소리는 침잠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 조심스럽게 물어 보면 그는 뭉뚱그린 답을 내놓았고 아네사는 화내지 않았다. 때로는 그게 서글펐다.

성인 두 명이 하루 종일 걷는 데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첫날에 넉넉히 구해놨다 생각했지만 이튿날에 금방 동이 났기에 또 도로를 벗어나야 했다. 근방은 갈대가 우거진 벌판이었고 인가는 가끔씩만 나왔다. 칼바람이 스친 땅에는 풍랑이 일었다.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갈대밭은 걸어가기보단 저어가야만 했다. 처음 만난 세 집은 전부 비어 있었다. 창고까지 뒤져보았자 침낭 하나와 외투 두어 개쯤을 들고 떠날 수 있었다. 네 번째 집은 나무로 지은 오두막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흩어지는 매캐한 먼지에 휴버트는 기침을 토해냈다. 그래도 잡동사니는 많겠네요. 가 봐요.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 통나무집은 어둑했고 밟을 때마다 판자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년도 더 전에 버려진 것 같은데. 다락방만 뒤져보고 나가요. 나무 사다리는 휴버트의 체중이 실리자마자 비명을 질렀기에 아네사 혼자 다락에 올라가기로 했다. 사다리는 으스러지지 않고 아네사를 올려보냈으며 거기서 아네사는 쉽게 비상식량을 찾을 수 있었다. 탄성을 낸 후에야 그는 그것은 편의점에 쌓여 있던 과자 봉지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음식을 찾았어요. 그런데…… 누가 여기서 지내고 있던 걸까요? 제대로 된 전투식량을 갖춰놓고 있어요.

안전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나 봐요. 보수공사는 십 년쯤 안 한 것 같은데.

중간에 들어와서 지낸 것 같은데요. 제조 일자가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왜 대피하지 않고 혼자 이런 데 있었을까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뭐 쏟았어요?

아래에서 우르르 엎어지는 소음이 난다. 아이고, 하는 소리가 잇달아 나고 이후 달각거리는 소리. 정리해 봤자 온갖 잡물의 무질서함 사이에서 더 나아질 건 없을 것 같았다. 휴버트가 쪼그리고 앉아 일일이 주워 담는 모습이 그려져 아네사는 작게 웃었다.

아무튼 마음에 좀 걸려요. 우리가 아무리 돌아가면 다 배상해 주기로 했지만 여긴 정말 누가 임시 거처로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왜 굳이 이런 데를 골랐는진 모르겠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걸 가져가고 싶진 않아요. 해 지기 전까지 부지런히 걸으면 주거지구에 진입할 것 같은데. 듣고 있어요?

아네사.

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나가는 게 좋겠어요.

아, 그래요.

빨리 나가야 돼요. 내려올 수 있겠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네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휴버트는 안쪽에서 사다리를 받쳐주고선 시선으로 아네사의 등 뒤를 가리켰다. 바닥에 쏟아진 수십 수백 개의 주사기. 마약일까요? 휴버트는 말했지만 아네사는 고개를 젓는다. 어둠에 반쯤 가려져 있어도 그가 몰라볼 리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누적된 경험은 어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주사기 배럴에 담긴 액체의 색깔과 바닥을 적실 때의 점도 그리고 냄새를 확인한다. 각인된 공포는 온몸에 전율을 흘려보내 말소리를 떨리게 한다.

내가 만든 거예요.

그 말 한 마디로 둘은 열린 문 뒤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주인을 확신한다.

휴버트는 큰 걸음으로 나서 아네사를 가리고 남자가 겨눈 권총 앞에 섰다. 그리고 짐짓 긴장한 듯이 양손을 들어 보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총과 손을 엇갈려 쳐내며 낚아챈다. 사흘 전에 이자를 만났더라면 미간에 남은 탄환을 다 박아 넣었을 텐데. 운이 좋다고 그는 생각한다.

손 들어. 문에서 비켜.

휴버트는 남자의 탁한 눈동자와 다물리지 않은 입을 알아채고 미간을 구긴다. 이런 XX……. 남자가 어설피 물러서다가 잡힌 문턱이 으크러지며 판자는 나뭇결을 새기며 그대로 산산조각난다. 발밑에서 버겁게 떨쳐나가며 반으로 갈라지는 바닥. 새로 등장한 폭주는 그 규모와 강도가 훨씬 심화된 것을 특징으로 하며. 돌려 들은 뉴스의 일부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이성이 사라진 상대에게 협박은 필요 없다. 겨눈 총을 치우고 반사적으로 등 뒤에 선 이를 감싼다. 괜찮아요? 아네사는 휴버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는다. 도망쳐 봤자예요. 여기서 기절시키고 가야 해요.

