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오스게일 - 라이어스 나잇
엘룬드님 커미션
* 엘룬드(@Meh29920193) 님 커미션 입니다.
* 이전 서사 : 일리시드가 된 파이오스가 영혼의 소실을 두려워하여 자결 한 이후, 승천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던 게일이 왕관을 씀으로서 파이오스의 영혼을 건져 신으로서 부활시켰습니다. 이로인해 파이오스는 망자들의 신이 되었습니다.
대도시의 꼴을 갖추게 된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워터딥의 어떤 면모는 세월을 타지 않고 옛 그대로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었다. 라이어즈 나잇이라는 명절도 그 중 하나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 덧문이 닫히고 가로수마다 낙엽은 떨어져나가기 직전 거리마다 잠깐 생업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가면과 분장으로 얼굴 일부를 가리고 거짓의 신과 가면의 신을 찬미했다.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기만으로 가득했고, 손은 남들의 호주머니를 털려고 분주했다. 모두가 도둑이자 사기꾼이 되는 날이었다. 오늘만은 부랑자도 신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날아오는 나비에 치여서 그만, 아아! 아버지도 똑같이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비들이 원수로다!"
대로에서 울부짖는 사람, 동조하며 함께 우는 사람들, 손가락질하며 낄낄 웃는 사람들이 구분되지 않았다. 역할도 금새 뒤바뀌었다. 거지가 왕이 되고 신도 죽은 자가 됐다.
"너를 제후로 임명하노라. 앞으로 저 비어있는 마탑을 맡아 다스리도록 해라. 이 권한은 세세만년 이어지리라. 다음! 내 너를 왕으로 임명하노라. 저 흘러가는 구름 위 성을 영원토록..."
워터딥 중앙대로에서는 얼굴을 가린 행렬이 이어졌다. 가면과 거짓을 섬기는 신도들이 존재감을 과시했는데, 그들 중 진짜 신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행렬을 구경하다 출출해진 사람들이 빵집의 좌판에서 멋대로 빵을 하나씩 집어서 축제용 바구니에 넣거나 손에 들고 갔다. 가격이 떡하니 붙어 있는데도 그랬다. ‘납작빵, 이천 골드. 둥근빵, 삼천 골드.’ 대부분 밥이 될만한 음식 대신 단 사탕과 작게 포장된 간식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전부 남의 주머니에서 훔친 것들이었다. 훔쳐서 호주머니에 쑤셔넣은 사람들의 주머니 역시 소매치기 당해 곧잘 비어버리기 일쑤였다. 공식적인 도둑 길드 따위는 일찌감치 없애버린 점잖은 시민들의 유흥거리라 해야 할 것이다.
오늘같은 날일수록 인적 없는 골목을 피하고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러야 했다. 거리와 대로를 장식해 놓은지라 미궁처럼 바뀌어 있는데다가 거리명과 상호가 적힌 표지판은 사라지고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판까지 뒤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햇살이 온기를 내려주는 낮시간이었지만, 모든 훌륭한 거짓말에는 약간의 진실이 뒤섞여 있다는 가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즐거운 가짜들 사이에 흐느끼는 목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을, 도시 전체를 조망하는 눈이라면 보고 있었을 것이다.
제 아이를 보셨나요? 이 정도 키의 티플링인데 집에서 만든 모자를 썼고... 어디로 갔다고요? 제발, 이번에도 거짓말은 안 돼요.
내 목걸이를 날치기해 갔다니까요. 그냥 목에서 잡아챘어요. 주머니에 가득한 사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건 라이어즈 나잇의 규칙과 다르다고요...
살려주세요, 누군가 눈 앞에서 연기를 불더니 앞이 안 보여요. 아니, 연극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례를 할 테니 시티워치를 불러 주세요... 아무도 안 도와줍니까? 아무도? 아무도 없어요?
워터딥 시티워치는 라이어즈 나잇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리를 지켰지만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혼란상을 관리하기에는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시티워치가 급히 뛰어간 골목에서 반짝이 폭발이 일고 마법의 꽃과 새떼가 날아갔다. 접수된 사건의 반수 이상이 가짜였다. 사람들은 열성으로 기만을 짜냈고, 거짓이 진실을 뒤덮어버리는 활기찬 하룻저녁은 도시의 조금은 음험한 기원부터 늘 그래 왔듯 광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랑받고 있었다.
시끄러운 허풍과 너스레 한복판에 한 남자가 미동없이 서 있었다.
다양한 종족의 워터딥 시민들이 추워지기 직전의 날씨를 즐기며 모여 있는 대광장 한복판, 고전적인 워터딥 신사로 보이는 차림을 한 남자는, 호박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과장된 옷차림에다 가면을 쓴 모습들과는 다르게 얼굴에 분장 한 점 없이 점잖은 복식이라 되려 어색하게 때와 장소를 잘못 찾아온 듯했다. 갈색 머리의 중단발을 한 그 인간은 대광장의 물줄기 쏟아지는 분수 곁에 못박인 듯 서서 심호흡만 하고 있었다. 방금 숨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처럼.
곧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온갖 고성과 허황된 주장, 기만의 노랫말이 뒤섞여 귓가를 윙윙 울려대는 감각이 혼란스러웠다. 남자가 몸을 뒤로 기대며 무심코 분수대의 대리석 난간을 짚었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차가워."
그가 양손을 천천히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동안 바라봤다. 시각은 조금 더 판별하기 쉬웠다. 구름이 흘러가는 황금빛 저녁의 기울어진 햇살을 받아, 꼭 끼는 소매 바깥으로 살과 피, 뼈로 이뤄진 양손의 얇은 부분이 붉은 기운을 띠었다. 손가락 사이로 석양볕에 노랗게 물든, 호박 조명이 분주히 준비되고 있는 광장이 보였다.
잠깐의 호기심이 두 눈에 스치고, 곧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남자가 입 밖으로 소리내 말했다.
"날... 쫓아냈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제야 흥분된 감정을 불러와, 거세진 맥박이 귓가에서 들려왔다가 멀어져 갔다. 바람이 축제의 부산물인 온갖 냄새를 빨아들여 코 끝에 전해주었다. 겨울 직전의 차가운 바람이었다.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입을 열고 숨을 내쉬자 입김이 나왔다. 가면의 행진이 지나가는 진동이 발밑에서 느껴지자 땅에 발딛고 있음이 실감되었다.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는 '어째서?' 라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거대한 감정의 꼭대기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대신, 감정을 실제로 겪고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어떻게'라는 질문을 '어째서'보다 앞세우는 쪽이었다.
