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01 - 처형난입
나비잠: 라브 라벤더 처형난입
리리 에리카가 독이 풀린 수조 안에 들어갔을 때. 13분은 넘게 숨을 참을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아이가 괴롭게 몸부림을 치는 것을 눈에 담았을 때. 라브는 마치 제가 물속에 들어간 양 숨을 멈추었다. 온 몸이 차갑게 식어 내리고 주위의 소리마저도 천천히 멀어져갔다. 피부 위에 차갑고 두터운 막이 덮여, 모든 감각이 제게서 멀어져가는 기분. 그러나 그와 반대로 라브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리리 에리카는 피데스 모를 죽였다. 자신의 소원을 위하여 다른 생명의 목숨을 앗았다. 이것은 무어라 변명할 수도, 변호해줄 수도 없는 그의 죄였다. 그렇지만 그 죄 때문에 그가 이리 목숨을 잃는 것은 정당한가. 의문이 떠오른 즉시, 라브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고 존엄하다. 이 세계에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그 자체로도 빛나고, 경이로우며 아름다운 존재이다. 저마다 다른 색을 띤 채 어우러져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어가는 저 모습을 사랑스럽다 칭하지 않으면 그 무엇을 사랑스럽다 칭할 수 있겠는가. 태어날 때부터 영혼에 깃들고, 자라나며 수없이 보고, 듣고, 배워나갔던 이 사랑의 개념은 어느 샌가 라브에게 천성이란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것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확고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그와 달랐다. 존중받아야 할 생명을 꺼트리길 종용하고 이것을 오락거리로 삼았다. 살해를 원치 않는 자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건네고, 결국엔 목숨을 꺼트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겨난 망자를 편히 쉬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그 죽음을 욕보이게 하였으며, 그를 살해한 자 또한 유린하여 잔혹한 처형장에 밀어 넣고 그 죽음마저도 유희 거리처럼 소모하도록 하였다.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라브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하지도, 합당하지도 않았다. 정당함과 합당함이 존재하지 않는 처벌은 아무런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처벌과 같았다. 의미 없는 처벌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 이 처형은 처형이 아닌 살해 행위였다. 리리가 피데스를 살해한 것보다 더욱 끔찍한 살해 행위. 아무리 메어리가 리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해도, 그 선택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 리리 본인이라고 해도 라브의 생각은 변치 않았다.
이곳에 모인 트로이메라이들은 이미 피데스를 한 번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리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피데스의 죽음은 예상하지 못했고,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던 것이었기에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리는? 이것은 예기치 못한 죽음인가? 정녕 막을 수 없는 죽음인가?
아니. 리리는 죽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죽음도, 우리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죽음도 아니었다. 아직 죽지 않았고, 달려가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죽음은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취해야 하는 행동은 단 하나 뿐이었다.
라브는 생각을 마치곤 고개를 치켜들었다. 멀어졌던 감각이 한 번에 달려 들어와 제 피부 속에 온전히 스며들었다. 넥타이를 풀어내어 오른손에 둘둘 감싼 뒤, 가까이에 있던 스패너를 움켜쥐곤 날개를 펼쳐들었다.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라 처형장에 도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놀란 듯한 트로이메라이의 얼굴과, 당혹스러워 하는 메어리를 지나. 저희들과 리리를 분리하는 처형장의 문턱을 밟고, 뛰어넘었다.
날아가던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손에 쥔 날붙이로 힘껏 수조를 후려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수조에 길게 금이 가고, 넥타이를 감아두었음에도 손 안에서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수없이 환자를 보아온 덕에 나름 손은 단단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감당해본 적이 없었기에 몇 번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금세 손아귀가 얼얼해졌다. 하지만 보호구를 찾거나 쉬어갈 틈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리리는 죽어 가고 있었고, 자신은 움직일 힘이 있었다.
“내가 왔네. 조금만 더 버텨주게.”
두터운 수조 벽 너머로 서로 눈이 마주쳤던가. 점차 생기를 잃어가는 와중에도 저를 시선에 담았는지, 어렵사리 맞춰 오는 눈동자를 보며 힘주어 말한 라브는 온 힘을 다해 손에 쥔 스패너를 휘둘렀다. 손속을 봐주지 않은 거친 휘두름 끝에 결국 넥타이가 검게 물들어갔지만 라브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른손에 점점 힘이 빠져나가자, 왼손으로 스패너를 바꿔 쥔 뒤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사람 하나를 가둬 죽일 작정으로 만들어낸 수조인 탓일까. 수조는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처음 전속력으로 날아와 부딪치며 만들어낸 금을 제외하고는 그저 미약해 보이는 흠집과 잔금만이 조금 늘어 있을 뿐이었다. 쇠붙이로 수조를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힘을 잃어 갔다. 고작 벽 하나. 유리벽 하나를 둔 채 점점 가라앉아가는 리리는 더없이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차마 손을 멈출 수는 없어, 피가 배어나오는 양 손으로 스패너를 움켜쥔 채 쉼 없이 유리를 내리쳤다.
“분명 우리 중 누군가는 메어리의 말에 혹했겠지? 정말 누군가를 죽이는 이가 나오면.. 라브는.., 그때 어쩔거야..?”
“슬퍼하겠지.”
“슬퍼만 하고.. 원망은 안 해? 죽인 사람도 리리와 라브의 친구지만, 죽여진 사람도.. 리리와 라브의 친구일텐데.”
우리들 중 죽은 사람이 나온다면 살해자를 원망하진 않을 것인가, 살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여러 사람이 이 주제로 제게 질문을 던져 왔고, 그 때마다 제가 한 답은 항상 같았다. 원망하더라도 곧 슬퍼하겠지. 살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지. 그리고 그 대답은 지금도 같았다.
원망하지 않았고, 슬퍼하고 있다. 용서하는 것은 그 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제가 아닌 피데스가 되어야 했다. 피데스는 죽고 없으니 용서를 받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가 참회하는 곳은 이 차갑고 괴로운 물속이 아닌 피데스의 앞이어야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적어도 친구라는 말을 입에 담았던 아이에게. 그대는 무슨 생각을 했었냐고. 그대는 내가 원망하길 바랐는지에 대해. 무엇을 그리 후회했는지에 대해. 적어도 그대의 입으로 말을 듣고 싶었다고. 아니, 사실 아무 것도 묻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 의미 없는 죽음을 더 보아 넘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라브의 손에서 스패너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갔다. 라브는 그것을 다시 쥐려다, 덜덜 떨리는 제 두 손을 보곤 팔을 거두어들였다. 이 손으로 수조를 더 때려봤자 헛손질만 하게 될 것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대신,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금이 간 수조를 향해 온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수조에 부딪치는 족족 무너지는 것은 유리벽이 아닌 그의 작은 몸이었으나,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자 마냥 다시 일어나 수조를 제 몸으로 들이받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꾸준히 가해진 충격에 수조에 갔던 금이 점차 세를 뻗혀 나갔다. 점점 빼곡이 갈라지는 유리벽의 모습에 라브는 지쳐 가는 몸을 간신히 다독이며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퍼진 금 사이로 아까보다 더욱 가라앉은 리리의 모습이 보였다.
거의 다 됐어, 하고 혼자 읊조린 라브는 이를 악물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휘청대는 몸을 바로 세우고, 턱까지 차오른 숨과 으스러질 것만 같은 전신의 통증에서 애써 고개를 돌린 채. 처형장에 막 들어왔을 때와 같이 문턱까지 몸을 물린 뒤, 있는 힘껏 날아 금이 간 수조의 유리벽을 향해 제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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