기절이라고요?

달리는 걸로는 따라잡힐 거예요. 죽이지 않을 방법이 있잖아요. 당신은 캐롤란드를 살렸어요.

하지만 아네사, 나는.

같은 실수는 다신 없어요. 부탁이에요.

허술하게 쌓아 올렸던 지붕이 무너지며 울음소리를 낸다. 아네사를 품에 끌어안고 한 팔로 머리 위를 막았다. 나무조각이 살갗을 찢고 근육을 파고드는 게 느껴져 이를 악문다. 그런 그를 끌어당기며 아네사는 간절한 눈을 한다. 누구보다도 선하고 그래서 가공可恐할 눈을 뜬다. 자신을 가두고 매질한 자를 살려달라 매달리는 그의 눈을 보고 휴버트는 후회한다. 멍한 얼굴로 내뱉는다. 나는.

나는 이능력으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뭐라고요?

발아래가 진동한다. 바닥보다 깊은 곳 어느 맥이 갈라지고 터지는 소리가 울린다. 검어진 눈빛으로 휴버트의 얼굴에서 과거를 더듬던 아네사는 문득 그의 품을 벗어난다. 손바닥을 부딪친 틈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이 들리고 망설임 없이 그는 소매를 적셔 폭주자의 얼굴을 틀어막는다. 피해 있어요. 휴버트는 그러지 않는다. 아네사가 취하는 행동을 바라본다. 헐떡이던 남자는 틀어막은 손 아래 밭은 숨을 내뱉는다. 헐어져 뼈대가 드러난 집이 마지막 남은 얼개를 무너뜨리고 있다. 땅을 가르던 굉음은 점차 줄더니 팽창을 멈춘다. 그나마 형태를 갖추던 벽이 넘어지고 남자는 느리게 고꾸라진다.

아네사는 돌아서 휴버트의 손을 낚아채 이끌었다. 클로로포름이에요. 깨어날지도 몰라요, 어서 가요. 잡은 손이 많이 떨렸다. 갈라진 땅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그들은 한참을 걷다 이제는 안전하게 느껴지는 도로에 올라서자 그제야 숨을 몰아쉰다. 그들은 서로를 수 번이고 확인했다. 아네사는 급히 휴버트를 뿌리치고 달려 나갈 때 손등이 크게 까졌고 휴버트는 팔 언저리가 전부 시뻘겋게 물든 채였다. 제 상태에 아랑곳않고 양손으로 아네사의 손을 쥐고 살피는 휴버트에게 아네사는 수많은 생각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 앙다물던 입을 연다.

아까 무슨 말이었어요?

그는 되물을 수 없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놓은 이유는 죄스러워서일 뿐이었다. 아네사는 구태여 다시 묻는다.

아까, 그랬잖아요. 이능력 못 쓰겠다고요.

아네사. 언제부터 세뇌가 풀렸는지 기억나요?

조직원이 크게 줄었던 때쯤……. 세뇌 이능력자를 오래 안 만나서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왜요?

아마 그 사람이 죽어서 그랬을 거예요.

그는 침묵한다. 그렇다고 고백이 한결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허나 미룰 수 없는 최후였고 여기가 벼랑이었다. 여기가 진실을 말할 마지막 고해소다.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었다.

그들을 검거하고 재판 결과를 기다렸는데 당신과 시민들을 죽인 죗값으론 턱없이 부족한 형량이 나왔어요. 그리고 난 그들이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죽었어요?

죽였어요.

한두 명이 아닌데요.

한두 명이 아니었어요.

거짓말이죠?

…….

여기 봐요. 휴버트, 거짓말한 거죠?

…….

어서 말해요. 늘 그렇듯이 농담이었다고 해요. 빨리.

아네사. 난…….

휴버트.

난 당신에게 거짓말 못 해요.

시야가 회전한다. 맞은 뺨이 아려왔지만 혹여나 다친 손을 쓴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고개는 다시 정면을 향한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아네사는 그보다 더 분개해 보일 수가 없었는데도 많이 슬퍼 보였다. 쓰라렸다. 그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왜 그랬어요? 이건, 당신 인생이잖아요.

그때 들었던 말이다.

내가 그런 걸 바랐을 것 같아요?

아니. 당신이라면 나를 경멸할 거라고 믿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거예요?

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었다.

난 당신이…….

당신이 없었으니까.

