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

오백 년을 사는 당신에게

오 년 후 보내는 편지

선이네 by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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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네요. 물론 이 편지가 바로 당신에게 닿을 것도 아닐 테니 당신이 이걸 볼 때면 정말 오래간만이 되겠죠. 당신은 마흔하나가 되고 전 서른일곱이겠군요. 제가 당신의 나이를 하나 넘어선다니. 난 당신에게 오 년을 내건 만큼 그간은 당신께 귀찮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구태여 그러지 않더라도 당신은 내 생각을 할 테니까요. 그래서 다섯 해가 지나고 나면 작별 인사 겸 편지를 보낼 셈입니다. 이걸 전부 읽고 나면 날 잊는 걸 허해드리겠습니다. 당초에 기간부 계약이었으니 손해 보는 것도 아니지요. 지금은 제 눈도 성해졌으니 당신에게만 종신 계약을 거는 건 부당한 것 같군요.

저는 지금 란셀레스 데본의 재산 일부를 양도받아 아이슬란드의 아주 한적한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 바람은 누구도 침범한 적 없는 땅에 지내는 것이었으나 그런 것을 바랄 순 없다는 걸 알기에 매일같이 광막한 자연을 보며 모든 걸 쏟아버리고자 왔습니다. 이곳에 올 때 탄 배는 영국에 갈 때 탔던 배와 비할 바 없이 흔들리더군요. 포악한 바다에 몸담은 인간 처지란 벼랑 끝에 선 것보다 위험하고 갓난애만큼이나 유약한 것이 아닌가요. 이곳은 매 순간 나 자신과 당신과 모두가 얼마나 작은지 일깨웁니다. 천지를 쏟아내는 듯한 폭포와 화산과……. 나는 이곳에 우리네 삶이 덧없지 않음을 포고하러 왔습니다. 대항한다면 이런 것이어야지 않겠습니까? 몸을 던지면 산산조각이 날 땅에서 나는 영원하다고 외치는 일. 그 부조리한 일이 날 무엇보다도 기쁘게 할 겁니다.

마침 란셀레스가 오 년 후 책의 완성본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와 함께 보낼 테니 당신이 읽어주면 좋겠군요. 기간이 짧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서른두 해 집필했으니까. 오 년간 마무리한다면 필경 역작이 되겠지요. 로즈 클라크가 책을 전부 사들일 거라더군요. 서점에 있던 제 책이 다 클라크의 서재로 가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땔감으로 쓰이게 되는 걸까요? (로즈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겠죠, 물론.)

 제 소식은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또 전할 게 있다면 펜을 들겠습니다. 그럼 무탈히 지내시길.


2.

안녕하십니까. 일 년 만인가요. 저는 근래 아이슬란드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오기 전 케일럽에게 부탁해 아이슬란드어 선생께 그럭저럭 배웠습니다만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자니 부족함이 많은 걸 느꼈거든요. 가까운 집의 어린애는 한 단어를 설명하면서 산과 바다와 하늘을 다녀볼 수 있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애에게 말을 배울 수 있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서툴지만 내가 선택한 언어를 배운다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요즘은 더욱 심해졌을 테지만 어릴 적 아일랜드에서는 경찰들이 영어를 강제했습니다. 그땐 아일랜드어를 집에서 쓰는 말, 영어를 밖에서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는 아일랜드어를 쓰지 않았지요. 그때 에이바란 이름도 묻고 아득한 아일랜드어도 묻어버렸습니다. 다시 그 언어를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난 그곳에 되돌아갈 생각이 없고 다른 곳에 머무르는 조국인들 또한 게일어를 거의 잊었겠지요. 언어에는 삶이 있습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제하고 구태여 그 단어를 골라 말했다는 것만으로 그자의 초상화 속 하나의 붓질이 되지요. 헌데 나는 삶의 어느 부분을 매몰하고 초상을 훼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허나 보십시오, 난 내가 선택한 삶을 그려내는 중입니다. 지나간 삶을 애도하고 우화하고자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즉 내가 가장 익숙한 언어는 영어라는 것이 썩 불유쾌하지만, 당신과 내가 만나는 지점의 언어이므로 조금은 무던해지도록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언어로 말하고 내가 나의 언어로 말하여도 되는 땅은 어디일까요?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면 알까.