제 양손을 빤히 쳐다보다 첨탑 꼭대기에라도 서있는 것처럼 발끝을 조심스레 움직이더니 혼잣말을 중얼대는 기행 정도로는 라이어즈 나잇을 맞이하는 대광장에서 주목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대광장에서 그 남자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남자를 지켜본지도 몇 분이 흘렀다. 분수대 옆의 갈색머리 남자는 분명코 기만과 거짓말의 능력이 있는 산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기만 따위로는 덮지 못할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음에 틀림없었다. 열애 중이던 연인에게 방금 전 차였거나 일방적인 이혼이라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나 넋을 잃어버린 사람 같다는 인상은 그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향하면서 눈빛에 햇빛이 이상하게 비쳐, 광채가 쏘아진 듯 보인 순간 사라져 버렸다.
"네... 기도가 기억나."
남자가 손을 들어 이쪽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지목받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군중 속에서 빠져나와 웃으며 남자 앞으로 갔다.
"위대하신 신이시여!" 외침에 히죽임이 섞여 있었다.
"제가 당신에게 기도를 올렸나이다. 밤이고 낮이고 빌었어요! 저는 진심으로... 그러니까... 에이, 몰라! 그러니까, 소원 이뤄주실 거죠?"
라이어즈 나잇이라는 명절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 관례다. 신들은 기도에 응답하고, 소원이 이뤄지고, 영원한 행복이 찾아온다고 믿어볼 수 있다. 그러나 저 신은 기대를 쉽게 채워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너는 죽은 사람과 재회하고 싶다면서 신들에게 매달렸었지. 세상 모든 신들을 호명하면서 내 이름도 몇 차례 불렀어. 워터딥에서는 더이상 흔히 불리는 이름이 아닌데도. 시간이 흐르고 상처가 잠잠하게 가라앉아 숨길 수 있게 되었지만, 진짜로 포기한 적은 없었잖아. 그렇지?"
신이 지목한 어떤 마음 앞에서 '기도하는 자'는 얼굴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곧 그가 울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요... 그랬어요."
"그렇겠지."
뭐든지 가능한 날인 라이어즈 나잇의 마력일까? 갈색머리 남자가 분수 난간에 걸터앉아, 석양 저물어 가는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 무언가를 두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워하는 시선이었다. 기도하는 자가 옆에 앉았다. 그들은 쏟아지는 분수의 물소리를 들으며 필멸자의 세상에 그어진 한계에서 오는, 늦가을 저녁과 닮은 쓸쓸한 정서를 공유했다. 기도하는 자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을 잃자,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어요. 오늘 같은 날, 그러니까 라이어즈 나잇에도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하지만, 하, 그 때 기분에 비하면 이건 그냥 장난일 뿐이에요.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닌데, 꼭 나까지 죽어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습겠지만, 만나서 따지고 싶었어요.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느냐고...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있는 거죠?"
"사소해."
"네?"
"내가 살아있군. 건강하게." 턱밑에 닿는 옷깃이 불편한지 자꾸 접으며 갈색머리 남자가 말했다. "여긴 틀림없는 워터딥이고."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을 그가 별 감정 없는 눈으로 보았다. 한 때 야망의 신 신앙의 발원지였던 워터딥에서 교세는 수그러든 지 오래였으며 많던 신전도 거의 다 사라졌다. 오늘날 야망의 신의 시선은 테이 같은 머나먼 땅에 머물렀다. "몇 년도지? 중요하지 않아. 라이어즈 나잇이 틀림없네. 남은 시간은 해의 위치로 봐서 여섯 시간 정도... 날 죽일 의도는 아니었던 건가. 오히려 반대야. 멀쩡하게, 인간일 적 옷까지 입혀 놓고 정성스레 고향에다 데려다 놓았군. 어떻게? 내, 힘. 아하."
그의 눈이 빛나며 당신을 본다.
"왕관을 훔쳤구나, 파이오스."
사실이다.
기도하는 자가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또다른 신에게 왕관을 빼앗겨 신성이 잠들고 인간의 육신으로 돌아온 야망의 신이 늘어놓았다.
"내 영역의 수많은 탑들 중 하나에서 카서스의 왕관을 훔쳐내다니. 무엇이 진짜 보물을 숨긴 탑인지 대체 어떻게 알아봤을까? 그러고 보니, 필멸자 시절 네가 도둑질에 능통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군. 파이오스, 나의 작품. 네가 야망의 신을 필멸자로 만들어 지상으로 추방해서, 이제 날 뛰어넘을 셈인가?" 그가 문득 웃었다. "야망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둬."
분수대 난간에서 내려온 워터딥 신사가 약간 휘청거리다가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팔을 조금 벌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걸음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던 기도하는 자를, 문득, 신이 천천히 돌아봤다.
"널 잊은 건 아니야."
"예... 예?"
남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서 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동작이 힘차게 되고 자연스러워졌다.
"저기, 어딜 가냐고요?"
그 질문에 남자가 다시 상대를 휙 돌아봤다. 이번에는 빠르게. 그리고 작게 짓는 차가운 웃음에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절묘한 수를 찾아냈다는 도취가 담겨 있었다.
"영생하는 신은 갈 수 없는 곳이지."
사이프러스 사이로 별하늘이 총총했다. 조금은 더 차가워진 밤바람이 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온 사방에서 사박거렸는데, 마치 한 때 소란스러웠다가 이제는 끝나버린 축제의 메아리 같았다. 그것을 제외하면 묘지는 조용했다.
비석들 사이를 헤매던 그들은 아직 관이 들어가지 않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를 하나 찾아냈다. 갈색머리 워터딥 신사가 빈 묘비 앞에 서서 이쪽을 보았다. 적어도 희생양을 으슥한 데로 유인하더니 갑자기 낄낄대며 목을 그어버릴 범죄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만일 그가 누군가를 죽음으로 끌어들일 작정이라면 아마 완전히 다른 방식을 쓸 것이다.
"여기 기회가 있어."
남자가 빈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림자가 져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그곳은 기만이나 거짓으로는 가릴 수 없는, 마지막에 남을 단 하나의 진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도하는 자가 멍하니 따라했다. "기회...?"
신이 자신의 팔을 들어, 달빛에 비친 손날을 뒤집으며 천천히 살폈다.
"비록 연약한 피와 살로 이뤄져 있으며, 고통과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필멸자일 뿐이지만."
신이 지적했다.
"하지만 죽을 만큼 보고 싶잖아.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해결을 구하면서, 필멸의 순리를 비틀어버리고 싶어 죽겠잖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내려왔어."
비석 앞에서 상대가 손을 내밀었다.
"기회를 잡아."