아네사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칠게 눈을 비벼 닦고선 가만 서 있다가 등을 돌렸다. 색색대며 오르내리는 어깻죽지. 그들도 하늘도 바람도 말을 하지 않는 순간이 지나자 아네사는 휴버트를 가드레일에 기대 앉혔다. 그리고 여분 외투와 작은 칼을 꺼내 옷가지를 찢어낸다. 다친 왼팔을 짓누르며 감싸주는 손길엔 책망만큼의 무게가 실린다. 휴버트는 아네사의 손을 잡고 페트병의 물을 흘려보낸다.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아픔 때문이 아니었지만 휴버트는 아네사가 바라는 대로 오해해 주려 애썼다.

4.

의식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렀다. 불에 시커멓게 그을린 마을과 추돌로 엉망이 된 레일과 기이하게 왜곡된 지각을 지났다. 최소한의 의사전달만으로 그들은 인가를 찾았고 처음보단 부실하지만 끼니를 때울 만한 걸 구했다. 더는 손을 잡고 걷는 일은 없었다. 불편하니까.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 침묵 속에서 갖은 이유를 떠올리며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해는 지고 떴으며 야생과 간척지의 경계선은 나타났고 설령 폭주의 끔찍한 잔재일지라도 사람의 흔적은 어디나 남아 있었다. 생기는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다.

비록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게 휴버트가 연인의 신뢰에 안주했다는 건 아니다. 관계에 태만한 것도 아니었다. 외려 그는 근 몇 년간 내린 것 중 가장 확고한 결단을 갖고 있었다. 온전히 그들의 의지로 맞이하는 이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그는 연인에게 가장 찬란한 두 번째 삶을 주고 싶었다. 이미 그에게서 행복을 앗아갔고 더는 돌려줄 수 없다면 적어도 남은 생을 좀먹지는 말자. 그는 모두가 불가능을 말할 때 언제나 그 자체로 반증이 되는 사람이었다. 존재 자체로 기적이었다. 나는 필연에 진 사람이고 당신은 우연을 빌려서라도 이긴다. 당신에게 필연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여 그는 꿈에 그리던 연인과 재회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있어야 할 곳으로 간다. 적확한 목적지를 가진 사람보다 빠른 사람은 없으므로 일행은 순조롭게 조용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아갔다.

먹구름 사이로 해가 사라지자 하늘은 단일한 회색조로 채워졌다. 시간이 없는 길을 영원히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꿈이다. 목가적인 풍경은 고요에 잠식되었고 알던 얼굴 중 어떤 것도 재등장하지 않는다. 아네사는 천애에 둘만이 남는 세계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정이 바뀐 세상의 낯을 알아보는 데엔 한참이 걸렸다. 반나절 만에 그는 중얼거리듯 입을 연다.

자주 왔던 곳이네요.

맞아요. 휴버트는 이곳에 올 때마다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꼈기에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대로 있을까요? 아니면 옮겼을까요?

답을 알지만 말로 옮기는 데까진 시간이 걸린다. 이장하기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대로 있을 거예요. 아네사는 명징하게 할 말이 있는데도 주저해야 하는 처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라일리가 있는 곳을 멀거니 바라보며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관리를 오랫동안 안 했을 거예요. 언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고 한번 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안 돼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즉답이 돌아왔다. 아네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뻔한다. 허나 돌아본 휴버트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감했고 또 유현해서 그는 한층 누그러진다. 걸어가려면 꽤 오래 걸릴 거예요. 한참 뒤늦게 덧붙인 변명은 허술했다. 숨을 가다듬는다.

원치 않는다면 나만 다녀올게요. 늦어도 해 지기 전까진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냥 가요.

그냥 가자고요?

호흡은 흐트러지고 평정은 쉽게도 깨진다. 양손을 온 힘을 다해 쥐지 않으면 또 어제 같은 짓을 할 것 같다.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한 마디씩 내뱉는다.

왜요. 당신 끌고 간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데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는 마치 없는 사람 같다. 숨소리도 말도 움직임 하나도 흘리지 않으며 그 자리에 가만있는 그를 보면 여기가 낭떠러지이기라도 한 양 내일은 없는 양 구는 것 같아 끔찍이도 싫었다.

당신 친구잖아요. 그 뒤로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그 사실만은 바뀌지 않아요. 뭐가 그렇게 싫은 건데요? 과거를 완전히 잊기라도 할 거예요? 내가 해준 말은 전부 무용지물인 거예요? 무슨 말 좀 해 봐요. 난 갇혀있는 동안 혹시라도 내가 완전히 바뀌어버릴까 봐 걱정했어요. 당신은 여전히 선하고 강한 사람인데 나는 도구처럼 쓰여선 일개 학살자로 당신 앞에 서는 건 아닐까 해서 늘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바뀔 수 있어요? 난 가끔 당신이…….