아, 그래요. 책 이야기를 해야죠. 이야기는 잘 풀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나오는 군상극이고, 어쩌면 조금은 비현실적일지도 모르겠군요.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나오는데, 죽기 전부터도 퀭한 몰골이 꼭 유령 같은 여자를 죽였습니다. 헌데 그는 분명 머리를 꿰뚫려 죽었을 텐데도 여상하게 나타나 살인자의 곁에 머무릅니다. 식인을 일삼는 아가씨와 교수형을 당하는 귀족과 죽고 죽이는 몇 날 며칠의 연회.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은 저와 당신을 포함해 볼링브로크 저에 머물렀던 이들만이 알겠죠. 그래요, 인물을 포함해서요. 허나 꿈조차도 순수한 창작을 할 수 없는데 현존 인물을 닮았다 하여 문제 될 일이 있겠습니까. 천상을 담은 그림보다 손때 묻은 장화를 그린 그림이 제겐 더 아름답습니다. 이상을 가진 영웅이 아닌 전부 흠결이 있고 다치고 취약한 자들. 누군가 끔찍하다 여겨 태우더라도 좋습니다. 난 태우지 않을 테니까.

얼마 전 로즈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문예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필경 신문을 샅샅이 뒤져 내가 관심 있을 소식을 찾아낸 거겠죠. 내가 읽은 책은 거진 영어였으므로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가끔 시를 쓰면 모아다 보낼까 생각 중입니다. 그 또한 소설을 다 쓰면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어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불행의 신도가 되는 데에 성공하셨습니까? 아니면 자애를 열쇠 삼아 지내고 있습니까? 수만 가지 당신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그럼 이만. 잘 지내고 있길 바라겠습니다.


3.

아일랜드를 다녀왔습니다.

문장을 쓰기가 쉽지 않군요. 글을 쓰는 데 뜸을 들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요. 우선 말하자면 그곳과 이곳과 내 스무 해를 보냈던 곳을 생각하며 쓴 시를 조금씩 모아 전하러 갔습니다. 편지로 부쳤어도 됐지만 여력이 된다면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시 가지 않을 듯싶습니다. 당초에 그곳은 나의 유토피아였던 적이 없기에 실망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망이란 심연이 들어찬 동굴 같은 것이군요. 기근으로 다들 흩어졌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미문으로 점철된 고향은 타지보다 끔찍했습니다. 그나마 익숙한 면모를 찾는다면 죽은 것 같았던 심장이 아려서 일찌감치 빠져나왔습니다.