별하늘은 묘지 따위엔 관심 두지 않는다. 별들은 부산한 거리와 광장마다 하룻밤 꿈의 시시한 소원과 눈속임으로 이뤄지는 소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야심이라 불릴 정도로 큰 것, 곧 '진짜'를 원한다면 감수해야 할 게 너무도 컸다. 자신의 존재 전체를 내던지라는 뜻밖의 부름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 그 손을 꽉 붙들고 싶다는 유혹이 들었다. 하지만 손을 잡는다면 무덤으로 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자가 앞에 있는 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요, 당신은 죽을 각오를 한 겁니까?"
"그게 방법이라면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창창한 삶이 펼쳐져 있는데,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질 거예요? 확실하지도 않은 길에?"
"야망에 바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어째서?"
"어째서...?"
이끼에 뒤덮인 비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상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곳의 청중들이라면 모두 동의할 만한 논거였다.
"필멸자의 목숨 따위 몇십 년만 있으면 유효기간이 끝나버리지. 그것은 내가 직접 쓰게 될 왕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무엇이건 이룰 수 있는 전능함에는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어. 그에 비하면 필멸의 삶이 주는 전망은 사소하지. 내 존재 전부마저도."
그 말을 들은 기도하는 자가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아뇨, 왜죠? 왜 한낱 기도나 하는 내가 이걸 감당해야 하죠? 신에게 비는 이유가 그건데.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달라고..."
"스스로 해야 해."
"나는 못해요!"
"아니, 할 수 있어. 네겐 무한한 가능성이..."
기도하던 자가 도리질쳤다. "그만두라고요! 당신도 이제 그만 자신을 속이는건 그만둬요! 라이어즈 나잇은 곧 끝나니까..." 그리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상대를 의혹이 담긴 눈으로 일별하고, 고개를 두어 차례 젓더니 수풀을 지나, 별빛 쏟아지는 사이프러스 사이로 한 마리 새처럼 도망쳐 버렸다.
혼자가 된 게일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음, 보통은 이렇지."
그리고 그는 무덤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나는 갈 거야."
달빛이 바닥까지 미처 닿지 않는 구덩이를 게일은 잠깐 눈 안에 담았다.
고개를 든 게일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달빛에 간신히 보이는 인간의 손은 강철도 하늘도 아니고 곧 스러져버릴 살과 뼈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의지만 있다면 하잘것없는 도구로 많은 걸 이룰 수 있었다.
드러난 목을 양손이 가볍게 덮었다. 작은 새의 펼친 날개처럼, 뒷목은 긁듯이 고정하고 숨이 통하는 앞부분을 감쌌다. 부드럽던 손길이 곧 쥐어짜듯 변했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손길에 저항하려 했고 폐는 호흡을 갈망했지만, 양손만은 아랑곳없이 힘을 계속 가했다.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고작해야 미스트라의 위브나 다루며 세상의 귀퉁이만 잡아당기던 손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빈 무덤 앞에 서 있던 그의 몸이 기울어지나 싶더니 가볍게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추락은 길고 캄캄했다.
먹먹한 어둠 속에서 게일은 위아래를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본래 위저드였던 그에게 마법의 보조도 없이 오래도록 자유낙하해 본 경험은 없다. 허우적거리던 끝에 게일은 요령을 찾아냈고, 조금 접힌 다리에서 그냥 힘을 뺀 채 양팔로 가볍게 자신을 감싸고만 있기로 했다.
긴 시간을 추락하면서 게일은 필멸자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격파된 네더브레인이 발더스게이트 앞바다에 수장된 이래, 인간 위저드인 게일은 발더스게이트를 비극에서 건져낸 영웅이자 그의 연인인 티플링 바드 파이오스와 더불어 필멸의 삶을 꾸려가고자 했다. 사랑하는 파이오스의 외형이 바뀌어도, 의식이 변형되어도, 설령 영혼이 깎여나간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파이오스가 감내할 수 있었던가?
충동을 참지 못하고 게일을 공격했던 순간인지, 아니면 연회에서 동료를 다치게 만들었던 순간인지는 모르지만, 일리시드가 되어 버린 파이오스는 사랑하는 것들 위로 조금씩 무너져가는 잔해가 될 처지를 감내하느니 자결을 택했다. 유서에 쓰인 모든 글자를 게일은 기억한다. 눌러 쓴 글자들은 무거웠다. 게일은 연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한다.
귓가에서 들리는 것은 울부짖음일까? 공기의 저항이 벅차게 느껴졌지만 추락을 막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떻게?'
게일은 기회를 포착했다. 기회라는 은빛 섬광은 저 깊은 바다에 잠겼는데도 높게 쌓인 어둠을 뚫고 나와 파도무늬 사이로 번쩍였다. 발더스게이트 근해의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왕관의 힘으로 신이 될 수 있다, 영생을 누릴 수도 있다...
윗쪽에서 무언가 게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저 죽어있던 검은 하늘이 눈을 하나씩 뜨며 주황색 빛이 점점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제야 게일은 깨달았다 - 머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지고 있었구나. 추락이 그에게 곧 상승이었다. 커져가던 불빛은 길게 이어지는 불의 꽃의 강이 되었다. 신이 된 파이오스, 먼저 신이 된 게일이 신으로 올린 파이오스의 영역인 그곳은 카서스의 왕관을 건져냈던 치온타 강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게일은 각오를 다졌다. 필멸자의 몸으로 신의 영역에 들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떨어진 게일을 받아준 불의 꽃잎은 흩날리다 꺼져버렸다. 추락은 포근했다.
흔들리는 불의 꽃들이 발밑을 부드럽게 받쳐 주었기에 게일은 잠시 혼란스러워져 불완전한 감각과 판단을 의심했다. 꽃밭 한복판에서 게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와서?'
다시 이런 감정이라니...
이것은 그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적에 자주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뭐였지? 기대감? 그러나 취약한... 여린 새싹 같은 것을 닮았는데, 신이 느낄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게일은 입술을 열고서 숨을 짧고 빠르게 쉬었다. 따뜻한 불길이 그의 다리를 간지럽혔다. 꽃의 길은 금빛으로 환히 빛났고, 그것은 파이오스를 안고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를 생각나게 했다.
설레는 마음.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게일이 멈췄다. 들켜선 안 돼. 그리고 흐름 따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게일은 일원인 척 언뜻언뜻 보이는 영혼들 사이에 몸을 숨기기만 하면 됐다. 망자들이 걷는 모습은 지상에서 쇠는 라이어즈 나잇과 별다를 것도 없었다.