아네사.

당신이 무서워요.

매섭게 쏘아붙이던 말끝에 물기가 묻어난다. 붉어지던 얼굴은 하얀 양손에 가려지고 못내 쌓인 울음이 비어진다. 안아주는 손길은 여전히 따듯한데 당신도 나도 너무 많이 변했다는 걸 어떻게 믿어야 하지. 안겨있는 품은 편안하고 어떤 일이든 막아줄 것처럼 안전하게 느껴진다. 언제까지나 그럴 것 같았다. 잘게 떠는 등이 커다란 손에 닿는다. 쓰다듬는 손길에 만감이 치솟고 사라진다. 분노할 사람도 기댈 사람도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릴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당신뿐인 이 황량한 길이 너무 길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휴버트는 연인을 안아 달랜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쩌면 후회를 배가하는 짓을 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깟 걸 두려워하느라 얼마나 많은 걸 놓쳤는지 안다. 목적지를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안 해서 미안해요.

뭐를요?

라일리 자리 옆에 동생 자리가 있는데. 그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충돌이 있었던 그때 우리는 협상에 응하는 척하고 추가 병력을 배치해 뒀어요. 라샤드는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예비 병력이었고 우리를 진심으로 돕고 싶어 했죠. 한 명만 보낸 게 아닌 줄 알아채자마자 예상보다 큰 격돌이 일어났고 그는 돌아오지 못했어요. 라샤드는, 많이 그리워했으니까. 분명 누나 옆에 묻히길 바랄 거라고 생각해서.

그가 죽었다고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서 그랬군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을 죽였을까? 그의 행동은 오롯이 정의감에서 비롯한 것일까?

…… 미안해요.

어둑한 하늘은 기어코 빗물을 떨구었다. 아네사의 뺨에 투명한 물줄기가 얹혔다. 금방 그칠 비는 아닌 모양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내가 알려주지 않았잖아요. 당신 잘못이 어딨어요.

나 정말…….

나쁜 사람이다. 몇 방울이 더 흘러내리더니 아스팔트 도로를 툭툭 검게 물들인다. 지면이 운다. 세상은 아스라이 부예져 마지막 조문객처럼 흐리마리하다. 뺨을 몇 번이고 닦아내며 숨을 죽이는 그 앞에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비가 시끄럽게 쏟아진다. 아네사 듣고 있어요? 당신은 잘못 없어요. 이렇게 예쁜 아내를 울리고 내가 나쁜 남편이네. 그런 말 하지 마요. 그럼 사랑스러운 아내. 그거 말고요. 알았어요. 난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다고요?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도 그런 말 했다고요. 남김없이 젖어 드는 세상 가운데 그들은 한참이고 비를 맞으며 오래도록 서 있었다.

비에 젖은 땅은 질어 헤진 운동화의 밑창을 붙잡았다. 휴버트는 체중 때문에 발이 거의 빠지다시피 해 결국 아네사가 손을 잡아줘야 했다. 장갑이 없으니 손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아네사는 잡초를 뽑아냈고 휴버트는 흙먼지 낀 비석을 닦았다. 빈손으로 와서 미안하지만 너희도 두부 없이 맞이했으니 피차일반이라는 소리를 하면서. 아네사는 그게 농담이냐고 물으면서도 웃었다. 휴버트는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는 말을 구태여 덧붙여 꾸중을 들었다. 아네사의 말대로 해가 지기 전에 전부 끝이 났다. 안 가요? 잠시만요. 먼저 가고 있어봐요. 휴버트는 닳은 기색 없이 반질거리는 비석 앞에 섰다. 형님 왔는데 누워서 맞기는. 반듯하게 새겨진 영문 추모비를 내려다본다. 어색함에 헛기침을 하지만 다시 눈을 맞춘다.

고생 많았어. 한참 나중에 보자.

5.

몇 겹이나 깔아둔 옷을 뚫고 배어드는 한기에 눈을 떴다. 어제도 모닥불을 지피고 한참 빗물을 말리며 떨었건만 그보다 더했다. 아네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자 별장의 창 밖에서 새하얗게 빛이 난다. 세상이 한 겹 눈을 덮어쓰고 표백되어 있다. 커다란 눈발은 바람에 실려 소복이 땅 위로 더해진다. 창에 맺힌 입김이 뿌옇다. 떨어지는 눈을 따라 시선을 오르내리며 멍하니 생각한다. 걷기 힘들겠다. 그리고 예쁘다.

휴버트가 아침을 데워 온 후 일어난 아네사도 같은 감상을 내놨다. 비척거리며 별장에 놓인 작은 탁자 앞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죠?