당신은 알겠지만 나의 심장 위 살갗에는 지저분한 화상이 있습니다. 마지막에서 세 번째로 일한 집이었던가요. 그 댁 마님은 확실한 복종을 위해서라면 기억과 신체에 낙인이 박혀야 한다고 생각하셨기에 영광스러운 백작가의 문장을 지졌습니다. 하여 나는 심장에 주인의 명을 새기고 바닥을 기며 굴종했지만, 글쎄요. 결국에 내가 남긴 건 다른 그 누가 아니라 내가 낙인을 찍겠노라며 덧칠하고 짓누른 화상입니다. 난 그때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스스로 내 손으로 죽인 겁니다. 그러니 심장이 없는 것처럼 살자고, 글을 모르는 것처럼 살자고 되뇌었습니다. 하여 무엇도 쓰지 않고 무엇도 읽지 않은 채 타인의 수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의지로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만한 삶의 증명이 어딨단 말입니까? 내 손으로 심장을 후빌 적에, 당신 손에 만년필을 쥐어줄 때 난 살아있었습니다. 더러운 말을 주워섬겨 주먹이 처박혔던 목구멍으로 저주하는 노랫말은 살아있습니다. 나는 그때에 살고 싶었고 그랬기에 인두를 쥐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난 확신합니다. 누구도 날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설령 이마와 양쪽 눈에 총알이 박히는 것으로 끝이 나고 내 글을 누구도 읽지 못하고 종이는 닳아 흙으로 돌아간대도 과연 내 말이 죽을까요. 내가 가닿았던 모든 죽음은 나의 책에 고통을 지필 불씨입니다. 다짐했습니다, 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난 어느 과거에도 있지 않습니다. 이 터질 듯 광분하는 심장을 지니고 온몸의 피를 쥐어짜 모든 자의 낯짝에 저주스러운 글을 들이밀어 속을 게워버리게 만들어야겠단 확신이 듭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벅차고 무척 유쾌한 상상이군요. 당신마저도 내 글을 보고 역겨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슴을 연 당신의 심장에는 무엇이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처럼 바삐 맥동하는 심장은 얼마를 더 약진하게 해줄 것인지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내게 심장을 바치지 마십시오. 비존재의 어두운 베일을 벗어던진 매 찰나에 당신의 맥동은 오롯이 당신의 것이길 바랍니다. 아주 가끔만 이곳을 향해 맥박을 들려주면 그것만으로 난 즐거울 것 같습니다. 계약은 계약이잖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참고로, 당신이 그때 주었던 주소는 지금도 책상 서랍 맨 위칸에 들어있습니다. 봉투에 저 주소를 내 손으로 적는 날을 기다립니다.


4.

안녕하십니까. 글을 거의 다 써가고 있습니다. 고민을 꽤 했지만 필명 없이 에이바 오설리반이란 이름으로 낼 작정입니다. 아마 영국인들은 읽지도 못하겠지요. 에아바, 이이바, 에어바, 이어바. 멍청이들. 하지만 그 악마적이고 아름답고 추잡한 글에 대해 광분하며 내 이름조차도 똑바로 말하지 못할 그들을 생각하면 다소 유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말끔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이름 아래 나올 책이 순탄하지 못하기 떄문입니다. 분명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모호합니다. 죄를 지은 이들이 속죄할 수 없다면 연민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없다면 십자가를 진 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이유 없이 인간을 죽이는 살인자는 무엇 때문에. 그리고 그에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자는 무엇을 향해……. 언어는 실체를 해부합니다. 알지 못한다는 말은 안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답은 분명 존재합니다. 헌데 쌓인 책을 뒤지고 뒤져보아도 그들이 모르는 말을 허공에 호소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마 남은 시간은 그들을 알아내는 데에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손에서 태어난 이들을 나는 아직 모릅니다. 매끈해졌던 왼손의 중지에도 다시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였건만 난 그들의 그림자조차도 제대로 그리고 있지 못했던 듯합니다. 우리가 그 누구를 이해한다고 말할 것입니까, 뤼시앵. 난 이럴 때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밖에 배우지 않았습니다. 파헤치고 돌진해 끌어안는 것. 감히 사경을 보았다고 할 만큼.

뤼시앵, 막연하지만 내 삶에서 모든 것이 명확했을 때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난제라 하여도 내 삶을 능가할 순 없을 겁니다. 앞으로 일 년인가요. 차고 넘치는 시간이로군요. 당신이 날 안았을 때가 서른여섯이었나요. 이제 나는 그때에 왔습니다. 당신이 나의 머리칼을 넘겨줄 수 있었듯 난 모든 불가해를 어루만질 수 있을 겁니다. 비로소 난 이름을 붙여 그것을 복속게 하고 내 일부 삼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 년만 기다리십시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제 생각을 하세요.

그럼. 다음엔 제본된 책과 함께 뵙겠습니다.


5.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드디어 당신은 마흔하나이고 난 서른일곱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드디어 첫 작품의 집필을 끝냈단 것이죠. 그리고 안 좋은 소식도 함께 있는데, 그것은 제가 저번에 말한 인물들을 비로소 알게 됐단 것입니다.