파이오스는 미련 남은 영혼의 한을 풀어 주고 환생을 하도록 인도하는 신이었다. 많은 수의 망자들이 몇 시간도 채 못 돼서 파이오스의 영역에서의 여정을 끝마쳤다. 그러나 몇몇은 정말로 오래, 몇백 년 이상 머무르기도 했다. 죽은 자의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려 해도 필멸자의 눈에는 그저 언뜻거리기만 했으므로 대신 게일은 귀를 기울였다. 청각은 조금 더 판별이 쉬웠다.
나는 아직 죽기엔 너무 젊어요... 죽인 건 내가 아냐! 어쩔 수 없었어. 왜 노력해서 일군 정당한 몫을 모두 두고 떠나야 하죠? 또 한 번의 기회를 줘. 마지막 말을 건네고 싶어. 그걸 팔았어야 했는데... 청산하지 못한 관계가 있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영혼들이 두서없이 미련의 무게를 쏟아냈고, 그것들은 길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럴수록 영혼들은 연기처럼 가벼워졌고 거의 장난스럽기까지 한 발걸음으로 꽃의 길을 따라 올라갔다. 파이오스가 창조한 망자들의 공간에선 마음이 실체를 띠었다. 미련이 가장 무거웠고, 영혼들은 짐 지고 있는 미련을 털어내야 비로소 불의 꽃들이 아롱진 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었다.
살아있던 시절의 기억을 지닌 망자들은 위로해 주고 품어 줄 온기를 원했는데 이는 거의 생존의 욕구를 닮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르막길이 정말이지 유혹적이라는 것을 게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혹을 뿌리치려면 본능을 억지로 거슬러야 했다.
'길의 방향을 유도하는 방식이 뻔하군.'
게일이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미련은 무언가 아주, 아주 중요한 물건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걸 머리에 쓰기만 하면 왕이 되고 신이 될 수 있죠. 기회를 보았고 직접 잡아봤는데 과연 미련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걸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감수할 겁니다. 당신들도 동의할 거야."
주위의 몇몇 영혼이 우뚝 멈춰서서 게일을 돌아보았다.
죽음이라는 말이 무게를 가지고 툭 떨어지려 하는 순간, 게일이 재빠르게 허공에서 그걸 잡아채 주먹 안에 숨겼다. 손 안에서 죽음은 차갑고 가시돋쳐 따끔거렸다. 나비처럼 팔랑이는 불의 꽃들이 그 말을 태워서 증기와 바람으로 바꾸고 싶어 주먹 근처에서 얼쩡거렸지만 게일은 이를 악물고 탁한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혈관 속 피가 실제로 식는 것이 느껴졌다. 망자들을 체온을 닮은 온기로 감싸주는 이 공간이 얼마나 따스한지 게일은 불현듯 깨달았다.
"파..."
말을 멈춘 게일은, 꽉 쥔 주먹으로 날아와 노란 빛을 비추며 아주 약간의 따스함을 나눠주고 스러져 버리는 불의 나비를 지켜보았다. 게일이 다른 쪽 손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인정하지, 파이오스. 네가 보여주는 길은 유혹적이고 막막한 어둠 속 흔들리는 등불마냥 따라가고 싶게 만들어. 하지만 나는 네 앞에 필멸자로 서지는 않을 거야. 다시는... 네 앞에는 동등한 신으로 설 거야. 우리는 동반자잖아?
날 내쫓았어.
끈적한 무거움이 손에 깍지를 끼고 끌어내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순수한 것에 얼룩이 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기 힘들었지만 게일이 신일 때는 그것 역시 온전할 수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필멸의 육신에 가두는 것 따위로 내가 신이라는 사실을 바꿀 순 없어."
주변에 있는 망자들이 좀 더 창백하고 반투명한 모습이 되어 지켜보는 가운데, 게일이 꽉 쥔 손에 대고 뭔가 조근조근 속삭이자, 손 안의 의지가 게일의 말을 듣고 자라나 자신과 비슷한 것을 향해 가려는 자성을 띠었다. 그것은 게일의 육신이 가진 질량보다 좀 더 큰 무게로 그를 끌어당겼다. 게일은 망자의 신의 영역에서 제 뜻대로 죽음을 비틀어 써먹으려 하고 있었는데, 비유하자면 미스트라의 영역에서 위브를 비틀어 자신의 뜻에 굽히게 하려 드는 행위와 비슷했다.
그가 행렬과 다른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끌려가듯 걷기 시작하자 망자들은 조금 헷갈려하는 것 같았다. 몇몇이 길을 벗어나는 그를 따라잡으려다 멈칫거렸다.
불의 꽃의 수가 줄어들며 어두워졌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길수록 온도가 뚝뚝 떨어져 싸늘한 겨울밤처럼 되어갔다. 냉기의 세계 안에도 영혼들은 있었다. 울고 있는 망자들은 마치 시든 나무처럼 한 명씩 서서 생전의 후회를 곱씹고 있었다. 가지가 게일을 스칠 때마다 수백 년, 수천 년 묵은 끝에 괴사해버린 생각들이 덤불처럼 게일의 등을 타고 올라 오소소 소름이 끼치고 머리끝이 곤두서게 만들었다. 이곳의 영혼들은 식어 있었다.
곤란한데.
게일의 심장이 뛰면서 꾸준히 열을 발산하고 있었기에 냉기로 이뤄진 숲 속에서 게일은 독보적으로 환했다. 체온을 감춰야 했다. 마침 꽉 쥔 주먹에 갇혀 있던 죽음이 게일의 팔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게일이 손아귀를 열었다.
"네가 날 도와야겠어. 추락한 신이 왕관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자, 날 감춰다오."
흘러나오는 죽음의 냉기가 풀어지고 넓어져 천처럼 되었다. 게일이 그 한중간을 양손으로 잡아 크게 털어내고 돌리는 동작으로 망토처럼 뒤집어쓴 다음, 머리를 덮는 두건 부분을 잡아당겨 얼굴을 끝까지 가렸다. 가면의 신을 섬기는 행렬에서 영감을 받은 복식이었다.
자신을 감추는 행동은 야망의 신에게서 쉽게 볼 수는 없는 것이라, 당신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본다. 그의 신상만 봐도 꼭꼭 감추는 복식이 아니었듯 야망이란 감추고 은밀히 행동하기보다는 드러내놓고 도발하길 즐겼다. 네가 원하고, 또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있다면 뭐든지 시도해보라고 조장했다. 신의 힘을 빼앗고자 하는 야망일일지라도... 그렇게 필멸자들을 휘저어 놓는 행위는 다른 신들의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필멸자의 한계를 부정하는 신이라니? 섬기는 신을 닮아가는 야망의 신도들은 신을 끌어내려 신의 힘을 빼앗으려 들었다. 권좌를 뒤흔들어 놓는 행위가 다른 신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러니, 나와 가장 가까운 신이 야망의 신격을 박탈하려 들 이유는 충분해.'