네. 한두 시간 정도면 도착해요.

정말 사람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 근방은 정말 사람이 하나도 없었잖아요. 한 명은 있었지만. 오면서 본 것들을 생각하면 사람들 있는 곳도 혼란스러울 것 같긴 해요.

설마 날 뺀 건 아니죠? 두 명이에요. 당신 포함 세 명.

알았어요, 세 명. 아무튼. 이상할 만큼 사람이 없었단 말이었어요. 도착하면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볼래요. 어서 먹고 가요.

눈밭 위로 두 쌍의 걸음이 놓였다. 눈을 치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천지는 백색이었고 그들 둘만이 검은 점처럼 남았다. 추위에 얼굴이 따가운데도 그들은 첫날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지냈던 곳은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만이 웃을 수 있는 농담을 하며 서로 손을 녹여주었다. 발에 감각이 없어질 것 같아도 걸음을 보채고 보챘다. 희부연 시야에 유리 같은 바다가 들어올 때까지.

바다?

길을 잘못 든 거 아니에요?

휴버트가 고개를 돌려 살폈지만 도로 위 표지판은 담담하게 목적지를 말하고 있었다. 수면의 끝이 어딘지 살피려 했으나 눈안개가 짙어 보이지 않았다. 쨍하게 얼은 바다는 깊어질수록 시커메 안을 보여주지 않았다. 시서느런 검정. 둘은 일전에 만났던 폭주자의 위력을 생각한다. 그런 자가 수십 시간이고 이능력을 사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때 재해가 쓸고 지나간 여기가 그들의 도착지였다. 닷새간 생각한 모든 것들을 비추어보며 그들은 물밑을 멍하니 바라본다. 눈보라만이 바람과 함께 숨을 쉬며 소리를 냈다.

잠긴 건 아니겠죠?

폭주한 지 얼마 안 돼서 대피했을 거예요.

아네사조차 휴버트가 그 말에 자신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휴버트는 날숨을 쉬며 드넓은 얼음을 앞에 두고 주저앉았다. 데려다 주기로 했는데 무기한 연장이네. 네? 아니에요. 며칠 내내 걸었더니 삭신이 쑤셔서. 조금만 있다가 가요.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다 얼은 손으로 눈뭉치를 만들었다. 아네사는 군말하지 않고 그 옆에 앉았다.

휴버트가 말했던 대로 더 먼 곳으로 대피했겠죠?

그럴 거예요.

건너가면 큰일 날 테니까 눈이 좀 멎으면 경계를 따라 걸어보기로 해요. 어디서 끝나는지 확인해 봐요.

그래요.

아네사는 소매를 길게 빼어 눈을 그러모았다. 그리고 휴버트가 만든 눈뭉치 위로 쏟아부었다. 뭐 만들려고요? 글쎄요. 눈사람? 휴버트도 맨손으로 하지 말고요. 약속한 것처럼 그들은 길이 막혀 드는 경계에 눈을 쌓았다. 미끄러지고 달라붙으며 눈더미는 얼추 모양새를 갖추었다. 누가 누구에게 먼저 눈덩이를 던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용케 간밤에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데 다음날이면 분명 코를 훌쩍일 거다. 생각보다 본격적인 눈싸움이 되어 한참 아무도 없는 눈길을 뛰어다닌 후에 휴버트는 항복을 얻어낸다. 어설프게 쌓아 올린 눈더미를 사이에 두고 시린 하양에 드러누워 시답잖은 승패를 가리다 웃었다. 아네사는 창공에서 떨어져 오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을 건다.

휴버트는 원래대로면 몇 년 후에 나오는 거예요?

이십구 년 이십팔 년 정도. 얼마 안 있었어요.

그 뒤엔 어쩌려고 했어요?

교도소에서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여행이라도 다니려고 했죠. 뭐 팔순인데 몸이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내 체력 알잖아요.

휴버트.

음. 사실 그다지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당신의 삶이잖아요.

글쎄요. 그때는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어리석게도. 그리고 그러지 않으면 내 삶도 없을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응. 그렇네요.

다시 돌아간다면 같은 말은 하지 않을게요. 신물이 나거든요.

맞아요.

그리고 용서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오래 같이 생각해볼게요. 더 많이 돕고 더 많이 사랑하는 걸로 해요. 말했죠, 같은 실수는 다신 없다고.

고마워요. 진심으로.

휴버트.

네.

곧 날이 풀리겠죠.

그렇겠죠.

그럼 이건 다 녹고 사라질 거고요.

그렇죠.

그때도 우리 같이 있겠죠?

그럼요.

0.

사랑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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