글을 쓸 때는 제 손에서 태어나는 모든 것들이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아 제가 구축하는 것보다도 그들을 따라 그리는 느낌이 듭니다. 일종의 초상화이지요. 나는 마지막까지 그가 왜 그다지도 평안한 표정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몇 번을 죽으면서도 그 살인자에게 들러붙은 이유를 몰랐지요. 그저 나는 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개운한 얼굴을 한 그의 초상을 완성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문장을 적을 때에서야 따라붙은 단어를 아주 생경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가 여태껏 적은 것의 정체가 고작 그런 것이라는 사실에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사흘간 원고에서 손을 떼고 줄곧 자연을 거닐고 말을 타고서 바닷가를 활주했지만 산들바람에서도 바다내음에서도 답은 명료했고 돌아와 펜대를 잡으려면 쓸 단어는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여자가 ‘사랑을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고 썼습니다. 상투적이고 지루한 결론이었습니다. 나의 군상극 속 숱한 인간들 중 그들이 유일하게 사랑을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쾌한 답이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정답을 거부한 이유는 그것을 인정하는즉 당신을 사랑한단 사실 또한 참이 되기 때문이었겠죠. 명제는 아주 간단하고, 그가 사랑을 한다면, 나 또한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불가해. 나는 이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내가 파헤친 끝에 도달한 결론을 마주 봅니다. 바람과 바다와 폭포가 부르짖는 말을 심장에 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씁니다.

Tá grá agam duit. 발음을 들려주지 못해 아쉽습니다. 첫 단어는 타, 하는 발음입니다. 끝을 조금 올리며 입술을 모아야 합니다. 그라, 이것도요. 다음은 조금 까다로울 수도 있는데, ‘아’와 ‘어’사이 발음으로 강세를 두고 어검, 그 비슷하게 발음하면 됩니다. 딧츠.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i 발음이 들어가지만 길게 해선 안 돼요. 이건 당신you이라는 뜻이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규정하거나 가두거나 재단하지 않고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건 일종의 진술이므로 당신이 마땅한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정하긴 어려웠으나 이에 패배감을 느끼는 건 아니므로 승리감을 안겨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줄곧 그래왔습니다. 당신이라는 페이지를 펼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자체로 존재하던 것에 이름을 붙여 취한다는 폭력적인 행위를 택하고 만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소설 속 살인자는 죽었습니다. 그는 내 오 년을 오롯이 바친 자이므로 완전히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령을 닮은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첫사랑을 기억하겠지요. 설령 깨닫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영원히 그가 사랑하는 모습으로 남을 테니까. 내가 그자를 죽인 것에 대해 질책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죽었어도 난 당신이 오백 년을 살기를 바라니까요. 분명 환멸에 질리겠지요. 총알이 항상 모자라겠습니다. 숱한 인간들의 삶을 보며 고대인들이 상상했듯 언젠가 끝없는 비가 내려 모든 생명체가 홍수에 잠겨 죽기를 바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서도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오백 번 절망하고 단 한 번 희망을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살아온 이유도, 죽은 이유도.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건 당신이 생각하는 현재와 같지 않습니까……. 만일 삶이 당신에게 그것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삶을 품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리하였고, 당신을 받아들였고, 그럼으로써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몇 번씩 뒤집어지는 꼴 아래로 흥얼거리며 걷는 당신의 모습을 쉽게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죽을 때 곁에 누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으스러뜨린 시체가 있을 수도 있고 동반자가 있을 수도 있고 아무도 없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에 여전히 외롭다면 당신을 위해 내가 이미 축복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동봉한 책에는 자필 서명을 해두었습니다. 다섯 세기 전 어느 어리석은 자가 쓴 희망론이라 비웃으며 골동품상에게 팔아 넘겨주길 빕니다. 그럼.

오백 년을 사는 뤼시앵 그르니에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에이바 오설리반이.

 

추신: 난 당신과 헤어진 이후로도 불어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Je t’aime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모릅니다. 뤼시앵 그르니에라는 발음 또한 당신의 입에서 나온 것만을 듣고 배워 다른 이들이 말하는 당신은 모릅니다. Je t‘aime. 이 또한 당신의 입으로 배우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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