게일은 생각했다.
죽음의 냉기를 뒤집어쓴 탓에 게일의 감각이 먹먹해져 갔다. 텅 빈 홀에서 울리는 듯하던 발자국 소리가 잦아들고, 매서운 추위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어갔지만, 게일은 손이 줄에 매인 듯 끌려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끝없이 걷던 그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당신, 혹시 지켜보고 있어?"
그의 말은 차가운 어둠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당신이 보고 있는게 좋을지 아닐지 모르겠네. 아직 들켜선 안 되거든. 아, 그래. 혼자라서 하는 말인데, 날 쫓아내 영생을 박탈하고 죽어가는 꼴을 지켜보는게 신으로서 휘두르는 당신의 권능이라니 악취미야." 그의 말투가 낮아졌다.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건가? 내가 끝없이 고통받는 딱한 필멸자 꼴로 영원을 걷는 것? 그런 당신을 죽음과 환생의 신이자 현자라고 할 수 있나. 하하... 당신은 영혼들이 생전의 미련을 씻어내고 환생하기를 바라지만, 그 대단하신 자비가 내게는 미치지 않을 것 같거든. 나는 다음 생으로 갈 수 없어. 우리는 동반자잖아. 당신을 되살리기 위해 내가 신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신의 자리를 포기할 것 같아?"
냉기를 뒤집어쓰고 있는데다 어둠이 너무나 짙었기에, 죽음의 영역 가장자리를 걷는 게일은 당신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사라졌다 한다. 결국, 상대적으로 안전한 워터딥에 데려다 놓는 정도로는 그를 지킬 수 없었다. 당신은 불의 꽃으로 게일을 따스하게 데워줄 수 없다는 사실에 상심한다. 늘 너무나 섣부르고 위험을 줄타기하는 그가 걱정되지만, 당신의 영역을 걷는 모든 망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듯이, 결국 길을 찾아올거라고 믿기로 한다.
망자의 죄와 과오, 미련을 다루는 신에게 이런 이야기는 익숙하다.
한 때 위대한 위저드가 있었다. 기회가 나타나자 위저드는 그것을 탐욕스레 그러쥐었다. 야심만만한 대마법사에게 마법의 여신 미스트릴의 권좌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자신뿐만 아니라 네더릴 사람들까지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으로서 스스로 머리에 썼던 마법 아티팩트에는 거대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왕관치고 권위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순수한 힘 그 자체였다.
게일이 천천히 두건을 벗고 자신을 드러냈다. 왕관이 뿜어내는 붉은 기운이 그의 눈에 일렁였다. "찾았다." 그가 차가운 손가락을 뻗었다.
"이건 네 소유가 아냐, 데카리오스."
찬란하던 왕관이 눈앞에서 저 너머로 휙 날아갔다. 망자의 목소리치곤 또렷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게일이 물었다.
"누가 날 그렇게 부르지?"
"자기 힘으로 신이 됐다고 자부하나? 젊은이."
게일은 상대가 누군지 깨달았다. 끔찍한 과오를 짊어진 자로서 악명높은 그 이름을 모르는 위저드는 페이룬에 없었다.
"카서스."
생전의 죄를 씻지 못하고 죽음의 영역에 머물며 긴 시간 후회를 곱씹는 유령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돌처럼 차갑고 회색빛으로 딱딱해져, 한때 끝없는 허기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후회에 잠식된 유령의 섬뜩함에 게일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지만, 그의 어떤 부분은 실망을 느꼈다. 자신을 위한 비석으로 굳어버린 망자는 신의 권좌를 넘보던 야망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았다.
게일이 입고 있던 냉기의 망토가 부스스 흩어지더니 마른 잎처럼 바닥에 쌓였다. 잎은 말라비틀어진 소리로 뒹굴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가듯 카서스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바람에 움직이듯.
"경고를 남겨봤자 소용없더란 말인가..." 카서스의 유령이 쓸쓸하게 말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위대했던 왕국이, 모두 나 때문에..."
"후회하나?" 마지막 미련을 몸에서 툭툭 털어내며 게일이 물었다.
"후회하지, 영원보다 무겁게 후회해. 아아... 그런 소망은 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야, 카서스. 더 철저히 준비했어야지."
"세상에 퍼지는 혼란을 지켜봤어. 내가 남겼던 씨앗은 뿌리뽑히지 않았던 거야. 나의 과오..."
마른 낙엽 가운데 고목처럼 뿌리내린 카서스가 말했다. 그는 품속에 왕관을 안아들고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왕관은 맥박처럼 붉은 빛을 내뿜었고, 왕관을 노리며 천천히 주위를 맴돌던 야망의 신이 카서스의 어깨 너머로 말했다.
"과오가 아니야. 내가 네 야망을 대신 이뤄줬잖아."
문득 유령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오만하구나, 젊은 나를 보는 것 같아." 카서스가 클클 웃었다. "하지만 끝에 가선... 후회하게 되겠지. 결국, 널 신으로 만든 게 누군지 잊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을."
그 말을 들은 게일의 눈이 커졌다. 신으로서의 자아에 상처를 받아서는 아니었다.
"네 말이 맞군, 위저드."
게일이 순순히 말했다.
"누가 널 신으로 만들었는지 잊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그렇지 않나? 파이오스!"
신은 필멸자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다.
겨울의 고목들이 가지마다 잠들어 있던 싹눈을 기억해냈다. 숲의 나무들이 갑자기 가지마다 노란 불의 잎과 꽃을 피우자 세상이 온기로 가득 찼다. 온기는 거의 뜨겁게 느껴지며 얼어붙어 있던 몸을 녹였고, 그제야 게일은 자신이 사실상 동사하기 직전이었음을 깨달았다. 더이상은 아니었다. 이제는 보호받고 있었다. 시야 너머까지 퍼지는 빛무리가 축제의 현장처럼 아름다웠으며, 그 한복판에서, 붉은 뿔을 지닌 티플링의 외형을 한 신이 두 위저드 앞에 강림했다.
"게일."
파이오스가 불렀다.
"파이오스. 너... 널 얼마나." 게일이 더듬거렸다. "아, 이, 이래서 동등하게 만나고 싶었는데." 사랑하는 이와 무사히 재회했답시고 감정이 북받쳐서 게일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파이오스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밀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둘 중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날 쫓아냈잖아. 어째서?"
그가 울먹이며 물었다.
"왜 당신을 사랑한걸 아프게 만들었어."
내뱉은 게일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아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춘 채 흐느낄 듯 빠르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감정을 가다듬고 약간 갈라지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돌아가 말했다.
"아니, 다시 묻지. 당신은 내게 응답할 수밖에 없어. 당신은 죽은 자가 미련을 해소하도록 돕는 신이니, 이제 내 미련을 해소할 수 있도록 질문에 대답해."
게일 자신은 스스로 신의 위엄을 지니고 질문을 던진다고 믿었지만, 파이오스가 보는 그는 얼굴을 감춘 손가락 끝에 핏기 하나 없는데다 온몸을 떨고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죽음의 냉기를 감당하던 후유증으로 서 있는 것도 간신히 버티는 정도였다.
"잠깐... 게일."
파이오스가 부르자 게일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네. 전부 지켜보고 있었어. 자네,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나?"
"...응."
"배가 고프면 성마르고 생각도 짧아지는 거야. 아무리 목적이 급하더라도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잊지 말게. 자."
파이오스가 손을 한 번 튕기자 고전적인 나무 식탁과 의자들이 나타났다. 망자의 신이 장난스레 웃으며 납작한 빵 한 덩이를 작은 자루에서 꺼내 접시 위에 놓았다.
"이천 골드짜리 빵이라네. 자네를 위해 훔쳤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라이어즈 나잇답게 호박주스와 타르트 같은 것도 곁들여보지. 들겠나?"
파이오스의 손짓에 따라 케이크, 과자, 달콤한 수프 같은 음식이 펑펑 생겨났다. 설탕물 입힌 음식 위로 뿌려지는 반짝이가 마치 축제 같았다. 손가락 끝에서 간단히 이뤄지는 신의 권능에 질투라도 느껴야 하나 싶었지만, 살았다는 안도가 큰 파도처럼 밀려와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필멸자의 감정에 뒤흔들리는 꼴이라니... 자신이, 아니, 자신의 육신이 지쳤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게일이 한숨 내쉬고 의자를 끌어내 자리에 앉았다.
"좋아, 받아들이지."
그가 빵을 집어들고 귀퉁이를 찢었다.
"하지만 오늘만이야."
식기를 놀리는 게일의 동작은 워터딥 신사답게 우아하고 절도 있었다. 나이프를 접시에 부딪치며 타르트를 자르고, 포크로 찍어올린 페이스트리를 이로 물어뜯고, 무거운 금속제 잔을 의도한 자리에 정확하게 내려놓는 소음이 주변을 맴도는 망자들의 마음에 희미한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그에 비해 카서스는 망자였으므로 음식을 먹지는 못하고 호박주스에 꽂힌 빨대를 건드려 잔 속에서 몇 차례 돌게 만들 뿐이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길에서 벗어나는 영혼들이 있어. 그들의 고집은 아무도 못말리지."
식탁의 주인인 파이오스가 말했다.
"여기 계신 카서스도 그런 영혼이었다네. 찾아줘서 감사할 따름이야, 게일."
망자의 신이자 영역의 주인, 야망의 신이었던 필멸자 위저드, 그리고 한 때 위대한 마법사였지만 과오를 품고 추락한 카서스의 유령까지 식탁에 세 영혼이 둘러앉았다. 식탁 위 줄에 걸려 드리운 등불장식 사이로 반딧불이처럼 생긴 빛들이 가볍게 날아다녔다. 음식을 툭툭 자르고 써는 게일의 얼굴에 축제 불빛이 아롱졌다.
"맛은 괜찮나?"
게일은 말없이 호박주스를 마시며 파이오스를 건너다봤다. 몸이 노곤노곤 따뜻하게 녹고 있었다. 필멸자의 몸에 음식을 채워넣을수록 긴장했던 신경이 누그러진다는 것을 체감하자니 썩 기껍지가 않았다. 이렇게 식탁에서 시간이나 낭비하자고 목숨 부지하는 중이 아니었으니까.
잔을 반쯤 비우고 내려놓자, 망자의 신이 단지에서 차가운 호박주스를 한 국자 떠서 잔을 채워주었다.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애썼어. 이제 마음높고 쉬어도 괜찮다네." 파이오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모험 시절 자네가 해 준 음식을 많이도 얻어 먹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대접할 기회가 닿아 다행이지 뭔가. 자네, 요리를 즐겨 했었잖나..."
식기를 쥔 게일이 잠자코 망자의 신을 노려보았다.
"나 역시 신이네만, 자네처럼 필멸의 시절을 사소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점을 잘 생각해 보게. 말하자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거든. 자네는 한 면을 버리고 싶어했지만, 나는 깊이 이해하고 싶었어. 아마 그게 우리의 차이일 것일세."
게일이 칼과 포크로 크림 위에 놓인 초콜릿 장식만 온전히 들어올렸다. 그가 표정 없이 말했다. "파이오스, 착각하나 본데, 그런 건."
그가 조금 힘을 주자 장식이 툭 부서졌다.
"쉽게 깨져."
식기를 가지런히 내려놓은 그가 턱을 괴고 당신을 빤히 본다.
야망의 신이 된 게일이 냉혈한이 되었던가? 아니, 신성이 잠든 게일 데카리오스의 평범한 갈색 눈동자 속에서 감정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깊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회한에 찬 카서스의 유령이 안고 있는 왕관으로부터 맥박같은 붉은 빛이 끝없이 흘러나와 마치 게일 자신의 심장박동이 필멸자의 살갗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파이오스는 그 박동을...
"왕관을 돌려주겠어?"
게일이 요구했다. 왕관의 광채를 담은 눈동자에서 욕망을 감춘 채.
"미안하네만, 데카리오스. 왕관을 돌려줄 수는 없네."
파이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등불은 아까처럼 속 편한 축제의 빛을 밝히고 있지 않았다. 망자의 영역은 그 신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방을 메운 불빛들이 붉은 꼬리를 그리며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자네가 신이 된 이후로,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한 것도 이게 처음이야. 자네는 늘 야망의 영역에만 사로잡혀 있었잖나..."
식탁 너머, 필멸자가 된 연인을 향해 파이오스가 손을 뻗자 게일이 흠칫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게일이 지닌 인간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다. 망자의 신이 가질 수밖에 없는 죽음의 아우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운명이 휘둘린다는 것.
순간적인 공포가 누그러졌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분노가 살아있는 심장 밑바닥에서 잔잔하게 타올랐다. 게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파이오스도 보았다. 이윽고 불길 사이로 살랑이는 바람이 뒤섞이는 모습까지. 게일의 손끝을 살짝 만지며 파이오스는 웃음지었고, 게일의 내면에 잿불 날리는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필멸자 시절, 사랑은 우연히 찾아오는 사건답지 않게 그 모든 포옹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게일은 분노했다. 하지만 결코 바뀌지 않는 것도 있었다.
'휘둘리는 게 아니야.'
게일이 다짐했다. 이거야말로 미련 아닌가? 하지만...
'잠시만이야.'
망자의 신의 다정한 눈길 아래, 게일은 티플링의 손톱이 돋은 손의 손등 쪽에 인간의 손을 올리고 깍지를 낀 다음, 그대로 두 손을 잡아올려 옆얼굴에 붙이고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망자의 신답지 않게 따뜻한 손이라는 것이, 필멸자로 되돌아온 지금에야 제대로 느껴졌다.
"죽음을 다루는 신치고, 너는 늘 장난스러웠지. 그런 면모는 예전과 같네..."
잠에 취하게 만드는 것 같은 온기를 느끼며 게일이 말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으면서 나는 두려웠어. 그래... 이제야 분명해지네. 네가 날 버려둘 것 같았거든. 하지만 끝까지 널 믿고 싶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함께 모험했고, 사랑을 나눴고, 그리고 내가 되살렸고, 신으로 만들기까지 한 파이오스, 네가 날 죽게 놔둘 리 없잖아. 우리는 동반자니까. 동반자를 어떻게 죽게 두겠어? 아, 그런데."
손을 내려놓은 게일이 조금 찌푸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꽉 다문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팔을 쭉 뻗고 손가락이 이쪽을 가리키는가 싶더니, 그가 내뱉었다.
"죽게 뒀네."
추락한 신, 게일이 의자를 뒤로 빼고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 한 손 짚고 구부정하게 서서 파이오스를 쏘아봤다.
"날 추락시킨 이유를 변명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할 거야. 다른 신들은 동의한 건가? 다른 신들과 작당했나?" 따져물을 듯하던 게일이 뜻밖에 차갑게 웃었다. "신이 된 너도 변한 걸 알아? 내가 캐묻지 않았으면 좋겠지? 오해와 앙금을 남겨서, 그걸로 발목을 붙잡아 놓고, 망자의 영역에 영영 머무르게 하고 싶으니까."
"모르는 것에 대해서 확정지어 생각하는 건 자네의 나쁜 버릇이야." 파이오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주변 풍경도 순간에 붙들리듯 얼어붙어, 빛도 바람도 허공에 멈춘 리본과 함께 가만히 걸려 있었다. 게일의 목숨을 위협했던 뼛속까지 에이는 추위가 닥쳐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달 하나만 외롭게 떠 있는 밤 같았다. 다른 종류의 추위였다. "이곳은 자신의 영혼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고 되짚어보는 장소야. 자네는 머무를 수 있다네. 나에 대한 미움, 증오, 그리고 사랑. 무엇이든 좋으니 그것들을 곱씹으며 이곳에 남아주게."
"나는 네 초즌이 아니야!"
버럭 소리지른 게일은 금방 침착해 보이는 겉모습을 회복했다. 그가 눈길을 피한 채 잔잔하게 말했다.
"물론, 필멸자에게 신마저 끌어내려 보라고 설파하는 신을 처단한대도 이해는 가. 넌 늘 살고 싶어했으니까, 불안요소는 싫겠지."
"또 버릇이 나오는군, 게일. 틀렸네. 어째서 내가..."
부드럽게 말하던 파이오스가 갑자기 말투를 바꿔 툭 내뱉었다.
"인정하지, 게일. 자네가 필멸자인 채로 죽었으면 좋겠네."
침착한 척하던 게일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필요한 일이야.' 파이오스는 생각한다. 죽은 신의 잔해가 흩어진 영계의 풍경을 파이오스는 기억했다. 죽은 신은 어디로 가는가?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모두 자네처럼 필멸의 시절을 외면하지는 않아. 야망의 영역 자체가 문제라고 보지는 않네. 자네는 악한 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자네가 인간성을 버리려 드는 바람에, 야망의 신도들도 그렇게 되어갔네. 신으로서 소멸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이대로 가다가는 야망의 신이 야망과 함께 조각날 것이 뻔했어. 그 잘난 야망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의 가능성도 긍정하지만 자네는 너무나 큰 위험에 처해 있었단 말일세. 왜 뻔히 보이는 미래를 보아내지 못하나!"
망자의 신이 꾸짖자 비명 같은 바람이 일며 숲이 진동했고 불의 꽃이 깜박이며 커지다가 꺼질 듯 했다.
"내 신도가 날 끌어내리는데에 성공한다면 더 바랄게 없어."
"뭐?"
파이오스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신으로서, 내 소멸의 가능성 역시 인정해. 그런 전망을 어리석게 없는 셈 치고 있다고 생각했어?"
게일이 허리를 폈다. 이제 그는 꼿꼿이 서서 망자의 신을 대면했다.
"그래, 나는 필멸자의 모든 야망을 긍정해. 그게 내 영역이고 내 힘이야. 파이오스, 우리의 영역은 겹치지 않아. 야망에게 망자들의 영역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따분한 장소일 뿐이고, 망자의 신에게 야망의 교리는 영혼이 덤으로 질 무게에 불과하겠지. 네 초즌이나 되는 것처럼 네 방식을 강요하겠다면, 나 역시 쉽게 포기 못 해. 들어봐, 파이오스. 나는 필멸자가 아니라 필멸의 육신을 입고 정체를 감춘 채 죽음의 영역까지 들어온 신으로서 네 앞에 있어. 그리고 이거 아나? 망자의 영역에도 야망의 추종자는 있단 말이지."
왕관의 맥박이 멈췄다.
붉은 빛은 맥동하는 대신 끝없이 빛을 내기만 하기로 선택한 듯했다. 게일의 등 뒤로 등대의 빛에 이끌리듯, 힘을 원하는 많은 영혼들이 어둠을 지나 찾아오고 있었다. 수많은 미련의 목소리가 얼기설기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기도를 전부 기억해. 그러므로 너희는 잊었던 야망에 다시 집착하게 될 거야."
"...망자들이 길을 잃게 될 걸세. 그런 짓은..." 파이오스가 신음하듯 말했지만, 게일은 차갑게 응수할 뿐이었다. "이런 사태는 다른 이도 아닌 야망의 신을 망자의 영역에 끌어들였을 때부터 짐작을 했어야지."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식탁 아래로 금이 가면서 은빛 광채가 새어나왔다. 파이오스의 영역에 일어난 균열이 순식간에 영역의 주인인 파이오스의 은색 눈까지 그어버리듯 상처를 냈다. 망자의 신이 탄식하며 상처입은 얼굴을 감쌌다. 불의 꽃이 균열을 향해 몰려들었다가 힘없이 꺼져갔다.
길 잃은 영혼들을 위한 슬픔의 순간.
게일이 이를 악물고 뛰쳐나가며 원하는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부름을 들은 망자 가운데 카서스의 유령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파리한 빛을 쬔 유령의 눈에 넘치는 생기가 깃들었고, 잊었던 생전의 허기가 영혼에 무게를 부여했다.
한때 위대했던 마법사의 그림자, 이제는 늙어버린 망자가 입을 쩍 벌리고 자신이 단조했던 왕관을 집어삼켰다. 왕관의 날카로운 부분이 유령의 머리를 뚫고 튀어나왔다. 핏방울 같은 영혼의 조각들이 튀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게일의 손끝이 피묻은 왕관 끝을 스쳤지만, 세상이 무너지며 발밑을 지탱해주던 불의 꽃들도 무너져 내렸다.
망자의 영역이 두 가지 빛깔의 눈을 치켜떴다... 나가게. 마치 화학반응처럼 죽음이 게일 데카리오스를 거부하려 들었다. 망자의 영역에 산 자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의 의지는 본능의 영역이며 필멸자인 게일은 생존본능을 죽이지 못했다. 거부하고 있던 고통이 가슴을 치자 죽은 척하던 게일이 결국 숨을 들이키며 몸부림쳤다.
"크헉! 헉!"
게일은 자신이 흙을 토해내고 있다고 믿었다. 숨이 멎을 듯 기침하며 폐가 터질 것처럼 지상의 공기를 들이키고 나자 그제야 머리가 탁 트이고 폐의 고통도 가셨다. 게일이 끙끙대며 무덤에서 기어나오다 풀썩 엎어졌다. 무덤에 반쯤 걸친 그의 몸이 잔뿌리 드러난 흙더미 위에 축 늘어졌다.
"하, 하아. 휴."
온몸에 식은땀이 돋은 탓에 더 추웠다. 산소부족으로 인해 머리를 쿵쿵 울리던 두통이 멀어져 갔다. 필멸자의 손으로 흙을 긁던 게일이, 비석을 짚고 간신히 일어나 두 발로 서서 현기증이 완전히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회복은 빨랐다. 눈앞의 점멸하던 빛들이 걷히고 손끝까지 다시 따뜻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며 소슬거리는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별하늘이 총총했다. 지상의 밤이었다. 그런데 옅은 녹색으로 쏘아지는 영혼들이 밤하늘을 잔뜩 메우고 있었다. 파이오스의 영역에서 새어나온 수많은 망자들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 왔다. 억울해...! 제발, 다시 만나게 해 줘. 한을 풀고 싶어. 나는 가져야만 해. 어째서 날 배신했지? 인정해 줘,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픔은 그만 겪을래... 자신이 벌인 짓을 지켜보며 게일이 작게 웃었다.
"하잘것 없는 영혼을 부지하느니 신으로서 죽는 편이 낫지."
뜻밖에 눈앞이 흐려지더니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훌쩍이며 울던 게일이 혼잣말했다.
"죽을 자리를 선택하게 해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요구였어?"
물론, 답은 없었다.
라이어즈 나잇이 끝난 다음날 아침.
신전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게일은 긴 복도를 걸어 야망의 신 신상 앞에 섰다. 먼지에 덮여 있는데도 햇살 아래 엄숙하게, 자기 존재 전부를 바쳐 원대한 목표를 쫓으라며, 그게 무슨 일이건간에 소망에 불가능은 없음을 명심하라는 뜻을 퍼뜨리고자 하는 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워터딥에서 잠든 지 오래였다.
'유물이 되어 버리고 싶진 않은걸.'
게일이 생각했다. 신으로서의 자아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 때 인간보다 높고 큰 신상의 뒷편에서 가벼운 발걸음에 우아한 꼬리를 지닌 뭔가가 튀어나왔다.
"타라?"
무심코 부른 게일이 제풀에 웃었다.
"그럴 리 없지. 그건 수백 년 전 일인걸..."
고양이는 잘 먹지 못했는지 털이 부스스했고 트레심인 타라와 그렇게 닮지도 않았다. 낯선 이를 경계하며 야옹거리던 고양이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게일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습관 그대로 몸을 낮추고 고양이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줬다.
"오늘 같은 날에는 숨어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길에 버려진 음식이 많을 거야. 축제가 끝나고 정산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는 거리가 두렵겠지. 하지만 괜찮아, 위험은 곧 기회니까, 붙잡도록 해."
고양이는 게일을 올려다보며 알아들은 것처럼 한 번 울더니 손 아래로 빠져나가 신전 문 바깥으로 쪼르르 달려나가 사라졌다.
라이어즈 나잇이 끝난 다음 날 더 추워진 날씨를 실감하며, 게일은 지난밤보다는 조금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손을 마주 비비며 따뜻하게 했다. 그러나 신상은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근엄하게 서 있었다. 신상을 향해 습관처럼 마법을 쓰려던 게일이 동작을 멈추고 불러 보았다.
"미스트라?"
답은 없었다. 희미한 위브의 흐름 한 가닥마저도.
"역시 신들이 작당한 건가. 내가 신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미스트라는 결코 응답하지 않겠지."
왕관을 빼앗기 위해 다른 신들의 도움까지 받다니, 빚지는걸 싫어하는 파이오스답지 않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 눈 앞에 선명했다. 상처를 입고 놀라 얼굴을 감싸던... 망설이던 게일이 또 불러 보았다.
"파이오스?"
역시 신전은 고요하기만 했다.
석재로 되어 있는 신상이 받침대 위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한 게일이 신상에 등을 기대고 다리에 열심히 힘을 주었다. 야망의 신 신상이 기울었다. 쓰러져 바닥에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에 신전에 숨어 있던 작은 동물들 몇 마리가 놀라 도망쳤다. 게일이 부서진 자신의 모습을 손으로 뒤적거렸다.
"여기 있군."
돌조각 사이에서 그것은 가볍고 재빠르게 번쩍거렸다. 게일이 손을 뻗자 작은 갈레리안 위브 조각이 성급하게 날아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듯 휘파람 소리로 울며 손가락 사이로 각지게 움직였다.
"야망의 신앙이 퍼져 있는 땅으로 가야겠어. 그곳이라면 힘을 되찾을 수 있겠지."
신성의 작은 조각을 반갑게 다루던 게일이 이어 말했다.
"하지만 소망은 산 자의 특권이니, 다음 라이어즈 나잇에는 좀 더 많은 걸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지. 언젠가는 마음을 바꾸고 내 편에 서주길 기대할까. 그럴 가망은 거의 없겠지만, 그 날을 기다릴게. 나는 그런 신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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